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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터즈] Chapter 9: 진화. Episode 35

Papillon, 2020-12-06 12:00:19

조회 수
124

몇이나 되는 괴물을 쓰러뜨렸는가?

얼마나 많은 공격을 퍼부었는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조차 헤아리지 못하겠다.


. .”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심장은 터질 듯이 고통에 몸부림친다. 팔다리는 천근이 넘는 추를 걸어둔 것처럼 무겁고, 마력이 흐를 때마다 신경이 타오르는 것처럼 뜨겁다.

쉬고 싶다.

마음속 나약함의 결정이 귓가에 끊임없이 유혹의 말을 쏟아부었지만, 이에 따를 수는 없었다.

쉬게 되는 순간 내 목숨 역시 끝날 것이 분명하기에.

파앙-!

발이 수면을 짚는 순간 파공성이 울리며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내게 유리한 전장은 공중.

솔직히 공중전은 그리 익숙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지상은 녀석에게 유리한 공간. 내가 녀석의 공격을 피하는 순간, 또 한 마리의 적이 탄생한다. 그렇기에 불리하더라도 가능한 공중에 머물러야 한다.


우오오오오오-!”


공중에 뜬 나를 향해 녀석이 울부짖으며 넝쿨로 구성된 촉수를 뻗어왔다.

겉보기와는 달리 녀석 역시 사고 능력이 있는 것일까?

내가 땅 위를 달릴 때는 피하든 말든 적당히 공격을 쏟아부었으면서, 공중에 뜬 나를 노릴 때는 하늘을 뒤덮을 것처럼 무수한 넝쿨을 쏟아낸다.

취리리릭-!

열대우림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이런 느낌이 들까?

그야말로 촉수의 해일, 그 자체.


피할 수 있을까?’


빠르게 허공을 훑어보며 빈틈을 확인했다.

불가능.

유감스러운 답변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거미 흉내라도 내는 것인지, 촘촘하게 이루어진 넝쿨의 그물은 벌레의 형태로 변신한다고 해도 돌파할 수 있는 구멍이 보이질 않는다.

회피는 불가능. 하지만 그렇다고 맞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없다면 만든다.’


우드득.

등을 변형시켜서 커다란 잠자리의 날개를 구현한다.


역시 힘드네.’


둔갑술은 원래 특정한 동물로 변신하는 기술. 부분 둔갑으로 해당 동물의 일부만 구현한다고 해도 그 크기는 원본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본래 이런 식으로 억지로 크기를 키운다면 나는 것이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늪에서 괴물을 상대로 한참 싸우며 다중 부분 둔갑을 연습한 내게, 이 정도 변용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웅-!

곤충 날개 특유의 소리를 내며 공중에 뜬 나는 눈으로 비교적 결합이 약한 부분을 쫓았다.

어디에 있지?

빠르게 움직이는 두 눈동자. 다행히 오래지 않아 원하던 장소를 찾아낸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찾았다!’


우드드득-!

목표를 찾은 순간, 몸통을 다른 동물의 것으로 변형시킨다.

구현하는 것은 폭탄먼지벌레 하복부.

둔갑이 완료되는 것과 동시에 고온의 독성 물질이 목표를 향해 연속으로 빠르게 쏘아져 나간다.

치이이익-!

결과는 내 예상대로.

목표지점에 도달한 넝쿨이 조금씩 흠집을 내더니, 이윽고 구멍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역시.’


아무리 자유자재로 움직인다고 해도 결국에는 식물의 줄기.

태생적인 한계가 있는 이상 뜨겁게 달아오른 독에 맞았을 때 멀쩡할 수는 없다.


지금이다!’


이윽고 구멍이 충분한 크기가 되었다고 판단하자, 나는 빠르게 허공으로 솟구쳤다.

구멍을 넘은 뒤 향하는 곳은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높이.


우오오오!”


촉수가 녹아내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를 놓쳤기 때문인지 수호자는 늪 전체가 울릴 정도로 커다랗게 포효를 내뱉었다.


, 그럼.’


더 크게 울부짖게 해볼까?

녀석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떨어졌을 때 녀석을 향할 위치에 도달하자 날개를 해제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둔갑. 이번에 필요한 것은 회피가 아닌 공격을 위해 최적화된 모습이다.

우드드득-!

연쇄적으로 울리는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내 모습이 변화한다.

갯가재의 팔로 펀치력을 강화한다.

바구미의 단단한 껍질이 갑주처럼 온몸을 감싼다.

코끼리의 질량을 구현해 펀치에 실릴 무게를 증가시킨다.

그 외에도 이어지는 수많은 변화.

본래라면 지나친 복잡성으로 제대로 된 생체 구조를 이루는 것조차 불가능했겠지만, 신력이라는 촉매가 그 틈새를 메운다.

그야말로 보통의 둔갑술사로서는 불가능의 영역에 속한 일격.

그것이 녀석의 몸에 닿는 순간,

쿠우우웅-!

뇌신(雷神)의 망치가 지상을 후려친 것처럼 거대한 소음이 숲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결과는,


빌어먹을!”


……실패.

효과는 있었다.

녀석의 거대한 몸에는 코끼리 하나가 들락거릴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흉터처럼 아로새겨졌다.

하지만 그뿐.

어지간한 동산 크기의 괴물 앞에 그 정도는 치명상이라고 부르기 힘들다. 사람으로 치면 기껏해야 팔, 다리에 타박상을 입은 수준. 제법 큰 상처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투를 그만둬야 할 수준은 아니다.

아쉽기 그지없는 결과.

마음 같아서는 한참 한탄하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자리에서 그럴 수 있는 시간 같은 건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우오오오오!”


후웅-!

분노한 녀석의 포효와 함께 거대한 넝쿨 다발이 나를 덮쳐왔다.


!”


해야 할 것은 회피.

빠르게 발을 굴러 녀석에게 떨어진 것과 동시에 다시 잠자리의 날개를 발현했다.

놈에게서 떨어진 것과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녀석의 전신.

거대한 녀석의 몸체에는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는 달리 무수히 많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그 흔적을 만든 범인은 바로 나 자신.

상처의 숫자만 보면 제법 성과를 낸 것 같았지만, 이 중 결정타라고 부를만한 것은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솔직히 답이 보이질 않았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했다.

전격, 중독, 베기, 물기…….

동물로서 구현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녀석에게 큰 피해를 준 건 없었다.

하긴 어쩔 수 없나?

둔갑술의 힘은 동물의 힘. 그리고 동물 중 단번에 산을 파괴할 수 있는 녀석은 없다.

물론 마수들 정도라면 그런 녀석들도 있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둔갑술로는 마수로 변신하지 못하지.’


마수는 단순히 생체 구조적으로 특별할 뿐만 아니라, 마법적인 특이성 또한 보유한 존재. 그렇기에 둔갑술로 형체를 흉내 낸다고 하여도 그저 닮은 무언가가 될 뿐, 그 힘을 구현할 수는 없다.


내가 대체 뭘 놓치고 있는 거지?’


분명 해답은 있다.

나는 이드라를 안다.

이드라는 결코 선한 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사도를 괴롭히는데 몰두하는 악신 또한 아니다.

애초에 그녀가 나를 괴롭히길 원했다면 처음부터 수호자를 보냈을 터.


부분 둔갑을 익히고, 괴물들을 모두 없앤 뒤에야 수호자와 마주했다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그 수수께끼의 해답을 푸는 것뿐!

생각해라.

나에게는 어떤 능력이 있지?

동물상형권은 의미가 없다.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대인용 권법. 설령 마투술로 변용한다고 해도 그 특징 역시 변하진 않는다. 동산처럼 거대한 녀석에게 대인용 권법으로 덤비는 건, 거대한 바위를 상대로 관절기를 거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다.

기본적인 둔갑술 역시 마찬가지. 부분 둔갑술로 만든 최강의 일격으로도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고작해야 평범한 둔갑술로 무엇을 하겠는가?

그렇다면 남는 건 신력과 다중 부분 둔갑의 응용 정도일 텐데……,


, 잠깐만?’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우오오오오오!”


마치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무언가를 떠올리자마자 수호자는 다시 몸을 추스르고 나를 노려왔다.

본래라면 이를 최대한 피해야 할 터. 하지만,


놓칠 순 없어.’


이 깨달음을 놓쳤다가는 끝까지 이 싸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떠오른 나는 그저 무의식에만 회피를 맡긴 채, 손에 잡힌 그 조그마한 깨달음의 부표에 집중했다.


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 내가 신력과 다중 부분 둔갑을 내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거지?

신력은 내 힘이 아니다.

비록 임시 사도이던 시절부터 자주 사용하던 힘이지만, 그건 이드라의 힘이다. 그러나 수없이 그 힘을 다뤄온 감각은 신력을 내 것이라 착각하게 했다.

다중 부분 둔갑 역시 마찬가지.

둔갑술 자체가 나의 힘이기에 착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부분 둔갑을 넘어서 다중 부분 둔갑에 도달한 것은 이드라의 신력 덕분. 비록 미래에 언젠가 도달할지도 모르는 경지라지만, 지금 그 힘을 쓸 수 있는 건 온전히 이드라의 권능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나는 그 힘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거지?

쿠웅-!

촉수 다발이 쉴새 없이 나를 향해 몰아쳤다. 녀석은 이번에야말로 나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하늘을 뒤덮을 것 같은 넝쿨의 세례가 나를 계속해서 추격한다.

피하는 것도 슬슬 한계.

조금씩 녀석의 촉수가 내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그와 함께 작은 덩굴이 내 몸에 뿌리를 내리려고 했지만, 그 정도는 신력으로 태워버릴 수 있다.

피해야 할까?


아직 아니야.’


조금만 더 집중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나는 신력과 다중 부분 둔갑을 내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애초에 내 힘이란 무엇일까? 나는 어째서 이런 힘을 다루는 거지?

그 두 힘 중 다중 부분 둔갑은 내 둔갑술과 신력이 융합한 존재. 그렇다면 신력이야말로 진정한 열쇠일 터다.

그렇다면 신력이란 뭘까?

신력. 신의 힘. 신적 존재의 힘?

그 순간,


사도는 신적 존재일까요? 아닐까요?’


얄궂게도 내가 가장 혐오하는 존재의 말이 내게 깨달음을 주었다.

그게 가능한 건 내가……!

콰직!

전신을 옥죄어오는 통증과 함께 나는 사고의 늪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녀석의 촉수에 붙잡혔는지, 내 몸은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허공에 붙들려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이전에 쓰러뜨린 놈들과 마찬가지로 괴물이 될 터.

하지만,


강림.”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전신이 환염으로 휩싸였다. 환염에 닿자마자 타오르는 녀석의 촉수. 그 안에서 나는 갑주를 입은 사도의 모습으로 변해 허공에 유영하고 있었다.


나는 이드라의 사도다.”


그리고 내가 능력을 쓸 수 있는 건, 사도로서의 당연한 권한이다. 그 힘의 근원이 이드라일지라도, 내가 힘을 쓸 수 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가능성.’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도달할 수 있는 모든 미래.

단순히 나 자신이 익힌 마법만을 의미하는 게 아닌, 어떤 형태로든 내가 얻을 수 있는 모든 힘!


권능 발동. 수왕 강림.”


우드드득-!

환염이 전신을 감싸며 내 몸의 형태가 변한다.

구현하는 것은 최강의 육체.

사도의 능력과 내가 아는 모든 동물의 특성을 합친 신체.


우오오오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한 것일까?

공포를 느낀 수호자가 몸부림쳤지만, 이미 늦었다. 도망친다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 터.

콰아아아아앙-!

일격.

단 한 번의 몸짓이 끝난 끝에, 산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거대하던 녀석의 몸은 먼지가 되어 허공을 수놓고 있었다.

끝났다.

도저히 그 결말이 보이지 않던 싸움이 이제야 끝을 고했다.

변신이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몸을 휘감은 전능감을 느끼며, 나는 즐겁게 웃음 지었다.


?

*** ***

?


[도달하였구나.]


여신 이드라는 자신의 옥좌에서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자기 인식.

그것은 신적 존재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신이란 이는 물리적 실체인 동시에 초월적 개념. 홀로 오롯이 존재하는 이. 그런 존재에게 자신의 개념을 인지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지금의 사도는 겨우 그 첫 계단을 밟은 터.


[이걸로 걸음마를 뗀 것인가?]


본래라면 사도로서 활약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사실. 하지만 이제 막 사도가 된 그레고르에게는 이를 깨닫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였으니, 남은 것은 그 존재를 증명할 위업을 쌓아야 할 터.


이제 모습을 보여주시죠.”


수호자와의 격전이 끝난 지 오래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레고르는 기운이 넘치는지 숲을 향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확실히 그것이 그가 그녀의 영지에 온 이유. 이제 조건을 갖추었으니 자신의 본체를 보고자 하는 것을 무조건 막을 수도 없다.

하지만,


[굳이 봐야만 하겠느냐?]


그녀로서는 여전히 부담이 갈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녀의 사도는 자격을 갖추었다. 하지만 그 자격은 그저 그녀를 마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일 뿐. 진정 그녀의 본체를 보았을 때 그가 버틸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대는 이미 강하니라. 조금 전의 권능은 샤우그너 판의 사도가 사용한 금강갑주조차 꿰뚫을 수 있을 터. 그렇다면 굳이 고유 권능을 익힐 필요도 없을 터이다.]


애초에 그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샤우그너 판의 사도를 이기기 위함일 뿐. 상대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을 터다.


[그러니 사도여. 다시 묻겠노라.]


그렇기에 그녀는 사도의 뜻을 돌리고자 했다.


[돌아가지 않겠느냐?]


그가 자신의 본체를 보고자 하지 않기를.

그레고르 역시 그런 그녀의 의중을 이해했는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침묵 끝에 돌아온 것은 부정.


저는 이드라 님의 본체를 봐야만 합니다.”


그는 그녀의 본체를 마주하는 걸 선택했다.


[어째서냐?]

이드라 님의 말씀처럼 금강 갑주를 뚫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드라 님이 말씀하셨으니 무조건 뚫을 수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하지만 그는 지난 싸움에서 그 권능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파괴술(Destruction Magic) 역시 폭발의 반동으로 속도를 늘리는 데 사용했을 뿐, 모든 힘을 다하지 않았죠.”

[…….]

이번에도 그가 똑같이 싸워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어쩌면 주제를 모른다고 생각해서 전력으로 저를 무찌르려고 할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저는 패배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로다.]

, 모르는 일이죠. 낮은 확률이지만 이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요? 더 강한 사도가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번처럼 정정당당하게 맞서준다는 보장도 없죠. 저는 가능한 한 빠르게 강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번처럼 동료가 위험한 일에 처하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뜻이 확고하기 때문일까?

그녀에게 뜻을 전하는 사도의 눈은 그녀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아.]


뜻을 돌릴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이드라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된 이상 그를 설득해봤자 무의미할 터.

결국 남은 것은 한 가지 길뿐이다.


[그렇다면 본녀의 사도여, 그대에게 부탁하노니.]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이드라는 입을 열었다.


[살아남거라.]


그렇게 꿈의 마녀가 움직였다.


?

*** ***


?

우르르릉-!

대지가 떨린다. 허공이 비명을 지른다. 마치 세상의 종말을 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숲이 공포에 떨고 있었다.


뭐지?’


그저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을 뿐인데?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난번에 본 화신과 본체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외형 정도는 다를 수도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국은 같은 존재.

큰 변화는 없으리라 생각했거늘 착각이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숲에서 내가 서 있던 부위가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단순히 내가 서 있던 부위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대지에서는 산이 솟아오르고, 하늘의 별들이 움직인다.

이게 대체 무슨?

경악한 내가 움직이려던 찰나.


[그대로 있거라.]


이드라의 목소리가 내게 움직이지 말 것을 종용했다.

늘 듣던 평소와 같은 어투.

하지만 어째서일까?


크윽.”


단순히 목소리가 들렸을 뿐인데, 온몸이 커다란 산에 짓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무거웠다.

그리고,

나는 꿈의 마녀를 볼 수 있었다.

아아아아아-!

숲의 모든 존재가 노래를 불렀다.

자신들이 속한 이 숲의 여주인, 아니 숲 그 자체인 존재가 도래하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드라가 날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녀가 숲에 있는 모든 것을 파악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진실이라고?

후드득.

갑자기 솟은 다섯 개의 산은 손가락이었으며, 내가 딛고 있던 땅은 손바닥에 불과했다.

하늘에서 빛나던 거대한 달은 눈동자였으며, 허공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이것이 꿈의 마녀.

그녀는 숲의 주인이 아니었다. 숲이 그저 그녀의 일부일 뿐.

그것을 파악하고 그녀의 본체를 마주하려고 하는 순간,


크윽!”


터무니없는 통증이 전신의 신경계를 타고 달렸다.

저것은 봐서는 안 되는 존재. 필멸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지식.

과잉된 정보가 오감을 통해 흘러들어오고, 뇌는 그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해 불타오른다. 전신의 근육이 공포에 떨어 녹아내릴 듯 경련하고, 심장은 터질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아.”


자아가 붕괴한다.

나 자신을 이루는 최소한의 기억조차 덮어버릴 정도로 거대한 정보의 해일이 뇌를 향해 날아들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견뎌야 해!’


이가 부서지고 잇몸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입을 꽉 다물어보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저 죽어갈 뿐.


크윽!”


좀 더 버텨야 하는데!

그 순간,


[이것이 본녀의 본체이노라.]


그 말과 함께 나는 허공에 떠 있던 달, 이드라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고.


!”


쓰러진 이의 목에 꽂힌 비수처럼, 그 시선이 결정타가 되어 내 이성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이대로 끝날 수는 없는…….’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허우적거려도 그뿐. 그 눈과 마주친 기억을 마지막으로 나의 의식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Papillon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4 댓글

마드리갈

2020-12-08 20:38:57

각 동물의 가장 유용한 속성을 채택하는 게 바로 부분 둔갑.

그리고, 자신이 사용하는 힘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해지겠네요. 그리고 이것을 깨달은 게 바로 이드라가 의도한 것 같네요. 이 엄청난 전투가 주인공 그레고르가 이드라의 사도로서의 최소한의 검증을 거친 것이라는 게 정말 놀라울 따름이예요.


그런데 이드라의 본체에 대한 묘사가 정말 무섭네요.

하늘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것만으로도 공포가 느껴지는데...

Papillon

2020-12-20 03:42:36

신이란 존재인만큼 단순히 강한 것만을 넘어선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었는데 제대로 되었는지는 모르겠군요. 무섭게 느껴지셨다면 다행입니다.

SiteOwner

2021-01-23 18:43:01

궁즉통(窮則通)이라는 말이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치를 터득하여 부분둔갑을 달성해 낼 수 있는 게 바로 그 자체로도 멋있지만, 이것을 일러스트나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할 수 있다면 정말 시선을 확 휘어잡는 멋진 명장면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을 잘 그려서 이런 게 가능하다면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저는 그림실력과는 담을 쌓아둬서 그게 안타깝습니다. 그저 감상평으로 감동을 전하는 게 전부인 것에 양해를 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기를 극복한 게 겨우 최소한의 조건 돌파라니...

역시 신의 세계는 범상치가 않는가 봅니다.

게다가 이드라의 본체가 묘사되는 모습이 무섭습니다. 당장 아파트 베란다 창문만한 얼굴이 나타난다고 해도 제정신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이게 바로 코스믹 호러인가 봅니다.

Papillon

2021-01-26 01:27:45

신이란 것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강하다고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니까요.


불가해라는 것은 대상에게 공포를 느끼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죠. 그리고 그 대상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임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한 번에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라고 판단해 그렇게 연출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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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고래 2013-02-28 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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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 가사 뒤에 「커넥트」를 붙히면 이렇게 된다 - by 니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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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고래 2013-02-27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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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 요즘 고래가 사용하는 바탕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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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고래 2013-02-26 2047

Polyphonic World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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