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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장 박사와 마르코를 찾고 있던 그때.
“하... 늦지 않았군.”
장 박사는 한숨을 돌린다. 숨소리가 다 울리는 땅속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카페거리 바로 아래의 하수도관 내부다.
“타이밍이 참 좋았습니다.”
복면을 쓰고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자가 장 박사를 반갑게 맞는다.
“딱 보스가 떨어지는 그 지점에 포털을 여는 순간, 보스가 제 앞에 떨어지더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라자, 여기 지금 너밖에 없는 거야?”
“아니요, 저를 따라오시면 차가 한 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레한드로의 차인가?”
“알레한드로의 차는 아닙니다. 알레한드로는 보스께서 말씀하신 목표를 싣고 안전하게 이동 중입니다.”
“알레한드로가 고생이 많군. 저번에 엘더 건 때도 큰 역할을 했고.”
“그렇지요.”
“잘 들어라, 라자.”
장 박사는 라자라는 여자를 보고 무겁게 말한다.
“내 정체를 캐려는 녀석들이 있다. 마음 단단히 먹고, 일단은 내 지시를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다음날 오후 4시. 미린고등학교 옆 주택가. 현애와 조제, 외제니가 나란히 길을 걷고 있다. 조제와 외제니 둘 다, 여기저기 멍이 들어 있고 팔다리 여기저기에 밴드도 붙어 있다.
“너희 둘 다, 괜찮은 거야?”
“어제보다는 좀 낫네.”
조제가 심드렁하게 말한다.
“아직도 여기저기 쑤시는 건 변함이 없지만.”
“그 자식 다시 보이기만 해 봐라.”
얼굴을 자꾸 어루만지는 외제니의 목소리는 어제보다는 좀 가라앉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제의 그 분노를 잊지 못하는 듯한 목소리다.
“아주 뼈도 못 추리게 해 줄 테니까.”
“둘 다 이제 좀 진정해. 그 사람을 찾아야지 패 주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야! 생각해 봐. 너는 진정이 되겠어?”
조제와 외제니가 입을 모아 현애를 보고 큰 소리로 말한다.
“아직도 어제의 일이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다고!”
“아,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어.”
현애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말없이, 조제와 외제니의 손을 잡고, 찬 기운을 살짝 흘려 넣는다.
“아... 그래, 그래.”
“우리도... 무슨 뜻인지 알지.”
조제와 외제니가 더욱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다들 그 날의 기억을 완전히 잊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너, 확실히 느낌이 달라졌어. 전에 비해서 많이 부드러워졌잖아. 안 그래? 특히... 그 뭐냐, 드릴맨 작가님 만나러 갔을 때의 네가 아닌 것 같은데.”
“조제 너, 내가 그 작가 만나러 간 건 어떻게 알았어?”
“뭐긴. 리나한테서 다 들었지.”
“아, 하하하, 그래?”
현애가 실실 웃으며 조제와 외제니의 손을 막 놔 주는 참에...
“어? 선배님, 안녕하세요!”
한 여학생이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돌아본다.
미린중 학생 한 명이 현애와 조제, 외제니를 보더니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하지만 얼굴은 그렇게 밝지는 않다. 애써 선배들을 보고 웃어 보이려고 하는 것 같으나, 확실히 어제 아침에 본 쾌활한 얼굴은 아니다.
조제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지려고 한다.
이 앞에 서 있는 여학생은, 어제 조제 자신과 외제니를 죽이려고 했던 그 녀석의 손녀다! 조제의 낌새가 좋지 않은 걸 눈치챈 외제니가 조제의 어꺠를 잡고 살짝 뒤로 당긴다. 조제는 여전히 살짝 일그러진 얼굴이지만, 외제니가 뭐라고 하려고 하는지를 알았는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아, 그래. 그래.”
“안녕, 루비야.”
루비는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배가 아파 보이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이다.
“왜 그래?”
현애가 짐짓 모르는 척하고는 최대한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혹시?”
“아, 선배님, 별로 그렇게 문제가 되는 것까지는 아닌데요...”
루비는 한숨을 푹푹 쉬며 말을 잇지 못한다.
“왜 그래, 뭐라도 있는 거야? 문제가 되지 않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저희 할아버지가 어젯밤부터 연락이 안 되네요.”
“연락이 안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현애와 조제, 외제니는 애써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고는 루비에게 물어본다. 특히 조제는 금방이라도 한 대 패고 싶은 심정을 겨우겨우 억누르고서 말이다.
“너희 할아버지한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저희 엄마하고 아빠가 이따가 한번 할아버지 댁에 가 본다고는 했는데...”
“네가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네 할아버지인데!”
외제니가 순간 욱하는 걸 참지 못하고 언성을 확 높인다.
“아니, 선배님!”
루비도 꽤 당황했는지 목소리를 높인다.
“선배님은 그럼 선배님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디어디 가는지 일일이 기억해요?”
“아, 아니...”
“같이 사는 것도 아닌데!”
“아, 그... 그래. 미안...”
외제니는 당황했는지 급히 말을 얼버무린다.
그때...
“어, 안녕.”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경찰관 한 명이 서서,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엘더 경위님, 맞죠?”
현애가 엘더 경위를 바로 알아본다.
“오늘은 혼자 다니시네요. 순찰차는...”
“아,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 혼자 나왔어.”
엘더 경위의 시선은 루비 쪽으로 쏠린다.
“네가 장루비구나. 뭐 좀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루비가 말을 얼버무리려 하자, 엘더 경위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다.
“아니, 아니야, 아니야! 네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고, 네 할아버지에 대해서 하나만 좀 물어보려고 하는데...”
“제 할아버지에 관한 거라면 잘못 찾아오셨어요.”
루비는 엘더 경위의 말을 끊으며 톡 쏘듯 말한다.
“그런 이야기는 방금 여기 선배들한테도 들었다고요. 저도 몰라요, 제 할아버지가 어제 어디서 뭘 했는지는.”
“그... 그래, 미안하구나.”
엘더 경위가 미안하다고는 했지만, 루비는 여전히 표정이 똥 씹은 듯 썩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건 더 듣고 싶지 않거든요!”
루비는 대뜸 이렇게 소리 지르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가 그 자리를 벗어나 버린다.
“야! 루비야! 루비...”
현애와 엘더 경위의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루비는 저택 담벼락 사이로 멀리 사라져 버린다.
“하, 뭐 좀 물어보려고 했는데.”
엘더 경위는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루비가 사라진 쪽을 허탈한 눈으로 물끄러미 보다가, 또 한 번 한숨을 쉬고는 현애와 조제, 외제니를 돌아본다.
“그런데 말이에요, 경위님.”
현애가 엘더 경위를 보고 묻는다.
“오늘은 왜 혼자 나오셨죠? 진언 씨도 안 보이고, 순찰차도 없고...”
“아, 오늘은 집에 일이 생겨서 일찍 돌아가는 거거든. 지하철 타러 가려는 길에 잠깐 들른 거야.”
“어... 그래요?”
“그런데, 루비는 어쩌다가 찾게 된 거죠?”
“할아버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장주원 박사가 제일 잘 알 것 같아서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려고 했지. 아무래도 직장 동료고 함께 오랜 시간 동안 일해 왔으니만큼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런데 슬슬 대답을 피하더니, 어제는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엘더 경위는 푹 한숨을 내쉰다. ‘어제’라는 대목에서, 엘더 경위를 보는 현애, 조제, 외제니의 표정이, 약 1초 동안 말 그대로 ‘썩어 버린다’. 엘더 경위는 그걸 눈치채지는 못했는지, 딱히 반응은 없다.
“아무튼, 이래저래 할 일은 많은데, 집은 또 나를 부르네. 그럼 또 보자!”
엘더 경위는 간단히 인사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급히 지하철역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큰일났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안 듣고 그냥 가 버리다니!
“저기, 저기!”
“경위님!”
“경찰 아저씨!”
현애, 조제, 외제니가 지하철역 쪽으로 사라져 가는 엘더 경위를 부르지만 엘더 경위는 못 들었는지 주택가 너머로 모습을 감춰 버린다.
“하...”
현애가 먼 데만 바라보며 한숨을 팍 내쉰다.
“진작에 말할 걸 그랬나.”
“연락처는 있어?”
“아니, 나는 없어. 아마도 세훈이한테 있겠지. 아니면 메이링 씨나 앨런 씨라든가.”
오후 5시, 동구의 한적한 주택가. 울긋불긋하거나 다채롭거나 하지는 않지만 수수하면서도 나름대로 멋을 낸 단독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다. 멀리 바다가 보이고 뒤로는 야트막한 산을 끼고 있어 풍광이 괜찮고, 비교적 교외에 가까우면서도 도심에서 그렇게 멀지는 않은 곳이라서 주거지로 선호되는 곳이다. 대중교통이 좀 빈약해서 지하철을 타려면 버스를 타고 좀 가야 하고, 그 버스도 자주 오지는 않는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 주택가에 엘더 경위의 집이 있다. 할아버지 엘더 박사가 대학 강사와 연구원으로 일하며 마련한 집이다. 가족들 모두가 마음에 들어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엘더 경위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 후 동생들이 태어나고, 경찰학교 졸업 후 미린경찰서에 발령을 받기까지, 모든 순간을 이 집과 함께했다.
할아버지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엘더 경위는 버스에서 내린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보인다.
붉은 벽돌에 흰 지붕의, 조그만 정원이 딸린 집이다.
“왜 갑자기 부모님이 나보고 오라는 걸까...”
이런 궁금증을 품고, 엘더 경위는 대문 앞에 선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엘더 경위는 문 안으로 들어선다. 평소와 다름없다. 잘 정돈된 정원은.
하지만 엘더 경위를 둘러싼 공기는 음산하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건?
집을 둘러싼 분위기는 평화로운데, 이런 위화감이 들다니?
도대체, 이건...
“엄마! 아빠!”
엘더 경위는 큰 소리로 불러 본다.
아무 반응이 없다.
“도로시! 다니엘!”
여전히, 반응이 없다.
뭔가 심상치 않은데...
엘더 경위의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만 같다...
침을 한번 삼킨다. 문을 연다.
그런데...
“때맞춰 왔군. 늦을 줄 알고 걱정했는데.”
현관에는, 훤칠한 키의 웬 노인이 서 있는 게 아닌가!
“누구냐, 네 녀석은!”
그렇게 소리를 질렀지만...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아니, 숨쉬기가 힘들다... 산소가 부족한 것 같다!
그 얼굴... 알 것 같다. 익숙한 얼굴! 며칠 전에도 본 얼굴!
“테렌스 엘더 경위, 아마 자네도 나를 몇 번 본 적 있지. 내 직장 근처에 자네 부하하고 같이 왔을 때. 그리고 그 전에도 자네 할아버지 소개로 몇 번.”
“장주원 박사... 당신이... 어째서...”
“더 나를 쫓는다면, 자네 목숨도 어찌 될지 모르지. 자네 가족들처럼 말이야.”
그 순간, 눈에 들어온다!
쓰러져 있는 엘더 경위의 부모님, 그리고 동생들!
눈을 뒤집은 채, 숨을 쉬지 않는다!
“이 자식, 말 다 한 거냐!”
주먹을 휘두르려 하지만 허공을 맴돌 뿐. 장 박사의 형상은 홀로그램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이미 숨을 거둔 가족들.
숨이 쉬어지지 않는 집 안.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엘더 경위는 눈앞에 펼쳐진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며, 그대로 주저앉고 만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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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0-12-10 00:37:35
루비는 또 무슨 죄라고...할아버지가 장주원 박사인 게 이럴 때에 참으로 껄끄럽네요...
태어날 때 가족을 선택할 수 없는 바로 이게 운명의 족쇄. 그런데 그렇다고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여러모로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어요.
게다가 엘더 경위의 가족에게는 이게 또 무슨 변고인가요...
토할 것 같네요...
시어하트어택
2020-12-11 16:16:10
맞습니다. 가족은 자기가 원할 때 버리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저런 상황이 생기면 정말 어려움이 크겠지요. 당장에 범죄자 가족이라든가 하는 사람들이 겪는 따가운 시선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SiteOwner
2021-01-23 19:01:43
사람의 변화라는 게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건 저의 지금까지의 삶도 그러했고,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사람들의 변화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현애가 많이 달라진 것도 그래서 눈에 잘 띄는 건가 싶습니다.
그나마 외제니가 조제보다는 자제력을 좀 더 발휘한 것 같긴 합니다만, 루비에게 뭘 한다고 해서 사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만일 여기에서 자제력을 발휘하지 않고 루비에게 해를 입힌다면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상황은 역풍이 불어버리기 마련. 그렇게 되면 악인에게 굴복해야 하는 골치아픈 상황이 벌어집니다. 특히 어린 여자아이에게 폭력을 가했다면 진상이 알려지기도 전에 프레임이 굉장히 불리하게 짜이고, 설령 그 프레임이 해소되었다고 해도 남는 것은 큰 상처밖에 없으니까요.
엘더 경위의 가족은 몰살당해 버렸군요.
소설 속이라지만, 이렇게 잔혹할데가...
시어하트어택
2021-01-24 23:11:04
큰 사건을 겪으면 그래서 사람이 좀 변하나 봅니다. 비록 겉으로는 크게 다른 바 없이 보일지 모르나, 속은 근본적으로 바뀌었으니, 분위기상으로만 봐도 뭔가 달라진 게 짐작이 가는 법이죠. 그래도 저런 식의 끔찍한 일은 겪지 않았으면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