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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점심시간, 미린고등학교 분수대.
벤치에는 여느 날과 다를 바가 없이 여기저기 남학생,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거나, 혼자서 재미있게 책이나 AI폰 같은 걸 보고 있다. 현애 역시 혼자서 만화 <라리의 모험> 최신 업로드 회차를 재미있게 보는 중이다. 역시나, 사람을 꽉 잡아끄는 스토리, 그리고 매력적인 캐릭터, 유려한 그림체. 이 세 가지가 맞아떨어지니 조회수가 쭉쭉 늘어나는 거겠지...
“저, 선배님.”
한참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누군가 현애의 앞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올려다보니, 레아와 사이가 앞에 서 있다.
“어, 너희 웬일이야?”
“아무 일 없었죠?”
“에이, 그런 건 굳이 안 물어봐도 되는데.”
“혹시 발레리오 씨가 어제 뭐래요?”
“아, 별 이야기는 없었어.”
“음...”
레아는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지만, 표정이 무겁다. 발레리오와 있었던 일을 대충은 알고는 있는 걸까... 옆에서 듣고 있는 사이도 평소의 과장된 표정은 짓고 있지 않다.
“그건 그렇고요, 선배님.”
“왜?”
“미레이 씨가 조금 있다가 재단 본부에 가 본다고 하네요.”
“어, 그래?”
“혹시 가 볼 수 있으면 가 볼 거예요?”
“아니, 한창 수업 중인데 어떻게 가려고?”
“조퇴 신청하고 적당히 지어내서 나가죠. 저는 아무래도 조사원이고 하니까.”
“그래? 혹시... 가는 사람들 더 없어?”
“일단 앨런 씨하고 파라 씨는 못 간다고 했고... 대신 호렌이 저하고 같이 갈 거예요.”
“그래... 조심하고.”
그날 오후 3시, VP재단 본부.
“하... 오랜만이네, 여기는.”
메이링이 주차장에 세워진 차에서 내리며 말한다.
“법무팀에 있던 게 아직도 어제 일어난 것 같이 생생한데 말이야.”
메이링의 뒤를 따라 몇 명이 더 내린다. 우선 조수석에서 내리는 호렌, 뒷좌석에서 내리는 레아, 그리고 수영, 파비안까지.
“여기 그런데 출입 허가증은요?”
수영이 묻자 메이링은 AI폰을 들어 보여준다.
“허가증? 발레리오 씨가 직접 만들어서 주던데요. 아마 작가님 폰에도 있을걸요?”
“제 폰에요?”
수영이 AI폰을 열어보니, 과연 출입 허가증 하나가 나타났다.
“이걸 찍고 들어가면 된다는 거죠...”
“네, 그렇죠. 파비안 씨도 마찬가지고요.”
“네... 네.”
“좋아요, 이제 다들 들어가자고요.”
메이링의 말에 따라 다들 AI폰에 출입증을 표시하고, 출입문을 걸어 들어간다. 삐- 삐- 거리는 소리도 없이 모두 무사히 통과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과정이지만, 다섯 명 모두 출입문을 통과하자, 메이링은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로비까지 들어와서 보니, 법무팀에 있었을 때 봤던 익숙한 얼굴들이 몇 명 보인다. 멀리서 지나가는 검은 정장을 입은 저 사람들은 틀림없이 김하준 변호사와 유세프 라티피 변호사. 곧잘 만나며 식사도 같이하고 친해져서, 법무팀을 나와 조사원을 하게 된 이후로도 자주 연락하는 변호사들이다.
“어?”
두 사람 중 김하준 변호사가 아는 척을 한다.
“메이링 씨 아니야?”
“김 변호사님은 뭐 하셔?”
“아, 법령해석 건 처리하고 이제 좀 쉬고 있지. 메이링 씨는 웬일이야?”
“임무수행 중이야, 지금은.”
“응? 임무 수행?”
김 변호사와 라티피 변호사가 일제히 묻는다.
“무슨 임무를 수행하는데?”
“쉿-”
메이링은 목소리를 낮춘다.
“이사장님 지시야!”
“아... 그래! 또 보자.”
김 변호사와 라티피 변호사는 눈치를 챘는지, 간단히 인사하고 뒤돌아 갈 길을 간다. 메이링 일행이 연구실 방향으로 향하는 길은 왜인지는 모르게 자꾸만 음산한 느낌이 든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그래 보이지가 않는데도.
“뭐지... 왜 분위기가 우리한테 이렇게 적대적인 거야?”
호렌이 경계하는 눈을 하고 말한다.
“보안요원들은 왜 우리를 다 저렇게 보는 거지?”
호렌의 말대로, 중간에 마주치는 검은 정장을 입은 보안요원들은 열이면 열 일행을 마치 외부 침입자나 범죄자 보듯,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노려보고 있다.
“진정해, 호렌.”
레아가 호렌을 제지한다.
“보안요원들은 그럴 수도 있으니까.”
“네, 레아 님.”
그렇게 메이링 일행이 장 박사의 사무실을 향해 가던 중.
“자네 메이링 맞지?”
누군가가 또 메이링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복도 맞은편이다. 돌아보니 금발의 이마가 벗어진,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다.
“듀카스 박사님이시죠?”
“아, 그래. 자네 법무팀 나간 뒤로는 처음 보는군.”
“잘 지내시죠?”
“에이, 그럼. 새삼스럽게 그런 걸 가지고.”
“요즘 연구는 잘 되시죠?”
메이링은 조금 말투를 바꾸어 말한다. 듀카스 박사는 뭔가 눈치챈 거라도 있는지, 목소리를 팍 죽인다.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말도 마. 요즘 분위기 얼마나 흉흉한지 알아?”
“왜요?”
“엘더 박사님도 갑자기 사라지고, 장 박사님도 갑자기 사라지고, 그 이후로 어느 날부터인가 재단 본부 안에 저렇게 보안요원들이 마치 우리를 범죄자 보듯 본다니까?”
“어... 정말요?”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저 보안요원들이 저러는지 모르겠어. 하도 신경 쓰여서 연구도 잘 안 될 정도라니까! 이사장은 뭐 하고 있는지... 뭐, 얼굴도 한 번도 못 봤지만...”
“그래요...”
메이링은 무겁게 말한다.
“실은 이사장님 지시받고 온 거거든요.”
“정말? 정말 이사장이 보낸 거야?”
듀카스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하자, 메이링은 주머니에서 발레리오의 명함을 꺼내 보여준다. ‘VP재단 이사장’이라고 쓰인 부분을 신경써서.
”오, 그래?”
막 격앙되려던 듀카스 박사의 목소리가 조금 잦아든다.
“다행이야, 그래도. 그 양반 일은 하네.”
“당연히 이럴 때는 해야죠.”
“그래, 그 이사장 양반이 필요할 때 나서 주니까 고맙기는 한데... 나도 못 본 이사장 얼굴 봐서 좋겠구만, 하하하.”
메이링은 주위를 한번 돌아본 다음, 목소리를 다시 높인다.
“아, 박사님, 그럼 가 볼게요. 수고하세요.”
“자네도 몸조심하고.”
잠시 후, 3층의 연구원들의 사무실 앞의 복도.
“어디 보자... 여기 이쯤이 엘더 박사님... 그리고 조금 더...”
메이링이 장 박사의 사무실을 한창 찾고 있는데.
“저기잖아요, 미레이 씨!”
레아가 한 사무실을 가리킨다.
“어디? 어딘데?”
“두 칸 앞에요!”
“어, 저기?”
일행은 바로 레아가 가리킨 사무실 앞으로 간다. 과연, ‘선임연구원 장주원’이라고 쓰인 명판이 있고 ‘부재중’이라는 표지판도 보인다.
“문은 굳게 잠겨 있네요.”
“안 그래도요, 호렌 씨, 이럴 때를 대비해서 발레리오 씨한테 마스터키를 받아왔어요.”
메이링이 AI폰에 마스터키를 띄우고 사무실 문에 갖다 대자, 바로 문이 스르르 열린다. 문 너머로 보이는 장 박사의 사무실은 매우 정갈하게 정돈되어, 마치 기계가 해 놓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다. 책상에 놓인 화분, 벽 한쪽에 있는 책장, 그리고 연구자료철까지.
“이제 들어가서 조사해 보면 되는 건가요, 메이링 씨?”
“네, 작가님. 발레리오 씨가 말하기를, 장 박사가 미처 없애지 못한 문건들이 많다고 하던데, PC를 열어 봐야 확인할 수 있다고 하네요.”
메이링은 경계를 품은 눈으로 한 번 더 돌아본다. 혹시나 누가 이리로 접근하고 있지 않을까 불안하다. 그리고 다시 장 박사의 사무실을 돌아보는데...
“어? 작가님... 그리고... 파비안!”
없다... 안 보인다. 수영과 파비안이!
“뭐야... 레아, 호렌 씨, 도대체 작가님과 파비안은...”
“그냥 문앞에 섰을 뿐인데, 확 끌려가 버리고, 문이 다시 닫혀 버리더라고요!”
“아니, 레아, 잡았어야 할 거 아니야!”
“그게, 워낙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장 박사의 사무실.
문은 굳게 잠겼고, 어두운 사무실 안은 매우 음산한 기운이 감돈다.
“왔나...”
사무실 어딘가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디 보자... 두 녀석이 있군. 한 녀석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한 녀석이 누군지는 알 수 있지!”
“어디 있는 거냐. 모습을 드러내라!”
“그래, 그래! 너희들 뜻대로 보여주지!”
말을 마치자마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온다. 책장 뒤쪽에서.
스포츠머리로 짧게 깎은 머리에, 군복처럼 얼룩무늬의 재킷을 입은 젊은 여자다.
“그래, 너!”
여자가 대뜸 파비안을 가리킨다.
“배신자가 왜 그렇게 당당히 행동하는 거지?”
“내가 배신자라니, 조금 어폐가 있는데.”
파비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애초에 나는 장 박사를 배신한 적이 없어. 그 장 박사라는 작자가 나를 세뇌했을 뿐이지. 그리고 당신은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어떻게 배신할 수 있는 거지?”
“세뇌? 세뇌라고? 훗...”
여자 역시 어이없다는 듯, 수영과 파비안을 깔보는 눈을 하고 말한다.
“나는 오랜 기간 잠들었던 내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그분께 감사하고 있단 말이다.”
“감사는 무슨 감사? 딱 들어도 기계음 같은데.”
이번에는 수영이 앞에 나서며 말한다.
“그 장 박사라는 녀석이 넣어 주는 대로 말하는 건 아니겠지?”
“너 이 자식, 말 다 했냐!”
순간, 수영을 향하여 여자의 아우라가 뻗친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엇... 이게 뭐야!”
수영의 몸이 갑자기 엎드려진다. 마치 센 바람이 부는 듯, 아니면 여자가 자석을 품고 있는 듯, 점점 끌려간다!
“이... 이런... 이건 도대체...”
“자, 자! 어서 머리를 조아리라고.”
여자는 땅바닥에 엎드려진 수영을 의기양양하게 보다가, 문득 파비안에게 손찌검한다.
“배신자, 다음은 네 차례다!”
여자의 말에 파비안이 뭐라고 대꾸해 보려고 하기도 전에...
쿵-
파비안이 엉덩방아를 찧는다...
그리고 끌려가기 시작한다!
“배신자, 너도 저 머리 긴 녀석과 같은 꼴이 되어야겠지?”
한편 사무실 밖 복도.
“지금 사무실 안에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혹시 보여?”
메이링이 문 앞에 선 레아에게 걱정스럽게 묻는다.
“아니요, 보이지는 않는데, 누군가하고 싸우고 있는 건 확실해요.”
“후, 그래...”
“메이링 씨, 사무실은 신경끄고, 우리 쪽이나 신경 쓰시죠.”
“그래요, 호렌 씨. 저쪽은 아무리 많아 봤자 두세 명 정도인 것 같은데, 우리 쪽은 열댓 명은 되는 것 같으니까.”
과연, 메이링의 말대로, 보안요원들이 메이링 일행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딱 봐도 우호적인 움직임은 아니고, 몇 명은 총을 뽑아 들고 겨눌 채비까지 하고 있다.
“아이고, 이거 완전히 포위되게 생겼는데요, 레아 님.”
“그래? 호렌, 그리고 미레이 씨.”
“어, 레아.”
“네, 레아 님.”
“다들, 준비됐죠?”
“아니, 레아. 내가 준비되긴 뭘 돼. 저 보안요원들, 딱 보니까 다들 비능력자 같은데?”
“그래요? 그럼 일단은 저희에게 맡기시죠.”
레아와 호렌이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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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0-12-27 15:29:49
일단 VP재단의 본부까지는 진입했는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네요.
문제의 짧은 머리의 젊은 여자는 초능력자같고, 적대적인 분위기를 알아서 풍기는 보안요원은 일단 비능력자같아 보이긴 한데 확증은 없고, 아무리 적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다수이면 절대로 안심할 수가 없죠.
이미 수영과 파비안은 문제의 젊은 여자에게 제압당했네요.
혹시 수영의 능력 중의 하나인 타인의 능력을 열화카피라도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도움이 될지...
시어하트어택
2020-12-30 23:46:06
사실 저런 상황에서 보안요원 같은 타입의 적들이 예상치 못한 능력을 보여 주었을 때, 그 효과가 더 큰 법이겠죠.
SiteOwner
2021-01-30 18:05:40
무언의 메시지라는 게 참 뭐랄까 강하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느끼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이렇게 말하던가요? 의사소통에서 비언어적 요소가 차지하는 게 83%라나...
설명은 어렵지만 묘하게 음산한 분위기, 게다가 적대적인 시선으로 보는 보안요원의 존재 등에서 많은 것이 전해집니다. 일본산 창작물에 흔히 나오는 "공기를 읽는다" 라는 표현이 이런 것에 대한 건가 싶기도 합니다.
이사장은 정말 보기 힘든 것 같군요. 그게 좋은지 아닌지는 글쎄요,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발레리오라면 자주 출근하는 쪽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시어하트어택
2021-01-31 23:27:25
아무래도 발레리오는 비밀도 좀 있고 하니까 모습을 잘 안 비치는 것으로 설정했는데, 오너님 말도 좀 일리가 있는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