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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키 린 시리즈
1. 3시간의 가치
2021년 1월 X일 오전 6시 45분.
인텔리전스 월드와이드 그룹(Intelligence Worldwide Group) 본관 11층 회장 집무실 안쪽에서 나는 모터 구동음.
잠시 후 내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집무실 안쪽 문에서 대략 23세 정도로 보이는 장신의 미녀가 나타났다.
하이힐의
굽 높이와 높게 올려묶은 포니테일을 감안하면 전체 키가 족히 190cm는 가볍게 넘을 법한, 유려한 바디라인을 부각시켜
드러내는 날렵한 검은색 재킷과 타이트 미니스커트의 투피스 정장을 입은 그녀는 늘 그랬듯이 집무실 안쪽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집무실의 상태를 간단히 둘러본 다음에 복도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나갔다.
맞은편의 종합상황실의 당직 상황실장이 그녀를 보고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상황실장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당직 상황실장에게 청아한 목소리로 정중하게 답례하는 그녀가, 인텔리전스 월드와이드 그룹의 창업주이자 회장인 코마키 린(小牧凛)이다.
종합상황실에서 야간변동사항을 보고받은 그녀는 집무실로 돌아와서 창문을 열었다.
24시간
공조장치가 계속 작동중이지만, 이른 아침에 직접 창을 열고 외기를 받아들일 때의 상쾌함은 이 시간대에만 느낄 수 있는 특권.
창문이 열리자 태평양을 넘어 쿠리하마항(久里浜港)으로 불어오는 아침의 시원한 바람과 수면에 반짝이는 아침해의 빛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에 더해, 야간초계비행을 마친 해군 대잠초계기가 쿠리하마 항공기지에 착륙하려 하강중이었다.
그런 창밖 풍경을 감상하며 심기일전한 듯한 린은 나지막하지만 청아한 미성으로 당일 업무의 시작을 선언했다.
"음, 오늘 업무도 이제 시작할까."
7시 정각.
책상 위의 워크스테이션을 켠 린은 당일처리안건, 해외 자본 및 상품시장현황, 접견일정 등을 신속히 점검했다.
이
날은 이례적으로 9시에서 12시까지 3시간에 걸쳐 일본페미니스트총연합회(日本フェミニスト総連合会)의 이사장, 총무부장 및
재무부장과의 접견이 예약되어 있었다. 그 총연합회는 세계 여성학논문집 및 일본의 여성운동사의 통합데이터베이스
구축의 건과 페미니즘 데이터센터 개설의 건으로, 회장과 비서 2명만을 접견지정해 둔 상태였다.
린이 다시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도 어조도 완전히 딴판이었다.
"마타카요, 타이가이니 시토케(またかよ、たいがいにしとけ)..."
대부분의 경우 표준어를 쓰는 그녀가, 이때만큼은 후쿠오카(福岡)의 사투리인 하카타벤(博多弁)으로 "또 왔나, 좀 작작하지?" 라는 의미로 거칠게 한마디 내뱉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8시 30분.
비서가 집무실에 들어왔다.
"회장님, 준비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동관 2층 응접실로 이동하지요."
비서와 같이 응접실로 이동한 린은 미리 응접실에서 접견을 준비하는 다른 비서를 도우며 최종점검을 하였다.
9시 정각.
이사장, 총무부장 및 재무부장이 아직 오지 않았다. 린과 비서 2명은 그대로 기다렸다.
수분 뒤에야 3명이 나타났다.
린과 직원들은 그녀들에게 인사했지만 그들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숄더백에서 자료를 꺼냈다.
이사장 시게노부 치즈코(重信千鶴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에 명함 받았죠? 그럼 안 드려도 되겠네요?"
린은 정중한 태도를 유지한 채, 그 3명이 자료를 꺼내는 동안 잠깐 기다리고 있었다.
응접실 한가운데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3명씩 양측에 앉자, 총무부장 칸자키 리사(神崎理沙)가 말을 꺼냈다.
"아, 데이터베이스고 데이터센터고 뭐고, 그거 당신 만나려고 그럴듯하게 각본 짠 거고, 그럼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됐죠?"
"예, 그럼."
린은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비서들의 얼굴표정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총무부장은 린의 가슴에 시선을 향한 채로 툭 던지듯이 말했다.
"그런데,
회장님은 옷 없으세요? 일본 최고의 부자라면서 이 1월에 실내라고 가슴골 다 내놓고. 지금 여기 여자들뿐인데 가슴 자랑하는 것도
솔직히 보기 싫거든요. 게다가, 곧 50이 다 된다면서 20대같이 가슴골 노출에 미니스커트에..."
리사가 말을 줄이는 것에 잠시 기다렸던 린이 대답했다.
"설마, 제 옷 품평회를 위해서 이렇게 3시간이나 예약하신 것은 아닐텐데, 어쩐 일로 저와의 직접면담을 신청하신 것인지."
떨리거나 얼굴을 붉히거나 가슴을 손으로 가리거나 하는 일 없이 대답하는 린을 본 리사가 침묵하자, 치즈코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당신이
이렇게 글로벌 기업의 창업주이자 회장으로 있을 수 있는 것도, 회사 내에서 가슴 드러내는 블라우스나 딱 붙는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도 다 우리들 덕분이니까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죠. 우리 일본페미니스트총연합회에 금전을
출연하시라는 겁니다. 당신이 여성이니까 여성을 위해서 당연한 의무입니다."
치즈코의 말이 끝나자 그 뒤를 재무부장 시이나 무츠미(椎名むつみ)가 이었다.
"코마키 회장님은 2020년 말일 기준 세계 2위, 일본 1위, 그리고 여성 1위의 자산가이시죠?"
"예, 그렇습니다만?"
"예, 그렇습니다만?"
"국내외 경제지의 신년특집호에 보도된 것을 보니 개인순자산이 20조엔이 넘는다고 하시더군요. 그것도 북미나 서유럽의 신흥자산가들과는 다르게, 현금
등의 금융자산이나 금, 은 등의 현물자산 비중이 높다고. 그러니, 보수적으로 잡아서 연이율 2.4%라고 치면, 적어도 주당
92억엔 넘게 이자가 발생하는 거죠. 그 1주일분 이자도 채 못되는 25억엔은 회장님께는 소액. 원금대비로도 0.0125%
이하네요. 그러니 회장님께서 출연해 주시면 회장님도 이미지가 살아 좋고 우리 조직도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니 좋고, 그렇게 여성끼리
공존공영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여성인권을 위해 매일같이 목숨걸고 분주히 활동하는 페미니스트이고, 회장님은 페미니스트의 최대 수혜자로서 페미니스트들이 쌓아올린 금자탑을 더욱 튼튼히 세우시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빨리 결정하시죠?"
듣고 있던 린은 잠시 기다렸다가 대답했다.
"25억엔이라...그 금액의 돈이라면 당장 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희색이 만면하려던 3명은, 린이 잠깐 말을 멈추자 표정을 굳힌 채로 린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그것을 보고 있던 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속행했다. 이번에는 팔짱을 끼고 있어서, 큰 가슴이 더욱 부각되었다.
"글쎄요. 제가 드릴 수는 있더라도 이사장님, 총무부장님 및 재무부장님이 그 25억엔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니, 제 돈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3명이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면서 부들부들 떨다가, 이사장 치즈코가 테이블을 쾅 치면서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어이, 당신, 회장이면 다야!! 돈 좀 있다고, 배웠다고 말장난하는 거야 뭐야!!"
2명의 비서 중 1명이 행동을 취하려고 하자 린은 손을 뻗어 제지하고 나서는 이사장을 보면서 답했다.
"시게노부 이사장님. 아무리 많은 돈이라고 해서 그게 무한하지는 않은 것, 아시겠지요?"
"......"
"아무리
큰 재산이라도 결국 1엔씩 모여서 형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25억엔은, 제 개인순자산 규모에서는 작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고, 큰 돈이 맞아요. 저에게도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터. 하다못해 자판기에서
130엔짜리 음료 한 캔을 사는데도 뭐가 좋을까를 생각하고, 지불방법도 1000엔 지폐를 하나 꺼낼까 모인 동전을 쓸까 아니면 교통계 IC카드로
처리할까에서 택일하는 게 인지상정이 아니겠습니까."
"......"
"다른 말씀이 없군요. 접견의 목적과 내용이 이렇게 다른 이상,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으니 여기서 마무리하시는 게 어떨지..."
린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재무부장 무츠미가 회심의 미소를 지은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허리를 잘랐다.
"이봐요, 당신, 하나는 알고 나머지는 모르는 것 같은데..."
"나머지라면?"
"우리를
이렇게 무시하면 당신 무사하지 못할걸요? 이거 공개하면 당신 회사 주가도 박살나고 그러면 이미지에 타격도 있을 건데요?
불매운동을 저희 조직이 일으키면 여성 소비자들은 돌아설 건데 그건 안 무서운가 봅니다? 눈 질끈 감고 그냥 군말없이 25억엔을 내면
서로 좋을 걸 뭐하러 어려운 길을 가려는지, 도쿄대학 수석졸업에 미국 조지아공과대학 수석졸업, 박사학위 2개에 글로벌 기업의
수장이라는 분이, 이렇게 인성도 박약하고 식견도 짧아가지고는...그러니까 당신이 자산가 순위 세계 1위도 못하고 당신 회사는
매출이 세계 9위밖에 안되잖아?"
비서들이 분을 못 참고 있는 상황에서 린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러시군요. 이 상황의 공개라, 그럼 저희 쪽에서 제공하면 되는 거군요. 소개가 늦었네요. 지금 이 분들이 수고해 주십니다."
테이블 위의 스위치를 하나 누르자 한쪽 벽이 열렸고, 촬영기자재 및 운용스탭들이 보였다.
린이 그렇게 벽 너머의 상황을 공개하자, 3명은 돌연 할 말을 잃고 부들부들 떨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시이나 부장님?"
"네에..."
조금 전의 당당한 태도가 싹 사라진 무츠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린은 그 무츠미의 얼굴을 응시하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시이나
부장님은 대체 어느 평행세계의 인텔리전스 월드와이드 그룹을 보셨는지요? 저희 회사는 비상장기업입니다. 제 개인순자산의 구조를
대략 아시는 분이 저희 회사의 지배구조는 모르시다니, 이건 어불성설이 아닌가요? 조금 전에 말씀하셨죠. 제 개인순자산에 현금 등의
금융자산이나 금, 은 등의 현물자산 비중이 높다고. 어디까지나 추정이지만, 이미 다른 기업에 대해서 습관적으로 그렇게 요구해 오신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습니까? 게다가, 물론 저희 회사에서 일반소비자용 상품 및 서비스도 제공하지만 대부분의 고객은 법인고객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될텐데요. 그 법인고객들을 설득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글쎄요, 세 분이 고작 저 한 사람을 설득시키지도 못하는 마당에
다수의 법인고객들을 설득가능할지는 심히 의문입니다만? 저희 회사가 각종 시민단체 등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유지하니까
이전에 거부당하셨고 이번에는 이렇게 대표인 저와 직접 담판을 짓고 싶어하시는 것까지는 이해합니다만, 저로부터 돈을 받고 싶어하시는 분이 저를 논리적으로
설득시키지 못하는 건 결과적으로 실패 아닌가요?"
시이나 무츠미는 이미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멍하게 있으면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린은 그런 무츠미를 응시하며 또 말을 이어갔다.
"대체
어느 평행세계의 여성 소비자들을 보고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동일하게 움직이지 않아요. 여성복 시장이
규모에서 남성복의 10배나 하는 이유도, 여성들의 소비 트렌드도 다양한데다 여성패션은 구성품이 다양하니까 인간의 절반이 여성이라도
여성복 시장은 의류시장의 절반이 아니라 절대다수인 것인데, 시이나 부장님의 논리대로라면 여성은 절대로 다양한 분야에 진출을
못하겠군요. 저희 회사처럼 비즈니스 전략 및 기술컨설팅, 산업디자인, 법인금융투자, 회계감사, 상품자원의 개발 및 거래, 미디어
발행 및 데이터베이스 구축 등과 같이 다각화된 분야를 다루는 기업은 더더욱 영위하지 못할 것인데, 결국 시이나 부장님은 여성을 내세우고 여성을 위해
목숨을 건다지만 결과적으로 여성을 부정하고 오로지 돈에만 목숨을 거는 게 아니었던가요? 제가 출연을 안 하면, 바로 곤란해질 곳은
일본페미니스트총연합회의 재정상태이고, 재정상태가 흔들리면 재무부장인 시이나 부장님의 지위부터가 위태로울 건데 그건 생각하지
못했나 봅니다?"
한 비서가 서류를 하나 들고 왔다.
린이 그것을 받아들고는 무츠미의 앞에 내밀었다.
"이건
일본페미니스트총연합회의 재무제표인데, 수상한 부분이 한두군데가 아닙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시민단체가 현대사회의 모종의 성역이라고
착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재무제표는 기업이나 정부기관에서 통용될 레벨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회사의
클라이언트도 아닌 마당에 뭐라고 할 건 아닙니다만, 글쎄요, 대중으로부터 선출된 것도 아니니 정당성의 확보에도 의문이 있는
시민단체가 활동의 전제가 되는 재무사항이 문제투성이인데다 그 목적이라는 것도 진정성이 의심되고, 3박자가 참 잘도 맞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이런 재무제표는 공인회계사라면 누구든지 실태를 간파할 수 있는 레벨. 그리고 저는 공인회계사이기도 하고, 일본공인회계사협회 상임고문이기도 함은 물론, 저희 회사의 사업영역에 회계감사도 있습니다."
계속 멍하게 앉아 울기만 하는 무츠미를 내버려둔채 린은 시선을 이사장 시게노부 치즈코로 돌렸다.
"시게노부 이사장님, 1985년 그 해에 뭘 하셨나요? 전 그때의 이사장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치즈코는 입을 못 연 채로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흠, 기억이 안 나시는가 보니 말씀드려야겠죠?"
린은 치즈코를 응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1985년
4월 16일 화요일, 그날 밤, 그러니까 최고재판소(最高裁判所) 판결이 나온 다음날, 이사장님이 방송에 나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요. 파파라치가 도쿄대학 구내에서 저를 미행하려다 저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반격했다가 그 파파라치에 중상을 입힌 저는
살인미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그 판결로 무죄가 확정되었는데, 그때 이사장님의 지위는 당시 가장 주목받던 소장파 여성학자였지요, 아마도?"
치즈코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린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이사장님께서는 당시 여대생의 패션스타일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말씀하셨지요. 학생이 학생답게 입어야지, 바디라인이 드러나는
옷은 또 무엇이며, 정장같이 입는 것은 곤란하다느니, 사치를 조장한다느니, 클리비지룩나 타이트 미니스커트가 대학사회의 성의식을
혼란시킨다니 운운하는. 게다가, 12세의 천재소녀가 도쿄대학에 진학해서는 키와 가슴이 크다고 어른같이 입고 다니다가 파파라치에
쫓겨다니던 끝에 결국은 살인미수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는 형국을 자초했다고 조롱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도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장님은 기억하시지 못하겠지만, 저는 거의 36년전에 공중파에서 그렇게 비난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장님은 최소한 저에게
도움을 주신 분은 아니었고, 그래서 제가 이렇게 입을 수 있는 것이 이사장님 덕분이라는 건 모순이 아닌가요?"
린이 당시의 방송영상을 화면에 띄우자 치즈코는 양손으로 귀를 막은 채로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테이블 건너편의 3명은 그냥 망연자실하며 울고 있는 재무부장과 엎드린 이사장, 그리고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인상을 쓰는 총무부장. 린은 총무부장을 향해서도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다.
"남의 돈을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시는지는 제가 알 바는 아닙니다만..."
칸자키 리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여전히 양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있었지만, 린은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당장
동네의 식당이나 편의점에 가더라도 그곳의 종업원들은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고, 대금을 지불할 때 공손하게 받고 활기차게 인사를
건네기 마련이죠. 그 사람들이 항상 즐거운 건 아닐 테지만, 최소한 자신의 일터이기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을 아니까 그렇게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주변에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고, 가게에 들어오는 사람이 항상 온전하다는 보장도 없지만. 이게
바로 비즈니스의 세계. 최소한 칸자키 부장님처럼 상대에게 험구를 쏟아내어 반발심을 부추기는 방식으로는 상대가 설득도 매료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겠는데, 그걸 모르셨다니 안타깝군요. 그래도 모르는 게 면책사유는 안되니까 책임은 져 주셔야겠습니다."
비서가 하드커버 폴더에 수납된 서류를 가져와서 3명의 앞에 놓았다.
이사장 시게노부 치즈코가 일어나서는 그 서류를 집어들고 읽다가 감전된 듯이 놀라고 말았다.
[청구서 - 32억 4000만엔]
리사와 무츠미도 그 서류를 보고 놀라더니, 3명이 일제히 바닥에 주저앉으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잘못했으니 제발 목숨만은..."
린은 그냥 담담하게 답했다.
"흠, 저는
생사여탈권 따위는 없으니 목숨 구걸은 안 해도 되는 건 물론 번지수도 틀렸어요. 단지 여러분들이 속임수를 써서 저의 시간을 뺏고 업무를 방해했기에 그에
합당히 청구했을 따름이죠. 금액은, 세 분이 거짓 목적으로 3시간이나 저의 시간을 낭비하게끔 하신 것에의 대가로 매초 10만엔의 요율로
산정한 것. 미국에는 워렌 버핏과의 점심식사를 위해서 경매를 하는 일도 있는데, 이 정도 각오는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일시불로 내라는 말은 없고 현금일 것도 요하지 않으니까, 협회 소유의 동산, 부동산 등은 물론, 저작권, 각종 채권
등으로도 대납가능합니다. 이건 협회 차원은 물론 세 분의 연대채무이기도 하니까 서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린이 청구서의 사항을 해설한 뒤 3명에게 서명을 요구하였다.
"공존공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 그대로 돌려드리죠. 지고지선하신 분이 어찌 저같은 자산가순위 세계 1위도 못하고 매출액 9위밖에 못하는
기업의 경영자의 돈을 받으시려 하셨는지, 그러니 저같은 사람의 돈은 여러분께 가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지고지선을 더럽히는 일은
제가 해서는 안될 것 같군요. 그리고, 아무리 큰 돈이라도 1엔씩 모이는 법이니까, 여성기업인인 제가 더욱 높은 지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오히려 지고지선하신 여러분이 저에게 돈을 내 주셔야 자산가순위 1위, 매출액 1위의 기업이 되는 데에 보탬이 되니까
이것이야말로 공존공영. 반론 있습니까?"
누구도 반론하지 못하고 있었다.
린은 그들을 응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반론 있습니까?"
"없습니다..."
"동의하셨죠. 그럼, 이 청구서에 서명을."
3명이 마지못해 청구서에 서명했고, 절차를 확인한 린이 테이블 위의 스위치를 누르자 잠시 후 남녀 경비원들이 들어왔다.
"여러분, 이 분들이 이제 가신다니까 에스코트를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린이 경비원들에게 목례를 하자 경비원들이 그녀들을 일으켜세웠다.
린이 한마디 덧붙였다.
"바로 아래층은 경찰서니까 조용히 나가시길. 소란을 일으키면 현행범으로 체포되도록 증거영상을 경찰서에 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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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댓글
대왕고래
2021-02-05 20:30:00
미팅에서 저런 식으로 상대방을 대하면 당연히 크게 데이는 법이죠.
근데 저 사람들은 크게 데였네요. 뭐 불에 손을 대면 데이는 게 다행이고 화상이 기본일테니 어쩔수 없는 거 같고...
마드리갈
2021-02-05 20:45:41
"나는 옳은 일을 한다. 그래서 나는 그 자체로 정의롭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꽤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그냥 재야인사로 있으면 표현의 자유, 다름의 인정, 포용성 등을 내세우면서 어떻게든지 이해받으려고 하지만, 일단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인정받게 되면 굉장히 잔인해지기 마련이죠. 그래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려거든 직함을 하나 씌워줘라" 라고 하는 걸지도요.
살아오면서 저런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봤는데, 지금도 달라진 게 없네요. 자신의 행동에는 여전히 무책임한 채로. 그러나 이 소설의 코마키 린같은 사람을 만나면 과연 그렇게 오만방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예요.
Lester
2021-02-07 01:17:15
음... 린의 설명적인 대사에 약간의 스토리가 붙어서 살짝 미묘한 모양새가 되었습니다만 그래도 흥미진진하네요. 그거하고 별개로 일페총련 3인조의 악담(?)이 잘 드러나지 않은 것도 아쉽습니다. 그래도 돈을 쉽사리 다루면 제대로 털린다는 것 자체는 확실히 드러나서 좋네요.
그런데 마지막에 린이 청구서를 내밀었다고 해도 서명하는 것 자체는 안 해도 되지 않나요? 물론 상황상 자기들이 일삼은 폭언과 과거의 행적이 자충수가 되긴 했지만, 그 거액의 청구서에 서명을 하는 건 협박이 아닌가요? 제가 법 쪽은 잘 몰라서 여쭤봅니다.
마드리갈
2021-02-07 02:08:49
돈은 많든 적든 유한한 법이죠. 게다가 상대를 얕보고 덤벼들면 아주 제대로 심하게 깨지게 되는 법.
문제의 일본페미니스트총연합회의 3명은 이번 이야기에 나오는 것으로 설정해 두긴 했는데 다른 이야기에도 등장시킬지는 아직 생각해 보진 않았어요. 다른 이야기를 쓸 때 재등장시켜볼까 싶기도 하네요.
폴리포닉 월드의 법규와 제도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드릴께요.
폴리포닉 월드는 민사에 대해 사적자치의 폭이 넓어요. 즉, 사인간의 계약자유의 원칙이 좀 더 보장되어 있는 동시에, 금반언(Estoppel), 영역의 혼동 등에 대한 대항조치도 발달해 있어요. 즉, 계약은 자유롭게 하되, 작정하고 상대를 속인다든지, 회사 차원에서 거부하는 방침을 무력화하기 위해 법인의 대표 등의 개인을 공격하는 우회전략을 구사하는 것도 사해행위(詐害行為)로 보고 이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금지하지 않는 대항조치를 사용가능하게끔 하는 법리도 있는 것이죠. 린은 그것을 최대한 활용한 거였어요. 즉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 법인의 대표자에 대한 공격 등의 각종 사해행위에 대해서는 그에 대해서 손해배상청구 등도 가능한 것. 이게 현실세계보다 좀 더 용인되어 있어요.
구성은 기업드라마 한자와 나오키를 참조했는데 이게 좀 미묘하군요. 다음에 쓸 때에는 어떤 시도를 해 볼지도 관건이겠어요.
흥미진진하게 읽어 주신 점에 깊이 감사드려요.
시어하트어택
2021-02-07 12:52:57
에휴...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고 해야 하는 걸까요, 혹 떼려다 혹 붙였다고 해야 하는 걸까요.
마드리갈
2021-02-07 13:50:47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라는 말은 불합리하다고 지적되면서도 실제로는 불합리성에 대한 지적보다는 자기완결적인 정당화가 더 만연하고 있어요. 코마키 린 시리즈에 나오는 일본페미니스트총연합회의 이사장, 총무부장 및 재무부장의 사고방식도 그런 것인데, 사실 자기완결적인 정당화라고 그럴듯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나는 옳다, 왜냐하면 내가 옳으니까 그렇다." 라는 동어반복의 순환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단지 주장하는 논지에 대해 반대하면 불어오는 역풍을 감당할 수 없으니 침묵한다는 선택지가 최선의 방책이 되니까 기묘한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는 것이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폴리포닉 월드에서도 이런 논리로 무장한 개인이나 단체가 존재하고, 어두운 단면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것에 대해서 린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쳐 버린 거였어요. 그것도 모욕, 협박 등을 정당화하는 수법에 대해서 그 논리로 그대로 갚아주었음은 물론이고, 폴리포닉 월드의 사법상의 제원칙을 최대로 활용하여 역으로 얽어맨 것이었어요. 그 결과 일본페미니스트총연합회는 25억엔을 뜯어내기는커녕 32억 4천만엔을 내야하는 꼴이 되어 버렸어요.
앞으로 전개될 다른 이야기에서도 이런 게 꽤 나올 거예요. 그럼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