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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오지 않은 봄

시어하트어택, 2021-03-07 20:53:57

조회 수
135

Una hirundo non facit ver.

- 제비 한 마리가 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끝났다.
끝나 버렸다.
우리의 ‘조르게’ 행성 ‘사토’ 지역에의 정착 시도는 실패해 버렸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잘 건설되나 싶었던 정착촌은, 밤이 지나고 지금 보니,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봄의 기운이 만연했는데, 거대한 눈보라가 휘젓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몇 달간 건물을 짓고, 어렵게 농사를 시도한 노력이 전부 허사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하마터면 내 목숨도 어제부로 끝나 버릴 뻔했다. 그때는 저녁 9시, 막 방 정리를 마치고 나서, 영화를 보며 밤을 보내려던 참이었다. 예감은 그때부터 안 좋았다. 어찌 된 일인지, 눈보라가 들이닥치기 전, EMP를 맞은 것처럼, 모든 전자기기가 먹통이 되어 버렸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다. 평소에는 잘만 돌아가던 TV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상심에 가득 찬 채로 그냥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전주곡에 불과했을 줄은 몰랐다. 사건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갑자기 말의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내 귀를 때렸다. 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이 행성에 오기 전부터 아낀 말, ‘그린웨이브’였다. 그건 평소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밤 늦게는 울지도 않고, 평소에는 낸 적 없는, 꽤나 불길하고 짜증 나는 울음소리였다.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린웨이브에게 좀 들어가라고 한소리 하기 위해 대문을 막 나서려던 그때.

나는 보고 말았다.
평소 저녁 시간이라면 풀과 나무로 덮인 야트막한 언덕, 그리고 더 멀리 우뚝 솟은 산이 보였을 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눈이 휘몰아치는 광경.
그리고, 모든 것을 빨아들일 기세로 소리없이 매섭게 회오리치는 기류.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제껏 본 적 없는 광경을 만들어냈다.
그 눈보라와 가장 가까이 있는 건물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산산이 조각나며 빨려 들어갔다.
도망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저런 걸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 상황이 참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그냥 그 자리에 서서 눈보라에 내 목숨을 맡겨 버릴 참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그린웨이브의 그 짜증 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거기다가, 전보다 훨씬 더 우렁차게, 마치 마을 사람들이 다 들으라는 듯 울고 있었다!
우연인지, 아니면 정말 기적이 일어났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린웨이브의 그 울음소리 덕분에,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물론 물건은 거의 건지지 못했다. 막 그린웨이브에 올라탄 순간 본 것은 지붕이 꽝 하고 쓰러지는 소리. 그것도 겨우 일군 밭 바로 위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 순간은 정말이지 나의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기분이었다. 나 자신부터도 그린웨이브를 탄 덕분에 몸만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 대부분이 안전한 고지대로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마을은 짙은 눈보라에 완전히 삼켜져 버렸다.

그리고 아침.
눈 앞에 펼쳐진 것을 보자, 내 머릿속은 깨끗이 비워졌다.
끝났다.
끝나 버렸구나.
이것뿐이었다. 다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비록 조금 춥기는 해도, 들판과 산을 가득 덮은 풀, 꽃, 그리고 조금조금씩 자라기 시작하는 보리와 밀 같은 작물들, 그리고 점점 따뜻해지는 색채까지.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개척민으로 온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날씨가 변덕을 부릴 줄이야. 이제까지 믿어왔던 날씨에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다.

그때였다.
“자네 안 일어나나?”
촌장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자! 가자고! 다시 일어나서 뭐라도 해야지.”
“하긴 뭘 합니까, 촌장님.”
나는 눈보라가 지나가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끝나 버렸어요. 아무것도 없다고요.”
내 감정을 팍팍 담은 말에, 촌장님도 그 자리에 굳어 버린 듯 말이 없었다. 잠시 말이 없던 촌장님은 약 1분쯤 후 입을 열었다.
“자네 뭐라고 했나?”
“끝.나.버.렸.다.고.요.”

“자네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촌장님의 목소리가 확 올라갔다.
“끝나 버렸다니, 그런 책임감 없는 말이나 하고!”
“책임감이 없다니요.”
그때 내 목소리는 왜 그렇게 끓어올랐는지 모르겠다.
“그간 제가 여기 정착을 위해 한 게 얼마나 많은데, 촌장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촌장님은 다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입을 꽉 다문 채, 나를 한참 동안 가만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촌장님의 입이 열렸다.
“자네 이러려고 개척단에 자원했나?”
“무... 물론, 그런 건 아닙니다만... 상황이 상황이잖습니까...”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어. 실망이야.”
“촌장님, 그 말은 너무한...”
거기서 촌장님은 내 말을 막아 버렸다.
“자네가 처음 이민선에 올라탔을 때의 패기, 아직도 기억하지. 그런데 그 모습은 오늘 보이지 않아. 끝을 보지도 않고 포기하려고 하나?”
“촌장님.”
어째서인지, 나도 지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의 가족, 그리고 미래의 자네에게 부끄럽지 않나?”
“그래도...”
“따라오게.”
나는 구시렁대며 그린웨이브에 올라타, 촌장님을 따라갔다. 분명히 훈계나 주욱 늘어놓겠지...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마을의 폐허, 내 집이 있던 자리 앞에 내려오더니, 아무 말 없이 지붕을 보고는, 그것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도와 드리려는 찰나, 촌장님은 지붕 안쪽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보게. 여기 지붕 밑에 새싹들은 무사하지 않나!”
과연, 촌장님의 말대로였다. 지붕을 들어보니, 조금은 찌부러졌을지언정 지붕 밑에 깔린 새싹들은 무사했다. 조금은 모습이 찌부러지더라도, 그 정도면, 정상적으로 수확도 가능할 정도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촌장님과 그 무사한 새싹들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그렇다.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약 1년이 지나서야 이 일기를 다시 본다. 지금 써 놓고 읽어보니 나 자신이 많이 부끄럽기도 하고, 만약 그때 내가 정말로 포기했다면 지금쯤 이 마을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확실한 건, 그때 촌장님의 따끔한 한 마디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물론, 이 마을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어제도 그 1년 전과 같은 눈보라가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다. 며칠 전 날씨가 갑자기 잘 풀렸는데, 그게 또 전조가 되었다. 그래도 그 1년 전과 같은 사례가 있었기에, 피해는 1년 전에 비하면 훨씬 적었다. 이번에도 그린웨이브가 큰 도움을 준 건 물론이다.
작년의 일을 이야기하자 촌장님은 그저 웃기만 했다.?

과연,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올해도 그렇다.
시어하트어택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1-03-07 21:32:49

읽다 보니,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포트 로스(Fort Ross)를 위시한 역사 속에서 명멸했던 여러 정착촌에서 들이닥쳤을 법한 위기가 떠올랐어요. 지구 위에서도 속수무책으로 멸망한 정착촌이 있었고, 앞서 언급한 포트 로스의 경우 러시아계 개척민들이 천연두가 유행하면서 죽어갔다 보니 19세기의 전반이 다 지나기도 전에 폐촌이 되어 버린 역사도 있었다 보니...


역시 행성들을 오갈 정도의 기술수준이라도 정착촌의 개척은 늘 어렵네요.

게다가 주인공이 잘못된 선택을 할 뻔 했지만, 촌장님의 말씀이 그를 구했고 오늘의 그를 있게 했네요. 역시 삶이란 도전과 그에 대한 응전이예요.

시어하트어택

2021-03-28 22:58:15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제 개척의 역사에서도 판단을 잘못 했다든지, 예기치 못한 재해에 휘말렸다든지 해서 사라져 간 마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저 마을은 이번의 위기를 잘 이겨냈으니 앞으로 오는 위기들도 잘 이겨낼 수 있겠죠.

SiteOwner

2021-04-03 12:44:33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여러 명마 중 적로라는 것이 있습니다. 불길하게 여겨졌지만 결정적으로 태운 사람인 유비를 위기상황에서 구해준 것처럼. 그린웨이브라는 이름의 그 말도 적로처럼 주인공을 비롯한 정착촌 사람들을 구한 데에 공헌했다는 게 기적적으로 여겨집니다. 역시 동물이 사람 말을 못해서 그렇지 영물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지요.

개다가, 보리, 밀 등의 작물에는 추운 날씨를 견디기 위해서 일부러 진압농법이 적용되기도 합니다. 보리밟기라든지, 롤러를 이용한 진압 등. 이외에도 저온환경을 겪어야 발아, 개화 등이 가능해지는 작물도 있습니다. 따뜻한 곳에서만 살아서 저온자극이 반영되지 않은채 꽃이 안 피는 하와이의 벚나무가 되지는 않아야겠지요. 언젠가는 겪어야 할 위기라면 미리 겪어서 단련되는 게 더 좋습니다.


작중의 사토 정착촌이 앞으로도 위기를 잘 견뎌내고 번성하기를 기원합니다.

시어하트어택

2021-04-03 20:15:56

제가 직접 농사를 지어 봤거나, 말을 타 봤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처음 저런 마을을 만들 적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까 하는 걸 나름대로 상상해 가며 썼더니 좀 그럴듯하게 나왔습니다. 물론 실제로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보기에는 이것도 꽤 부족하게 보이겠지요.


정말 온실 속 화초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위기도 겪고, 시련도 겪어야 더 성숙해지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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