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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터즈] Chapter12: 질투. Episode 48

Papillon, 2021-03-08 12:03:17

조회 수
142

겨울의 정령이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아름다운 눈꽃이 허공에 흩날렸다.

본디 아직은 서리조차 내릴 수 없는 계절이건만, 이 작은 토지만큼은 겨울의 신이 왕림한 듯 하얗게 뒤덮였다.

여름과 겨울이 동시에 존재하는 기괴하지만 실로 아름다운 풍경.

그 땅에 천사가 내려왔다.

?

하아.”

?

몸에는 창은의 갑주를 휘감고, 갑옷 위에는 빙설의 바람을 휘감은 채, 빅토리아는 적을 추방한 빅토리아는 지상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발이 닿는 순간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냉기. 대지를 덮은 눈이 녹아내리고, 허공에 휘날리던 눈이 그 형체를 잃는 순간.

?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주인 없던 목소리가 눈꽃의 감옥에서 해방돼 허공에서 울렸다.

시작을 알린 것은 제스의 당혹스러운 음성. 이어서 다른 폭력배들의 아우성이 침묵을 지운다.

?

끄악!”

이게 어떻게 된?!”

형님!”

?

이어지는 수십 초간의 합창.

이미 그 목소리의 주인은 도시 반대편 쓰레기장에 버려진 지 오래거늘, 그 너저분한 아우성은 보육원의 마당을 가득 메웠다.

마치 지옥의 망자들이 속삭이는 것과 같은 광경.

그것이 빅토리아, 그녀의 힘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비틀-.

자신이 만든 결과에 감상을 표할 시간조차 없이 빅토리아는 자신의 몸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전신을 짓누르는 끔찍한 고통. 지금 그녀의 몸 상태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

! !”

?

호흡기에 문제라도 생겼는지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웠다. 폐와 심장은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겁고, 전신의 근육은 파열되지 않을 찾기 힘들었다.

?

빌어먹을.’

?

사도의 회복력이 아니었다면 이미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 그녀는 그런 상태로 자신이 서 있을 수 있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

그나마 나아진 게 이 정도인 건가?’

?

힘을 사용할수록 점점 괜찮아질 것이다. 처음 부작용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이타콰는 그리 말했다.

이타콰의 권능은 북풍한설.

무엇보다도 빠르지만, 동시에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권능. 그 때문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고 하였다.

실제로 조금 나아지긴 한 것일까? 어제는 비슷한 속도로 달렸을 때 내장이 튀어나왔는데, 지금은 고통스러울 뿐, 피를 흘리진 않았다.

?

이러다가 나중에는 마조히스트가 되는 거 아냐?’

?

순간적으로 떠오른 실없는 생각에 흘러나오는 헛웃음. 그 덕택인지 고통이 조금은 덜어진 것 같았다.

그 순간.

?

저기 괜찮아요?”

?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빅토리아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

실수했다!’

?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는지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처음 이 능력을 사용한 이래 그녀는 한 가지 원칙을 세웠다.

?

절대 변신하는 것을 남에게 보여선 안 된다.’

?

그것은 그녀가 살아온 삶을 통해 내린 판단이었다.

빈민가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 걔 중에는 남들보다 뛰어난 인물도 있고, 남들보다 못한 자들도 있었다. 하나, 그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 자였다.

이타콰의 힘, 그건 인간의 힘이 아니다. 그리고 그 힘을 다루는 그녀는 빈민가의 그 누구보다 특이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변신한 이후의 그녀를 건드릴 수 있는 자는 없겠지.

하지만 보육원의 아이들을 인질로 삼는다면? 변신하기 전의 그녀를 기습해 제압한다면?

그랬기에 그녀는 가능한 한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사도의 갑주를 걸쳤고. 근처에 아무도 없을 때만 변신을 해제했다.

여태까지 한 번도 이를 어긴 적이 없건만. 조금 전 그녀는 자신이 정한 원칙을 어겨버렸다.

욱씬-!

?

크윽!”

?

당황했기 때문일까?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편하게 드러눕고 싶건만, 지금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

빌어먹을!’

?

하필이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사건에 휘말렸다.

그 자식들, 그 범죄자들은 그녀의 가장 소중한 장소를 침범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를 분노케 하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녀석들의 만행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

망했네.’

?

고통 때문에 흐릿한 눈으로 그녀는 두 사람의 기척을 살폈다.

오늘 보육원을 찾아온 그녀와 비슷한 또래의 두 사람. 빅토리아는 그 둘이 어쩌면 자신의 첫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첫 친구.

그 말대로 그녀는 친구가 없었다.

친밀한 이가 없는 건 아니다. 보육원의 아이들도, 원장인 아이린도 그녀에게 굉장히 잘해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가족이지 친구가 아니었다.

물론 바깥에서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보육원 밖을 나설 수 없었고, 나이를 먹고는 보육원을 위해 일하느라 바빴다.

그렇기에 두 사람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내심 굉장히 기뻤다. 그들이 처음으로 그녀의 친구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흥분해서 그들을 이끌고 다녔고, 그들이 모욕을 받자 분노해 날뛰었다.

그런데 일이 이 꼴이 될 줄이야…….

?

어떻게 하지?’

?

도망쳐야 할까?

순간 떠오른 생각이건만, 이내 멍청한 판단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집은 이곳이다. 한데 집을 놔두고 대체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둘을 쫓아낸다?

?

힘들어.’

?

저 범죄자 놈들처럼 강제로 끌고 갈 순 있겠지만, 저 둘을 상처입히게 될까 두려웠다. 그나마 멀쩡하던 상태라면 모를까……. 이 상태로 그들을 데리고 이동했다간 필히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

머리라도 좀 멀쩡히 돌아가면 좋을 텐데.’

?

욱씬-.

심각한 통증 때문에 판단력 역시 흐려진 지 오래다.

잠시간 이어진 침묵. 그 침묵의 끝은 빅토리아의 변신이 해제되면서 끝났다.

털썩-!

조금 전까지 얇은 갑옷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신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런 그녀의 곁에 드리우는 그림자.

그레고르.

자신이 야시장에서 만났던 사내가 그녀의 곁에 다가왔다.

?

뭘 하려는 거지?’

?

그가 도망치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왔다는 사실에 살짝 동요하는 빅토리아.

이윽고 그레고르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고.

?

숨을 편히 쉬세요.”

?

평온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마력을 흘려 넣었다. 그와 함께 조금씩 편해지는 육체. 치유술사의 것보다는 못하지만, 마력이란 곧 생명력. 자연스럽게 몸을 진정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

몸이 버틸 수 없는 힘을 써서 그런 겁니다. 마력으로 보조할 테니까 호흡만 바꿔도 좀 나아질 거예요.”

?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었는지 차분하게 이어지는 설명.

?

그런 걸……어떻게……?”

?

의아하다는 듯한 빅토리아의 표정에 그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눈앞에 두었다.

우드드득-!

평범한 형태이던 그의 손은 뒤틀리며 짐승의 것과 같이 변해갔다.

?

마법?’

?

처음 보는 기괴한 모습에 눈을 살짝 크게 뜨는 빅토리아.

?

저도 그, 조금 다르긴 하지만, 변신하는 능력이 있거든요. 그래서 조금 알아요.”

?

그 목소리에는 어째서인지 어색함이 느껴졌지만, 지친 빅토리아는 이를 넘기기로 했다.

?

, 저를 따라서 숨을 쉬어보세요.”

?

실제로 고통이 경감되는 것에 신기해하면서도, 빅토리아는 그의 지도에 따라 호흡을 조절했다.

그와 동시에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안심.

?

나를 무서워하지 않아.’

?

그 사실이 그녀는 마음에 들었다.

?

정말로 친구가 생길지도 모르겠네.’

?

그렇게 미소를 지으며 빅토리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서서히 굳어가고 있는 에스텔의 표정은 보지 못한 채로…….

?

?

*** ***

?

?

빅토리아의 상태가 호전되자, 세 사람은 보육원 건물로 향했다. 만신창이가 된 빅토리아의 모습에 아이린 수녀가 기겁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넘길 수는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도의 회복력 덕에 빅토리아는 금세 일어설 수 있었고, 그레고르와 신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야말로 그레고르의 계획대로 진행된 상황. 하지만 에스텔의 표정은 이와는 반대로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

나는 나가서 수련을 해봐야 할 것 같다.”

?

결국 더는 보고 싶지 않았지만, 말 한마디만 남긴 채, 에스텔은 홀로 마당으로 나왔다.

후웅-!

마력의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검은 밤하늘에 푸른 선이 새겨졌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선의 형태는 평소와는 달리 지나치게 격정적이고 삐뚤거렸다.

명백히 수련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증거. 본래라면 당장 수련을 멈추고 점검을 할 필요가 있거늘, 에스텔은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마치, 눈앞에 생사대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

제길!’

?

빅토리아. 사도의 모습을 한 그녀를 떠올리며 에스텔은 명백한 적의가 담긴 눈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압!”

이어지는 살벌한 검격. 평범한 인간이라면 갈기갈기 찢어버렸겠지만, 마음속에 투영된 환영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다. 아니, 설령 저것이 진짜라고 해도 사도인 그녀에게 작은 생채기라도 남길 수 있을까?

?

빌어먹을!’

?

불가능하다.

그 답을 떠올리자 다시 한번 분노 때문에 검로가 흔들린다.

?

어째서냐!’

?

이해할 수 없다. 흔들리는 검로를 보며 에스텔은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 판단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이거늘, 그녀는 왜 자신이 분노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무언가 저주에 당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이후에는 중독을 고려했다. 하나,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분노의 원인은 자기 자신.

그녀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분노하고 있을 따름이다. 단지 자기 자신도 분노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

?

!”

?

혀를 차면서 그녀는 눈을 감고 조용히 자신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 떠올린 것은 부분 둔갑을 발동하던 그레고르의 손이었다.

빅토리아가 싸움에 나서려고 했을 때, 그레고르는 부분 둔갑을 사용하려고 했다.

그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그레고르와 그녀는 빅토리아의 호의를 사야만 하고, 사도로 변하지 않은 그레고르의 전투법은 상형권과 부분 둔갑의 조합뿐이니까.

하지만 그녀가 희롱당할 때는 나서지 않았다는 점이 그녀를 분노하게 했다

?

빌어먹을.’

?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그때 그레고르가 나설 필요가 없었음을. 자신이 싸우고자 했다면 상대는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으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게 치면 빅토리아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빅토리아는 사도다. 순수한 전투력만 따지면 에스텔보다도 명백히 우위에 선다.

머리로는 그 행동이 이해가 갔다. 왜 그랬는지 직접 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장면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괘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뒤이어진 장면은 그녀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호흡법 교육.

그레고르는 지친 빅토리아를 돕기 위해 마력을 불어넣으며 호흡법을 알려주었다.

그녀와 친해져야만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실로 바람직한 전개. 하지만…….

?

그 호흡법은 내가 가르쳐 준 거였다.’

?

보어헤스 백작과의 첫 결투 전에 에스텔은 그레고르에게 상형권을 가르쳤다. 수업 도중 그레고르는 자주 지쳐 쓰러졌고, 에스텔은 그런 그를 돕기 위해 호흡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레고르는 필요해서라고는 하나 그것을 다른 여인에게 전수했다.

그게 싫었다. 그녀와 그레고르 둘만의 추억이 다른 색으로 물드는 것만 같았다.

마치 심장을 조여오는 것만 같은 분노.

하지만 여기까지는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옛 군주 이타콰의 말만 없었더라면.

?

[갸하하하! 이봐, 형씨. 혹시 빅토리아에게 반한 거야? 그렇다면 좀 잘해달라고!]

?

빅토리아를 간호하는 그레고르에게 이타콰가 그렇게 말했다.

당사자들은 그저 웃어넘겼다. 그저 친구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에스텔은 결코 그 말을 넘길 수 없었다.

?

크윽!”

?

분노 때문에 실수한 것일까? 마력의 흐름이 뒤틀려 팔에 강한 부담이 걸렸다. 그와 함께 오른팔에서는 격통.

쨍그랑-!
그 통증 때문에 어느새 그녀의 마력검은 손에서 떨어져 있었다.

?

, !”

?

어째서일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상의 빅토리아가 그녀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마치 너 따위는 그의 곁에 있을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서러워져서, 에스텔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잠시간 이어지는 흐느끼는 소리.

?

추하네.”

?

그 흐느낌이 끝나자, 씁쓸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추했다.

자신이 너무나도 추하게 느껴졌다.

필요한 상황이란 걸 이해하면서도 분노하는 자신이 싫었다. 그레고르가 다른 여성과 친해지는 것을 보고 가슴 졸이는 자신이 미웠다. 그리고 그 여인이 사도라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끼는 자신이 너무나도 모자라 보였다.

?

뭘까, 이 감정은……?’

?

질투.

누군가가 그녀의 질문을 듣는다면 얘기해주었을 답을 알지 못한 채, 에스텔은 욱신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

어떻게 해야 하지?’

?

어떻게 해야 이 불안감과 증오, 씁쓸함이 뒤섞인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자 한 가지 답이 떠올랐다.

빅토리아가 아닌 자신이 그레고르의 곁에 있으면 된다. 그레고르가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들면 된다. 자신이 그의 유일한 존재가 되면 된다.

?

하지만…….’

?

그럴 수가 없었다.

사도야행이 끝나지 않는 한, 그레고르는 자신보다 빅토리아를 더 주시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

[사도니까?]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던 에스텔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

누구냐!”

?

극도의 경계심을 느끼며 다시 검을 드는 에스텔. 여전히 팔은 근육통 때문에 저렸지만, 검을 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

모습을 드러내라!”

?

이어지는 외침.

그런 그녀의 앞에 그림자가 일어났다.

우웅-!

그것은 실로 기괴한 모습이었다.

분명 인간의 모습이거늘, 인간은 아니었다. 시각적인 정보 외에 오감은 물론 기감에도 상대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그것만이라면 그저 극도의 은신술을 익힌 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

하지만 시각 역시 불완전하기에는 마찬가지였다.

?

얼굴이 인식되질 않아.’

?

분명 얼굴을 것은 확실한데, 아무것도 인식되지 않았다. 마치 상대의 얼굴이 머릿속에 들어온 순간, 누군가가 검게 먹칠이라도 하는 듯이.

?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대를 해치지 않으니.]

?

그림자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조금 전보다는 더 길어진 문장. 그 문장을 읊는 목소리에 그녀는 기억 속에서 상대방을 찾아낼 수 있었다.

?

그 녀석이다.’

?

그레고르와 보어헤스 백작의 결투 도중 그녀를 도와주었던 존재. 그 그림자가 다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

하지만 왜 이제야?’

[나는 항상 네 곁에 있었다. 다시 한번 네가 나를 찾게 될 때까지 기다렸지.]

?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림자는 그렇게 조용히 속삭여왔다.

잠시간 이어진 침묵.

상대방의 눈치를 보던 에스텔은 결국 대화를 이어가기로 했다.

?

무슨 속셈이지?”

[흐흐. 꿍꿍이 같은 건 없다. 그저 너한테 다시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지.]

도움?”

[그래, 도울 수 있지.]

?

이어지는 대화. 하지만 에스텔의 신경은 대화보다는 다른 쪽에 실려있었다.

?

그리 먼 위치는 아니야.’

?

그녀의 기감에 그레고르의 위치가 잡혔다. 전력으로 뛴다면 금방 도달할 수 있는 위치. 상대가 빅토리아처럼 빠르지 않은 이상, 충분히 도망칠 수 있으리라.

?

기회를 엿봐야 해.’

?

마력을 운용하며 그녀는 조용히 상황을 살폈다.

잠시 후, 그녀가 움직이려는 순간.

?

[그대를 사도로 만들어 줄 수도 있겠지.]

?

예기치 못한 제안에 그녀는 마력이 완전히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

나를 사도로?’

?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그녀의 이성이 속삭였다.

사도를 선정할 수 있는 것은 옛 군주뿐. 그리고 옛 군주라면 신기를 지니지 않은 그녀에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을 건넬 수 없었다.

평소라면 분명히 거절했을 터.

그러나 지금, 자신이 처음 느끼는 감정에 당황하고 있는 그녀에게 이 제안은 너무나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

[그래, 사도. 나는 그대를 사도로 만들어줄 수 있다.]

그걸 어떻게 믿지?”

[그것 역시 상관없지. 하지만 괜찮을까? 이번이 그대의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

에스텔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사내가 정말 그녀를 사도로 만들어줄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게 가능하다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것 역시 사실이다. 이미 사도야행이 시작된 지 오래. 대부분의 옛 군주는 사도를 결정한 이후일 것이다.

?

[사도가 된다면 그대는 저 남자에게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테지. 그리고 그렇게 되면 훨씬 그에게 중요한 인물이 될 테고 말이야.]

그건…….”

[그렇다면 그 사내를 어린 계집에게 빼앗길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을 테지.]

나는 그런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

반쯤 비명에 가깝게 터져 나오는 에스텔의 목소리. 부정의 뜻을 담기 위해서인지 강하게 대답하긴 했으나,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질 않았다..

?

[흐흐흐. 그러면 그렇다고 해주지. 하지만 그대에게는 여전히 좋은 거래야. 자 어떻게 생각하지?]

?

이어지는 긴 침묵.

머리로는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에스텔은 선뜻 그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

그레고르가 나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고?’

?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달콤하게 느껴지는 상황. 그 상상에 결국 흔들린 것일까?

?

대가는 뭐지?”

?

그렇게 에스텔이 묻는 순간, 그림자의 입가에 미소가 새겨졌다.

?

[그저 내 부탁을 몇 번 따라주기만 하면 된다.]

?

선심 쓰듯 그렇게 대답하는 그림자.

예상보다도 괜찮은 제안에 에스텔이 대답을 하려던 순간.

?

무슨 일이 있나요?”

?

보육원의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어떻게 된 거지?’

?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는 에스텔. 하나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조금 전 문을 열고 나온 그레고르 뿐이었다.

?

혹시 울었어요?”

?

그녀의 눈가에 남은 눈물 자국을 찾아낸 것일까? 그레고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그 역시 그림자를 전혀 보지 못한 것이 확실한 상황.

?

말해야 하나?’

?

잠시 그레고르의 얼굴을 보며 고민에 빠진 에스텔이었지만,

?

아무것도 아니다.”

?

그녀는 결국 침묵을 지켰다.

?

이건 내가 결정할 문제다.’

?

그녀는 애써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웃하는 그레고르. 하지만 큰일은 아니리라 생각했는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

혹시 무슨 일이 있다면 얘기해주세요.”

?

다시 문을 열고 보육원으로 향하는 그레고르. 다시 홀로 남은 에스텔의 뒤에서, 그림자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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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사정으로 연재가 하루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건강하시길.

Papillon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4 댓글

마드리갈

2021-03-08 13:08:33

일신상의 사정이 있었군요.

포럼에서는 추궁하거나 책망하거나 비난하는 일이 없으니까, 언제든지 편하실 때에 포럼을 이용해 주시면 되니까 걱정하시지 않으시길 당부드릴께요.


역시 사도의 힘은 강력하네요.

폭력배 따위가 대적하거나 감당할 레벨이 아니었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상황하에서 절규하는 정도...

게다가 타인에게 투사한 능력 말고도 자신에 대한 능력도 굉장해요. 회복력도 발군...


그레고르가 빅토리아를 돕는 과정에서 에스텔이 느낀 감정, 이해할 수 있어요, 적어도 저는.

저 또한 독점욕이 꽤 강한 편이다 보니...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진격의 거인의 미카사 아커만처럼 맹목적으로 일부터 벌이고 보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리고 그렇게 흔들리는 에스텔의 마음을 파고드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나타나네요. 평소라면 설득력은 고사하고 아예 존재감조차 없을 것인데, 폭풍전야라는 감을 숨길 수가 없어요.

Papillon

2021-03-15 02:08:02

에스텔의 경우에는 독점욕이 강하기도 하지만, 없던 감정이 생겨나다보니 제어를 못하는 것도 있긴 합니다.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그레고르만이 아니라 에스텔도 성장시킬 예정이라 그런 면모를 부각시켰습니다.

SiteOwner

2021-04-03 12:44:57

굳건한 믿음은 의외의 작은 변수에 흔들릴 수 있게 되고, 일단 흔들렸다면 걷잡을 수 없이 증폭하게 됩니다. 게다가, 의심생암귀(疑心生暗鬼), 또는 의심암귀(疑心暗鬼)라는 옛말처럼 의심은 악순환을 낳기 마련입니다. 이 문제가 각각 빅토리아와 에스텔에게 일어났으니 정말 큰일입니다.

특히 에스텔이 많이 걱정되는군요.

외지생활을 많이 해 본 저로서는, 힘든 때에 누군가의 회유의 손길이 뻗쳐지는 등의 상황을 겪어 본 일이 많다 보니 그 상황의 무서움이 실감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독점욕이 강한 성격이 동생과 비슷하다 보니 결코 남의 일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두운 그림자가 어두운 그림자로 끝나야 할텐데 하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Papillon

2021-04-04 12:04:32

외지 생활 중에는 평소에는 무시할 법한 이야기에도 솔깃하게 되기도 하죠. 에스텔을 찾아온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비밀입니다만, 그가 큰 장애가 될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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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초능력자가 수상하다!] 43화 - 뜻밖의 손님(4)

|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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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2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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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일본 여행기 - 쇼핑에서 산 물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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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2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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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일본 여행기 - 6일차(식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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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2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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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일본 여행기 - 6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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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2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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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초능력자가 수상하다!] 42화 - 뜻밖의 손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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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2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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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초능력자가 수상하다!] 41화 - 뜻밖의 손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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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20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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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자료] 진리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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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18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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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일본 여행기 - 5일차(식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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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17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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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일본 여행기 - 5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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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16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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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초능력자가 수상하다!] 40화 - 뜻밖의 손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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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15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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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지도로 보는 세계 18. 미국본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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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갈 2024-11-14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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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초능력자가 수상하다!] 39화 - 어수선한 주말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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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13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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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지도로 보는 세계 17. 카리브해 중심의 중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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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갈 2024-11-11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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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일본 여행기 - 4일차(식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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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10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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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일본 여행기 - 4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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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09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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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그려본 APT. 패러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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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09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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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초능력자가 수상하다!] 38화 - 이상한 전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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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08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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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초능력자가 수상하다!] 37화 - 저녁은 물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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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일본 여행기 - 3일차(식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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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03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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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일본 여행기 - 3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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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4-11-02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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