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보다 먼저 움직인 것은 몸이었다.
에스텔이 자신의 행동을 의식했을 때, 그녀의 마력검은 이미 허리춤을 떠나 적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발검(拔劍) 표범 사냥.
범인에게는 칼날이 한줄기 선으로 보일 정도로 고속의 참격.
사도처럼 초월적인 능력을 지니지 않았다면 피하지도, 막지도 못하는 공격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상대 역시 인간이 아니었다.
콰득-!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빛의 칼날이 허공에 고정됐다. 이윽고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기괴하게 변이된 그림자의 오른손.
?
‘설마 이 녀석도 사도인가?’
?
만에 하나 그렇다면 필패.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린 에스텔은 이를 악물고 상대의 반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반격은 돌아오지 않았다.
상대는 그저 손으로 칼날을 쥔 채 천천히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
?
‘어째서지?’
?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이에 에스텔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울컥-!
뒤틀린 녀석의 손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생긴 것만 보아서는 진흙처럼 끈적한 어둠.
?
‘피인가?’
?
물론 형태는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칼날을 잡은 상대의 손에서 무언가가 흘렀다는 사실에 그녀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상처를 입힐 수 있어!’
?
입가가 올라가며,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깃든다.
피를 흘린다는 건 죽일 수 있다는 의미. 그리고 죽일 수 있는 적을 상대로 그녀는 두려움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
“하압!”
?
기합을 내뱉으며 마력검에 더 많은 힘을 흘려보낸다. 그와 함께 뒤틀리며 어둠을 흘리는 상대방의 손. 이대로라면 상대의 손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으리라.
그래, 그대로라면.
?
[‘속임수’를 허하지 않는다.]
?
차분한, 그저 읊조리는 것 같은 놈의 선언. 그 목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순간, ‘무언가’가 그녀에게서 사라졌다.
시작은 마력검이었다.
푸르게 빛나던 마력의 칼날은,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흩어져 소멸했다.
?
‘설마 망가졌나?’
?
한순간 떠올린 가능성은 마력검의 고장. 하지만 이어지는 변화에 에스텔은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마력이 느껴지질 않아!’
?
단순히 마력을 쓸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체내에도 체외에도 마력이 느껴지질 않았다.
?
“거짓말.”
?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와 함께 떨리기 시작하는 몸. 그와 함께 그녀의 신체를 지배하는 건 하나의 감각.
공포.
?
[재미있지 않나?]
?
그런 에스텔의 반응이 재미있기라도 한지, 마치 웃는 사람의 그림자처럼, 그림자의 입가는 뒤틀려 있었다.
?
“……무슨 짓을 한 거냐?”
[하하하하.]
?
숨길 생각조차 없는지 박장대소를 터뜨리는 상대. 그런 상대에게 분노를 느낄 법도 하건만, 에스텔은 그런 여유조차 가지지 못했다.
?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마력이 소멸한 거지?!”
?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목소리가 떨려왔다. 평소의 자신이 본다면 마도기사 실격이라고 외칠 모습. 하지만 그런 것을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현재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마력 소멸.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봉인이나 흡수, 고갈 따위와는 다르다. 그런 건 그저 당장 마력을 쓸 수 없게 될 뿐. 시간만 지나면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
‘큭!’
?
마력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력과 관련된 모든 기능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체내에 어떤 힘도 흐르지 않는다. 기감은 마력은 물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마치 마법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
“이런 건……,”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
?
조롱이라도 하고 싶은 것일까? 밉살스러운 상대의 목소리. 이에 에스텔은 상대의 발언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
[나야말로 묻고 싶군. 왜 마법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뭐?”
[마력이든 신력이든 왜 그런 괴력난신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거냐? 본래는 그런 것이 없는 게 정상이라고 여기진 않는가?]
“무슨 소리야?”
[신도 마법도 초인도 없는 세계. 주문이 아닌 화약이 전장을 지배하는 세계. 마법사의 성 대신 기업가들의 마천루가 세워진 세계. 모든 인간이 적어도 생물학적으로는 평등한 세계.]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상대의 목소리. 하지만 에스텔은 거기서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떠한 광기를 보았다.
?
[그것이야말로 정상적인 세계라고 생각하진 않는가?]
?
한참 동안 자신이 원하는 세상의 모습을 말하던 그는 그녀에게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혼란에 빠진 얼굴뿐.
?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가?]
?
조금 실망스러웠던 것일까? 왠지 상대는 힘이 빠진 것처럼 보였지만, 이 또한 잠시에 불과했다.
?
[어쩔 수 없지. 다시 제안으로 돌아가도록 할까?]
?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돌아와 입을 여는 그림자. 그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그레고르의 육체가 둥실 떠올랐다.
그에 따라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에스텔의 손. 하지만 마력을 잃은 지금의 그녀는 이 어둠 속에서 손을 드는 것조차 버거웠다.
?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
온화하고 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협박이나 다름없는 이 상황은 그 온화함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
‘제기랄.’
?
마음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다. 너의 망상에는 관심 없다며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상대를 베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자살 역시도…….
?
“그레고르…….”
?
질끈 다문 입술이 뜨거워지며 녹슨 쇳내가 났다.
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
?
“제안을 받아들이겠…,”
?
그렇게 그녀가 굴복을 선언하려던 순간.
?
“거부하라고 했을 텐데요?”
?
빛의 실이 허공을 가르며, 공간이 통째로 잘려 나갔다.
이윽고 에스텔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공간의 절단면과 백은의 갑주를 입은 기사.
스테파니, 거미여제의 사도.
그녀가 이곳에 강림했다.
?
?
*** ***
?
?
‘귀찮아졌군.’
?
예기치 못한 불청객을 바라보며 그림자는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혀를 찼다.
스테파니. 아틀락나차의 수호자이자 자신의 옛 벗 쿠엔틴의 사냥개.
?
‘날 추격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
설마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을 줄이야.
공간을 초월한 거미여제의 권능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흠.]
‘무엇이 좋을까?’
?
평소라면 도주를 택할 것이다.
이 ‘가면’이 부서진다고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사도를 상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할 필요 역시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라면?
?
[후훗.]
?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가면’은 약하다.
사도는 물론, 제법 괜찮은 수준의 마법사를 상대로 승산을 점치기 힘들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임수’가 통용되는 세계의 이야기.
?
‘평범한 인간 정도야 쉽게 찢어 죽일 수 있지.’
?
그렇기에 그는 기다렸고,
?
“들어와선 안 됩니다!”
?
에스텔은 막아서려고 했지만,
저벅-.
스테파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
“이건?”
?
사도의 갑주가 해체된다. 백은의 갑주가 소멸하고, 신력이 자취를 감춘다.
?
“아아!”
?
절규하는 에스텔.
더는 승산이 없다. 이제 저 자리에 서 있는 건 평범한 인간. 마력도 신력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
?
[이제 이 놀이도 끝이로군.]
?
어둠이 해일처럼 몰아쳤다. 직후 여인의 모습이 사라지며 다시 혼돈만이 남았다.
?
[오늘은 실보다 득이 많은 날이로군.]
?
잠깐 귀찮은 일을 겪었지만, 얻은 것은 훨씬 많았다.
?
[자, 그러면 이제 이야기를 계속…,]
?
그렇게 그가 환희하며 입을 여는 순간.
퍽-!
그의 팔이 터져갔다.
?
‘뭐지?’
?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는 그레고르를 잡고 있던 팔이 사라졌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
‘어떻게 된 거냐?’
?
속임수 따위는 없는 이 세계에서 대체 누가 그의 팔을 잘라냈단 말인가?
그가 추리를 시작하기도 전에 범인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
“오랜만이군요.”
?
사라졌어야 할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스테파니.
옷이 살짝 망가졌을 뿐, 그녀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존재했다.
?
“맨주먹으로 적을 쳐 죽이는 건.”
?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그림자는 자신의 머리가 터져 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
*** ***
?
“하하하하하!”
?
맑은 밤하늘 아래 웃음이란 이름의 천둥이 울렸다. 그 거대한 뇌성을 따르는 것은 비. 하지만 물이 내리는 평범한 비와는 달리, 지금은 불길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멸망을 그린 듯한 풍경.
그 풍경 아래에는 붉은 갑주와 검은 투구를 쓴 사내가 있었다.
?
“이것도 받아봐라!”
?
붉은 사도, 제스가 손짓하자 불꽃의 창이 허공에 떠올라 쏘아진다.
목표는 저 허름한 보육원.
?
“젠장!”
?
그 붉은 자연재해에 욕설을 내뱉으면서 빅토리아는 다시 한번 가속했다.
?
‘빌어먹을.’
?
상황이 지나치게 좋지 않았다. 이 상황은 그녀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장점은 모두 봉쇄.
냉기를 이용한 감속 능력은 저 불길 때문에 힘을 잃었다.
속도를 이용한 기동전은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한 번에 쏟아지는 공격이 하나뿐이라면 이렇게 가속까지는 할 필요가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저 불꽃의 창은 최소 수십 개 이상이었다.
울컥-!
입에서 피와 내장이 흘러나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저 화염의 창 중 하나라도 적중했다간 보육원은 화마에 휩싸일 터. 그렇게 되면 그녀의 집은 물론 가족까지 숯이 되어버린다.
다행히 이번에도 방어는 성공.
빅토리아는 서둘러 가속을 해제했지만, 부작용은 그녀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안구의 핏줄이 터졌는지 시야가 점점 붉어진다. 툭하면 피가 입으로 역류하고, 고막에 문제가 생겼는지 귀에서는 이명이 들린다.
?
‘길어야 5분인가?’
?
그 이상 시간이 흐른다면 강제로 변신이 해제되고 말 터.
?
‘상대는 어떻지?’
?
혹시나 상대방도 능력에 부작용 때문에 고심하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그래 보이진 않았다.
?
‘머리는 맛이 간 것 같지만 말이야.’
“하하하하하!”
?
미쳐버리기라도 한 걸까? 강철조차 녹아내리는 열기에서 녀석은 그저 그저 웃고만 있었다.
?
‘기분 나쁜 새끼.’
?
마음 같아서는 당장 두들겨 패고 싶지만, 정상적인 공격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 정상적이고 평범한 공격으로는.
?
‘그럴 써볼까?’
?
빅토리아는 숨을 고르고 자세를 잡았다.
지금 하는 것은 도박. 성공하면 이길 테지만, 실패하면 무조건 패배하는 수밖에 없다.
?
[할 거냐, 파트너?]
“그래, 답이 없으니까.”
[……가능한 한 내가 보조해주마.]
?
대답은 하지 못했다.
미쳐 날뛰는 신력을 제어하면서 빅토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
‘기회는 한 번뿐.’
?
실패해선 안 된다.
그렇게 마음을 되새긴 입을 열었고.
?
“권능 발동. 백색의 침묵.”
?
세계가 정지했다.
?
‘무거워!’
?
터무니없는 냉기와 압력에 빅토리아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지금 그녀가 한 것은 가속을 넘어선 가속. 그 속도는 시간을 정지한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
‘간다!’
?
우득-!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거센 저항력에 뼈가 부러졌다. 피부는 터져나가고, 근육은 찢어졌다.
?
‘다행히 아프진 않아….’
?
물론 실제로는 통증을 일으키는 신경이 모조리 망가져서 그런 거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
‘괜찮아.’
?
어차피 사도인 이상 이런 상처쯤은 재생할 수 있다. 온종일 아무것도 못 할 상황이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가족이 죽는 것보다야 낫다.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가며 빅토리아는 녀석의 앞에 도달했고,
꽉-!
자신을 붙잡는 무언가의 손에 경악했다.
?
‘뭐야?!’
?
뜨거운 무언가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
‘대체 어떤 자식이?’
?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상대는 붉은 사도, 제스의 뱃가죽에 새겨져 있던 불량배의 얼굴.
?
‘뭐야 저건?’
?
익숙한 얼굴을 한 그것들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결코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에 불로 만들어진 사람 따위는 없을 테니까.
?
‘이게 어떻게 된 거지?!’
?
갑작스러운 상황.
이 상황에 당황한 빅토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권능을 해제했고.
?
“권능 발동. 흡혈귀의 희생제.”
?
그 직후 폭음이 울려 퍼졌다.
?
?
*** ***
?
?
‘여긴 어디지?’
?
잠이 덜 깨서일까?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뜬 나는 가만히 누워서 기억을 더듬었다.
?
‘어디 보자, 빅토리아랑 헤어진 이후, 돌아가다가…….’
?
다행히 머리에 이상은 없는지 서서히 돌아오는 기억. 이윽고 나는 마지막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고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젠장!”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
몸 상태로 보아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진 않았다.
우선 시야에 들어오는 건 기절하기 전 본 기묘한 공간. 혹시나 해서 에스텔이 사라졌나 했지만, 그녀는 내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
“다행이다.”
?
에스텔은 아직 무사하다.
그 사실을 확신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흘리곤, 그림자의 위치를 찾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눈에 들어온 것은…….
?
“뭐야 저거?”
?
퍽-! 퍽-!
철저하게 터져나가고 있는 그림자의 몸체였다.
?
‘진짜 뭔데 저거?’
?
그림자는 이미 머리가 날아간 지 오래지만, 계속해서 팔을 휘둘렀다.
그에 맞서서 움직이는 것은 평범한 주먹.
스테파니 씨의 손과 발은 오래지 않아 괴물의 거대한 팔을 누더기로 만들었다.
?
‘저게 말이 되나?’
?
차라리 스테파니 씨의 주먹이 겉으로 보기에 화려했다면 어떻게든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그레고르는 자신의 상식이 부정되는 걸 느꼈다.
빠르긴 하지만 에스텔의 검처럼 눈으로 보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강하지만 보어헤스 백작의 주먹처럼 바위를 부술 정도도 아니다.
정교하긴 하지만 로즈마리의 단도처럼 은밀하지도 않다.
그런데 어째서 저 그림자는 피하질 못하는 거냐?
그 기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뜬 나는 오래지 않아 스테파니 씨의 비밀을 파악할 수 있었다.
?
‘상대방이 움직이기 전에, 그 위치에 주먹을 가져다 놓고 있어.’
?
스테파니 씨의 주먹은 상대방보다 항상 먼저 움직였다.
예지. 아니 인간을 초월한 통찰력인가?
?
‘저런 마투술도 있나?’
?
혹시나 에스텔은 아는가 싶어서 그녀에게 물어볼까 했지만 아무래도 대답을 듣진 못할 것 같았다.
?
“말도 안 돼. 저런 게 가능할 리가….”
?
단순히 겉핥기로 무술을 배운 나와는 다른 것일까?
에스텔의 눈동자는 내 예상보다 떨리고 있었다.
?
[쿠엔틴, 그 자식이 터무니없는 사냥개를 키웠군.]
?
그림자 본인 역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일까? 입이 사라진 녀석의 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회장님을 마음대로 부르지 마라.”
?
퍽-!
하지만 이어지는 건 그저 응징뿐.
이윽고 그림자는 소멸했고, 그 자리에 남아있는 건 스테파니 씨뿐이었다.
?
‘혼돈이 사라지고 있어.’
?
술자가 소멸하면 자동으로 해제되는 능력이었던 것일까? 눈에 띌 정도로 빠른 속도로 시야가 돌아왔다.
?
[어떻게 되었던 게냐?]
?
걱정하셨던 걸까?
평소보다 격양된 이드라 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 반가운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 같아서는 즐겁게 이야기라도 하고 싶지만,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
‘일단은 감사 인사부터.’
?
태도를 보아 딱히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내가 감사의 인사를 건네기 위해 움직이려던 순간.
콰앙-!
하늘에 붉게 타올랐다.
그와 함께 주변을 잠식하는 녹아내릴 것 같은 열기. 그것이 느껴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는 거대한 불기둥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지상과 하늘을 꿰뚫는 태양신의 창처럼, 천공을 꿰뚫는 화염의 기둥.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장소로 이어져 있었다.
?
“아이린 보육원.”
?
사색이 된 우리는 서둘러 창이 떨어진 장소로 서둘러 달려갔다.
?
?
*** ***
?
?
“커억!”
‘아…파…!’
?
타버린 호흡기로 겨우 숨을 뱉어내며, 빅토리아는 자신이 겨우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어떻게 된 거지?’
?
시야가 보이질 않는다.
촉각도 차단되었다.
청각은 겨우 들리지만, 커다란 소리도 속삭이는 것처럼 작게 들렸다.
현재 그녀의 상태는 최악.
비록 서 있긴 했지만, 아무도 그녀가 사람이라고는 여기진 못할 것이다.
그저 똑바로 직립한 숯덩이.
그것이 제삼자가 본 그녀의 모습이었다.
촤르르륵-!
갑주가 해체되며 화상으로 흉측해진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전신 4도 화상.
인간이라면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사도인 그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특별한 일이 없다면…….
?
“역시 살아있었군.”
?
콰직-!
몸이 붕 뜨는 감각과 함께 탄화된 그녀의 피부가 부서져 나갔다.
제스. 그녀를 이렇게 만든 범인인 그는 갑주에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채, 그녀 앞에 서 있었다.
?
“커억!”
?
녀석이 그녀를 들고 흔들 때마다 공기에 닿은 살갗이 아프다.
?
“아프냐?”
?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질문과 함께 복부를 파고드는 손가락. 그것은 탄화된 피부를 뚫고, 반쯤 요리된 거나 다름없는 내장을 손가락이 쥐어뜯는다.
?
“끄아아아악!”
?
망가진 성대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
“그래, 아프겠지. 나도 아팠는데 네년도 아파야 하지.”
?
털썩-!
녀석이 손을 놓는 것과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진 빅토리아의 몸. 녀석은 갑주를 해제하지 않은 채, 그 육중한 몸으로 그녀를 깔고 앉았다.
?
“네년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너무나 평온한 목소리로 제스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
“내 것이 돼라. 내 사냥개가, 내 암컷이, 내 노예가 돼라. 그러면 네년을 살려주지.”
?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달콤한 목소리.
그런 제스를 향해 빅토리아는 망가진 상대로 힘겹게 대답했다.
?
“엿…먹어…등신아!”
“호오?”
?
콰득-!
다시 한번 뱃속을 파고드는 손가락과 울려 퍼지는 비명.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세상에 나온 제스의 손가락에는 늑골로 추정되는 뼈가 잡혀 있었다.
?
“다시 묻지. 아직 뼈랑 내장은 많으니까 말이야.”
?
낄낄거리는 그의 목소리. 이에 빅토리아가 다시 대답하려는 순간.
?
“빅토리아!”
?
나와서는 안 될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왔다.
아이린 수녀, 그리고 아이들.
빅토리아의 변신이 해제되며 바람의 권능이 해제되었기 때문일까? 그들은 이 지옥에 모습을 드러내 버렸다.
?
“쳇, 시끄럽긴.”
?
귀찮다는 듯이 아이린 수녀를 가리키는 제스의 손가락.
?
“펑!”
?
제스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아이린 수녀의 몸이 얼음 동상처럼 천천히 녹아내렸다.
?
“꺄악!”
?
사람이 한순간에 수프가 되어 녹아내리는 모습에 아이들은 하늘이 무너질 듯 비명을 질러댔다.
?
“아아!”
?
충격받은 것은 빅토리아 역시 마찬가지. 타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눈에서는 피와 뇌수가 섞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
“시끄럽다고 했을 텐데?”
?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일까?
제스는 짜증을 내며 다시 손가락을 들었다. 그것이 향하는 것은 아이 중 한 명.
?
‘안……돼!’
?
간절함이 기적으로 부른 것일까?
빅토리아는 억지로 숯덩이가 된 팔이 움직였고 제스의 손가락이 슬쩍 틀어지며, 아이들은 살아남았다.
누가 본다면 기적이라고 부를 법한 현상. 하지만 신의 기적과는 달리, 인간이 이룬 업적에는 대가가 존재했다.
파사삭-!
이미 형태만 간신히 이루고 있던 빅토리아의 팔이 재가 되어 그대로 흩어졌다.
아마도 사도의 힘으로 이를 재생하려면 한참의 시간이 걸리겠지.
?
“과연. 그렇단 말이지?”
?
그 모습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리던 제스는 다시 한번 자신의 권속, 불의 흡혈귀들을 불러냈다.
?
“내 제안을 잘 생각해보라고, 꼬맹이.”
?
아이들을 향해 다가서는 괴물들.
그 모습에 빅토리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제스의 주먹이 움직였고, 끝없는 절망 속에서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
?
?
?
=========================================================================================
?
1. 마력을 쓸 수 없는 에스텔이 약한 건 아닙니다. 대충 현실 프로 격투기에서 그럭저럭 무난한 선수로 활약할 수 있는 수준 정도이에요. 단지 스테파니가 너무 강한 겁니다. 대략 마력 없이도 “겐간 아슈라”의 권원 시합이나 “바키 시리즈”의 지하투기장 같은 곳에서도 상위권에서 놀 수 있는 인물이라고 여기시면 됩니다. 그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Act에서 밝혀질 예정입니다.
?
2. “사도 변신 불가/마력 있음”이라는 전제하에 등장인물의 전투력 순위를 한다면 아래와 같습니다.
?
소여 백작>보어헤스 백작>스테파니>>>에스텔>로즈마리>제니퍼(길드 마스터)>그레고르>>>>오드리>제스>블레어>빅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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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을 “사도 변신 불가/마력 없음”으로 바꾸면 다시 순위가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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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니>>>>보어헤스 백작>>소여 백작>제스>에스텔>로즈마리>그레고르>블레어>>>>빅토리아>오드리>>>>제니퍼(길드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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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전투력 순위는 스포일러라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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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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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1-04-12 19:40:16
에스텔이 꺾이기 전에 나타난 스테파니, 정말 그냥 강한 정도가 아니네요.
에스텔도 충분히 강하고 일반인은 아예 상대도 안되지만, 그 에스텔을 굴복시키려 했던 문제의 존재가 스테파니의 일격에 저렇게 박살이 나다니...정말 초월적이네요.누군가의 말인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전쟁에서 분노하는 사람과 정작 전장에서 죽는 사람은 별개라죠.
그 참상이 이렇게 끔찍한 형태로 벌어졌을 줄이야...이 경우는 빅토리아도 살아 있는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보육원을 이끌어 가는 아이린 수녀는 대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빅토리아가 저 꼴인데 보육원의 아이들의 앞날은 1초 후도 보장할 수 없어 보이네요. 이렇게 끔찍한 상황, 최악으로 흐를 것 같은 감을 전혀 떨칠 수가 없어요.
Papillon
2021-04-25 12:21:36
스테파니는 마력 없이 순수 전투기술 면에서는 최강에 속하는 캐릭터이니까요. 그녀보다 전투 기술이 뛰어난 존재는 필멸자 중에서는 없습니다.
사도야행은 사도들 입장에서는 그저 자기들끼리의 싸움이지만,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재앙이지요. 아이린 수녀와 아이들은 그 재앙에 휘말려 버린 불운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SiteOwner
2021-04-17 23:02:02
역시 저렇게 마각을 드러내는군요.
문제의 그림자, 꼭 옛 드라마인 여명의 눈동자에 나오는 공산주의자같습니다. 신사적으로 대하다가 어느새 폭력적으로 돌변하여 포섭대상자에 대한 가스라이팅을 반복하는. 그리고 에스텔이 굴복하려는 순간이 정말 마음아프게 느껴집니다. 그녀가 굴복했다 해서 어찌 나약하다고 비난하겠습니까.
다행이군요. 스테파니의 등장이...
그런데 제스는 그림자와는 달리 마각을 드러내서 정말 피해를 입혔군요.
아이린 수녀를 저렇게 만들어버리고, 이제 아이들까지...아이린 수녀를 되살릴 방법은 없는 건지...Papillon
2021-04-25 12:23:19
죽을 이를 되살릴 방법이 세계관 내에 없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살아나긴 힘듭니다. 물론 인간이 아닌 존재로 부활한다면 선택지가 더 많지만, 아이린 수녀도 그걸 원하진 않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