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관문을 지나서 눈을 뜬 곳에는 ‘칠흑’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것은 아니다.
무언가가 시야를 가리고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검정으로 칠해진 공간. 그것이 이 정체 모를 세계 그 자체였다.
그야말로 다른 색을 인정치 않는 독선의 세계. 기괴하기 그지없는 지옥과 같은 공간.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는 순간 공포에 질렸을 테고, 나 역시 아마 처음 보았다면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으리라.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이전에 비슷한 장소를 본 적이 있었다.
?
‘역시 그 녀석의 솜씨인가…….’
?
그때, 이 빌어먹을 사건이 시작됐다.
막 탈출한 제스가 빅토리아를 불태우고 있던 그 시기. 나와 에스텔은 ‘녀석’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림자.
사도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아니, 그걸 넘어 애초에 인간이긴 한 것인지 의문이 드는 존재.
그 빌어먹을 자식이 만든 세계는 이것과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
‘아니 완전히 같지는 않은가?’
?
그곳에서 나는 사도로 변신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녀석에게 기습을 허용했다.
에스텔 또한 마찬가지.
그곳에서 그녀는 마력을 사용할 수 없었고, 녀석과 싸워보지도 못한 채, 협상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자유롭게 싸울 수 있었던 건, 순수한 무술만으로 싸웠던 스테파니 씨뿐.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으드드득-!
부분 둔갑을 전개해보자,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모습이 변했다. 혹시나 외형만 변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기능을 사용해 보았지만, 이 역시 멀쩡하다.
다시 말해 마법사를 가둬두는 데 필요한 금제 같은 건 없다는 이야기인데…….
?
‘역시 빅토리아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세계인가?’
?
하지만 왜? 빅토리아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 거지?
나나 에스텔에게야 빅토리아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건 그녀가 우리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그녀는 평범한 빈민가 고아에 불과하다. 이런 세계를 만들어 그녀만을 가둬둘 가치는 없다.
?
‘그렇다고 사도로서 강하지도 않고 말이야.’
?
가속 능력 때문에 상대하기 어렵긴 하지만, 솔직히 정면 승부에서 그녀는 그리 강하지도 않다.
보어헤스 백작과 블레어. 두 사람의 완성된 사도라면 어렵지 않게 쓰러뜨릴 수 있을 테지.
?
‘아무래도 수지가 맞질 않아.’
?
이해가 가질 않는 상황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어떻게 해도 그럴싸한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이어지는 침묵.
나는 생각에 늪에 빠져서 여러 번 다른 답을 떠올려봤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가끔 특이한 감각만이 느껴질…….
?
“응?”
‘뭔가 움직였어!’
?
갑작스럽게 감지된 움직임에 나는 생각을 멈추고 감각을 집중했다.
조금 전 느낀 것은 민들레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수준으로 작은 움직임. 그것을 감지를 할 수 있었던 원인은 그저 순수한 우연이었다.
?
‘설마 그냥 확인을 위해 변신시킨 이 부분이 도움이 될 줄이야.’
?
나는 머리에서 흔들리는 기다란 더듬이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일전에 보어헤스 백작과의 전투 중 사용했던 바퀴벌레의 기류 감지 능력. 이번에도 혹시나 모를 기습에 대비해 사용했는데, 예상외의 밥벌이를 했다.
?
‘대체 뭐가 움직이고 있는 거지?’
?
크기는 작고 움직임 역시 크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녀석은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이걸 움직인다고 할 수 있을까?
?
‘장소가 계속해서 바뀌잖아?’
?
시작은 바닥.
무언가가 내 발치 주변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벽면과 천장.
?
‘저게 대체 뭐야?’
?
지금의 감각으로는 움직인다는 것 이상의 정보를 얻어낼 수 없다.
?
‘어쩔 수 없지.’
?
이럴 때는 해결책은 간단하다.
하나로 탐지할 수 없다면, 그저 탐지 방법을 늘리면 그만!
판단이 내려지기 무섭게, 몸이 빠르게 변화한다.
구현하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특수 감지 기관.
뱀의 능력을 이용해 열을 감지한다.
상어의 능력을 모방해 생체전류를 읽는다.
박쥐를 흉내 내 주변을 초음파로 읽어낸다.
감각이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조금씩 늘어나는 정보. 그 작은 파편을 모두 짜 맞췄을 때 드러난 사실은…….
?
‘이 공간이 움직이고 있어.’
?
바닥, 벽, 천장. 이 주변을 메우고 있는 ‘검정’은 그냥 단순한 벽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군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무한에 가까운 검은 촉수가 만들어낸 ‘살아있는 감옥’.
?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
이 장소는 대체 뭐지? 아니, 그 이전에 대체 어떻게 빅토리아의 의식 안에 이런 존재를 만들어낸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답은 나오질 않았다.
?
‘좀 더 정보를 알아내야 해!’
?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 터.
판단을 끝낸 나는 마치 유혹하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벽에 손을 뻗었고,
?
[만지지 마라!]
?
귓가를 울리는 음성에 그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이건?’
?
익숙한 목소리였다.
비열함과 위엄, 왈패와 제왕이 뒤섞인 모순 그 자체의 존재. 그리고 빅토리아 외에 내가 찾아 헤매던 또 다른 한 사람, 아니 한 신의 목소리.
?
[여기 멀쩡한 건 거기 형씨밖에 없으니 말이지. 괜히 형씨까지 잡혔다간 진짜로 답이 없단 말이다.]
?
이타콰. 침묵과 북풍의 신이자, 빅토리아와 계약한 옛 군주.
평소와는 달리 웃음기가 전혀 섞이진 않았지만, 그의 음성은 여전히 그가 건재함을 알려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
“이타콰 님!”
?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무리 정상적인 상태가 아닐지라도 이타콰는 신. 썩어도 준치인 만큼 내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서둘러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서 이타콰 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거기에 있는 것은 거인이었다.
머리에 뿔이 달린 인골의 모습을 한, 거대한 활시인(活屍人, Undead) 형태의 거인.
하지만 자세히 본 그 순간, 저것이 단순한 ‘뼈다귀’ 따위가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사아아아-!
거인 근처에 차가운 서리가 낀다.
원인은 다른 특수한 능력이 아닌, 거인을 구성하는 뼈 그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 그 자체.
만년빙정.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이, 그 골격을 구성하고 있는 재질의 정체였다.
이드라 님의 본체에 비하면 단순하기 그지없는 모습.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해서 이타콰 님의 급이 낮다고 오판하지는 않았다.
?
‘저 모습은 가짜다.’
?
왠지 그렇게 느껴졌다.
저기에 있는 것은 그저 그렇게 보이는 형상일 뿐. 얼어붙은 호수 밖에서 본 그림자 정도에 불과하리라.
?
‘이건 어쩌면 다행인가?’
?
일전에 이드라 님의 경우를 생각하면, 본체를 함부로 봤다가는 역으로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신의 본체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거대한 정보의 덩어리. 그것을 그저 보는 것만으로 뇌에 어마어마한 부담을 지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부하는 없다.
?
‘단순히 저게 본체가 아니라서는 아닌 것 같은데.’
?
나는 천천히 그 자리에 있는 이타콰 님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지금 그분의 상태는 빈말로라도 도저히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
“……어떻게 된 겁니까?”
?
두개골은 꼭 도끼에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움푹 파여있었다.
원래 창백한 청염으로 빛났으리라 생각하는 눈은, 마치 꺼져가는 촛불처럼 뒤틀려 있었다.
전신의 골격은 부서지기 직전의 도자기와 같이 금이 가 있었다. 누군가가 억지로 붙들어 놓은 것처럼 형태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머지않아 박살이 나도 이상하진 않을 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그를 붙잡고 있는 무수히 많은 ‘검정’.
이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그 정체불명의 존재가 혓바닥처럼 보이는 촉수를 무수히 뿜어내 이타콰 님의 신체를 옭아매고 있었다.
?
[앙? 보면 모르겠냐? 그 빌어먹을 자식한테 붙잡혀서 떨어질 때로 떨어진 머저리 신의 모습이지.]
“빌어먹을 자식이라면……?”
?
설마 그 그림자 녀석이 이타콰 님을 이 꼴로 만들었다는 건가?
?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을 이 정도까지 몰아붙일 수는…….’
[누구긴 누구겠냐. ■■■■■, 그 빌어먹을 자식 때문이지! 그 버러지 자식이 하필 그 상황에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누구……라고요?”
?
분명 엄청나게 커다란 목소리로 외친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그 내용물은 단 하나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검열을 해놓은 것처럼.
?
[빌어먹을. 이제는 그 개자식의 이름도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격이 떨어져 버린 건가?]
“네?”
[일단 넘겨 버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진짜 중요한 건 내 파트너를 구하는 일이지.]
?
두서없는 이타콰 님의 말에 살짝 당황하던 나는 그가 부르는 익숙한 호칭을 듣자 빠르게 냉정해져 갔다.
?
“설마 빅토리아가 있는 장소를 알고 계십니까?”
[그래, 알고 있지. 알고 있고말고.]
?
마치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것처럼 말하는 태연하게 이타콰 님의 상태.
그 모습에 나는 쾌재를 부르며 구체적인 사항을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
?
‘무슨 일이지?’
?
갑자기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이어지는 장시간의 기다림.
대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어색한 시간에 내가 슬슬 지루함을 느낄 무렵, 드디어 이타콰 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다.]
?
어째서인지 평소와는 달리 착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내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어떤 질문인가요……?”
[너는 사람이 아닌 채 태어난 아이를 사람으로 인정해 줄 수 있나?]
‘뭔 소리야?’
?
갑자기 철학 토론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
“네? 그게 무슨,”
[닥치고 대답이나 해라. 질문은 내가 한다.]
?
당황한 나는 무심코 다시 질문을 던져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짜증뿐이었다.
?
‘뭐지 이건?’
?
뭔가 태도가 이상한데.
분명 위협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와는 달리 오히려 간절하게 매달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
‘대체 무슨 의도지?’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상대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지금 제가 보는 사람이 어떤지 보고 판단할 뿐이죠.”
?
그 의도에 살짝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가능한 한 진솔하게 내 의견을 전달했다.
솔직히 어디서 태어났냐 같은 건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태어났을 때 무엇이었냐가 아닌, 나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뿐.
?
‘애초에 에스텔과 나도 본래라면 만날 리가 없던 사이였지만 말이지.’
[흐음, 그렇군.]
?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타콰 님은 잠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
[저쪽으로 쉬지 않고 가라. 그러면 파트너를 만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언가 하실 말씀이라도?”
[녀석을 부탁한다. 지금 그 녀석을 구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으니까.]
?
그렇게 말하는 이타콰 님의 목소리는 살짝 쓸쓸하면서도,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네, 반드시 구출하겠습니다.”
?
그렇게 나는 대답만을 남긴 채, 서둘러 빅토리아가 있을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거기에 무엇이 있을지조차 모른 채.
?
?
*** ***
?
?
‘어떻게 된 거지?’
?
눈 앞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에 에스텔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 놓인 것은 마치 동상처럼 굳어버린 두 사람의 사도.
그레고르와 빅토리아.
두 사람은 융합 변이가 일어나던 상태 그대로 약 30분 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고 서 있는 상태였다.
모르는 이가 보면 꼭 누군가 정체 모를 예술가가 조각상이라도 세워 둔 것처럼 보이는 상황.
?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
그레고르가 이 계획을 제안했을 때, 솔직히 에스텔은 그리 성공 확률이 높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이를 받아들였을 뿐.
그렇기에 그녀는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전혀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상태.
그녀가 예상한 실패는 그저 빅토리아가 풀려나 다시 날뛰는 것이었지, 이런 식은 아니었다
?
‘완전히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닌가?’
?
슬쩍 그녀의 시선이 돌아가자, 그레고르의 손에서 뻗어 나온 촉수가 빅토리아의 가슴을 꿰뚫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본래라면 이 이후, 이드라의 환염이 빅토리아를 덮쳤을 터……. 직접 겪어본 당사자인 만큼, 에스텔은 융합 변이 당시의 기억을 더듬으며 상황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저 그림자가 그걸 막고 있군.’
?
본래 빅토리아의 갑옷을 덮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지금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환염의 침입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자신의 것을 빼앗기기 싫어서 날뛰는 짐승의 몸부림.
?
‘음.’
?
에스텔은 살짝 못마땅한 표정으로 불꽃과 그림자의 대립을 바라보았다.
환염과 그림자의 대립은 두 사람이 이 상태가 된 이후로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어떨 때는 그림자가 승기를 보였고, 어떨 때는 환염이 기세를 탔다.
하지만 그것은 고작해야 일진일퇴.
결국, 두 힘은 촉수에서 영원히 대립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래도 환염이 이겨야만 완전히 그레고르의 계획으로 되는 것일 터인데.
?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나…….’
?
한 번 그림자가 승기를 잡았을 때, 환염을 도와보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줄 수는 없었다.
그림자도 환염도 그저 자기 할 일을 할 뿐.
하다못해 완전 마력검까지 사용해 봤지만, 두 힘은 에스텔의 힘이 허깨비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강역 다툼을 벌였다.
이는 결국, 그녀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
과거, 아니 고작 며칠 전까지의 그녀였다는 이 사실에 슬퍼하다 못해 자괴감을 느꼈으리라.
왜 자신은 사도와 같은 힘이 없느냐고.
어째서 자신은 사랑하는 이를 도울 기회조차 얻지 못하냐고.
그렇게 누군지도 모를 신을 향해 원망을 토해냈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
‘힘내라, 그레고르.’
?
완전 마력검을 얻으며,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얽매여있던, 타인을 ‘구하기만 하는’ 기사는 그저 망집일 뿐이었다고.
함께 한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상대를 지키는 것이 아닌, 서로 돕고 지탱해주는 것.
?
‘그러니 나는 지킬 것이다.’
?
그레고르가 빅토리아를 구하기 위해 싸우는 동안, 그녀는 그레고르를 지킬 것이다.
바로 ‘저 녀석’ 같은 놈으로부터.
?
“나와라.”
?
최대한 무덤덤하게 대응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적의가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로부터 흘러나왔다.
지금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텅 빈 허공. 하지만 여태까지의 경험과 완전 마력검을 얻으며 날카로워진 감각이 그녀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저기에 ‘녀석’이 있다고.
?
[과연 강해지긴 한 모양이로군.]
?
허공에 검은 물이 들었다.
도화지에 먹을 칠하듯, 녀석이 갑작스럽게 세상에 그려졌다.
?
“그러는 너는 모습이 바뀌었군.”
?
에스텔이 지적했든 모습을 드러낸 녀석의 모습은 더는 그림자가 아니었다.
칠흑 일색으로 통일하긴 했지만, 명백히 옷을 입고 있는 인간 형태의 모습.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
‘정체를 인식할 수 없어.’
?
인간형이란 걸 제외하고는 남녀노소 그 어떤 존재로도 인식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눈앞의 녀석이었다.
?
[일전의 가면은 부서져서 말이지. 그래서 다른 일을 하는 가면이 이 자리에 오게 되었지.]
?
그림자는 히죽 웃더니 빅토리아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겨왔다.
?
[‘저건’ 제법 완성품에 가까운 물건이라서 말이야. 아직 너희들이 망가뜨리는 걸 보고 싶지는 않거든.]
?
서서히 빅토리아를,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의 가슴에 꽂힌 그레고르의 촉수로 다가서는 녀석의 손. 그 손이 닿으려는 순간.
?
“그런가? 우연이군.”
?
수천 개의 푸른 빛이 허공을 수놓으며, 녀석의 팔을 물리적으로 갈아버렸다.
?
[흐음.]
?
잘려 나갔지만,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팔목. 그 팔목을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
[이해가 가질 않는군. 어째서 나한테 공감한다고 해놓고 공격을 가한 거지?]
?
본래 평범한 인간이라면 극한의 고통에 몸부림쳐야 정상일 터인데. 녀석은 마치 ‘오늘 저녁은 왜 고기가 아닌 생선을 먹느냐?’ 수준의 질문을 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
‘통각이 없나?’
?
녀석의 반응을 보고 다시 자세를 잡는 에스텔.
?
“나도 네 놈 같은 사마외도에게 빅토리아가 망가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
그녀의 양손에는 각각 레이피어와 패링 대거의 형태를 한 완전 마력검이 두 자루 떠올라 있었다.
?
[그렇군. ‘이해’했다.]
“이전처럼 마력을 봉인하진 않는 건가?”
[유감스럽게도 이 ‘가면’에 그런 기능을 넣어두질 않아서 말이야. 그리고 넣을 필요도 없고 말이지.]
?
그렇게 태연하게 말하는 그림자의 손에는 어느새 칠흑 일색의 지팡이가 하나 들려 있었다.
?
[조금 놀아주도록 하지.]
?
마치 그 지팡이를 검처럼 든 녀석은 오연히 에스텔을 바라보았고, 곧이어 검은 어둠과 푸른 빛이 대기를 찢어버리며 충돌했다.
?
?
?
?
=========================================================================================
?
잠깐 설정 이야기
?
이번에 이미지를 설명한 캐릭터는 이 작품의 메인 히로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에스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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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의 외모는 사실 구체적으로 ‘어느 캐릭터가 어느 부위’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게, 그냥 동시에 두 캐릭터를 떠올리며 제가 생각한 이미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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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 캐릭터 중 첫째는 “THE iDOLM@STER SHINY COLORS(통칭 샤니마스)”의 캐릭터 중 하나인 시라세 사쿠야(이미지 링크 #). 전체적으로 가장 에스텔의 이미지에 가까운 캐릭터입니다.
?
그리고 둘째는 “누이 되는 자”의 히로인인 치요(이미지 링크 #). 대략 에스텔은 시라세 사쿠야를 베이스로 치요를 대략 8:2 정도로 섞은 느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기사라는 명칭을 하고는 있지만, 에스텔은 흔히 생각하는 갑옷을 입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의 전반적인 설정상, 갑주를 입는 건 보어헤스 백작 같은 전투마법사이지 마도기사가 아니거든요. 에스텔이 초기에 나왔을 때 입고 있던 옷은 “디스아너드 2”의 에밀리 콜드윈(이미지 링크#)이 입고 있는 옷 같은 식이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만, 이는 공식적으로는 소여 백작가 기사들의 제복 같은 것인지라, 이후 가문을 떠난 이후는 “오버로드”의 나베랄 감마(이미지 링크#)가 입고 있는 것 같은 평범한 옷으로 바뀌었습니다.
?
작중 설정에서 마력검은 마도기사의 상징이지만, 모든 마도기사가 마력검을 쓰진 않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돈이고, 둘째는 은밀성입니다.
마력검 자체가 은근히 유지비가 많이 나오는 물건이라, 용병처럼 일하는 마도기사는 그냥 검을 마력으로 강화해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로즈마리처럼 은밀한 임무를 주로 수행하는 이들 역시 마력검을 사용하진 않는데, 마력검 자체가 칼날이 없는 칼 손잡이 형태인 만큼 어느 정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데다가, 칼날이 빛나거든요. 그래서 은밀한 임무에는 조금 맞질 않습니다.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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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30 20:43:53
아트홀의 1900번째 게시물은 Papillon님께서 작성해 주신 시프터즈의 제60화가 되었군요.
드디어 이렇게까지 아트홀이 활성화된 것에 놀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렇게 코멘트를 남깁니다.
역시 아무리 하찮고 작게 보이는 것이라도 전연 무가치한 것은 아니지요. 게다가, 중후장대하다고 해서 그것이 최적의 솔루션인 것만도 아니고. 그게 그레고르의 부분둔갑과 에스텔의 마력검에서 잘 보이는군요.
그런데 이타콰 님의 상태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군요.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대체 어떻게 되어버린 건지 알 수 없는 처참한 이타콰 님이 그에 더해서 선문답같은 질문을 던지고...
게다가 에스텔의 시점에서 봤을 때 그레고르와 빅토리아의 융합변이는 상황이 이상하군요. 분명 크게 동요될 것 같은데, 그레고르가 빅토리아를 위해 싸우는 동안 에스텔은 그레고르를 지키기로...정말 위대합니다.
문제의 그림자와 운명의 대결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군요. 에스텔, 반드시 이기기를.
설정에서 묘사된 에스텔의 모습에 친근감이 느껴집니다.
아이돌마스터 샤이니 컬러즈의 시라세 사쿠야는 동생이 매우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질감을 많이 느끼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단 모발색은 시라세 사쿠야보다는 더욱 갈색에 가깝고 피부톤도 더욱 밝습니다만. 게다가 치요같은 체형이기도 하면 그레고르가 야시장에서 에스텔을 만났을 때 당황했던 게 이해되기도 합니다.
Papillon
2021-06-02 03:10:42
딱히 노린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제가 1900번째 게시물을 올리게 되었네요.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상황이 상당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지요. 하지만 그 역시 해결을 위해 필요한 과정입니다.
에스텔 자체가 대단한 미인, 그것도 섹시한 타입이다 보니 그레고르 입장에서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물론, 그런 여성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니 복 받은 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요.
마드리갈
2021-06-01 13:35:45
점입가경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네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고, 뭐가 옳은 선택인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결단까지 허여된 시간은 사실상 거의 없는, 정말 누구라도 될대로 되겠지 하고 포기해도 안 이상할 상황이예요. 그 중에서도 그레고르의 부분둔갑이 하찮아 보여도 쓸모가 있다는 게 보여서 다행이예요. 맹상군의 계명구도 이야기가 먼 옛날의 고사만이 아니라는 게 이렇게 드러나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의 그림자의 정체는 대체 뭘까요.
생각한 이상으로 위험하네요. 이타콰를 저 꼴로 만들어 놓은데에서 무서운 능력과 잔인한 심성이 같이 드러나는 듯...
에스텔이 확실히 달라졌어요. 이제 정말 다른 누구와의 관계로 정의되는 게 아닌, 에스텔 그녀 자신으로서.
다음편이 기대되어요!!
설정 또한 재미있어요.
저는 에스텔을 Fate 시리즈의 스카사하같다고 생각했어요.
빠삐용님께서 상정한 캐릭터는 아이돌마스터 샤이니 컬러즈의 시라세 사쿠야와 누이 되는 자의 치요를 8:2 비율로 합친 듯한...두 작품 모두 알다 보니 바로 이미지가 떠오르고 있어요. 게다가 시라세 사쿠야는 저와 비슷한 신체조건인데다 2차창작에서는 대형견에 잘 비유되다 보니 시라세 사쿠야를 저는 "사쿠야쥐" 로 잘 지칭하고 있어요. 왜 개 관련을 쥐라고 부르는지는 작년에 쓴 글인 쥐 관련으로 이것저것을 참조해 보시면 될 거예요.
마력검, 역시 장점만이 있는 건 아니네요. 에스텔이 마력검을 쓰겠다는 것은 그만큼 중대한 의미가...
Papillon
2021-06-02 03:17:59
일단 작품 전체의 흑막인 캐릭터이다 보니 그림자의 정체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중간중간 힌트를 넣어놓았으니 크툴루 신화 쪽을 아시는 분이라면 누구와 관련 있는 인물인지 짐작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스카사하도 생각은 했습니다만, 성격이나 분위기를 생각하면 사쿠야 쪽에 더 가깝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여기에 치요가 살짝 섞인 느낌이지만요.
음,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나 보군요. 설정에 나온 마력검에 대한 설명은 기존의 에스텔이 쓰던 마력검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에스텔이 쓰는 완전 마력검은 저 중에서 은밀성 면은 해결이 된 물건이지요. 마력 소모는 더 크지만요.
에스텔이 사용하던 기존 마력검은 “둠 이터널”의 마검 크루시블과 비슷한 형태입니다만, 검신의 형상이 레이피어에 가깝고 푸른 빛입니다. 마력검의 칼날 생김새랑 색상은 전부 사용자에게 달렸지만, 손잡이의 형태는 제작자에 따라 달라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