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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월요일 오전 8시 40분, 테르미니 시내. 검은 도장을 한 버스가 도로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오늘은 또 어디로 가는 거지?”
세훈이 궁금증 가득한 얼굴을 하고 말한다.
“어딘지는 몰라도 어제보다는 일찍 출발하네. 어디로 가든, 꽤 기대되는데...”
“야, 너는 팸플릿이나 가이드북 같은 것도 안 봤냐.”
옆에 앉은 현애가 핀잔하듯 말하며 지도를 꺼내 보여준다.
“자, 여기! 오늘 어디 가는지 다 나오잖아.”
“아... 그래! 맞다. 여기 ‘극장 지구’가 있네. 극장 주위로 이레시아인들의 건축물이 모여 있는 데라고 했지?”
“그래. 아까 파울리 씨 설명 안 듣고 뭐 했어?”
세훈은 머리를 긁으며 창가만 본다. 얼핏 창밖을 보니 바깥 풍경은 여느 도시와 다를 바가 없다. 출근길에 차가 밀리는 반대편 도로, 그리고 여기저기 다니는 정장 차림의 사람들. 단지, 그 도시 곳곳에 유적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만 뺀다면.
“아, 맞아, 맞다. 도심을 가로질러 가느라 시간이 좀 걸릴 수 있다고 했지.”
세훈은 잠시 말이 없다가 무릎을 탁 친다.
“그래! 공원이고 또 평일이니까 사람은 많이 없을 거 아니야. 맞지?”
“내 생각은 아마 아닐 것 같은데.”
“좋아! 나하고 내기 할까?”
한편, 그 시간, 옆에서는 미켈이 누군가와 통화중이다.
“어? 바리오? 웬일이야?”
전화를 얼마 정도 들고 있던 미켈의 표정이 약간 풀어진다.
“아... 그래, 너도 거기에 있단 말이지. 좋아. 그러면 이따가 볼 수 있으면 한번 보자고.”
한편 그 시간.
갈색의 소형 승합차 한 대가 버스를 뒤따르고 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거리를 바짝 붙여서 쫓아가는 것은 아니고, 마침 러시아워 시간대라서 다른 차들에 가려서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확인했다... 저 차로군.”
험상궂은 인상의 이레시아인 남자가 나지막이 말한다.
“미켈 파울리라고 했나... 저 녀석한테 추궁하면 태양석에 대한 실마리를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는 건가? 꼭 그랬으면 좋겠는데.”
남자는 차창을 닫고 운전대 옆의 전화 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왜 전화했어?”
전화 너머로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 지금 손님들 받고 있다고. 전화는 나중에 해!”
이레시아인 남자가 막 뭐라고 해 보려고 입을 열지만, 전화는 금방 끊겨 버린다.
“에이, 성미도 급하지. 내 말이나 좀 들어 보고 끊지 그랬어...”
이레시아인 남자는 다시 운전대를 두 손에 잡는다.
“그럼 좋아. 시간이 없어도 한번 물어보고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다면... 내가 알아서 하는 수밖에.”
어느덧 버스가 도착한 곳은 테르미니 시내에서 조금 외곽에 있는 어느 공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대도시마다 있는 ‘대공원’과 다르지 않다. 시내에 비해서 조금 높은 지대에 있고,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조각공원이 여행객들을 반겨 준다는 게 특징이긴 하지만. 거기에다가 그렇게까지 외곽도 아니다. 큰 도로를 두고 제법 규모가 있는 아파트 단지가 마주 보고 있고, 뒤돌아서 보면, 나무들 너머로 호수 사원의 꼭대기가 살짝 보일 정도다. 꽤 멀리 있기는 하지만, 그 꼭대기의 금색으로 빛나는 외관은 한눈에 봐도 알아볼 수 있다.
“자, 자, 여러분! 다 내리셨죠?”
일행보다 한 발 앞서 내린 미켈은 어느새 공원의 정문 앞에 서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의 목적지는 바로 ‘테르미니 문화공원’입니다. 똑같이 이레시아인들의 유적이기는 하지만, 세워진 시기는 약간 더 오래되었고, 어제 간 호수 사원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죠.”
일행이 미켈의 뒤를 따라 대리석 기둥이 받치고 선 정문을 지나가니, 벽돌이 깔린 길이 나오고, 그 양옆으로는 눈에 잘 띄는 구조물이 보인다. 마치 버려진 고대 도시 같은 느낌이다.
“파울리 씨.”
옆의 구조물을 보던 시저가 묻는다.
“혹시 이건 집 같은 건가요?”
“맞습니다. 여기는 원래 마을이었죠. 이레시아인의 도시가 아직 발달하지 않던 시절에 세워진 개척촌이라고 합니다.”
과연, 미켈의 말대로 집 같은 구조물은 격자형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모습을 하고 있다. 상상력만 조금 더하면, 먼 옛날의 마을의 풍경이 저절로 연상될 수 있을 만큼, 터가 아주 잘 남아 있다.
“여기가 공원으로 지정되고 본격적으로 정비된 건 약 100년 정도 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언덕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우연히 이곳의 가치를 알게 된 테르미니시 문화공보실장의 노력으로 본격적으로 이곳은 공원으로 정비되었고, 몇십 년에 걸친 조성 사업과 개보수의 결과 이곳은 이렇게 공원으로 정비되었습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어제의 호수 사원에 비하면 조금은 아쉽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아예 돔이나 유리관 같은 데에 격리해 두고 전시해 놓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런 게 낫기도 합니다...”
미켈은 짐짓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웃음을 띠고 일행의 앞에 선다.
“자, 여기 문화공원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대극장도 봐야겠지만, 우선은 여기 개척촌 지구를 조금 더 둘러보고 나서 순서대로 관람하시겠습니다.”
일행은 미켈을 따라 천천히 개척촌 지구를 걷기 시작한다.
한편 그 근처에서는...
“목표 확인.”
주택 유적 한가운데에 숨은 누군가가 나지막이 말한다. 풍경에 가려서 모습은 잘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가 있다는 건 확실하다. 물론 그 조그맣게 들린 말이 아니었으면 그 어느 누구도 그 풍경에 몸을 감추고 있는 사람의 존재를 눈치챌 수는 없었겠지만.
이윽고, 뭔가가 그 풍경 사이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두 눈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그 얼굴의 작은 부위만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관광객들과 함께 있어서 녀석만 노리기에는 좀 어려운 것 같군. 하지만 내 능력이라면 녀석만 정확히 노리기에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주위를 한번 돌아본 후, 그가 머리에 쓴 뭔가를 벗기는 손동작을 하자, 그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힘을 준 두 눈은 경계를 풀지 않고 계속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보고 있다. 그가 지금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건 초능력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아니다. 가격은 조금 비싸기는 해도, 전신을 덮는 투명화 슈트 하나만 있어도 초능력 없이도 얼마든지 온몸을 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
“파울리는 이제 막 이 유적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군... 기회야 얼마든지 있겠지만, 왜 하필 이런 때 하는 건지...”
이레시아인 남자는 못내 아쉬운 건지 말끝을 흐린다.
“하지만 기대해라, 파울리. 어떻게 해서든지 네 녀석에게서 그 태양석에 대한 실마리를 얻어내고야 말 테니...”
그렇게 남자가 전의를 다지면서, 잠시 드러냈던 얼굴을 다시 슈트로 덮으려는데...
“하... 또 뭐야.”
남자의 허리 부위가 조금 걸리적거린다는 느낌이 든다. 묵직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돌이 튀어나왔다든가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그렇지만 확실히 기분나쁜 느낌이다. 발에 확 쥐가 난 느낌과 뭔가가 자꾸만 남자의 몸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반반씩 섞어놓은 듯하다.
“도대체 뭐가...”
남자가 손을 허리 쪽으로 가져가 살짝 훑으니...
“엇...?”
뭔가 잡힌다. 꿈틀거리는 것이다. 허리춤에서 남자의 허리를 자꾸만 자극하는 그것.
잡아서 눈앞으로 가져가 보니...
“으엑... 웬 벌레...”
손에 잡힌 건, 암녹색 외피에 다리가 수십 개 달려서 꿈틀거리는 벌레다. 그 벌레를 보자마자, 남자의 몸속 깊은 곳에서 토악질이 올라올 것만 같다. 싫다. 이런 상황은... 남자는 그 벌레를 보자마자, 곧바로 어디론가 집어던져 버린다.
“흐으으으...”
벌레가 눈에서 보이지 않자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다. 시야에서 그 벌레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건 정말이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엇? 뭐야?”
별안간 남자가 놀란 듯 확 목소리가 올라간다.
“여기 이건 다 뭐지? 웬 벌레가 여기 또 있어?”
순간 남자는 입을 틀어막는다. 투명화 슈트를 입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아무튼 그는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다. 그러나 자꾸만 기어오르는 벌레들에게서 밀려드는 불쾌감은, 그에게는 쉽게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런 비좁은 잔디 위에서라면 더더욱.
“어떤 녀석이냐... 도대체 어떤 녀석이!”
♩♪♬♩♪♬♩♪♬
그때, 남자의 허리춤 쪽에서 희미하게 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이 녀석... 내 번호로 전화를 걸고 있는 건가?”
남자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려다가 멈춘다.
“이거... 받으면 안되는데... 어디서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한테 실마리를 줘서는 안 되는데!”
그 시간.
미켈은 일행 앞에 서서 몇 걸음 가다가, 문득 멈춰서더니 일행에게 넓어 보이는 어느 곳을 가리킨다. 사람이 거주하는 주택보다는 조금 넓어 보이고, 가구가 있었던 흔적도 다른 집들과는 조금 달라 보인다.
현애가 조금 앞으로 가서 그 유적지를 유심히 보니, 의자와 테이블 자리, 그리고 계단으로 이어지다 말고 끊긴 2층의 흔적 등이 눈에 띈다. 한가운데 있는 조각상이나 기둥 같은 게 놓였을 무너진 기둥도 보니...
“여기는... 식당이었나 봐요? 그 중에서도... 제법 큰.”
“네, 잘 지적해 주셨네요.”
미켈의 답은 바로 나온다.
“연구진 발표에 따르면, 이곳은 당시 개척촌에서도 제법 큰 식당의 자리라고 합니다. 단순히 식당뿐만이 아니라, 마땅히 모일 공간이 없었던 초창기에 사교의 장으로 이용되었던 곳이기도 하죠. 지금도 여러 행성에 세워지고 있는 정착촌들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 역시 그 유적의 형태에서 얼른 식당을 연상해 내지는 못하더라도, 미켈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미켈이 조금 더 앞으로 가서 설명을 막 하려는데...
♩♪♬♩♪♬♩♪♬
미켈에게 걸려 온 전화다. 바로 받아본다.
“어? 여보세요?”
“미켈? 근처에 있네?”
“바리오? 너 어디 있어?”
“아, 잠깐... 네가 보이네. 나 오늘 그거 하잖아. 뭐냐... 퍼레이드 연습 인원 모집.”
“어... 퍼레이드?”
“며칠 뒤에 테르미니시 설립 300주년 문화제 퍼레이드 하잖아?”
“아... 맞다! 그렇지... 조금 있다가 한번 만나자고.”
한편 그 근처에서는...
“바리오? 바리오라고 했겠다...”
근처 유적 한쪽에 투명 슈트를 입고 바짝 엎드린 남자의 목소리가 끓어오른다.
“그럴 줄 알았지. 이 자식을 아주 그냥...”
남자는 어떻게든 일어서 보려고 한다. 조금 전부터, 종아리 쪽에 뭔가가 물어뜯는 것 같았다. 살짝 뒤돌아보니,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역시, 벌레 여러 마리가 그의 다리에 올라타, 마치 슈트를 파고들기라도 할 듯 그의 다리를 열심히 갉아대고 있다!
“바리오 이 자식... 어떻게 해서든 나를 끌어내려고 하나 본데... 그렇게는 안 된다... 네 녀석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방책이 있다고!”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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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갈
2021-06-04 12:34:13
제목에서 일단 뭐가 등장할지를 조금이라도 예상해서 그나마 덜 놀랐네요...
허리에 뭔가 벌레가 기어다닌다는 건, 정말 끔찍해요. 문제의 벌레는 혹시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요? 온대지방의 뱀보다는 작은 크기일까요? 몸을 갉아먹는다는 느낌이 날 정도면 절대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크기의 것은 아닐 것 같고...
과거의 정착촌이 오늘날에는 공원으로...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것도 좋네요.
물론 이전에 갔던 일본 기후현의 시라카와고(白川?)같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역이 보존되고 있기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지역주민들이 사는 생활공간의 일부분으로 자리잡아 있는 것도 나름의 장점이 있고...
태양석에 대한 정보가 정말 별로 없다 보니 실낱같은 단서 하나하나가 중요하고, 그래서 이렇게 각축전이 벌어지는 거네요.
시어하트어택
2021-06-06 00:04:11
아이디어 자체는 대도시 한복판의 문화유적이 있는 공원을 적당히 생각해서 만들었습니다. 또 저렇게 근린공원 식으로 되어 있으면 시민들이 더 편하게 유적을 접할 수 있기도 하고요.
태양석은 키 아이템이기 때문에 당장은 그 진짜 모습과 경위가 드러날 일은 없을 겁니다. 적어도 가까운 시일 내에는요. 그래봤자 작중 시간 기준으로 6일 안에는 다 드러나겠지만요.
SiteOwner
2021-06-23 18:35:10
예전에 이탈리아에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로마 시내는 워낙 유적이 많아서 개발에 난점이 많을뿐만 아니라 유적이 도시생활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피렌체는 중세 때의 모습이 거의 온존되어 있다 보니 생활거점으로 쓰이는 가옥이 수십대째 쓰인다든지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게 생각나다 보니 테르미니가 어떤 곳인지 상상되기도 합니다.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수법은 기본적으로 타인도 구사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걸 알면 적의 입장에서 검토하여 최소한 대실패는 면할 수 있는데, 그걸 모르면 성공은 당연히 안되고 대실패도 모면할 수 없게 됩니다. 바로 그렇기에 하나의 능력을 절대화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투명화 슈트는 분명 대단한데, 그것보다 더욱 기술적 난이도나 비용 등이 낮은 벌레가 충분히 우위를 보일 수 있는 것이겠지요.시어하트어택
2021-06-24 07:57:40
저도 대략 오너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경관을 생각하며 이런저런 상상을 덧붙여 묘사를 했는데, 동감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어떤 능력이든 생각지도 못한 약점도 있고, 또 강점도 있는 법이죠. 그게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이더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