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허공에 수를 놓기라도 하듯, 창공과도 같은 푸른 빛이 허공을 갈랐다.
그 빛이 이루고 있는 모습은 그림자조차 베어버릴 것처럼 날카롭기 그지없는 한 자루의 레이피어.
비록 빛으로 만들어져 있긴 하지만 그 형태는 기껏해야 평범한 검. 그렇기에 그 칼날이 그릴 수 있는 건 고작해야 한 줄기의 선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 휘둘러지고 있는 이 검은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선이 중첩되어 면이 된다.
면이 쌓여서 입체가 된다.
그리고 입체가 늘어나, 공간 그 자체를 먹어 치운다.
인간의 인지 속도를 아득히 넘어서는 극쾌(極快)의 검.
평범한 무인이라면 보는 것만으로 전의를 잃게 될 것이건만, 상대 역시 만만치 않았다.
푸르게 빛나는 극쾌의 레이피어 맞서는 것은 한 자루의 지팡이.
그 색상은 순수한 검정. 심연의 어둠 그 자체를 응축해놓은 완전한 칠흑.
그 움직임 또한 단순한 직선. 어떠한 무리조차 담지 못하고, 빈틈조차 쉽게 노리지 못하는 어중간한 일격.
하지만 이를 쥔 상대의 힘은 기껏해야 그런 ‘몽둥이질’로 상대를 밀어붙일 수 있게 만들었다.
펑-!
지팡이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터져 나갔다.
그런 기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마력도, 기술도 아닌 순수한 근력 그 자체. 그 터무니없는 힘은 단순한 움직임을 전투법으로 변화시켰다.
쾅-!
한 번 푸른 레이피어와 검은 지팡이가 충돌하자, 레이피어를 든 손이 눈에 뜨일 정도로 흔들렸다.
이로 인해 생기는 것은 자그마한 빈틈.
평범한 검사라면 여기서 그 작은 빈틈이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푸른 검의 주인 에스텔은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렸다.
그 일차적인 원인은 보법.
타닥-!
충격 때문에 무게 중심이 흔들렸지만, 자그마한 스텝이 더해지는 것만으로 위치가 바뀐다. 그 직후 허공을 가른 것은 터무니없는 거력을 담은 검은 지팡이. 아무것도 없는 공기조차 터트려버리는 위력이건만, 오랜 실전으로 다져진 에스텔의 보법은 십중팔구 이를 손쉽게 피해낸다.
물론 세상일에 절대라는 것은 없어서 가끔 에스텔의 몸이 지팡이의 궤적에 들어가는 일 역시 없지는 않았다.
아주 가끔, 지극히 드문 경우긴 하지만 저 흉악한 지팡이는 에스텔의 몸을 정확히 노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에스텔에게는 어린애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챙-!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무언가와 충돌한 지팡이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간다.
이 기현상을 일으킨 것은 에스텔의 왼손에 들려 있는 또 하나의 완전 마력검.
패링 대거.
그 작은 마력검의 위력은 미약하기 그지없었지만, 에스텔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가해지는 것은 아주 약간의 힘.
만들어내는 것은 미약한 변수.
하지만 휘둘러지는 도중 생겨난 그 약간의 변화는, 지팡이의 궤적을 완전히 휘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그야말로 어린아이와 성인 수준의 기량 차이. 그 결과로 에스텔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는 반면, 그림자의 몸에는 작긴 해도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이 싸움은 에스텔의 일방적인 우세.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방심하지 않았다.
?
‘저건 가짜다.’
?
에스텔의 눈이 차갑게 상대방의 상처를 살폈다.
만약 상대가 인간이었다면 에스텔은 안심했을 것이다.
저건 얕기는 하지만 분명한 상처.
인간이 저런 상처를 입는다면 점점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상대는 인간형을 하고 있을 뿐,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
그런 존재에게 저 상처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에스텔은 장담할 수 없었다.
?
‘이제 곧 변화가 있을 거다.’
[성가시군.]
?
그녀의 가정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림자는 지팡이를 높게 치켜들었다.
방어를 완전히 도외시한 빈틈투성이의 동작.
마치 하늘을 가리키듯 높게 뻗어진 지팡이는, 꼭 산을 부술 것 같은 기세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앙-!
아직 목표에 도달하기도 전에 공기가 부서져 갔다. 지금까지 휘두르던 것은 장난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림자의 전력이 담긴 몽둥이질이 에스텔을 노렸다.
?
‘이건 피할 수 없어!’
?
설령 피한다고 해도 그 파괴력에 휘말려 들 뿐.
?
‘그렇다면.’
?
에스텔의 왼손이 움직여 패링 대거 형상의 마력검이 지팡이와 부딪힌다.
쨍그랑-!
평소와 달리 이번에 들린 것은 검이 깨져나가는 소리.
지팡이와 부딪힌 빛의 단검은 유리잔처럼 쉽게 부서져 나갔다.
여기까지는 에스텔이 예상한 범위.
저 무식한 공격의 위력이 살짝 준 것만으로 패링 대거는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그리고 살짝 약해진 공격을 막기 위해 그녀가 택한 방법은, 그저 그대로 그 흐름에 올라타는 것.
?
‘호흡을 바꾼다.’
?
공격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윽고 지팡이가 몸에 닿는 충격이 에스텔의 몸을 파고들었고, 그녀는 마치 종이 인형처럼 이를 받아들이고 허공에 떠올랐다.
?
[끝내도록 하지.]
?
이겼다고 생각이라도 한 것일까?
그런 그녀를 보며 지팡이를 고쳐잡는 검은 그림자.
하지만 에스텔은 이를 비웃으며 오른손에 새로운 무장을 만들어낸다.
구현하는 것은 둔기. 끝에 둔중한 철구가 달린, 마치 채찍과도 같은 무기.
플레일.
촤르륵-!
에스텔의 손에서 뻗어 나간 그 빛의 쇠사슬은 지팡이를 쥔 그림자를 어렵지 않게 붙잡았다.
?
[음, 이건?]
?
예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인지 여태까지와는 달리 살짝 당황한 기색이 묻어나는 상대의 목소리. 이에 에스텔은 잠시 미소를 띠었지만, 곧바로 냉정을 되찾았다.
?
‘아직 끝난 게 아니다.’
?
이윽고 움직이는 그녀의 오른손.
플레일의 형상을 한 마력검의 사슬이 당겨지며, 탄성으로 그녀의 몸이 그림자의 위로 튕겨 나간다.
직후, 그녀의 손에 다시 생겨나는 것은 또 다른 무기.
배틀액스. 그것도 일반적인 것이 아닌 성인 남성보다 거대한 날을 지닌 특제품.
그것을 양손에 든 그녀는 곧바로 지상으로 쏘아져 나갔고, 조금 전의 지팡이조차 아득히 뛰어넘는 파괴력이 그림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콰앙-!
대지가 깨지는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흩날렸다.
직격이었다면 명백히 상대를 파괴했을 감각. 하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공허한 감각에 에스텔은 주저하지 않고 다음 무기를 구현한다.
이번에 형성하는 것은 기다란 형상의 워 사이드. 주변의 모든 것을 쓸어버릴 듯 회전한 대낫의 칼날이 다시 한번 무언가에 닿았고.
?
“찾았다!”
?
에스텔의 손에 또 다른 무기가 쥐어진다.
지금 그녀가 구현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쌓아온 무예의 정수. 에스텔이라는 무인의 극의 그 자체.
첨(尖), 둔(鈍), 패(覇), 유(柔), 환(幻), 쾌(快), 강(强), 변(變), 중(重).
펼칠 수 있는 모든 형을 체현한다.
스틸레토, 워해머, 펄션, 스몰소드, 우르미, 샤쉬카, 메이스, 클로, 버디슈.
그 순간에 가장 적합한 무기를 구현한다.
천변만화를 지향하되 시작은 하나.
한 명에게서 시작되는 무한의 무.
에스텔이라는 인간이 체현해낸 폭력은 그렇게 그림자를 목표로 쏟아져나왔다.
언뜻 보기에는 에스텔의 일방적인 우세.
실제로 지금 에스텔의 눈앞에 놓인 그림자의 몸에는 인간이라면 치명상에 가까울 정도의 상처가 쌓여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에스텔은 지금 자신이 유리하다고 여기고 있질 않았다.
?
‘전혀 반응이 없어.’
?
지금 그녀가 상대하고 있는 이는 그 능력의 한계를 알 수 없는 존재. 언제 어디서 어떤 수를 동원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자다.
그런데 그는 지금 순순히 ‘맞아주는 것’ 외에는 어떠한 수도 꺼내질 않고 있다고?
?
‘분명 무언가가 있다.’
[이해가 가질 않는군. 그대는 검사였을 텐데?]
?
그런 에스텔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인지, 그림자의 목소리는 약간의 의아함만이 깃들어 있을 뿐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
[거기에 언뜻 미친 듯이 공격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아이들을 공격 궤적에서 배제하고 있어. 실로 흥미롭군.]
?
그리고 이어지는 날카로운 분석.
자신의 의도가 완전히 읽혔기 때문일까? 에스텔은 왠지 등을 타고 흐르는 땀이 조금 차갑게 느껴졌다.
?
‘역시 아직 이길 순 없는 건가…….’
?
그녀 자신이 나름대로 강해졌다고 여겼건만, 아직은 이 정도가 한계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
?
‘이길 수 없다면, 이길 수 있는 자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면 될 뿐.’
?
그녀에게는 누구보다 든든한 원군이 있으니까.
?
‘서둘러라, 그레고르.’
?
슬쩍 시선을 돌려 그레고르의 모습을 바라본 에스텔은 다시 그림자를 향해 뛰어들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
?
*** ***
?
?
끝이 없는 것처럼 칠흑도, 걷다 보니 어느새 끝을 고했다. 길의 끝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이한 시설.
전체적인 분위기는 가축을 키우는 축사와 비슷했다. 말구유와 비슷한 그릇과 우리, 그리고 짚으로 가득 찬 방까지……. 하지만 단순한 목장이라고 보기에는 도저히 그 장소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 역시 가득했다.
제일 먼저 눈에 밟힌 건 금속 재질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구속기구였다.
평소에는 결코 볼일이 없는 물건.
처형장이나 혹은 그렇고 그런 업소에서나 겨우 볼 수 있을 법한 도구는 어째서인지 이 축사에 수십 개가 넘게 비치되어 있었다.
?
‘여긴 대체 어디야?’
?
그 의문을 품고 고개를 든 순간, 시야에 하나의 현판이 들어왔다.
비뚤배뚤한 글씨로 쓰여있는 낡디 낡은 싸구려 현판.
그곳에는 간단하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밀림 유인원 목장’이라고…….
?
“뭐야, 이건?”
?
그 이름을 본 순간 목소리가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빅토리아는 어디에 있는지, 애초에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시설이 빅토리아의 내면세계에 존재하는지.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
‘이게 어떻게 된 거야?’
?
당혹감 때문일까?
심한 뱃멀미를 앓는 것처럼 울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걸음과 시선을 옮겼다.
저벅. 저벅.
느린, 하지만 확실한 전진.
그 전진이 이어져 나갈 때마다, 내 눈에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보여왔다.
바닥 곳곳에 방치된 인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혈액과 배설물.
말구유와 비슷한 곳에 있는 음식물 쓰레기.
살짝 냄새가 코끝을 지난 것만으로 머리가 몽롱해지는 용액과 그 주변에 놓인 주사기들.
?
‘설마 실존하는 장소인 건가?’
?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현실감을 더해가는 그 모습에 나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가정을 떠올렸다.
그렇게 당황하고 있기를 한참.
갑작스레 익숙한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직접 들려오고 있었다.
?
『남부인이 공식적으로 사람 취급을 받게 된 것은 채 30년이 지나질 않았다.』
?
고저가 없는 기계적인 어조. 하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빅토리아…….
?
“어디야, 빅토리아?!”
?
목이 아파져 올 정도로 살짝 크게 외쳐보았지만, 답변은 돌아오질 않았다.
그저 그 목소리는 자신이 하고 싶지만, 나는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속삭일 뿐.
?
『법으로 평등을 공표해도, 남부의 개척민들에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남부인은 사람 형태를 한 짐승. 한 줌의 땅을 얻을 수 있다면 언제든 죽일 수 있고, 팔아넘길 수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
그녀의 목소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내가 어렴풋이 알고만 있던 역사.
?
『하지만 법으로 금지된 이상, 함부로 노예를 사냥할 순 없었다. 그 때문에 남부의 한 마법사 길드는 새로운 사업 방법을 떠올렸다.』
?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텅 비어 있던 구속구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 형상은 분명한 인간.
누군가가 먹칠을 칠한 것처럼 개인을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그 형상은 분명 인간이었다.
?
『사냥이 끝나고 목축의 시대가 도래했다.』
?
남부인, 그리고 누군가가 부르길 ‘밀림 유인원’.
이곳에서 그들은 사육당하고 있었다.
?
‘설마 빅토리아도 이 목장 출신인가?’
?
문득, 빅토리아가 보육원에 들어온 사연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빅토리아는 분명 남부인.
카다스에서는 보기 드문 인종인 것이 분명하다. 어린, 그것도 보육원에서 자란 그녀가 있기에는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장소.
?
‘어린 시절까지는 목장에 잡혀 있었다가 누군가가 구조했다면…….’
?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지만, 뒤이어 이어져 온 말에 나는 내가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세상은 내 생각보다 더 뒤틀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처음에는 평범한 교배와 납치로 가축을 늘렸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품질이 낮은 가축들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
목장 한구석에서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를 던지는 모습이 보였다.
던지고 있는 자는 다 큰 성인. 그리고 던져지는 이는 이제 갓 첫 생일을 맞이했을 법한 갓난아기였다.
외모가 떨어지는 남부인의 아이는, 그렇게 병아리 솎아내듯 던져져서 ‘가공’되어 누군가의 식탁이나 실험실로 팔려나가고 있었다.
?
‘빌어먹을.’
?
그 충격적인 광경에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진짜가 아닌 과거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욕지기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
“제발 그만해줘.”
?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빅토리아, 그 밝던 아이가 뒤틀린 그녀의 과거를 얘기하는 것을 보고 싶진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그래서 그들은 꾀를 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물’을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서 저 ‘유인원’들을 교배시키자고.』
?
나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강제 교배’의 광경에 눈을 돌리고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찾아야 한다.
어서 빅토리아를 찾아 이 빌어먹을 장소에서 나가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복도의 끝에 도달했을 때.
나는 볼 수 있었다.
?
『품종명 ‘빅토리아’. 나는 활기차고 귀여운 ‘암컷 가축’을 목표로 세상에 태어났다.』
?
가면을 쓴 채, 어둠으로 만든 구속구에 묶여 있는 빅토리아의 모습을.
?
“빅토리아.”
?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가면을 썼기에 표정 역시 읽을 수 없었지만 나는 그래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슬퍼하고 있다고.
뚝! 뚝!
빅토리아의 얼굴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비록 가면에 가려져서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출처가 그녀의 양 눈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
『나는 만들어진 아이였다. 고객들의 기대에 맞춰 지옥과 같은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품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돈을 벌어서 해결해야 해! 아니, 단순히 해결이 아니야! 아이들은 나랑 다르게 좋은 학교에 보내고 마법도 가르칠 거라고!’
?
그녀가 나와의 첫 만남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목장을 배신한 다른 가축을 제압해 일꾼들에게 이를 알리도록 설계되었다.』
?
나와 에스텔의 이야기를 듣고 이상할 정도로 분노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
『나를 구해온 아이린 수녀님도 이를 고칠 순 없었다. 그저 최대한 나를 아껴주며, 내가 이를 잊어버리도록 할 뿐이었다. 하지만…….』
?
툭! 투두둑!
바닥으로 떨어지던 핏방울은 어느새 양이 늘어나 이제는 웅덩이를 이룰 정도가 되었다.
?
“이런!”
?
놀란 나는 서둘러 출혈을 멈추기 위해 그녀의 가면을 벗기고자 했지만, 안타깝게도 내 손은 그녀에게 닿질 못했다.
나를 막아선 것은 혀처럼 날름거리는 검은 그림자. 그녀를 묶은 구속구에서 뻗어 나온 어둠이 내 손을 부여잡고 있었다.
?
“비켜!”
?
우드득-!
팔의 근육이 부풀어 오른다. 인간의 것을 넘어, 강하다는 생물의 근육이 팔에 섞였다.
하지만 움직이질 않는다.
마치 힘을 흡수하는 구조로 설계된 것처럼, 어둠은 내 팔을 잡고 놓아줄 생각을 하질 않았다.
?
『나는 거짓이다. 빅토리아라는 소녀는 세상에 없고 그저 가축뿐이었다.』
?
눈앞에서 계속해서 빅토리아의 발언이 이어져갔다.
그 내용은 그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 그저 단순한 말에 불과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럴 순 없어!’
?
빅토리아를 여기에서 잃을 순 없다.
그녀 자신은 본인이 거짓된 존재라고 여길지는 몰라도,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 잡힌 팔을 풀어내야 할 터!
?
‘할 수 없지!’
?
으드득-!
잡히지 않은 다른 팔의 형상이 사마귀의 것처럼 낫처럼 변했고.
으적!
그것이 휘둘러진 순간, 다른 한쪽 팔이 내 몸에서 분리되었다.
?
“큭!”
?
아프다.
터무니없이, 미칠 듯이 고통스럽다.
아무리 재생한다는 걸 알아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
‘하지만 이제 움직일 수 있지!’
?
쾅-!
크게 발을 딛자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어둠 역시 내가 이런 수단을 쓸리라 못했는지, 그 자리에서 주춤거리고 있었다.
?
“그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벗겨주마!”
?
손을 뻗자, 그 빌어먹을 녀석이 씌워둔 가면이 잡혔고 나는 전력을 다해 이를 뜯어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느껴지는 건 강력한 저항감.
역시 가면에 무언가 처리를 한 것이 틀림없는지, 평범하게 당기는 정도로는 벗겨지진 않았다.
?
“좀 일어나라고!”
?
절단부에서 피가 솟는 것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몸을 변화시킨다.
최대한 힘을 낼 수 있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저 가면을 벗길 수 있고.
빅토리아를 구할 수 있게…….
?
‘그걸 위해 피 정도야 얼마든지 흘려줄 수 있어!’
?
쩌적-!
이윽고 가면의 이음새에서 뭔가 기분 나쁜 소음이 들려왔고, 천천히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피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는 한 소녀의 얼굴이.
?
“형씨?”
?
가면을 잡아당겼기 때문일까?
빅토리아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의 무감정한 목소리와는 다른 본래 그녀의 목소리.
?
“좋은 아침, 빅토리아.”
?
그 음성에 담긴 울먹이는 기운이 싫었기 때문인지, 나는 억지로 웃으며 최대한 밝게 인사했다.
그녀가 나를 따라서 웃길 바라며…….
?
?
?
?
=========================================================================================
?
잠깐 설정 이야기
?
이번에 베이스 이미지를 설명할 캐릭터는 주인공인 그레고르입니다.
일전에 리플로 설명했듯이, 작품 외적인 이유로 등장인물 중 상당수의 나이대는 높은 편입니다.
그레고르 역시 마찬가지라, 설정된 나이는 20대 후반, 그것도 일본에서 소위 ‘아라사(Around 30)’라고 부르는 연령대입니다.
에스텔과 만나기 전의 그레고르의 모습과 가장 닮은 캐릭터는 “Fate/Grand Order”의 헥토르(이미지 링크#)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모습이죠. 거기에 더해 그레고르는 당시 면도도 하질 않고, 목욕도 자주 하지 않는 등 관리가 거의 되질 않는 상태라 좀 더 겉늙어 보이던 상태입니다.
블레어와의 사건 이후 조금은 변했는데, 그 이후의 모습은 마찬가지로 “Fate/Grand Order”의 살리에리(이미지 링크#)에 가깝습니다. 다만 이는 순전히 외모적인 면일 뿐이고, 여전히 분위기는 헥토르 쪽에 가까운 편입니다.
?
작중 사도의 외형을 흔히 풀 플레이트 메일로 묘사하고는 있지만, 사실 현실적인 풀 플레이트 메일과는 거리가 먼 편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Garo” 시리즈의 마계기사(이미지 링크#)들의 갑주나, “베르세르크”의 광전사의 갑주(이미지 링크#) 혹은 “하이스쿨 DxD”의 부스티드 기어 밸런스 브레이크(이미지 링크#)에 더 가까운 느낌이지요. 그런데도 제가 이를 풀 플레이트 메일이나 판금 갑주로 표현하는 이유는, 가능한 한 세계관 내에 존재하는 물건으로 이를 묘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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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1-06-06 14:34:43
에스텔, 확실히 유능하네요.
자신의 능력도 뛰어나고, 상대인 그림자의 속성을 파악하고 있고, 또한 철저히 이성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고, 그리고 그레고르를 신뢰하고 있기도 하고...아름답다는 개념은 이런 에스텔과 그녀의 운명을 건 이 싸움을 위해 탄생한 어휘임에 틀림없을 거예요.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허리에서 힘이 빠진 듯한...끔찍하다는 말도 부족하네요.
빅토리아는 외형적 특성이 카다스의 주민 대다수와는 구분되는 남부인이었군요. 그리고 그들은 사실상 인간 아닌 것으로...
그 참혹한 성장과정이, 비록 이미 무의식의 저편으로 넘어간 것이라도 완전히 없던 것으로 된 건 아니었고, 그게 바로 빅토리아의 마음의 기저를 이루는...
그러고 보니, 자동반사적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르고 있어요. 그레고르가 빅토리아의 원래 목소리를 듣고 인사를 건넸을 때도 아무래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갑자기 눈물이 나고 있어요.
그레고르의 나이는 또 의외로 적게 설정되어 있네요. 그리고 생각한 것보다도 젊고 매력있어 보이네요. 잘 다듬어진다면이라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시프터즈를 읽으면서 전 그레고르가 최소한 30대는 넘었고 약간 대머리 기질이 있어 보이고, 오드리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전반같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레고르와 오드리는 연령차가 적은 것도 신기하게 보이기도 해요.
변한 이후의 그레고르는 확실히 카리스마가 증대되었어요.
사도로서의 모습의 모델로서 하이스쿨 DxD의 부스티드 기어 밸런스 브레이크, 잘 부합해 보이네요. 현실세계의 풀 플레이트 아머와는 확연히 다르지만, 그래도 일단 판금방식으로 제조된 갑주라는 형태는 지키고 있으니까요.
Papillon
2021-06-09 19:28:23
이번 에스텔의 전투씬은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서 쓴 장면입니다. 새로 구상하고 있는 작품의 장르가 퓨전 무협이어서 한 번 무협 같은 장면을 써보고 싶었거든요. 다양한 무기를 연계해서 사용하는 건, 제 개인적으로 한 가지 무예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무예의 장점을 취하는, 이종격투기 방식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빅토리아의 특징인 옅은 체모, 갈색 피부, 문신 등은 세계관 내 남부인의 전형적인 특성입니다. 사실 인간 종족이지만, 남부에서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죠. 다만, 저런 농장은 현재 사라진 상황인데 이유는 도덕성 발달이 아닌 이권 문제입니다.
그레고르와 오드리의 나이 차는 전에 언급했듯 작품 외적인 이유로 좁혀진 경우입니다. 오드리의 나이가 올라가면서 둘의 관계가 학교 선후배 관계로 수정되었고, 그러다 보니 학제에 맞춰서 나이가 조절될 수밖에 없었거든요.
SiteOwner
2021-06-23 18:35:31
에스텔이 싸우는 모습, 분명 기하학적인 형상으로 움직일 것인데, 어떻게 보면 우아함의 극치를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또한 장엄함이 잘 전달됩니다. 그리고, 제대로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상대인 그림자를 대적하면서, 충분히 불안해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레고르를 신뢰하고 있는 그 마음이 정말 멋집니다. 근래에 읽은 소설 중 이렇게 전투장면이 인상적인 것은 시프터즈의 지금 회차인 61화라고 단언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레고르가 찾아낸 밀림 유인원 목장은 사실상 남부인들을 수용하는 노예목장 겸 시장이었던 것이군요.
병아리 감별처럼 남부인 아기들을 솎아내고, 그리고 선정된 아기들을 키워내서 강제교배를 시키는...저녁식사를 한 뒤라서 기괴한 느낌이 배가되는 것 같습니다.
그레고르의 외형, 생각했던 것보다는 미형이군요. 역시 미가공의 원석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사도의 외형도 꽤 카리스마 있게 보입니다. 아름다움이 적을 압도한다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있는가 봅니다.Papillon
2021-06-25 01:09:36
좋은 평가 감사드립니다. 제법 공들여서 쓰긴 했는데, 솔직히 조금 자신이 없었거든요.
일단 학창 시절부터 오드리가 호감을 보이던 인물이었으니까요. 계기가 있긴 했지만, 타고난 외모가 꽝이었다면 그런 관계로까지 이어지긴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