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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자 H] 121화 - 독과 벌레(2)

시어하트어택, 2021-06-07 07:20:32

조회 수
134

테르미니 문화공원 주택지 유적의 한가운데, 눈에 잘 안 띄는 자리.
거기에 투명 슈트를 입고 엎드린 이레시아인 남자가 조그맣고 낮게 깐 목소리로 말하며 이를 갈자...
그가 엎드려 있는 자리로부터 뭔가가 퍼져나오는 듯하더니...
그의 다리를 갉아대던 벌레들이 픽 쓰러진다.
마치 그의 다리 위에 살충제를 치사량만큼 뿌린 듯 말이다.
다시 한번 살펴보니, 그의 다리를 갉아대던 벌레들은 죽었다. 다리 위에 있던 벌레들뿐만이 아니다. 그가 엎드려 있던 풀밭에 기어가고 있던 벌레들, 모두, 죽었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꽉 쥔다. 물론 투명 슈트를 입어서 그가 한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는 않지만.
“좋아... 그럼 나도 반격이다. 기다려라, 바리오... 그리고... 파울리!”
그는 슬며시 위를 올려다본다. 미켈은 아까보다 훨씬 가까이 왔다.
“좋다. 미켈 파울리, 사정거리 안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온다. 일단은 죽지 않을 만큼만 중독시켜 주지. 죽이면 네놈이 정보를 불 수가 없으니까. 그런 다음에는 바리오 녀석도 중독시키고, 목표를 이룬다!”
남자의 작고도 굵은 목소리가 유적 아래쪽을 울리자마자, 곧바로 그가 엎드린 풀밭이 누런빛을 띠더니, 몇 초 뒤, 그곳에서 꾸물거리며 기어다니던 벌레 몇 마리가 시들시들거리더니 픽 하고 쓰러져 죽는다. 풀밭의 풀도 점점 시들거리고 있다.
“됐다... 독이 점점 퍼져 가고 있군. 기다려라, 파울리. 네 녀석에게 독이 퍼지는 건, 시간 문제니까...”

“어때요, 좀 설명이 됐죠?”
미켈의 말에 일행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특히 현애는 미켈이 말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추임새를 넣고 있다. 미켈과 그렇게 친해졌다든가 하는 건 아니지만, 뜻하지 않게 단순한 가이드와 여행객의 관계 이상이 되어 버리다 보니 친밀감이 더해진 것도 있기는 하다. 아무튼, 그렇게 되다 보니 미켈의 말도 더 쑥쑥 들어오는 것 같다.
“자, 그럼 바로 옆의 건물터로 넘어가 보실까요?”
한편 바로 근처의 건물터.
미켈을 따라 옆 건물로 향하는 일행을 흘끗흘끗 올려다보며, 투명 슈트를 입은 남자는 상황을 살핀다. 어느새 시들시들거리다 못해 노랗게 변한 풀밭은 점점 넓어지더니, 미켈과 일행이 서 있는 곳까지 넓어지려고 한다. 1분 정도면, 일행이 있는 곳까지, 남자가 퍼뜨린 독기가 퍼질 것이다.
“좋아... 나의 독이 너를 소리 없이 쓰러트릴 거다. 그리고 꼼짝없이 불어야만 할 거다... 네놈이 멋대로 가져갔던 그 일체의 이권에 대해서!”
투명 슈트를 입은 이레시아인 남자가 막 승기를 잡아 간다.
그런데...
마침 운동복을 입은 한 행인이 일행의 근처를 뜀걸음으로 지나고 있다. 유적 공원이라지만 이상하다거나 낯선 풍경은 아니다. 공원 맞은편에는 주택가가 있고, 당장 일행 역시 여기에 들어오면서도 산책하는 주민들을 많이 봤으니까.
그 행인이, 잠시 뜀걸음을 멈추고는 천천히 걷는다. 제법 과장된 동작까지 해 가며 숨쉬기 운동을 하면서 말이다. 행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누렇게 변한 풀밭을 밟고 지나간다. 숨쉬기 운동을 하느라 숨을 크게 들이쉬는 건 덤이다.
그리고.

♩♪♬♩♪♬♩♪♬

“어? 잠깐...”
미켈의 전화가 울리고, 전화를 받는다.
“어... 바리오? 아, 그래. 알았어.”
전화를 끊자마자, 미켈은 급히 일행을 돌아본다. 물론 전화를 받을 때 일행에게서 돌리고 있던 굳은 얼굴을 한순간에 밝게 펴는 건 덤이다.
“아, 여러분, 보여 드릴 데가 하나 있는데, 이 마을터 유적에서 최근 주목도가 높은 건물터입니다. 한번 가 보시겠습니까?”
미켈의 자연스러운 유도에 일행은 다들 미켈을 따라 미켈이 말한 유적으로 이동한다. 미켈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걷지만, 일행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다.

“아니... 왜 엉뚱한 녀석이 쓰러지고 그래!”
투명 슈트를 입은 남자가 분함을 감추지 못한다.
“정작 목표로 하던 녀석은 어디론가 가 버리고 말이야!”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남자는 곧바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미켈을 쫓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뗀다. 이 정도면 된다. 조금 조심조심 걷더라도 어차피 투명화 슈트를 입고 있어서 보이지도 않는다. 이대로 슬금슬금 걸어서, 미켈이 멈춘 곳으로 다가가서, 독을 퍼뜨리면 그만인 것이다!
이상하다.
뭔가가 또 그를 물고 지나간 것 같다.
또 벌레인가...
“아니, 또 뭐야.”
한둘이 아니다.
이상하게 파리가 꼬여 버렸다. 자꾸만 앵앵거리며 날아다니는 파리는 정말 성가시다. 거기에다가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씩 저러니, 정말 없던 짜증도 치밀어오른다.
“이놈의 벌레들을 아주 그냥 확...”
생각같아서는 크게 소리지르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소리를 질렀다가는 이쪽으로 시선이 다들 쏠려 버릴 게 확실하기에.
“그리고 바리오 이 망할 자식도...”
남자가 그렇게 이를 갈던 그때.
“왜, 나를 찾았나?”
남자의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뒤를 돌아봐도 얼핏 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바리오 이 자식, 너도 투명 슈트를 입은 거냐?”
“네가 입었다고 다들 입은 줄 아나, 아즈탄?”
바리오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실망이군. 그래도 신관의 아들이라서 좀 나은 줄 알았는데.”
“뒤쪽이로군, 바리오 이 자식!”
아즈탄이라고 불린 남자는 바리오의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확 돌린다.
하지만 없다.
안 보인다. 유적 건물터 어디에도, 바리오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 그의 목소리는 들리고, 투명 슈트도 안 입었을 텐데 말이다. 거기에다가 파리는 이제 백 마리에 가까운 수가 꼬였다.
“그럼 좋다... 제1목표는 바리오로 바꾼다... 그리고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을 거다!”
독기가 다시 한번 아즈탄으로부터 퍼져나간다. 아즈탄의 주위를 맴돌던 파리들은 풀밭에 떨어져 즉사했고, 그가 밟고 선 풀밭 역시 누렇게 변하다 못해 흙이 다 드러날 정도가 되었다.
“중독되기 싫으면 순순히 나와라, 바리오! 내 독이 퍼져 나가는 건 시간 문제고, 어디에 숨든 네 녀석은 중독될 수밖에 없으니!”
“호오, 그런가?”
또다. 바리오의 목소리는 바로 뒤에서 들리는 것 같다.
“확실히 그런 것 같군. 독기가 공기 중에까지 퍼질 줄은 몰랐어. 인정해야겠는걸. 지금의 아즈탄은, 내가 알던 아즈탄이 아니라는 걸.”
“존칭 같은 건 바라지도 않겠다.”
조금 누그러들기는 했지만, 아즈탄의 목소리는 여전히 분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당장 내려와서 네가 아는 정보를 불어라. 그러면 최소한 바리오 너만큼은 중독당해서 온몸이 마비되는 고통은 겪지 않을 테니.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네놈은 온몸에 맹독이 퍼져 끔찍하게 최후를 맞이할 줄 알아라!”
“그래, 확실히 네 독은 위험하겠어. 돌까지 검게 변하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땅으로 바뀌어 가는데, 내 능력으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는 없지.”
“그래...”
온화해진 바리오의 목소리를 듣자, 아즈탄 역시 훨씬 목소리가 누그러든다.
“현명한 판단 고맙다, 바리오. 이제 모습을 드러내면 된다. 그러면 너만큼은 손 대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그래, 아즈탄. 네 말대로, 이제 내려와 주지.”
“뭐라고? 내려와?”
아즈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다는 말은, 이제껏 바리오는 유적지에 숨어 있지 않았다는 말 아닌가! 그건 그렇고, 올라갈 데는 또 어디 있다는 건가?
“이 자식, 나를 속여!”
“아니, 속이지 않았어. 나는 거짓말도 한 적 없고.”
“너는 지금 숨겨진 능력이 더 있는 걸 믿고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니냐! 나를 속였으니 너는 내가 아주 고통스럽게...”
“아닌데. 내 능력은 단지 벌레를 조종하는 것일 뿐.”
바리오가 그렇게 말한 그때.
뭔가 날아드는 느낌이 아즈탄에게 드는데...

퍽-

머리가 지잉- 하고 울리는 듯하고, 눈앞이 팽글팽글 돈다. 방금 뭔가가 아즈탄의 뒤통수를 때렸다. 묵직하고, 큰 무언가가 말이다. 일격에 쓰러진 아즈탄은 잠시 정신을 잃은 듯 그 자리에 쓰러져서는 일어서지 못한다. 투명 슈트의 투명화도 꺼졌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발자국의 흔적만 보이던 잔디밭에는 암청색의 전신 슈트를 입은 사람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돌덩이도.
“개같은 자식... 비겁하게...”
어느새 그가 퍼뜨리던 독기도 사라졌는지, 풀밭에는 다시 푸른 잔디가 올라오기 시작한다.그리고 그 잔디밭 위로, 한 사람이 사뿐히 착지한다.
“아즈탄, 이렇게 다시 만나는군. 이런 식으로는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꽁지머리를 한 활동복 차림의 이레시아인 남자, 바리오다. 바리오의 그 말이 들리자마자, 쓰러져 있던 아즈탄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한쪽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는, 자리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서 어느새 눈앞에 선 바리오를 노려본다.
“바리오... 이 공경심도 없는 녀석...”
“아직 변하지 않았어. 역시 아즈탄 너는 철부지 도련님이라니까.”
“닥쳐라, 개자식!”
머리를 싸매고 비틀거리면서도, 아즈탄의 눈은 눈앞의 바리오를 향해 이글거린다. 아즈탄의 얼굴에는 고통과 적개심만 나타난 게 아니다. 경멸, 그리고 우월감. 아즈탄의 얼굴에는 그 두 가지가 더 강하게 두드러진다.
“하...?”
그러던 아즈탄의 시선이 바리오의 발밑 한쪽으로 향한다. 전단지 한 장이 떨어져 있다. 바리오가 땅에 착지하다가 실수로 흘린 모양이다. 아즈탄은 그걸 놓치지 않는다.

[유적 채굴 인원 모집중]
[장소:...]

“좋아... 저거로군!”
“뭣...”
바리오가 재빨리 허리를 숙여 그 전단지를 주머니에 넣으려는 순간, 아즈탄은 손에 찬 AI시계에 달린 카메라로 그것을 찍는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한 번에 잘 찍혔다.
“됐다... 됐어! 이거면 될 거라고!”
“그렇게 된 건가...”
바리오가 잠시 나지막이 읊조리더니...
“그럼 나도 더 이상의 정보를 넘기지 않아야겠군.”
“아니!”
뒤통수를 여전히 한 손으로 싸매고 있으면서도, 아즈탄의 목소리는 더 커진다.
“더 많이 넘겨 줘야겠는걸. 네가 가진 모든 정보를 말이지 될 수 있는 한 많이, 너한테서 가져갈 거라고!”
위험하다.
다시, 독이 퍼지고 있다. 지면으로.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그 독기는 앞에 선 바리오를 가득 덮어 버리기 직전이다. 독기가 퍼진 잔디밭, 그리고 그 위의 공간에는 살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바리오와 아즈탄 말고는.
“분명, 벌레를 조종하는 능력이었지?”
아즈탄은 한 손으로는 머리를 어루만지며, 씩씩댄다. 그의 눈은 슬며시 웃고 있다.
“여기에는 조종할 벌레들은 더 이상 없는 것 같군. 그럼, 네게, 더 이상의 수는 없지? 좋다. 이번에야말로, 마비시켜 주마아아아아앗!”
시어하트어택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1-06-07 13:05:50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살이란 정말 잘 쓰였죠.

물론 현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소련-러시아의 독살은 아주 유서깊은 전통이죠. 우산에 내장된 독침총, 방사능 홍차, 그리고 노비촉 테러까지 별별 이상한 게 있어요. 특히 노비촉(Новичок)이란 탐지 및 방호가 곤란하면서도 상당히 안정된 독극물이라는 점에서 무서운 것이었어요. 러시아에서는 2018년에 영국에서 일으킨 전직 러시아 공작원 부녀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이라든지, 2020년에 자국내 야당지도자 알렉세이 아나톨리예비치 나발니(Алексей Анатольевич Навальный, 1976년생)에 대한 암살미수에 이 노비촉을 사용했어요. 단지 이것이 다습한 환경에서는 성능이 떨어진다든지 하는 이유로 위력이 반감했지만요.


여기에서 묘사된 독 또한 참 지독하네요.

게다가, 이렇게 효과가 빠른 독은 얼마든지 나쁜 용도로 쓰이기 좋으니...

시어하트어택

2021-06-13 20:12:37

당하는 대상이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순간 작용한다는 게 크죠.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없으니까요. 김정남 암살에 사용된 VX도 그런 종류라고 알고 있습니다.

SiteOwner

2021-06-23 18:35:51

끔찍한, 그리고 목적을 달성하면 금방 분해되는 기적의 독...이런 게 현실에 없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면 위에 바리오와 아즈탄밖에 없는 이 상황, 확실히 위험합니다.


독에는 여러 약점이 있습니다. 일단 맹독으로 쓸 수 있는 게 많지 않고, 위에서 동생이 언급한 노비촉은 습기에 약해서 비가 자주 잘 오는 영국의 환경에서는 독성이 약하고, 미 육군의 M687같은 바이너리케미컬은 이미 폐기되었고, 사용후 저절로 분해되어 사라지는 독은 제가 아는 한 없습니다.

시어하트어택

2021-06-24 08:00:21

화학전 같은 데에서도 무색무취의 물질이 가장 위험하다고 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불의의 일격이고, 알지도 못하는 새에 당하고 말 테니까요. 아즈탄이 쓰는 독 능력도 그런 종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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