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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애는 바로 파울리의 손짓에 따라 아래쪽을 내려다본다. 밑을 내려다보니 희미한 빨간 선 같은 게 보인다. 약 1mm 정도 두께의 가는 줄이 퍼져 있는데, 검은색과 은색 위주의 대극장에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빨간 줄이다.
“자, 이제 여기를 보시면, 여느 야외극장의 무대와 다를 바 없는 조명시설의 흔적을 보실 수 있고...”
미켈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선 채로 일행을 보고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한다. 일행의 시선이 전부 미켈에게 쏠려 있을 동안, 현애는 약 5초 동안 무대의 주위를 살핀다. 붉고 가는 줄이 무대의 틈을 따라 숨어 있는 게 보인다. 저 줄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데...
♩♪♬♩♪♬♩♪♬
마침, 미켈의 전화가 울리고, 미켈은 잠시 설명을 멈추고 전화를 받는다.
“아, 여보세요? 바리오? 왜 전화한 거야?”
미켈은 전화 너머의 바리오의 말을 듣더니 약간 얼굴이 굳어지는 듯하지만, 이내 태연하게 통화를 이어간다. 그러면서도 현애를 향해서는 무언의 눈길을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 그래. 이따가 보자고.”
미켈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바리오와의 전화 통화를 끝낸다. 미켈의 시선은 다시 자신의 설명을 듣는 일행을 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를 유심히 보는 현애를 살짝살짝 곁눈질로 보고 있다.
잠시 고민하던 현애는 이윽고 뭔가 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발밑까지 조용히 다가온 붉은 줄이다. 아무 말 없이, 발을 통해서 슬며시 냉기를 흘려 넣는다.
그리고 약 3초 후...
효과는 즉시 나타난다.
냉기에 닿은 붉은 줄이 힘없이 바스러지기 시작한다. 마치 다 썩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 줄을 타고 퍼져나가는 냉기가 닿을 때마다, 붉은 줄은 힘없이 바스라든다. 그 붉은 줄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나 보니....
미켈, 미켈의 발에 미세하게 묶여 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렇게 묶은 줄을 가지고 미켈의 움직임을 조작한 게 틀림없다. 미켈의 눈에 보이지 않았으니 미켈이 저렇게 쩔쩔맨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하지만.
저 냉기가 미켈의 발을 덮게 된다면, 미켈은 아마도 움직이기 힘들게 될 것이다. 냉기 능력을 여러 번 사용해 보니, 그런 것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저걸 해제해야 하겠는데... 냉기가 막 미켈의 발을 타고 올라가기 직전이다.
큰일났다... 해제해도 이미 늦는 건 아닌가?
“저, 저걸...”
그래도 해야겠다... 막 능력을 해제하려는 그때.
미켈의 발을 타고 올라가려던 냉기가, 갑자기 끊긴다. 어떻게 된 건가? 분명 현애 자신은 냉기를 살짝 흘려 넣었을 뿐, 손을 댄다든가 한 건 없다. 그런데도 저렇게, 마치 뭔가로 잘라 버린 듯 냉기가 끊겨 버렸다는 건...
♩♪♬♩♪♬♩♪♬
미켈의 전화가 다시 울린다.
“아, 바리오. 어떻게 됐어?”
미켈이 잠시 전화 너머의 바리오의 말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더니...
“아, 고마워. 고생했어, 바리오!”
전화를 마치고, 미켈은 일행의 눈에 최대한 띄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고 물을 마시는 척하며 소리없이 안도한다. 잠시 후, 일행을 돌아보는 미켈의 목소리가 다시 쾌활해진다.
“자, 여러분! 기다리셨죠? 그러면 이제 하나하나씩 다니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어느덧 점심시간.
공원 한가운데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하고 나서, 다음 일정 때까지 쉬는 시간이다. 일행 대부분은 삼삼오오 모여서 음료수와 간식을 앞에 두고 잡담을 하든가, 혼자서 놀고 있다. 현애와 세훈도 그건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조금 깊숙한 자리에서 다른 두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다. 그 다른 두 사람이란, 다름 아닌 미켈과 바리오다.
“수고했어, 둘 다.”
미켈이 옆에 앉은 바리오와 마주앉은 현애를 번갈아 보며 말한다.
“설마설마했는데, 다른 녀석들이 우리를 노릴 줄은 몰랐어.”
“그러게. 아까 상대한 녀석도 하필 내가 아는 녀석이고.”
“뭐? 네가 아는 녀석을 상대했다고?”
미켈이 화들짝 놀란다.
“그게 누군데? 누구야, 바리오?”
“아즈탄 보론이라고 있어. 나하고 악연이 좀 많았지.”
“어... 그래?”
“너 하마터면 그 녀석의 독에 중독될 뻔했어. 알아?”
“휴...”
“그건 그렇고, 너희들!”
바리오는 현애와 세훈을 보고 말한다.
“여행은 재미있게 하고 있어?”
“헤... 말도 마세요.”
세훈이 한숨을 푹 내쉬며 넋두리를 내뱉듯 말한다.
“누가 패키지 여행 가서 싸움박질이나 할 줄 상상이나 했겠느냐고요.”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바리오의 말에 현애, 세훈 둘 다 고개를 강하게 끄덕인다.?
“그건 그렇고 바리오.”
“왜, 미켈?”
“아까 왜 그렇게 전화를 자꾸 했던 거야? 내 전화에 한 10개는 넘게 찍혀 있던데.”
“문제가 좀 생겼어.”
“무슨 문제?”
“아즈탄 그 녀석이, 글쎄 우리가 고용하기로 한 인력 정보를 자기네 패거리에 유출했어!”
“아니, 어떻게?”
“하...”
바리오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미켈의 귀에다 대고 뭔가 조그맣게 말한다.
“그래... 이미 엎질러진 건 어쩔 수 없지. 조금 있다가 오늘 일정 끝나고, 더 자세히 논의해 보자고. 앞으로 마음 더 굳게 먹고.”
“고맙다... 이따가 보자.”
바리오는 일어서서 자리를 뜬다. 그의 힘없이 걸어나가는 뒷모습이 결코 가볍지 않다.
오후 1시, 테르미니 시내의 한 카페. 로만 칼라 셔츠를 입고 검은 머리를 빗어 넘긴 한 남자가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에 나와 있는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한 손으로는 전화를 받고 있는데...
“뭐... 뭣?”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확 올라간다.
“아즈탄이... 쓰러졌다고?”
남자가 어찌나 놀랐는지, 순간 커피잔을 손에서 놓친다. 곧바로 잔은 다시 붙들었지만, 커피 방울 몇 방울이 남자의 옷에 선명하게 튀었다. 눈에 선명히 띌 정도의 얼룩이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는다. 아니, 그런 얼룩 따위에 신경 쓸 새가 없다.
“맹독에 중독되어서 의식을 못 찾고 있다고? 어째서?”
남자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전화 너머의 목소리에 온 정신이 쏠린다. 한참 듣던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 왔네, 왔어. 그래도 하나 큰 걸 보내 줬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남자는 또다시 침울하게 고개를 푹 숙인다.
그리고 잠시 후, 남자는 다시 고개를 든다. 아까 놓칠 뻔했던 커피잔을 다시 들고, 쭉 들이켠다. 조금은 뜨겁지만, 그런대로 참을 만하다.
“아즈탄이 남겨 준 걸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찾아낼 거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것이 아즈탄과, 목숨을 바친 모든 이들을 위한 길이니!”
남자는 혼자서 중얼거린 후, 다시 노트북에 시선을 돌린다.
그날 저녁, 호텔 아래의 번화가 마운틴 로드의 한 레스토랑.
창가의 원형 테이블에 테르미니 퍼스트의 크루들 중 바리오, 비앙카, 도레이가 둘러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잠시 후.?
“어, 미켈! 일찍 왔네?”
테이블 쪽으로 오는 미켈을 보고 모두 반갑게 손을 흔든다.
“웬일이야? 오늘은 일찍 왔네.”
“아, 오늘 저녁에는 이제 일정이 없거든.”
“혹시 어떻게 됐어, 그 인력 모집 건은?”
“아... 그거?”
바리오의 얼굴은 의외로 어둡지 않다. 오히려 미켈의 눈을 피하지도 않는다.
“자, 미켈! 여기 한번 봐.”
“어? 뭔데?”
바리오가 홀로그램을 하나 켜서 뭔가를 보여 주자, 미켈의 얼굴이 금세 밝아진다.
“그래도 어떻게 했네? 인력 모집 내용이 유출되어 버려서 모집이 좀 힘들 것 같았는데?”
“다행히 가브리엘이 미리 확보해 놓은 인맥이 좀 있었지. 그거 아니었으면 모집이 좀 힘들었을 거야.”
“역시 가브리엘이야.”
“아, 가브리엘도 가브리엘이지만, 그때 내가 그걸 안 흘렸어야 하는 건데...”
“괜찮아. 기회는 또 있겠지.”
미켈이 달래 주자 바리오는 길게 심호흡을 한번 한다.
그렇게 약 1분 정도 지났을 때.
“그런데, 이상하다?”
비앙카가 불쑥 말을 꺼낸다.
“왜?”
“자라는 왜 안 와?”
“어? 자라?”
“맞다. 아까 출발한다고 전화했지. 이야기한 지가 30분이 다 지났는데 안 와?”
미켈, 바리오, 도레이도 비앙카의 말에 자라가 생각난 건지 무릎을 탁 친다.
“전화 한번 해봐! 지금쯤 와야 할 시간이잖아!”
한편 그 시간, 레스토랑 근처의 길거리.
“하, 좀 늦었잖아. 지금 들어가면 다들 뭐라고 안 하려나?”
자라는 걱정스럽게 말하며 빠른 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시계를 보니 5시 45분.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5분은 훌쩍 지났다. 앞을 가로막은 행인들을 볼 때마다, ‘치워 버리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든다.
“제발, 제발, 제발...”
자라는 꽤나 초조한지 마치 주문이라도 거는 듯 ‘제발’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뇐다. 두 눈은 덜덜 떨리고 있고, 입술도 마찬가지다.
어느덧, 자라의 눈에 보인다. 5층 높이의 흰 외벽으로 이루어진 제법 규모가 커 보이는 쇼핑몰이, 거리 건너편에 있다.
“하, 다 왔다. 그래, 저기 꼭대기에 있다고 했지...”
자라는 바로 쇼핑몰로 들어간다. 월요일인데도 쇼핑몰 안에는 사람들로 어느 정도 활기가 넘친다. 대부분은 친구들이나 연인끼리 놀러 나왔든가, 아니면 식사하러 나온 회사원들이다.
“어디 보자, 꼭대기, 5층...”
자라의 손가락이 멈춘 곳은 ‘5층 ? 루프홀’이라고 쓰인 곳. 일행은 거기 모여 있을 것이다. 곧장 자라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어찌나 조바심이 들었는지, 그냥 올라가지도 않고 한발 한발 큰 걸음으로 걸어서 올라간다. 그렇게 하니 5초 만에 2층에 다다른다. 꽤나 빠른 걸음이지만, 자라는 이것도 성에 차지 않은 듯, 숨을 돌리지도 않고 곧바로 몸을 돌려 3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발을 딛고, 생각할 새도 없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한발 한발, 내딛는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3층이다. 3층에 다 올라갔는데...
“엇, 뭐야?”
옆을 보니, 여전히 2층이다. 분명히 자라는 3층에 올라갔음에도.
“뭐지... 내 감각이 잘못된 건가?”
자라는 머리를 한 번 흔들어 보고는,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려 한다.
“이상한데, 다시...”
하지만, 자라가 있는 곳은 전혀 엉뚱한 곳이다.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도 않고, 여러 가게에서도 먼 외진 곳. 바로 옆에 기계실 문이 있다.
“아, 뭐야.”
자라는 고개를 내젓는다.
“어떤 녀석이 장난질을 하는 건데.”
“답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지.”
누군가가 마치 자라를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말투로 말한다. 여자의 목소리인데, 나이 들게 느껴지지도 않지만, 유약하게 느껴지지도 않고 꽤나 드센 성격인 것 같다. 등 뒤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인가?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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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1-06-11 12:33:49
독 능력을 가진 아즈탄 보론이 독에 중독되어 쓰러지다...
남을 탓할 수도 없겠네요. 뭐랄까, 독사가 정작 자기 독에는 면역이 없어서 실수로라도 자기 꼬리를 물어버리면, 독주머니 속에 있는 한은 안전한 독이 몸에 퍼져서 죽는다고...그게 생각나네요. 그 뱀을 어리석다고 탓하지도 못할 것이고...
위험한 상황은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죠. 지금 자라가 딱 그 형국인데...
과연 플랜B는 문제가 없을 것인지...시어하트어택
2021-06-13 20:29:20
뭐, 그 아즈탄의 피가 독으로 이루어져 있다든가 하지는 않으니까요... 어찌보면 당연한 거죠.
SiteOwner
2021-06-26 14:27:14
세상의 만물이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어져 있다고 하지요.
만일 전파, 인간관계 같은 것들이 실제로 눈에 보인다 하면 꽤나 재미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고, 역기능도 만만찮다 보니 아마 그렇게 변한다면 그 관계가 보이는 것을 계속 원할지 의문이지만...
그런 것이 일시적으로나마 초능력을 통해 보이는 세계란 아무래도 꽤나 신기할 것 같습니다.
여행이 저렇게 된다는 것, 역시 창작물 속에 한정되어야겠지요. 현실의 상황으로 겪고 싶지는 않습니다.시어하트어택
2021-06-27 21:58:42
게임에서도 그런 게 있었죠. 스타크래프트 시리즈의 프로토스는 칼라라는 연결망을 통해 모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죠. 물론 그것은 어떤 이유로 사라져 버립니다만... 오너님이 말씀하시니 그게 다시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