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느낀 감정은 의아함이었다.
?
‘기억나질 않아.’
?
무엇하나 제대로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꼭 약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고 빅토리아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왜 자신은 이런 곳에 있는 걸까?
어째서 가면을 쓰고 잠들어 있던 것일까?
그리고 왜 그레고르는 잠들어 있던 자신을 깨워야만 했던 것일까?
끝없이 꼬리를 무는 질문의 연쇄. 처음에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그 의문의 파도가 끊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그래, 나는…….’
?
겨울날 유리창에 서린 김을 닦아내는 것처럼, 의식 깊은 곳에 끼어있던 안개가 서서히 걷혀나갔다.
제스와의 싸움이 기억났다. 온몸이 숯덩이가 되었다는 사실과 아이린 수녀가 산 채로 녹아내리는 모습이 기억에 새겨졌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폭주해 그레고르와 사이가 틀어졌던 기억이 재생됐다. 그리고 사과해야 했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시장에서 우연히 마주했던 첫 만남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이후 처음으로 사귀게 된 친구 때문에 두근거리던 가슴이 느껴졌다.
그리고……. 영원토록 마음속 깊이 봉인하고 싶었던 ‘가축’으로의 옛 기억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깊게 두개골 안에 새겨졌다.
?
“아아……!”
?
완전히 멈춘 줄 알았던 피눈물이 그녀의 두 눈에서 다시 흘러내렸다.
그녀의 마음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장소는 다름 아닌 절망.
그 원인은 더는 바꿀 수 없는 자신의 과거도, 알고 싶지 않았던 충격적인 진실도 아니었다.
?
‘보여버렸어.’
?
자신조차 잊고 싶어 하던 추악한 과거를 타인이, 그것도 처음으로 사귄 친구가 봐버렸다.
?
“하, 하하!”
?
그것을 깨닫고 나니 어째서인지 웃음이 나왔다.
?
‘끝났네.’
?
더는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 그녀는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가축.
품종명 ‘빅토리아’로 팔리기 위해 교배를 통해 만들어진 가축용 남부 유인원.
?
“큭, 크크큭!”
?
어째서일까?
입에서는 웃음이 계속해서 새어 나오는데,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
“있잖아, 형씨.”
?
그랬기에 그녀는 선택했다.
?
“나, 두고 가지 않을래?”
?
이대로 영영 사라지기로.
?
“너 그게 무슨?!”
“말 그대로야, 형씨. 나를 그냥 이대로 두고 가줘. 그리고 나가는 즉시 미쳐 날뛰는 나를 죽여줘.”
?
이미 결심을 굳혔기 때문일까? 웃음기가 섞인 그녀의 목소리에서 떨림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겉보기일 뿐.
?
“걱정하지 마. 나는 사람이 아니니까 죄책감 같은 건 가질 필요 없어. 그냥 닭이나 돼지를 잡는다고만 생각해. 그러면 될 거야.”
?
무서웠다. 무서워서 어떻게든 현실과의 괴리감을 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억지로 가벼운 말투를 연기했고, 겁먹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
“제발 부탁이야, 형씨.”
?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친구에게 부탁을 건넸다. 제발, 자신을 죽여달라고. 그리고 거기에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말을 끝내고 침묵 속에 대답을 기다렸건만, 제법 오랜 시간이 흘러도 답변은 돌아오질 않았다.
그레고르는 그녀에게 무어라고 말하지도, 그렇다고 그 자리를 떠나지도 않은 채 그대로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저 어색한 침묵만이 이 기괴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
그렇게 그녀가 흘린 피눈물이 작은 웅덩이를 이루었을 때쯤.
?
“……고개를 들어.”
?
소녀의 귀를 파고든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
“응?”
“고개 숙이고 있지 말고, 날 똑바로 보라고.”
?
돌아온 것은 답변이나 선택이 아닌 또 다른 요청.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없어서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이를 이해해보고자 했건만, 답은 나오질 않았다.
그저 느껴지는 건 그레고르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평온하다는 것뿐.
?
“……알겠어.”
?
결국, 고민 끝에 그녀가 선택한 것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
‘어차피 죽기로 한 몸, 별일이야 없겠지.’
?
이후 고개를 든 그녀가 본 것은…….
?
“뭐, 뭐야?!”
?
점점 자신의 얼굴로 다가오는 그레고르의 얼굴.
?
‘대체 뭐지?!’
?
처음으로 코앞에 다가온 상대, 그것도 남성의 얼굴에 그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뇌리에 떠오르는 한 개의 단어.
입맞춤, 또는 키스.
?
‘하지만 왜? 어째서? 에스텔이랑 그런 사이였던 거 아니야?’
?
죽음은 각오했어도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빅토리아는 눈을 질끈 감고 다가올 감촉을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기다렸다.
그리고 눈을 감은 그녀가 느낀 것은.
빠각!
이마를 파고드는 강렬한 충격.
?
“아파!”
?
박치기.
그것이 그레고르가 그녀에게 한 행동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아팠다.
이후에는 뭐라고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달한 것은 분노였다.
?
“뭐 하자는 짓이야?!”
?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평소처럼 큰 목소리로 분통을 터뜨렸다.
?
“미쳤어, 형씨?! 나는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고 있었는데! 이건 대체 뭐 하자는 짓이야! 마지막은 좀 멋있게 보내주면 안 되냐고?!”
?
그리고 그걸 본 그레고르는 빙긋 웃더니, 그대로 그녀에게 한 마디를 돌려줬다.
?
“응, 안돼.”
“뭐?”
?
너무나 가벼운 말투에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은 빅토리아. 하지만 그녀가 이를 받아들이건 말건 그레고르는 홀로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
“넌 여기서 죽지 않을 테니까.”
?
그는 지금 상황이 그저 농담인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
“난 널 살리려고 온 거야, 거기에 변경 사항은 없어.”
?
협상의 여지 따위는 없다는 것처럼 단호한 목소리.
그 음성에 살짝 기쁘다고 생각하면서도, 빅토리아는 이를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
“하지만 나는 가축이었는데……?”
“그래서?”
“응?”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야 나는…….”
‘사람이 아니니까.’
?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려던 말.
하지만 그레고르의 얼굴을 본 순간 빅토리아는 이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녀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보냈다간 또 한 번 박치기가 날아올 것 같았으니까.
?
“에스텔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
그런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레고르가 다시 말한 건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
“에스텔은 그 소여 가문의 후계자였어.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랑 같이 다닐 급은 아니지.”
“……그런데?”
“하지만 첫 만남, 아니 그때는 좀 그랬구나, 하여튼 자기소개를 마친 이후로 에스텔은 한 번도 나를 평민이나 우민이니 이렇게 취급한 적은 없어. 그냥 친구, 전우, 그리고 좋……이건 생략. 아무튼 그런 식으로 대우해줬지. 그리고 이건 너도 마찬가지야.”
?
그렇게 말한 그레고르는 다시 그녀의 귓가에 다가서며 -이 과정에서 또 박치기가 들어오는 게 아닐까 하고 잠시 움찔거리는 빅토리아였다- 단호히 속삭였다.
?
“너는 빅토리아야. 이타콰의 사도고, 보육원 아이들의 보호자고, 내 친구다. 그 외에 과거가 어땠는지 출신이 어땠는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중요한 건 지금 네가 뭐냐는 거지.”
“…….”
“그리고 나는 내 친구를 이런 곳에서 자살하게 둘 생각은 없어.”
?
그렇게 말을 끝낸 그레고르는 조금 전까지 진지하던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
“박치기는 미안하게 됐다. 사실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 싶었는데, 멀쩡한 손이 없어서 말이야.”
?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거리자, 잘린 한쪽 팔과 어떻게든 그녀에게 돌아가려고 날뛰는 가면을 움켜쥐고 있는 다른 손이 보였다.
?
“그래서 같이 나갈 준비는 됐어?”
?
질문 직후에 다시 이어진 어색한 침묵.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니 무슨 대답을 하든 의미는 있을지 고민하던 빅토리아의 선택을 종용한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였다.
?
[키아아아악!]
?
괴성을 지르는 것은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칠흑의 촉수.
녀석들은 빅토리아가 가면을 벗은 걸 이제야 눈치챘는지, 미친 듯이 이 장소로 몰려오고 있었다.
?
“형씨, 저건?!”
“역시 뭔가 해놓은 건가?”
?
당황하는 빅토리아와는 다르게 냉정하게 촉수의 무리를 슬쩍 쳐다본 그레고르는 다시 빅토리아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
“시간이 없으니 다시 물을게, 정말 이대로 죽을 거야? 아니면 친구와 함께 여기서 나갈 거야?”
“…….”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널 구하고 싶지만, 그래도 네 의사를 존중하도록 할게. 선택해. 어떻게 할 거지, 빅토리아?”
?
단호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레고르의 표정.
그 모습을 보면 어째서인지, 빅토리아는 오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
‘왜 에스텔이 반한 건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그렇게 말하며 입가에 감도는 장난기가 서린 미소.
?
“……나가면 책임져 줄 거야?”
“물론이다. 친구로서 당연한 일이지.”
?
아무래도 그 ‘장난’을 이해하지 못한 느낌이었지만, 빅토리아는 거기서 선택을 굳혔다.
?
“날 구해줘, 형씨, 아니, 그레고르.”
“접수 완료.”
?
으드득-!
뼈와 근육이 뒤틀리며, 가면을 든 그레고르의 손이 기괴한 형태로 변화했다.
그 형태가 도달하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게와 같은 갑각류의 집게발.
?
[키에에에엑!]
?
그 집게 사이에 낀 가면은 비명을 토해냈지만, 녀석의 미래는 변하질 않았다.
쩌저적-!
비명과 함께 울린 파열음이 끝나고, 가면은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와 함께 검은 촉수를 태워버리는 무지갯빛의 환염. 그 불꽃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면서 빅토리아는 작게 미소 지었다.
친구, 아니 조금 다른 의미로 친해진 사람과 함께 밖으로 나아갈 것을 기대하며…….
?
?
*** ***
?
?
‘뭐지 이 불안감은?’
?
분명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건만, 에스텔은 어째서인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시달리고 있었다.
싸움이 시작한 이래, 모든 것은 그녀가 의도한 대로 진행되었다.
상대는 그레고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접근하지 못했다. 그녀가 펼치는 연환격은, 그림자를 쓰러뜨리진 못했지만 움직임을 봉쇄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런데 어째서…….
?
‘이렇게 불안하냔 말이다!’
?
그 불안감을 잊기 위해서, 에스텔은 더욱 공세를 가했다.
이번에 투영한 것은 곡괭이의 형상을 한 워 피크. 그것이 그림자의 머리 부분을 꿰뚫는 순간.
?
[키에에에에에엑!]
?
그녀의 불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예기치 못한 괴음이 주변을 잠식해나갔다.
마치 공간을 찢는 것 같은 비명의 출처는 돌이 된 듯 굳어 있던 빅토리아의 신체. 이타콰의 사도의 모습을 한 그녀의 육체는 기괴한 음성을 내며 조금씩 뒤틀리고 있었다.
마치 내부에서 무언가 끓어오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
갑작스러운 변화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에스텔. 하지만 이윽고 이어진 상대의 목소리에 그녀는 누가 이 상황을 의도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계획대로로군.]
?
귓가를 타고 그림자의 조소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
“무슨 짓을 한 거냐!”
?
다시 무기를 구현해 그림자를 겨누는 에스텔. 하지만 적을 공격하는 데만 집중하던 이전과는 달리 에스텔의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
‘분명 접근조차 하지 못했을 텐데?’
?
하면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
[오늘은 좋은 것을 보았으니 내가 약간의 ‘전술 수업’을 해주도록 하지.]
?
그런 에스텔의 속내를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림자는 놀리듯이 과장된 몸짓을 하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
[제1강. 적이 내 진짜 목표를 모르게 하라.]
“무슨 소리냐?”
?
당황한 듯 떨리는 에스텔의 목소리.
?
[간단한 이야기지. 내가 노리던 것은 저쪽과 접촉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거다.]
?
그런 그녀를 더욱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림자는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거기에 들려있는 건…….
?
‘반지를 낀 손가락? 설마?!’
“크투가의 신기!”
?
자신이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날 듯이 깨물었다.
그림자가 나타난 이래, 에스텔은 제스의 시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건 빅토리아와 그레고르, 그리고 아이들뿐. 그들을 지키기 위해 쉴 새 없이 그림자를 몰아치던 그녀는 제스의 시체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
‘하지만 어째서 빅토리아가 발작을 시작한 거지?’
?
그런 그녀의 의문을 이해하기라도 했는지, 그림자는 이죽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
[내가 노린 것은 둘. 하나는 이 크투가의 신기를 회수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이곳에 최대한 오래 머무는 것.’]
“뭐……라고?”
[대체 언제부터 내가 접근해야만 빅토리아에게 간섭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그야……!”
?
처음 나타났을 때 그 둘에게 다가가려고 했으니까.
문득 그때의 상황이 떠오르자, 에스텔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
“설마?!”
?
만약 그 행동 자체가 계산하고 한 동작이라면……!
그녀의 경악한 얼굴이 재미있기라도 한 것인지, 그림자는 잠시 조소를 흘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자, 그럼 나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지.]
?
그 말을 남긴 채 서서히 사라져 가는 그림자의 모습.
?
“도망치게 둘 것 같으냐!”
?
놀란 에스텔이 서둘러 상대를 향해 뛰어들었지만.
?
[그럴 것 같군.]
?
녀석이 뿜어낸 그림자가 아이들을 노리자, 움직임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쾅-!
단순히 그녀를 방해하기 위함이었는지, 그리 위력적이지 못한 공격. 하지만 녀석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에는 충분했다.
결국, 에스텔의 시선이 녀석을 다시 찾을 때, 녀석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추적해야 한다.
순간 에스텔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림자는 그녀와 그레고르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다.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추격해서 제거해야 한다.
그녀가 지닌 전투 본능이 그렇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
[키에에에에엑!]
?
빅토리아, 아니 이미 그녀의 모습은 조금도 남지 않은 이타콰의 사도가 변이를 마치고 있었다.
그것은 더는 갑주를 입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크기는 이미 어지간한 성인 남성의 3배 이상. 거기에 골격 역시 기괴하게 뒤틀려 팔은 이미 촉수를 엮어놓은 것 같은 형상이 되었다. 투구는 검은 수정으로 만들어진 해골의 모습이 되었고, 육체는 인골을 악의적으로 뒤틀어놓은 모습으로 변이했다.
마치 전승으로 알려진 이타콰의 화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기괴하게 오염시켜 놓은 것처럼.
?
‘빌어먹을.’
?
저것이 움직인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
‘길어야 1초.’
?
떠오른 의문에 본능이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1초. 그것조차도 최대한 낙관적으로 평가한 결과. 시간을 얼리고 달려드는 저 괴물을 상대로 그녀가 버틸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
‘하지만 도망칠 순 없어.’
?
아이들과 그레고르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
‘그렇다면.’
“먼저 공격해서 시간을 끌뿐!”
?
비록 이걸로 끝일 테지만, 적어도 나쁘지 않은 죽음이리라.
그렇게 받아들이며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고.
쾅-!
괴물의 거구가 무언가에 의해 허공을 날았다.
?
“어?”
?
순간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얼빠진 목소리가 나왔다.
상대는 타락하기는 했지만 사도.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걸음을 옮긴 것만으로?
?
“늦어서 미안해요, 에스텔.”
?
그 대답은 그녀의 곁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음성의 출처는 평소와는 다른 갑주를 입은 기사였다.
판금 갑주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급소를 제외하고는 가리는 부분이 없는 몸통 갑주. 그와는 대조적으로 기이하게 거대한 다리 부분. 그리고 등 뒤로 뻗은 얼음의 좌익과 환염으로 이루어진 불꽃의 우익.
?
“그레고르! 설마 빅토리아는?”
『물론 나도 여기 있지!』
?
갑주에서 들려오는 활발한 소녀의 목소리. 그레고르가 빅토리아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는 증거에 에스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됐다.’
?
이걸로 전부 해결할 수 있다.
?
“그럼 이제 맡겨주세요, 에스텔.”
?
그런 그녀의 기대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그레고르는 따스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후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에 있는 건 이미 사도라고 말할 수 없는 이타콰의 분신.
?
[캬아아아아아!]
?
그것은 짐승처럼 주변을 얼려버리며 날뛰고 있었다.
?
“그럼 시작해볼까.”
?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들리는 그레고르의 음성. 그리고 그것이 끝난 순간.
시간이 얼어붙었다.
?
?
?
?
=========================================================================================
?
잠깐 설정 이야기
?
작중 세계관 내에는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 역시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카다스 시 역시 본래는 선주 종족이라는 다른 종족의 땅이었지만, 4대 가문의 조상님들이 반란 혹은 혁명을 일으켜 빼앗은 땅이기도 하죠. 이런 특성 탓인지 카다스 내에서 이종족은 보기 힘듭니다만, 그래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인간이 변이한 이종족은 귀족 중에도 있을 정도예요.
?
이종족 외에 다른 인종 역시 존재하는데, 빅토리아의 혈통인 남부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남부인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어두운 피부색.
밝은 모발 색.
피부에 새긴 문신.
?
다만, 이건 인종적 얘기고 문화적인 면에서 남부인은 다시 셋으로 분류됩니다.
?
-카다스 같은 왕국 사회에 흡수된 쪽.
-남부 우림에서 외곽에 사는 원주민 부락에 가까운 쪽.
-우림 내부에 거주 중인 크메르 제국 비슷한 느낌의 거대 제국.
?
30년 전에 남부인을 사람으로 인정하게 된 이유는 세 번째 부류와 교역이 시행되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남부 개척민들이 주로 만나는 남부인은 두 번째 부류였기에, 남부인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이었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솔직히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거든요. 부족마다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아즈텍 수준의 식인 문화를 지닌 곳, 몽골 수준의 약탈 경제로 유지되는 곳, 약탈혼이 당연해서 납치/강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곳도 있거든요. 이런 부족들은 대부분 소탕된 지 오래입니다만, 이들을 겪은 남부 개척민들은 여전히 남부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참고로 남부인과 별개로 북부인이 있습니다만, 아직 등장하진 않았습니다. 남부인과는 다르게 이쪽은 왕국과 아예 적대 관계입니다. 왕국 국민과 북부인은 서로를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관계라고만 말씀드릴게요.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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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지도로 보는 세계 16. 프랑스 및 이베리아반도편|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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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일본 여행기 - 2일차(식사편)| 스틸이미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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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7 | 64 |
4 댓글
마드리갈
2021-06-13 16:14:52
그레고르의 태도, 정말 시프터즈 초기의 그 그레고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성장했어요!!
그래서 읽으면서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어요. 역시 빅토리아가 감동받을 만해요.
에스텔의 전황은 꽤 험난하군요. 게다가 문제의 그림자의 계략은 에스텔의 사고보다 훨씬 앞서 있었고...
이제, 에스텔이 확실히 혼자가 아니네요, 그레고르도, 그리고 빅토리아도 왔어요. 그리고 이전보다 더욱 발전해 있는 모습으로...
남부인 중 두번째 부류는 확실히 꺼려지네요. 식인과 약탈이 당연시되는 부족도 있는, 그야말로 미개인 그 자체네요. 브라질이나 파푸아뉴기니 등의 밀림지대에 점재하는, 문명과의 접촉이 없는 고립부족(Uncontacted Tribes)들의 행태가 저럴 것 같네요.
북부인도 있군요. 게다가 북부인은 왕국과는 완전히 적대관계...
Papillon
2021-06-25 01:53:59
물론 남부인이라고 해도 결국 인종과 지역에 따른 구분에 불과한지라 모두가 그런 위협적인 부류는 아닙니다. 일부 부족은 오히려 평화주의적이었죠. 하지만 땅과 자원, 그리고 가축이 필요했던 개척민 입장에서는 굳이 그들을 구분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SiteOwner
2021-07-01 19:28:33
빅토리아의 내면, 그리고 그레고르가 그녀에게 준 외부자극을 보니 생각나는 게 많이 있습니다.
이미 14년전도 더 전의 상황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당장 내일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위독했고, 진통제가 없으면 혼자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하루에 10시간도 허락되지 않았지만 깨어 있을 때에도 그저 불안함이 가득할 뿐이었는데...유일한 가족인 동생이 없었더라면 저는 2007년의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더 이상 바깥 땅을 스스로의 힘으로 서지도 못하고 입원중인 병원에서 목숨을 다했을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때가 생각나다 보니 빅토리아의 눈물이 남의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후회고 무엇이고 간에 살아남아야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레고르가 빅토리아에게 준 외부자극이 그래서 더욱 고맙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에스텔의 전투는 정말 경이롭습니다. 분명 위험한데다 본의아니게 적에게 생각을 따라잡혀 있어 크게 동요할 수도 있는데, 최소한 그렇게 갑자기 불리해진 건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레고르와 빅토리아도 왔습니다. 이제는 상황을 바꿀 일만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종차별이 존재하는데 과거에는 어땠을지...
사람 아닌 것 취급을 한다는 게 이렇게 무섭습니다.Papillon
2021-07-11 11:50:40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으니까요. 결국, 후회도 기쁨도 살아남은 자의 것이니.
당장 흑인이나 아일랜드인을 상대로 한 인종차별이야 유명했지요. 세계관 내의 인간 목장과 마찬가지로 교배를 통해 필요한 노예를 생산하기도 했고요. 특히 아일랜드인 노예는 가격이 쌌기 때문에 일부러 흑인과 교잡종을 만들기까지 했다고 할 정도니 실로 참담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