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 서글픕니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됐는지는 얘기가 길어지니 하나씩 얘기할게요.
(1) 어제(5일) 아침 카톡으로 알림이 왔습니다. 도서관에서 대출한 도서의 반납기간(2주)이 다 되었으니 반납해야 한다는 얘기였죠. 이 알람이 전날에야 딱 한 번 오는 게 웃기긴 합니다. 뭐 저처럼 주말과 주중의 구분이 없는 사람에겐 어차피 상관없지만요. 하지만 저는 새벽까지 자잘한 추가 번역이나 기타 작업을 하느라 새벽에야 일이 다 끝났고, 이미 해도 밝아버렸겠다 싶어 잠을 안 자고 아침 겸 점심으로 군만두를 대강 구워먹기로 했습니다.
(2-1) 그리고 지난 주에 구입한 디지털 피아노가 도착하고 토요일에 PC 연결용 USB 케이블도 도착했다 보니, 잠이 달아난 김에 PC 연결(모바일은 이미 블루투스를 통해 주말에 성공했습니다)을 제대로 해봐야겠다 싶어 해봤습니다. 하지만 피아노를 PC에 외부장치로 설치해도 제가 원했던 사이트(Multiplayer Piano)하고는 연동이 안 되더군요. 그 때가 7시쯤이라 제조업체나 판매업체는 전화를 당연히 안 받고, 인터넷을 계속 뒤져도 'USB 케이블 연결하면 잘 됩니다'만 나오고 정확히 어떻게 하는지는 안 나왔습니다.
(2-2) 그러다 보니 성질을 내며 연구를 거듭한 끝에 9시가 되자 업체에 전화를 걸어 해결하려고 한 순간, 문제가 엄청 간단하게 풀렸습니다. 제가 주로 쓰는 브라우저가 파이어폭스인데, 파이어폭스에서는 WebMIDI가 지원이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Microsoft Edge로 가서 했더니 잘만 연동이 되더군요. 그래도 연동이 되니까 기분이 좀 풀어져서, 한국인하고도 어울리고 외국인(게다가 취향이 신스웨이브로 동일함, 캐나다 출신)과도 마음이 맞아서 같이 합주하기도 하고 즐거웠죠.
(3) 그러다 보니 안 자고 버텼던 게 슬슬 피곤해져서 눈을 잠깐 붙였습니다. 일어나보니까 오후 4~5시쯤 됐더군요. 순간적으로 (1)의 카톡이 생각났죠. 오늘 책 반납해야 하는데. 그냥 푹 자고 하루 정도 늦은 뒤에 가도 상관은 없었습니다. 특별히 더 빌릴 책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냥 푹 잘까 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첫 번째 선택, '안 자고 도서관에 가기'를 선택했습니다.
(4) 도서관은 보통 6시에 닫으니, 저는 택시를 잡아타고(버스를 타도 되지만 내리는 곳이 애매하고 가뜩이나 도서관이 언덕 위에 있습니다) 얼른 가서 책을 반납했습니다. 모 게임회사 대표님의 차기작의 소재가 되는 외국소설이 생각나 다시 빌리려고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대출불가더군요. 그래서 꿩 대신 닭으로 '디테일 사전(도시 편)'이라는, 글쓰기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책을 빌려왔습니다. 돌아올 때는 물론 버스를 탔죠.
(5) 기왕 나왔으니 외부 활동도 해봐야겠고,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랴 싶어 오락실에 들렀습니다. 평소대로 펌프 잇 업을 하면서 최대한 땀을 뺄 생각이었죠. 일상이 단조로운 저에겐 그게 가장 과격한 활동이고 또 운동도 됐으니까요. 저질 체력이라 오래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숨쉴 때마다 가슴이 땡길 정도로 땀을 뺐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때, 앞서 하고 있던 고수 게이머들이 '9시 됐는데 가야겠다' 하면서 우르르 빠지더군요. 저도 빠질까 했죠.
여기서 저는 두 번째 선택, '나온 김에 최대한 몸을 움직이기'를 선택했습니다.
(6) 생각대로 땀을 엄청 흘리긴 했는데, 집에 돌아가려면 언덕을 두 개나 넘어야 했죠. 그러다보니 휘청휘청하고 중간에 쉬어가면서 집에 도착했습니다. 이 때가 약 10시 반인가 됐어요. 땀도 엄청 흘렸겠다, 목욕을 하려고 플라스틱 욕조를 꺼내서 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미리 큰 일을 보는데, 유튜브 영상에 마인크래프트의 성인게임화와 관련하여 셧다운제 반대 영상이 올라왔더군요. 제 일하고도 관련이 있는지라, 저는 물을 틀어두고 상술한 주제와 관련된 국민청원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정신이 팔린 사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욕조에 목욕물을 넘치도록 받은 것. 이 때가 11시였습니다.
일단 물이야 뭐 나중에 청소라도 할 때 쓰면 되겠다 싶어 갖고 있는 대야를 다 가지고 나와서 옮겨 담았습니다. 그래도 약 3/4 정도 남았고 더 담을 곳이 없었기에, 물을 퍼다가 화장실도 대강 청소하고 했습니다. 하지만 솔질 소리가 거슬렸는지 아니면 다른 일 때문인지 아랫층에서 언성이 높아지더군요. (무슨 말인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눈치 없는 저라도 이건 위험하겠다 싶어 청소는 당연히 그만두고 욕조에 몸을 담그고 목욕이나 얼른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아랫층에서 투덜투덜하고 말리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장담할 순 없지만 물소리가 조금이라도 더 들리면 올라와서 문 두드리고 따질 기세였습니다. 결국 목욕은 포기하고 아직 뜨거운 물이라 머리를 감고 세수에 발만 씻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목욕물은 욕조의 반절로 줄어 써도 될만했지만, 할 수는 없었죠. 그러는 사이에 시계는 11시 반에 거의 닿았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쓰지 못한 물은 청소에 써야겠다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간만에 화장실도 각잡고 빨랫비누에 솔질하며 청소하고, 싱크대도 역시 행주 빨아서 제대로 닦아준다고. 그래도 물이 남으면 어정쩡하게 남은 빨래를 하는 김에, 세탁기에 수도꼭지로 물을 받는 대신 남은 물을 쏟아부어서 써야겠다고. 그러니까 바보같은 실수도 전화위복처럼 느껴지긴 하더군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화장실의 절반을 채운 대야와 욕조에 물이 한가득 채워진 걸 보니 굉장히 씁쓸해졌습니다. 특히나 원래 목적인 목욕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말이죠. 네, 그 많은 물로 최대한 청소를 열심히 하고 그렇게 흘린 땀을 다시 물 받아서 목욕하고 씻으면 됩니다. 아무렴요.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실수한 건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다시 생각해 보면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기면 되는 일인데, 오늘 하루를 저답지 않게 알차게(?) 보내서 그런지 심적인 충격이 더더욱 강했습니다. 위의 상황들 중 하나에서 반대로 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안 생기지 않았을까? 애초에 10시가 넘었는데도 제딴에는 깔끔하게 목욕하고 푹 자겠다는 생각을 한 것부터가 미련한 짓 아닐까? 샤워만으로도 충분했던 걸 왜 목욕하겠다고 그랬던 걸까? 국민청원이니 뭐니 하는 것에 한눈만 팔지 않았어도 물낭비는 최대한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우울증 약이 아직 남아 있는 게 다행이네요. 오늘은 작업이고 게임이고 뭐고 그냥 일찍 자야겠습니다.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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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1-07-07 12:43:13
뭔가 게임에서의 선택지 분기같은 감각으로 생활하셨네요.
사실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삶도 본질적으로 다를 건 없을 것이고 저 또한 예외는 아니지만, 이렇게 정리된 레스터님의 일상은 또 새로운 느낌으로 읽히고 있어요.
너무 우울해 하실 건 아니라고 봐요. 그래도 최소한 허송세월한 게 아니면 된 거라고 봐요.
그럼 기분전환 잘 하시리라 믿어요. 요즘 연일 비가 많은데 특히 우울해지지 않도록 조심해 주시길 당부드릴께요.
Lester
2021-07-10 09:36:45
어찌저찌 싱크대와 화장실 청소를 끝냈지만 그래도 욕조에 물이 남아서 어정쩡한 양의 빨래를 끝낸다고 들이부었고, 그래도 물이 남았길래 버리고 처음부터 새로 받기는 애매해서 그 상태로 물을 채워서 목욕을 마쳤네요. 다만 뜨거운 물을 약하게 틀어서 그런지 살짝 추웠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나름대로 물낭비 안 하고 최대한 알차게 썼으니 다행입니다. 다만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해야겠죠.
SiteOwner
2021-07-12 19:46:57
간혹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물 관련으로 곤혹스러웠던 적이 있기도 해서 많은 부분에서 공감합니다.
꽤 오래전의 일이었는데, 목욕물을 받는다고 하다가 중간에 급히 다른 일이 생겨서 그걸 끝내고 왔는데 이미 욕조 안에서는 물이 만수위가 된 건 물론이고 마구잡이로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것으로 별의 별 욕도 다 듣고 그랬습니다. 뭐 그때 일을 지금 탓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간이상수도를 쓰던 열악한 환경과 시대 탓으로 돌려야겠지요.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Lester
2021-07-12 23:00:20
코로나 4단계 때문에 어디 나갈 일이 없기도 하고, 다른 곳에 복붙하고 있던 소설은 반응이 시원찮은데다, 본업인 번역 역시 (관계가 아닌 업무적인 감각에서)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이래저래 침울합니다. 별도의 글을 쓰기는 하겠지만 사회적 매장을 당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