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블레어에게 물었다. 가능한 한 태연한 상태를 가장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이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
“야하? 알고 있잖아? 그치~.”
?
블레어는 내 말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싱긋 웃어 보일 뿐, 이 이상의 정보를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거짓말이야.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블레어의 말을 부정하며 녀석을 쫓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러질 못했다.
나 역시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것이다. 오드리가 이미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
“증거는 있나?”
“히히히. 지금 진심으로 묻는 거야~?”
?
블레어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실실거리면서 웃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에라도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지만, 나는 전력을 다해서 인내했다.
지금은 참아야만 했다.
오드리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닌 녀석이다.
?
“냐하. 정말로 몰랐던 모양이네? 이건 의외인데~?”
“닥치고 대답이나 해라. 증거는 있나?”
“냐하하. 내가 역으로 묻고 싶은데 말이지. 저기 혹시 후배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
나는 녀석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오드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적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나치게 상심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
“냐하하하. 사랑받는다는 건 재미있네? 아껴주는 바람에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다니~. 정말 재미있지 않아?”
“닥쳐!”
“냐하하하. 싫은데~. 나는 비웃고 싶거든. 소중한 사람의 이상도 눈치채지 못한다니 말이야~.”
?
빌어먹을.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지만,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녀석이 말하는 건 모두 사실.
여기서 욕을 먹어야 하는 건 전부 나였다.
?
“후배의 성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내가 맞춰볼까?”
?
어느새 가만히 앉아있는 나에게 달라붙은 녀석은 달콤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
“선택을 제대로 못 하고, 다른 사람이 말해줘야만 선택해. 무언가에 심각할 정도로 의존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하면 싫어하지~. 어때 내가 정확하게 맞췄을까~?”
?
혹시 관찰이라도 한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녀석은 오드리의 상태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내 반응을 본 녀석의 입가에서 미소가 짙어졌다. 아무래도 자신이 정답을 말했다는 걸 확신한 모양이다.
?
“냐하. 그건 사실~ 봉사 종족들의 전형적인 모습이거든~.”
“봉사 종족?”
“그래, 봉사 종족. 신을 모시고 평생 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종족 말이야~. 그 녀석들은 신에게서 벗어나면 안 되기 때문에 항상 그런 상태야~.”
?
녀석이 말을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오드리가 보였던 행동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
‘젠장! 왜 눈치채지 못한 거지?’
?
확실히 내가 기억하는 오드리는 저런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당찬 성격이었고, 나보다 강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오드리가 저런 상태가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던 거지?
?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
찾아야 했다. 오드리를 인간으로 되돌릴 방법을.
?
“되돌릴 방법 같은 건 없나?”
?
나는 망설임 끝에 녀석에 물었다.
블레어가 어떤 대가를 요구할지 모르지만, 이것만큼은 반드시 알아야 했다.
?
“냐하~. 참 웃기는 말이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있지, 너는 스테이크를 소로 돌려놓을 수 있어? 똑같은 얘기야~.”
?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절망뿐이었다.
이전과 같은 오드리는 없다. 돌려놓을 수단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 무거운 진실이 내 가슴을 짓눌렀다.
?
‘제길,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
정말 방법이 없을까? 녀석이 말하지 않았을 뿐 또 다른 수단이 있지 않을까?
만약 정말로 아무런 방법도 없다면, 지금까지 난 대체 무엇을…….
?
“그런데 굳이 원래대로 돌릴 필요가 있을까나~?”
?
그때, 그런 내 귓가에 블레어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매혹적인 그 목소리는 내게 다른 선택지를 말하고 있었다.
?
“무슨 헛소리를…….”
“냐하~. 정말 헛소리일까? 굳이 후배가 인간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없잖아~?”
“인간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
내 귓가에서 속삭이던 녀석은 뒤로 물러나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평소와는 달리 아름다운 아가씨처럼 입고 온 녀석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서려 있었다.
?
“사람은 왜 사람일까~?”
“네놈이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철학적인 문제로군.”
“냐하~. 그러지 말고 좀 생각해 봐~.”
?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의아한 시선으로 녀석을 바라보았지만, 블레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웃고만 있었다.
한참 동안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방 안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가득했고, 내 눈에는 불안감이 깃들었다.
?
“흐흥~. 이럴 때는 둔하네. 어쩔 수 없지.”
?
결국, 침묵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블레어였다.
?
“사람이란 건 그냥 고깃덩이야. 살아있고 생각하는 거 말고는 특별할 게 없다고~.”
?
인간이라는 것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태도. 실로 살인귀다운 발언에 나는 일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지?”
?
정신을 차린 내가 매서운 눈으로 블레어를 쏘아보았지만, 녀석은 약간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입가를 핥았을 뿐.
?
“야햐~. 정말 모르겠어? 굳이 인간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거지~.”
?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깃펜에 꿰뚫린 상처가 생겼던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렸다. 작은 흉터 하나 남지 않은 그 손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닌 기괴한 촉수의 뭉치에 가까웠다.
?
“인간을 포기하면 간단하잖아~? 그냥 후배가 그렇게 살게 하면 돼~.”
“그렇게 되면 오드리는 외톨이가…….”
“왜 외톨이가 된다고 생각해~? 네가 함께 있어 주면 되잖아~.”
“뭐라고?”
“말 그대로야~.”
?
녀석은 두족류와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
“그레고르~. 너도 우리처럼 인간이기를 포기하자고~. 그러면 언제나 후배 곁에 있을 수 있어~.”
“나는…….”
“아, 혹시 다른 아이들이 걱정되는 거야~? 야하! 역시 상냥하네. 그러면 그 애들도 모두 똑같이 만들어줄 게~. 그렇게 되면 모두 해결되는 거야~.”
?
녀석은 바닥을 미끄러지듯 내게 다가왔다. 마치 문어나 오징어와 같은 기괴한 움직임이었다.
?
“있지, 그거 알아~? 사람을 포기하면 정말로 좋아~. 늙지도 않고, 더 강해질 수 있어~. 거기에 다른 것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고~.”
“…….”
“사도가 되기 전에 널 괴롭혔던 돈도, 명예도, 주위의 시선도~. 아무것도 관계없어진다고~. 그저 영원히 그 애들과 함께 즐겁게 살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
어느새 녀석의 얼굴이 내 코앞까지 와있었다. 아주 조금의 움직임으로 키스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 녀석의 차가운 숨결에 나는 순간 움찔하며 머리를 뒤로 빼려고 했다.
하지만 블레어는 내가 도망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키스하는 연인처럼 내 머리를 부여잡고는 블레어는 매혹적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
“그러니까 우리랑 함께하자~. 내가 최고의 즐거움을 줄 테니까~.”
?
녀석은 혀를 내밀어 내 입가를 핥았다. 순간적으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인간이 아닌 녀석의 힘을 이길 순 없었다.
?
‘아니, 정말 그래서일까?’
?
문득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속삭였다.
정말로 그래서 녀석을 밀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강림하지 못한다고 해도, 마법을 쓰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것 아닐까?
나는 왜 녀석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는 거지?
?
‘갈등하고 있는 거야.’
?
녀석의 제안을 듣고 나서, 진심으로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
“나는…….”
?
그렇게 내가 녀석의 말에 대답하려는 순간, 창밖에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
콰앙-!
나는 소리를 듣자마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순히 폭발 때문이 아닌 그것에 실려있는 기운 때문이었다.
?
‘이건 신력!’
?
그것도 내게 익숙한 두 신력이 충돌하고 있었다.
하나는 티나 크루거의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드리의 것이다.
?
“흐응~. 바보가 내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나 보네~. 아까워라~.”
?
나는 입맛을 다시는 블레어를 뒤로 한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
‘이건 위험해!’
?
오드리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지로 싸워보지 못했다. 티나 크루거의 인격을 생각하면 끔찍한 꼴을 당할지도 몰랐다.
사도의 힘이 있으면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전력으로 땅을 차며 오드리에게로 향했다.
제발 모두 무사하기를 빌면서.
?
?
*** ***
?
?
‘위험해.’
?
오드리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눈앞의 상대는 분명 그레고르를 찾고 있었다. 거기에 이렇게 병력을 끌고 온 걸 보아서 긍정적인 의도 역시 아니었다.
문제는 그레고르는 지금 사도 강림을 시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그레고르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차토구아와 강림 불가의 계약을 맺은 상태. 그는 차라리 본인이 죽을지언정 이를 어기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
‘내가 막아야 해.’
?
오드리는 굳은 표정으로 티나 크루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티나 크루거를 묶어두기 위한 계획이 계속해서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녀가 한 가지 계산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티나 크루거의 인격.
?
“내가 분명 부르라고 했지?”
?
오드리가 바로 그레고르를 부르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티나의 목소리에는 짙은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투구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짜증이 가득 난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뻔했다.
?
“약간 교육이 필요하겠네.”
?
티나 크루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오드리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팔이 잘려 나갔는데도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철퍽-.
인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오드리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다. 아직도 팔에서 들리는 소리를 보아, 일종의 용해액을 사용해 뜯어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 사실에 집중할 수 없었다.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팔의 단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
“아아.”
?
거기에는 뼈도 살도 없었다.
꼭 검은색 젤리를 한 입 베어 문 것처럼, 걸쭉한 검은 액체만이 가득했다.
그 형상을 오드리는 본 적이 있었다.
형태 없는 자손(Formless Spawn). 그녀가 계약한 옛 군주, 차토구아의 봉사 종족은 모두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억해버렸다. 자신이 잡힌 첫날 무슨 일을 당했는지.
잡힌 첫날, 의지를 빼앗긴 그녀는 차토구아의 무녀가 되었다.
차토구아의 무녀가 된 의식으로 그녀는 차토구아의 체액이 섞인 기괴한 액체를 마셨다.
그 액체의 정체는 다름 아닌 형태 없는 자손의 유체였다.
체내로 들어간 그 유체는 그녀의 몸과 하나가 되었고. 그리고 그다음에는.
?
“아아아아아!”
?
잊고 싶었던 진실에 그녀는 울부짖었다.
체내로 들어간 형태 없는 자손은, 오드리라는 인간의 세포를 하나하나 잡아먹었다. 오드리라는 인간이 지닌 특성은 모두 형태 없는 자손이 흡수당했고, 최후에는 인간을 위장한 껍질만이 남았다.
?
‘나는 누구지?’
?
오드리일까? 아니면 그저 그 겉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괴물일까?
묻고 싶어도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
“뭐야, 식모인 줄 알았는데 애완동물이네? 이런 걸 키우다니 그 녀석 역시 병신 같은 취향이네.”
?
그런 오드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티나 크루거는 잘려나 간 그녀의 팔을 벌레라도 되는 것처럼 짓밟았다.
철퍽-.
땅에 떨어트린 푸딩처럼, 팔 형태를 하고 있던 부정형의 검은 액체가 뭉개져 흩어졌다.
?
“하하하하하.”
?
오드리는 웃었다. 하지만 눈에서는 눈물 대신에 검은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이미 늦었다.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고 여겼는데 모두 늦어버렸다.
이제 자신은 선배를 방해하는 방해물일 뿐.
?
‘미안해요, 선배.’
?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선배의 방해물이 될 수 없었다. 괴물로 살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녀석들을 처리하고 사라져야 했다.
?
“강림.”
?
세상을 진흙이 뒤덮는 것 같은 감각과 함께 오드리의 몸이 갑주로 뒤덮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지만, 마음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쾅-.
땅을 박차며 오드리는 티나 크루거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이 마지막 싸움이라고 생각하면서.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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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갈
2021-10-31 14:01:44
재등장한 블레어의 저 끔찍한 말투는 정말 소름돋고 기분나쁘긴 한데, 발언의 내용에 폐부를 찌르는 게 있네요. 오드리의 상태에 대한 굉장히 중요한 정보 그 자체도 있고 또한 "스테이크를 소로 돌려놓을 수 있어?" 라는 말에서는 분명 분개할 수밖에 없지만 딱히 반박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오드리의 상태가 비가역적이라는 게 시사되니...
오드리는 규화목같은 상태인가 보네요. 나무의 세포를 구성하는 탄소가 규소로 다 치환되어 나무의 모습을 하되 더 이상 식물의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처럼...그래서 그 운명을 안고 최후의 결전을 감행하려는 거네요.
Papillon
2021-10-31 21:01:54
사실 오드리가 받은 처치는 일종의 축복이기도 해서 더욱더 되돌리기 쉽지 않습니다. 사실 차토구아의 신자라면 저런 처치를 받는 건 영광스러운 것이거든요. 물론 강제로 받은 입장에서는 도저히 축복이라고 여길 수 없겠지요.
SiteOwner
2021-11-21 13:58:04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블레어가 미친 살인귀이고 그의 생각 자체가 정상적인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블레어의 말이니까 전부 버려야 한다는 담론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 뼈아프게 느껴집니다. 그레고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
묘사된 블레어의 퇴폐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은 정말 무섭습니다. 그냥 흉악한 괴물이라면 그러려니 싶은데 그것도 아니고...
티나 크루거의 오만함은 마이너스가 되면 되었지 절대로 플러스가 될 리가 없는데, 과연 어떻게 될지...
적어도 해피엔딩은 아닐 것 같습니다.Papillon
2021-11-28 16:20:51
악인이기에 오히려 냉정하게 판단할 수도 있겠죠.
사실 불편한 진실은 아무나 말하기 힘든 내용이기도 하고요.
티나 크루거의 결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게 될 것입니다. 언급하신 것처럼 그리 해피 엔딩은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