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08학번이니까 2007년쯤에 수능을 봤겠죠 아마. 이젠 뭐 기억나지도 않네요. 어디로 갔는지, 점심을 어떻게 대충 때웠는지, 수능 끝나고 어땠는지가 수능철만 되면 기억납니다. 아주 간단했어요. 아버지가 저 데리러 차 가져오셔서는 간단하게 물으셨습니다.
"끝났냐?"
"네."
"수고했다. 뭐나 먹으러 가자."
그리고 한옥마을에서 짜장면 먹고 귀가했죠. 그리고 평상시와 다름없는 평일을 보냈습니다. 제가 원체 재미없는 사람이라서요. 수능 끝난 고3은 막 날아다닌다던데 저는 그 때 대체 뭘 했는지 생각이 안 날 정도로 무미건조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야자 시간에 남들처럼 붙잡혀 있지 않고 자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보니 그 해방감(?)이 크게 와닿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렇게 전북대 인문학부(그마저도 1년 뒤에 사학과로 통폐합)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4년의 방황을 거쳐 후에 아는 사람만 알아주는 게임번역가가 되었죠. 아주 간단하죠? 고등학교 내내 '이걸로 네 미래가 좌우되는 거다'라고 들었던 거랑은 딴판이었습니다. 물론 어느 대학을 나왔냐는 것 자체가 크게 작용하긴 하지만, 학과까지 들여다보진 않는다는 걸 감안하면 글쎄요...
꼴찌 동경대 가다(원제: 드래곤 사쿠라)에서 시험을 편하게 보는 법 중에 하나가 '뭐야 별 거 아니잖아'라는 마음가짐이라고 합니다. 옛날 명언 중에 하나인 '이 또한 지나가리라', (아마도) 성경의 '하느님은 이겨낼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와 일맥상통하죠. 그 당시의 제가 이런 명언을 마음에 품고 수능을 대충 봤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야자 시간 동안 경주마처럼 수능만 보고 달리진 않고, 인터넷을 뒤지며 이런저런 문화를 섭렵했더니 저만의 무언가를 찾은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저 나름대로도 노력했죠. 정말로. 안 그러면 부모님을 뵐 낯이 없으니까.)
현재 제 지인들 중에 수능을 볼 만한 나이의 사람은 없습니다만(20대 한 명이 있는데 대학 진학을 보류중입니다), 수능을 앞두거나 본 사람이 있다면 고등학교 내내 공부에 매진하는 것은 학생의 신분상 맞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라는 것만큼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수능을 잘못 봤다고 자기 목숨을 끊거나 하는 일이 벌어진다거나 할 때마다 슬프죠. 재수를 할 여건이 안 되더라도, 자기 재능을 알고 있으면 어떻게든 꽃피울 방법이 있을 터인데. (뭐 저라고 재능을 꽃피운 건 아니라서, 언제 떠나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6시가 지나면 고3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서 연말이 한껏 떠들썩해지겠지만, 코로나 때문에 옛날만큼 시끄럽진 않을 것 같네요. 제가 사는 동네가 번화가랑 거리가 있어서 고3들 보기도 힘들기도 하고... 뭐, 그저 수능이라는 한 고비를 무사히 넘긴 걸 축하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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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나왔던 게임번역의 후속편입니다. 정확히는 그 다음 달인 8월에 있었던 일인데 이제 생각나서 써 봅니다.
정확한 사정은 이렇습니다. 해당 번역과 관련이 있는 팀 동료가 좀 더 정확한 검수를 위해서 저한테 잠깐 검토해 달라고 했답니다. 듣기로는 모종의 일정이 있는지라 급히 작업했고 개발자도 중개인의 한국인 친구도 '나쁘지 않네'라고 했다네요. 그런데 제가 봤을 때는 이전 글에 적었듯이 영 아니었어요. 중요한 부분은 남아있지만 미묘한 포인트도 사라지고 쓸데없는 문장부호도 들어가는 바람에 문장을 분위기에 안 맞게 틀어버렸거든요. 그래서 저는 "의뢰인이 됐다고 한다면 나야 아무 상관없지만, 내 기준으로 봤을 때는 영 아니다"고 답변하고 검수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괜히 저걸 제 실력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통과시켜서 덤터기를 쓰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 결과, 8월에 저한테 다시 연락이 와서 봤더니 "이거 (처음부터) 재작업해야 하는데 시간이 있느냐" 물어보더군요. 그 쪽에서 알아서 하기로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팀 동료 왈, 자기랑 협력한 퍼블리셔가 "번역 품질이 열악해서 해당 일정에 맞출 수 없다, (한국어) 원어민이 말한 것 같지 않다"고 했다더군요. 그러면서 개발자가 하는 말이 '이미 기존 번역자가 자기 몫의 번역료를 가져가는 바람에 재번역에 대한 돈은 더 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거야 철저하게 확인하지 않은 개발자 잘못 아니냐고 팀 동료한테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제가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가에 해주겠다고 했습니다만, 이후 아무 연락도 없어서 (오늘) 물어봤더니 결국 퍼블리셔가 직접 작업했다고 합니다. 말이 그렇지 다른 사람을 썼을 거에요. 단가 때문이든 뭐든.
아무튼 그런 해프닝이 있는 대신, 팀 동료가 해당 개발자의 다른 차기작은 저한테 번역을 맡기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글쎄요? 해당 게임의 특색이 없으면 번역 실력을 갈고 닦는 데엔 도움이 되겠지만 저 자신을 알리는 데엔 별로 도움이 안 되거든요. 물론 거래처 확보, 그러니까 개발자와 친해져서 그 사람이 만든 게임을 독점(?)하게 된다는 이점은 있겠지만요. '갓겜(엄청나게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 때까지 천년만년 기다려 줄 수는 없겠지만, 나중 일이라는 건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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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스토리 RPG의 경우 현재까지 예고된 업데이트의 번역을 (일정을 착각하긴 했지만) 미리 끝내둔 덕분에 그 여력을 스톤샤드에 쏟을 수 있었는데,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개발자가 "너네 언어(한국어)가 읽고 싶을 만큼 깔끔하다, 모든 언어들 중에서 가장 멋지다"라고 덕담을 해줬습니다. 그리고는 조만간 모바일 버전이 나오면 "한국에 가장 먼저 발매하겠다"고 하더군요. 모바일 버전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텍스트는 원작을 따라가고 포팅 과정에서 달라지는 조작이나 몇몇 요소들만 추가 번역하게 될 테니, 어지간해선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고전게임을 많이 좋아하는 편인데, 스톤 스토리 RPG는 그 특유의 아스키 그래픽이 옛날 생각이 나게 해줘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RPG라는 점은 다소 마음에 걸리지만요)
남은 퀘스트 업데이트의 번역도 큰 무리 없이 번역이 끝나면 스톤 스토리 RPG는 더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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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댓글
마드리갈
2021-11-18 19:18:09
보통 수능 시행일이라면 추운 게 일반적이었죠. 이른바 입시한파. 그런데 오늘은 참 따뜻했어요. 수험생들이 여러모로 고생이 많을텐데 올해는 다행히도 춥지 않았으니 그나마 그 점만큼은 도움이 되었을까요.
제 경우는 수능 당일도 그냥 사설기관 모의고사 보는 것 같았어요. 시험이 끝나고 귀가하니까 그냥 곯아떨어졌던 것은 사설기관 모의고사보다도 더욱 정도가 더했지만...그때는 드래곤 사쿠라를 몰랐지만, 올해 2005년판 드라마 및 2021년판 드라마를 모두 시청하면서 시험당일에 대해 가졌던 태도가 그 드라마에도 거의 그대로 나오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겼죠.
그렇게 되었군요, 게임번역의 후일담은.
그리고 차기작 번역의 의뢰 이야기까지 나왔군요. 굉장해요.
게다가 레스터님의 한국어 번역이 그렇게 칭송을 받고 있군요. 축하드려요. 역시 긍지를 가지실 만해요.
Lester
2021-11-19 08:41:12
아무래도 악천후면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기 쉬운데 날이 따뜻한 덕분에 다들 활발하게 답을 써내려갔을 것 같습니다만, 한편으론 너무 풀어져서 안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실제로 으레 그렇듯이 지각은 물론이고 시험장을 아예 잘못 찾아간 학생들도 제법 되더군요. 본문에서 수능이 끝이 아니라고 적긴 했습니다만, 지각이나 시험장을 착각한 건 분명한 본인의 실수이니 더 말할 게 없다고 봅니다.
시험을 보고 와서 푹 잤다는 것은, 그만큼 사력을 다해서 뇌를 사용했다는 반증이겠죠. 수능 끝난 고3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하니 그날만큼은 온 에너지를 다 쏟아도 된다고 봅니다.
본문 2에 나온 차기작은 텍스트가 도착하긴 했는데 제작진이 (사실 아웃팅이 되는지라 미안하지만) LGBT 계열이라 고유명사나 호칭 번역이 굉장히 난해할 것 같습니다. 생긴 건 퍼즐 게임인데 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일단 텍스트를 자세히 봐야 대충 윤곽이라도 그려질 것 같습니다.
뭐 칭송까지야 있나요... 그나마 개발자가 "너희 한국에서는 (아마도 번역이 잘 돼서) 코 안 대고 마케팅에 큰 덕을 봤다"라고 덧붙인 걸 보니 분명히 큰 도움이 된 것 같긴 한데, 주변에서는 잘 모르다보니 체감이 안 되네요. 올해는 스톤샤드를 비롯한 대거 프로젝트에만 매달려서 그런지 내년에는 좀 당당해질 만한 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대왕고래
2021-11-18 20:54:26
수능때 어땠는지 기억도 안 나네요. 확실한 건 수학이 엄청 어려웠고, 돌아와서는 가뿐하게 털어버렸고, 성적 보고는 실망했던 거 정도네요. 뭐 이제와서 옛날 이야기고 흐릿하지만요.
번역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레스터님이 받은 평가는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Lester
2021-11-19 08:44:30
저도 뭐 (당시 내신등급제가 적용된지라) 4등급이어서 이래저래 쇼크를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북대도 결국엔 (당시에 좋아했던 역사의 영향도 있지만) 등급 맞춰서 간다고 3등급 사학과가 아닌 4등급 인문학부(사학)으로 들어갔네요. 그 와중에 인문학부는 특색이 없어서인지 모종의 이유인지 통폐합되다시피 하다가 철학과를 거쳐서 사학과로 갔고... 어차피 대학에서는 수업보다 전산원에서의 게임번역에 더 집중해서 그런지 남는 게 없었습니다.
저런 말은 대단한 것 같으면서도 립서비스 정도로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언제부터인지 마음놓고 기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SiteOwner
2021-11-30 23:08:05
수능시험, 참 오래전의 이야기지요. 하지만 그때 일은 생각납니다. 날씨는 정말 추웠고 문제는 돌아버릴 정도로 어렵고, 직후에 심하게 아팠지만 그래도 다같이 망한 시험이라서 그나마 덜 망했던 저는 운이 좋았던 것을 확인하고 그 아픔을 보상받았던 것. 그게 벌써 까마득한 날이었다는 데에서 놀라게 됩니다.
역시 시대가 달라지면 시험관련도 달라지는 것인지, 올해의 수능실시일은 따뜻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약칭에 "대수력" 과 "수능" 이 혼재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수능" 으로 일원화되던 것도 생각났습니다.
종사분야에서 인정받고 또한 신규 프로젝트 참여를 의뢰받는 것은 참으로 좋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날이 꾸준히 이어질 것이라 믿습니다. 그에 따라서 기뻐하는 방법을 향상시키는 것도 과제가 되리라 봅니다.
Lester
2021-12-07 20:08:53
인터넷을 뒤지다 보면 수능을 본 학생들이 자신의 아픔을 달래려는지 '불수능'이니 '물수능'이니 하고 얘기를 나누더군요. "거 봐, 나만 힘든 거 아니었어" 하고 말이죠. 뭐 그러거나 말거나 당장 놀려고 튀어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뭐 고등학교 생활을 다 바쳐서 공부했으니 머리 비우고 놀아도 되는 시기지만요.
어제(12월 6일) 기준으로 "노바디즈: 사후세계Nobodies: After Death"의 초판 번역을 마무리짓고 보내서 그런지 지금은 좀 한가합니다. 그 동안 일했으니 쉬어야겠다 싶어서 어찌저찌 아는 사람들과 제주도에 가려고 하는데, 이 추운 날에 어딜 돌아다니고 볼 게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냥 비행기표 끊지 말고 집에서 따숩게 있을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