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지 이 불길한 기분은?’
갑작스럽게 가슴을 파고드는 불안감에 에스텔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어째서인지, 지금 당장 일행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아니, 당황하지 말자.’
?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에스텔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금 그녀가 해야할 일은 고작 불안감 때문에 멈추기에는 너무 나도 중요했다.
에스텔의 시선이 눈앞에 있는 노인을 향했다.
눈앞의 노인은 겉모습만 보았을 때는 굉장히 추레해 보였다. 다리 역시 불편한지, 지팡이 없이는 제대로 거동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겉모습만 보고 노인을 얕볼 수는 없었다.
쿠엔틴 회장.
평민 출신이면서도 길드 연합의 회장이 된 이를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아마 이 나라 내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대체 왜 나를 부른 거지?’
?
오늘 아침 에스텔은 쿠엔틴 회장의 호출을 받았다.
그가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에스텔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애초에 그와는 그리 친밀한 관계도 아니었을뿐더러, 딱히 그가 자신을 부를 이유도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지금 에스텔과 그레고르가 머무는 장소는 쿠엔틴 회장이 제공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세뇌당한 오드리의 습격으로 집이 무너진 이후, 두 사람은 빅토리아와 같은 숙소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빅토리아와 보육원 아이들이 머무는 곳은 쿠엔틴 회장이 제공해준 건물이다.
?
‘아무래도 집주인의 뜻을 거스를 순 없지.’
?
자신의 가치관이 상당히 세속적으로 변했음을 깨달은 에스텔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가문을 나오고 소여라는 성을 버린 이후로는 이전처럼 고고한 기사처럼 살 수는 없었다. 아무리 잘난 기사라도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
‘잡생각은 그만하지.’
?
그녀가 선택한 길이다. 가문을 나선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그러니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그저 묵묵히 지금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나았다.
상념에서 벗어난 에스텔은 눈앞에 놓인 기다란 복도를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수수한 공간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어마어마하게 비싼 물건들도 도배된 장소였다.
예를 들면, 저 벽지. 겉으로는 아무런 문양도 없는 싸구려로 보였지만, 실상은 어지간한 오염은 자동으로 처리해주는 마법적인 소재였다.
외형이 수수해 보이는 건 아무래도 집주인의 취향이겠지.
에스텔은 다시 쿠엔틴 회장을 바라보았다.
집에 그녀를 초대해놓고, 그는 정작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복도를 걷고만 있었다.
?
“내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궁금한가?”
?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쿠엔틴 회장이 그녀에게 조용히 질문했다.
그 의도를 읽을 수 없었기에 에스텔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사실대로 말했다.
?
“솔직히 그렇습니다. 왜 저를 불렀는지 모르겠군요.”
“사실 나도 그렇다네.”
“네?”
?
초대한 사람이 자신도 왜 불렀는지 모른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
“생뚱맞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라네. 자네를 부른 건 내가 아니기 때문일세.”
“그렇다면 대체 누가 부른 것입니까?”
“스테파니, 내 비서가 자네를 불렀다네.”
?
익숙하지만, 그리 달갑지 않은 이름이 언급되자 에스텔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에스텔은 스테파니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굉장히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태도 때문인지, 에스텔은 스테파니를 긍정적으로 볼 수 없었다.
특히 빈민가에서의 사건 당시 노골적으로 에스텔을 비웃던 시선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
‘물론 그때 실제로 내가 잘못된 길을 걷고는 있었지만…….’
?
그렇다고 해서 굳이 그런 시선으로 자신을 볼 필요가 있었을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미 늦었다.
?
“이 방이네.”
?
어느새 에스텔은 목적지에 도달해 있었고, 고작해야 문 하나만이 그녀와 스테파니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
‘어쩔 수 없지.’
?
작게 한숨을 내쉰 에스텔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정갈하다 못해 삭막한 방의 정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차라리 감옥의 독방이 더 살가운 느낌이 아닐까?
스테파니의 방을 보고 에스텔은 그렇게 생각했다.
벽지나 바닥재를 붙일 생각이 없었는지, 나무 기둥과 석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가구 역시 침대와 옷걸이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는 깔끔하긴 했지만, 최소 20년 이상 된 것처럼 낡아 보였고, 옷걸이는 새것이긴 했지만 똑같은 옷만 여러 벌 걸려있었다.
?
‘대체 왜 이런 방에서 사는 거지?’
?
비고티라에게 어마어마한 거금을 투자하던 쿠엔틴 회장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설마 빅토리아에게는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해주면서 자신의 비서에게는 돈 한 푼 쓰기 아깝다고 여기는 것일까?
?
“착각하지 마시죠.”
?
그런 에스텔의 표정을 읽었는지, 스테파니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
“방이 이 상태인 건 제 취미입니다. 회장님의 뜻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받았는지, 그녀의 목소리에서 살짝 짜증이 묻어나왔다.
이를 들은 에스텔의 시선이 침대에 누워있는 스테파니에게로 향했다.
전에 본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냉담한 그녀의 얼굴이 눈동자에 비쳤다.
에스텔은 그녀의 상태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다쳤다는 말은 들었지만, 스테파니의 상태는 그녀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
“어떻게 된 거지?”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
대답하는 스테파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왠지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평소의 스테파니는 차갑게 식은 칼날과도 같았다면, 지금의 그녀는 깨진 유리 조각을 연상시켰다.
여전히 위험한 건 마찬가지지만, 언제든지 부서질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지금 에스텔이 보고 있는 스테파니의 몸 상태였다.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에스텔은 스테파니의 두 팔을 바라보았다.
그 어떤 무기보다 믿음직스럽던 그녀의 두 팔은 지금은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다.
왼팔은 고열로 지지기라도 한 것인지, 탄화된 피부만이 남아있었다. 화상의 영향인지 손가락 근육과 신경이 굽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른팔에 비하면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스테파니의 오른팔은 얼렸다가 녹인 고기처럼 시꺼멓게 죽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움직일 때마다 썩어버린 살점이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신체의 다른 부위 역시 양팔보다는 아니었지만, 드문드문 보이는 피부로 보아 상태가 정상은 아니리라.
?
‘사도의 재생력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럴 순 없을 텐데.’
?
무언가 재생을 방해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에스텔은 계속해서 추궁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스테파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스테파니는 유리알처럼 보이는 눈동자로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눈 역시 망가졌는지 초점이 조금 어긋나 있었다.
?
“제가 당신을 부른 건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안?”
“예. 솔직히 믿음직스럽진 않지만 그래도 다른 머저리들보다는 당신이 낫기 때문입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
분명 칭찬은 칭찬인 것 같은데, 어째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
“그래서 무슨 제안이지?”
?
스테파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호흡할 때마다 몸이 바스러져 나가고 있는데도, 그녀의 표정은 조금도 감정이 깃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시간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스테파니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
“사도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까?”
?
무심한 음성으로 나온 예상치 못한 제안에 에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
?
?
이건 현실일까? 꿈일까?
현실이라면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잔혹했고, 꿈이라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싶을 정도로 생생했다.
?
“아아!”
?
나는 눈앞에 쓰러진 빅토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은 움직일 수 없는 방향으로 틀어져 있었고, 그녀의 눈에서는 생기가 사라졌다.
?
‘아직 살아있을 거야!’
?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와 융합 변이를 시도했다.
융합 변이를 하면, 그녀에게 사도의 재생력을 나눠줄 수 있다. 그러니 죽지만 않았다면 어떻게든 그녀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녀의 몸은 내게로 흡수되지 않았고, 차갑게 식은 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이건 악몽이다.’
?
오드리를 지키지 못했고, 빅토리아 역시 지키지 못했다.
이런 현실이 있을 수는 없었다.
이것은 꿈이어야 했다. 아니, 꿈이기를 바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를, 지금 눈을 뜨면 빅토리아와 오드리가 나를 반겨주기를 계속해서 기도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나의 기대를 비웃었다.
?
“빌어먹을.”
?
사도의 투구 때문에 밖으로 흐르지 못한 눈물이, 내 시야를 가렸다.
대체 어떻게 해야 했단 말인가?
아니, 무언가를 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기는 했을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내 귀를 존 마이어스의 비웃음이 파고들었다.
?
“하하하하! 꼴 좋다. 이 몸을 성가시게 하던 여자다운 말로다!”
?
더는 그 너절한 본성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지, 녀석은 실로 유쾌하다는 듯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
“어떠냐? 잘난 듯이 행동하던 주제에 너는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그게 너 같은 천것의 한계다!”
?
내가 좌절한 것이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녀석은 낄낄거리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빅토리아의 뜻을 존중해 녀석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더는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녀석에게 다가갔다.
아직 몸을 회복하지 못했는지, 녀석은 도망가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
“그렇게 즐겁나?”
?
콰득-!
녀석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존 마이어스의 아래턱을 붙잡고 그대로 뜯어버렸다.
사도의 힘과 다중 부분 둔갑으로 증폭된 완력 덕에, 녀석의 아래턱은 푸딩을 베어 무는 것처럼 가볍게 떨어져 나갔다.
부글부글-!
더는 말할 수 없게 된 녀석의 목구멍에서 피거품이 솟아올랐다.
이제야 상황을 깨달았는지, 녀석의 눈에 공포의 감정이 차올랐지만, 나는 녀석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
“난 너를 죽이지 않을 거다. 그게 빅토리아가 원한 거였으니까.”
?
나는 작은 목소리로 녀석에게 속삭였다.
이에 녀석은 살짝 안도한 것 같았지만, 그건 고작해야 잠깐의 행복에 불과했다.
퍽-!
총알개미의 독침을 모방해 녀석의 체내에 독을 심었다. 녀석이 몸부림치기 시작했지만, 나는 거미줄을 모방해 녀석을 벽에 내걸었다.
?
“절대로 죽이지는 않는다.”
?
단지 극한의 고통을 줄 뿐.
어떻게 하면 녀석을 더 고통스럽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빅토리아의 원한을 갚아줄 수 있을까?
그 생각에 빠져들며, 나는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
“너 설마 그레고르냐?”
?
길드마스터, 제니퍼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보고 두려움을 느꼈는지, 늘 당당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와 함께 일하던 길드 동료들이 평소와는 다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서린 감정은 참으로 단순했다.
공포.
그들에게 나는 더는 동료가 아니었다. 자신들과는 다른 힘을 지닌 정체불명의 괴물이었다.
?
“하하하하.”
?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내 비밀을 알고 있는 친구들은 이제 에스텔 말고는 다 죽었다.
내가 동료라고 생각하던 이들은 전부 나를 괴물로만 보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계속해서 이곳에 있는 것일까?
?
‘인간을 포기하면 돼.’
?
그때 문득 블레어가 했던 제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혹시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머리가 복잡해서 답이 나오질 않았다.
?
‘여기에 있을 수는 없겠지.’
?
한 손에는 존 마이어스를, 다른 한 손에는 시체가 된 빅토리아를 든 채, 나는 길드 건물을 떠났다.
더는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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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1-12-05 15:54:34
에스텔이 의외의 상황을 맞이했네요...
쿠엔틴 회장과 스테파니의 재등장은 그 자체로도 심각한 문제로 이어질 게 예상되는데, 쿠엔틴 회장은 부른 사람이 자신이 아니고 이유를 모르고 스테파니는 사도가 되지 않겠냐고 제안을...스테파니의 몰골과 사도를 언급하는 말이 겹쳐 보이면서 섬찟함이 배가되고 있어요.
결국 빅토리아는 죽었군요. 그러나 빅토리아를 죽인 존 마이어스를 죽이지는 않고 극한의 고통을 맛보게 하려는 그레고르는 정말 이대로 괜찮은가요. 블레어의 제안 쪽으로 자꾸 기울어가는 것 같은데...
Papillon
2021-12-07 21:08:48
에스텔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맞닥뜨렸죠. 이것에 그녀에게 기회가 될지, 위기가 될지는 아직 비밀입니다.
빅토리아는 일단 리타이어입니다. 현재로서는 죽은 것이 맞습니다만, 이 이상은 스포일러라 말을 줄이겠습니다.
그레고르의 정신 상태는 지금 좋지 못합니다.
하지만 몇 가지 조건만 갖춰진다면 도약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SiteOwner
2021-12-11 17:37:20
스테파니의 상태가 영 말이 아니군요. 산송장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도 한데, 에스텔을 불러서 사도가 되고 싶지 않냐고 물어본 게 혹시 자신이 얼마 안 남은 것을 직감하고 에스텔이 사도를 계승하기를 원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스테파니든 에스텔이든 결정은 신중하게 내려야겠지만 둘 다에게 허락된 시간은 별로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빅토리아는 결국 죽었군요.
그리고 그레고르의 앞날이 블레어의 복안 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보이지만...Papillon
2021-12-19 12:30:43
스테파니의 상황은 정상이 아니지요. 두 사람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는 비밀입니다.
상황이 블레어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지요. 하지만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