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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심상치 않은 자세를 하고서 이쪽을 바라보는 윤진을 보자, 지온은 뭔가 폭풍이 한차례 지나갈 것으로 예상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만화부장이 대놓고 부원들 앞에서 한 부원에게 콕 집어서 경고를 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의 광경이다. 의외로, 윤진은 과장된 자세를 보여 줬음에도 불구하고, 격분한 나머지 길길이 날뛴다기보다는, 마치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 이야기하듯 차분하게 말하고 있다.
“그래,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그리고 그때 내가 했던 말, 절대로 잊지 말고.”
지온이 가만히 보니, 나디아 역시 지온이 말하자마자 바로 얼굴을 누그러뜨리고, 언제 그렇게 열을 내고 그랬냐는 듯 얌전해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지온으로써는 현재는 알 수가 없지만, 민을 비롯한 몇몇 부원들은 이 상황이 생소한 건 아닌 건지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고 있다.
“후...”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엉덩이를 뗐던 지온은 안도하며 자리에 다시 앉으려 한다.
“저기 선배...”
나디아가 아까보다 확 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눈빛은 조금 전의 당당함이 무색할 정도로 불안하게 떨린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지온은 나디아가 말하는 말투라든가, 자세 같은 게 살짝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여러 부원들이 보고 있는 상황이라, 그냥 좋게 끝을 맺기로 한다.
“그래, 미안하면 됐지... 또 실수하지 않으면 되는 거고.”
완전히 안심했다든가 하는 건 하지만, 나디아는 아까보다는 긴장이 많이 풀렸는지 아까보다는 꽤 편해진 얼굴을 하고 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된 것을 확인한 윤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다.
“자, 얘들아! 이제 ‘자유주제 토론’ 시간이니까, 재미있는 시간 보내자고!”
윤진의 입에서 ‘자유주제 토론’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저마다 크고 작은 긴장을 품은 채로 모여 있던 부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삼삼오오 모이거나, 아니면 혼자 앉아서 보던 책을 계속 본다. 언제 사건이 있었냐는 듯 말이다. 지온에게는 조금은 어색한 광경이지만, 다들 아무런 잡음도 없이 움직이는 걸 보면, 이 시간은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일단은, 자신의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지온이, 슬며시 윤진에게 다가간다.
“그런데... ”
지온은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윤진을 보고 말한다.
“여기 이 나디아라는 애한테 말한, 그 한마디 했다는 건 뭐죠?”
“아... 그거? 지금은 몰라도 돼.”
친절하게 이것저것 알려줄 것 같았던 윤진은 이상하게도 급히 얼버무리며, 말을 아끼려 한다.
“그건 차차 알게 될 거야.”
“차차 알게 될 거라니...”
지온이 되묻자, 윤진이 곧바로 말한다.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돼. 오늘은 그냥,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돼. 알겠지?”
“......”
지온의 ‘궁금해 미치겠다’는 듯한 표정을 보자, 윤진은 다시 한마디 더 한다.
“지금 다 말하자면 또 사연이 좀 길거든. 무슨 뜻인지 알겠지, 내가 이야기하려는 게?”
“네... 네.”
여전히 윤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렇게 대답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또 궁금하다고 말해 봤자, 시간만 더 잡아먹고 질질 끌 것 같다.
“그래, 다시 한번, 우리 만화부원이 된 것을 환영해.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윤진의 말을 듣고서 자리에 돌아가 앉아, 지온은 다시 책을 편다. 윤진의 환영하는 말을 들으니, 아까 있었던 일은 좀 잊을 것 같다.
한편, 민은 지온과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몇몇 또래들과 모여앉아 있다. 포니테일 머리를 한 남학생, 헤드셋을 끼고 물감을 뿌린 듯한 얇은 점퍼를 입은 여학생, 은발에 가까운 금발 머리에 보라색 세일러복을 입은 남학생, 그리고 청록색 머리에 트레이닝복 비슷한 옷을 입은 이레시아인 남학생 등.
“어제 그거 끝까지 본 거 맞냐? 나는 못 봤는데.”
헤드셋 낀 여학생이 말하자 민을 포함 둘러앉은 다른 부원들이 귀를 쫑긋거리다가, 이윽고 민이 입을 연다.
“야, 네가 왜 못 봐? 너 <셀렉트 원> 굿즈 집에 가득할 정도로 팬 아니야?”
“맞아, 맞아!”
다른 부원들이 민의 말에 맞장구친다.
“너 오늘 입은 것도 ‘코라’ 따라한 거잖아!”
“그래, 그래. 거기에다가 배지도 가득 차고 있고! 그 정도면 거의 작가가 인정한 팬 정도라고 봐도 되지. 안 그래?”
“아, 그건 맞는데, 어제 하필 어디 나갔다 오는 바람에 못 봤다고! 다들 이야기하는 그 중요한 장면을 실시간으로 못 봤어!”
그 여학생이 짜증을 내자 민이 얼른 맞장구를 친다.
“그래, 그러니까 본방송을 봐야 했는데! 맞지, 리카?”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리카라고 불린 부원은 한숨을 푹 내쉬는 것도 모자라, 마치 나라를 잃기라도 한 것처럼 울상을 지으려고까지 한다.
“야, 좀 진정해! 본방 사수 안 하면 어디 죽기라도 해?”
포니테일을 한 남학생이 리카의 옆에서 뭐라고 한마디 하자, 리카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네가 아직 몰라서 그래. 너는 본방 사수의 소중함을 잘 몰라.”
“아니, 본방이고 뭐고, 요즘 재방도 많이 해 주는데...”
민이 뭐라고 해도, 리카는 막무가내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무조건 본방이라니까!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그 반응은 본방에서밖에 못 본다고! 한번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 아마 저 선배도...”
“응?”
리카가 아무데나 가리킨 줄 알았던 손가락 끝은, 혼자 앉아 있는 지온을 향하고 있다.
“누가 나 부른 건가...?”
지온은 직감한 건지 바로 민과 친구들이 모여 있는 쪽을 돌아본다.
그리고 지온이 돌아보자마자, 리카는 기다렸다는 듯 얼굴이 밝아지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입을 연다.
“선배님... 아니, 오늘 새로 온 오빠!”
리카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지온은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고개를 돌린다.
“아니, 나는 왜?”
“선배님도 <셀렉트 원> 봤죠?”
“,,,,응?”
지온은 도대체 무슨 소리 하냐는 듯한 반응이다.
“내가 무슨 <셀렉트 원>을 본다고?”
“응? 선배님 딱 그거 보게 생겼는데요...?”
“에이, 무슨 소리야? 아직 그거 본 적도 없어.”
지온이 다시 한번 그렇게 말하자, 리카는 그제야 확 올라갔던 기대감을 한순간에 풀어 버리고, 한숨을 푹 내쉰다.
“하... 아니었다니.”
“난 또 뭐라고...”
지온이 머리를 긁으며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자, 리카는 또다시 <셀렉트 원> 본방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 그러니까,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고. 이번에는 완전히 기습적으로 당해 버린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음에는 내가 반드시...”
그렇게 리카의 말을 들어주고 있다가 문득, 민은 나디아 쪽을 돌아본다. 나디아는 아까의 그 잔뜩 열을 올리던 그 모습은 어디로 가고, 또래 부원과 마주 앉아서 평소의 만화책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이 신경이 안 쓰일 수는 없다. 아까 그렇게 큰 싸움까지 날 뻔했는데, 지금 아무 일도 없고 그게 쭉 이어진다는 게 더 이상하다.
지온 쪽도 한번 돌아본다. 여전히, 혼자서 재미있게 만화에 빠져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조금은 어색하다. 역시 혼자 있으니 조금 음침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걸 보니, 조금 있다가 한번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아무 데도 축축한 느낌은 나지 않는다. 문득, 앉아 있는 의자와 주위의 책상을 한번 손으로 쓸어 본다. 다행이다. 지금은 어딘가 습하고 은근히 짜증 나는 느낌 같은 건 없다. 지금은.
이윽고, 시간은 오후 4시를 훌쩍 넘겼다. 만화부 활동도 다 끝나고, 이제 다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어쩌다 보니 민과 지온, 나디아가 나란히 걷게 되었다. 사실 ‘어쩌다’는 아니다. 민이 적극적으로 같이 가자고 해서 이렇게 같이 가게 된 것이지만.
민을 사이에 둔 지온과 나디아는 서로 앞만 보며 어색하게 걷고, 민은 그 사이에서 어색하게 폰을 보며 걷는다. 그러면서도 양옆의 지온과 나디아를 조금 그렇게 걷다가, 나디아가 문득 지온 쪽을 어색하게 돌아보며 말한다.
“어... 그러니까, 또 말하는 건데... 아까는 정말 미안했어요.”
나디아가 더듬더듬 말하자, 지온은 뭐라고 한마디 할까 하다가도,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연다.
“에이, 뭘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래도 두 번씩이나 의심받으면 기분이 안 좋지 않나요?”
“아니야, 오히려 좋은 경험이 된 것 같은데.”
나디아는 지온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의외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윤진의 ‘영업’부터 시작해서 두 번째로 받은 의심까지 좋지 않은 상황의 연속이기는 했지만, 지온의 입장에서는 후배들 앞이니 좋게 대답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렇게 또 몇 걸음쯤 걸었을까.
“만화부, 괜찮지?”
민이 문득 입을 연다.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문득 주위를 돌아본다. 주위는 이제 본격적으로 주택가가 나온다. 그것도 정원이 딸린 집들이라면... 지온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지하철역 쪽으로 가야 하는데 지나친 게 아닌가!
“어... 잠깐...”
지온의 집은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기에, 바로 방향을 돌린다.
“야, 나 저쪽으로 가야 되는데... 그럼 내일...”
지온이 바로 뒤로 돌아서 지하철역 쪽으로 가기 전, 급히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려고 하는데...
“어라?”
지온에게는 처음 들어보는 여자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린다. 반면 민과 나디아는 이 목소리를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둘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민과 나디아보다 조금 큰 정도의 여자가 한 명 서 있는데, 지온이 보기에 얼굴과 헤어스타일은 민과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지만, 딱 봐도 나이는 10대가 아니라 20대 정도다. 누구일까, 이 사람은? 지온이 막 그런 궁금증을 품었을 때.
“네가 그 만화부 신입 부원이구나?”
“네... 네?”
그 여자가 지온을 보고 그렇게 대뜸 말하자, 지온은 조금은 놀랍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황당하기도 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일 테고, 또 학교에는 절대 올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인데, 지온을 어떻게 알고 인사까지 한다니? 하지만, 지온에게 더 놀랄 만한 건 그다음이다.
“안녕하세요?”
민이 그 사람을 보더니 익숙하게 인사하는 게 아닌가. 나디아 역시 민보다는 많이 어색해 보여도 반갑게 인사한다. 지온이 아무리 봐도 20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는 되어 보이는데, 민은 친근하게 말을 거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지온은 더욱 궁금증이 들어 민에게 살짝 물어본다.
“혹시 아는 사이야?”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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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SiteOwner
2022-07-23 15:38:17
여러 사람의 시선이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에 여러 사람의 시선이 가해지면 그것만으로도 비일상적인 상황이 태어날 수도 있고, 역의 상황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일촉즉발의 위기도 있었고 갈등이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 선에서 더 첨예한 충돌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인 듯합니다.
만화부 내에는 무엇인가 암묵의 룰 같은 게 존재하기도 하고, 통상적인 수준의 사고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도 횡행하고, 생면부지의 사람이 자신의 신상을 알고 있는 채로 접근하기도 하고...꽤 무서워집니다.
시어하트어택
2022-07-24 16:54:48
그나마 윤진이 만화부를 잘 잡아주고 있어서 큰 충돌은 안 일어나는 거죠. 윤진이 나디아에게 말한 '전에 해 준 말'이라는 건 또 뒤에 가 봐야 알겠지만요.
지온을 보고 아는 척한 저 여자는... 일단 만화부원은 아닙니다.
마드리갈
2022-08-01 20:50:01
갈등이 일단락되어서 다행이예요. 여전히 의문인 것도 있긴 한데...
리카같은 사람이 현실에 있다면 저는 겁부터 날 것 같네요. 왜 사람을 보고 대뜸 지레짐작하는 것인지...
그러고 보니 대학생 때 일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여러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사람들이 "너는 클래식 음악만 듣는 줄 알았는데..." 라고 반응했던 것이 있었어요. 누가 얼굴에 그렇게 써놓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학교에 올 일이 없는 20대 여자...대체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교직원같아 보이지도 않겠네요.
시어하트어택
2022-08-07 22:16:32
글쎄, 아무래도 저런 경우는 뭔가 자신감이 조금 부족하다 보니 다른 사람도 자신과 같은 취미를 공유한다는 것으로 자랑거리라든지 위안거리를 삼으려는 것이겠죠... 외모를 보고 취미라든가 관심사도 그러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사례는 저도 많이 겪어 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