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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랬었죠. 변호사님의 말을 듣고 보니까.”
“맞아.”
아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메이링은 사무실 벽 한쪽에 프로젝터를 켜서 마왕성 영상을 보여주며 말한다. 화면이 분할되어 표시되는데, 모두 제보자들이 찍어 보내온 영상들이다. 영상의 각도와 화면 속 마왕성의 크기는 각각 달라도, 그것들이 공통적으로 그 마왕성을 찍은 것이라는 건 잘 알 수 있다.
“그 마왕성 능력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걸 좋아하니 그런 조그만 공원으로는 성에 못 차겠지. 최근 들어서 패턴이 많이 불규칙해진 것도 그 심리상태를 방증하지.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초능력자인데 공원에서 그런 일을 벌인다는 제보를 받았거든. 그래서 겸사겸사 가 보는 거야. 그 마왕성 능력자를 거기서 잡을 수 있으면 좋은 거고.”
“그래요...”
아냐는 메이링의 그 말을 알겠는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또 의문이 생겼는지 또다시 메이링에게 질문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변호사님이 직접 가시는 거죠?”
“잠입이라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메이링의 답은 의외로 매우 간결하다. 짧은 대답이 아냐에게는 걸렸던 건지, 아냐가 되묻는다.
“잠입... 이라니요?”
“어, 그게 말 그대로의 의미도 있고, 비유적인 의미도 있고, 그렇지.”
“역시 변호사님다운... 말이네요.”
아냐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화면을 더 보다가, 무언가 또 궁금한 게 있는지 메이링을 다시 돌아보고 입을 연다.
“그런데, VP재단 요원들은 이번에는 하나도 안 가나 봐요?”
“아, 그 사람들도 요즘 바쁘대. 단순히 바쁜 게 아니라, 제 코가 석 자라서. 그래서 오늘은 나한테 다 부탁하더라. 안 그래도 말썽을 부리는 녀석들은 더 많아졌는데.”
“그래요... 혹시 저희도 가야 하는 건가요...”
“가게 되면 내가 다시 알려줄 테니까, 그때까지는 걱정하지는 마.”
“네...”
그리고 메이링이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아냐는 ‘휴’ 하며 깊게 한숨을 내쉰다. 그걸 보자마자 앨런이 걱정스럽게 아냐를 돌아보며 말한다.
“왜 그래요, 골로바텐코 씨?”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사무장님이나 치라유 씨같이 자주 출장을 나가야 하나 해서요.”
“뭐, 그건 변호사님 밑에 있는 이상은 피할 수 없는 걸지도 모르죠.”
앨런은 다 안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말한다.
“우리 변호사님 정도면 그럴 만도 하니까요. 신분을 속인다든가, 아니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든가 하는 이미지이지 않나요?”
“그런가요...”
“그래도 생각해 보면, 변호사님 말대로 밖에 출장 나가는 게 여기서 머리를 싸매고 온갖 서류와 법조문을 검토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죠.”
“글쎄요...”
아냐는 다시 소송 서류 창을 열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한다.
“지금은 이게 차라리 더 나은 것 같네요.”
그리고 오후 6시.
민과 친구들은 미린역 남쪽 카페거리의 한 교차점에 모여서 어디론가 가려던 참이다.
“어때, 며칠 만에 밖에 나와서 친구들하고 같이 놀러 가는 건?”
“어... 글쎄, 가 보면 알겠지.”
민은 자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무얼 하든 이길 자신이 있다는 듯한 그 메시지가, 유와 토마를 비롯한 친구들에게도 훤히 비쳐 보인다.
“어? 저기 누구냐?”
“음... 아는 얼굴들인데...”
카일이 가리키는 쪽을 따라 민이 돌아보니, 아이란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딱 봐도 아이란이 여태껏 입은 적은 없던, 검은 고딕 드레스다. 그리고 3명의 여자가 더 있는데, 한 명은 아까 본 홈카페 동아리의 매니저 미아, 그리고 다른 2명은 메이드 연구회의 언주, 아오다.
“아니...”
민이 언주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뭐라고 해 보려는데, 언주는 살며시 웃으며 자기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댄다.
“전염된 건가...”
민은 아이란이 입은 그 의상을 한번 위아래로 훑어본다. 이렇게 보니 꽤 어울려 보이기도 하다. 물론, 손가방에 있는 책들 중 살짝 삐져나온 한 권은 덤이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러고 보니 다른 친구들은 이미 발걸음을 막 옮기고 있다. 유가 재빨리 민을 잡아끈다.
“뭐 해? 빨리 가자고!”
곧바로 민은 친구들을 따라간다. 그러면서 살짝 돌아보는데, 아이란은 어느새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더니 막 설명을 하고 있는 듯하다. 과연 미아와 언주, 아오가 그걸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 이곳은 RZ타워 5층에 있는 오락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락실에는 사람들로 많이 들어차 있다. 민의 또래나 조금 더 어린 아이들도 있고, 물론 중고등학생, 대학생, 그리고 할 일 없는 사람들, 직장인, 심지어 나이 지긋한 사람들도 보인다.
”한번 기대해 보겠어. 실력이 녹슬지 않았는지, 아니면 썩어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음... 글쎄? 너희들이 나를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민과 친구들은 막 오락실 정문 앞에 도착한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오락실에서 할 만한 게임을 물색하는 중인데, 자리마다 한두 사람씩은 차 있어서 마땅한 게임을 찾기 어렵다. 그나마 비어있는 자리는 비인기 게임들이다.
“어, 잠깐...”
토마가 한쪽에 있는 게임기를 보더니, 구경하던 사람과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막 자리를 뜨는 걸 보고 말한다. 그 사람들 모두, 표정이 대단히 좋지 않다. 마치 갖고 있던 모든 걸 다 잃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다. 게임을 한 당사자는 검은색 모자를 쓰고 품이 넓은 상의와 하의를 입었는데,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다. 자세히 들리지는 않지만, ‘내가 질 게임이 아닌데’ 하고 푸념하는 소리도 들린다. 같이 온 사람들이 그를 위로하려는 듯 뭐라고 자꾸 말을 거는 건 덤이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민과 친구들도 몇 번 본 얼굴이다.
“우리 학교 선배, 맞지?”
“어, 맞아.”
얼굴을 보니 확실하다.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은 미린중학교의 루카스다. 분명히 이번에도 어떤 수를 써서 루카스가 이겼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다음 상대를 물색하고 있을 것이다.
“저기는 가지 말자고. 보나 마나 결과는 뻔하잖아?”
“어, 그렇지. 저기를 가느니...”
막 민이 그렇게 말하려는데...
“어, 거기!”
루카스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틀림없이 민과 친구들을 부르는 소리일 것이다. 바로 돌아보니, 루카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너희들, 이 게임 좋아하지? 마침 잘 됐다. 이리 와서 한번 해 보자고!”
“해 보자니? 왜 갑자기 저희보고 하자고 그러죠?”
루카스가 말하는 의미를 민과 친구들은 모를 리가 없다. 루카스의 능력도 말이다. 방금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서 오락실을 떠나던 사람의 일행들은 분명히 루카스에게 졌을 것이다. 왜 졌는지는 모르고서 말이다.
“아니, 우리가 왜 거기를 가야 되냐고요? 한번 선배님하고 같이 그걸 해야 할 이유를 좀 설명해 볼까요?”
“에이, 그런 건 물어서 뭐 하려고! 그냥 가볍게 즐기고 그러는 거지 뭐.”
하지만, 그런 말과는 달리, 루카스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민에게도 보인다. 루카스가 자기 능력을 또다시 발동하고서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는 게 말이다.
“자! 한번 해 보자고! 만약 너희들이 이걸 잘 못 하면 내가 적당히 조절해 가면서 할 요량도 있으니까, 한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하지만 루카스가 미처 말을 다 끝내기도 전, 민은 어딘가를 가리키며 마치 오락실 안에 있는 모두가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한다.
“얘들아! 저기 자리 비었네! 저기로 가자!”
“어, 그래!”
민의 말에 친구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다들 그쪽으로 몰려간다. 루카스는 눈앞에서 목표를 놓쳤다는 생각에, 자신의 앞에 있는 오락기 자판을 ‘꽝’ 하고 주먹으로 치며 분통을 터뜨린다.
“하, 뭐냐고! 겨우 또 내 손 안에 들어왔나 했는데!”
하지만 루카스에게는 그렇게 혼자서 분을 삭이거나 할 시간도 없는 듯하다. 마치 루카스가 그러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곧바로 메시지 도착음이 들려온다.
♩♪♬
“에이, 이 시간에 또 누구야...”
루카스가 그 메시지를 보니, 메시지는 다름 아닌 슬레인에게서 온 것이다.
[허튼 짓 할래? 네 능력은 그런 데 허비하라고 있는 게 아닐 텐데]
“아니, 어떻게 안 거지? 왜 다들 내가 이렇게 노는 걸 못마땅해하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푸념하는 루카스를 지켜보던 또 한 사람이 있다. 마침 RZ백화점에 쇼핑을 나왔다가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된, 루카스의 어머니다.
“왜 요즘 학교에서 저녁 시간 넘어서까지 늦게 오나 했더니, 이런 데 다 가 있었구나!”
“어, 엄마, 엄마가 어째서 여기에...”
“모처럼 쇼핑을 나왔는데 이런 데서 아들을 만나면 안 놀라는 게 더 이상하지 않니?”
“어... 저는 단지, 여기서...”
루카스가 그렇게 변명을 해 보려고 해도,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한다.
“너희 아빠처럼 진득하게 방에 앉아서 독서를 하라든가 하라고는 안 해. 그래도 최소한의 성의는 가지고 학업에 임하고, 어디 가서 말썽은 안 피워야 할 거 아니야!”
“어, 엄마, 그런 게 아니라...”
“다 들었어! 속임수를 써서 내기하고 그런 걸 이 엄마가 모를 줄 알아?”
루카스의 어머니는 그 길로 루카스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한 다음, 자신의 뒤를 따르게 한다. 루카스는 이 상황이 꽤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마치 다른 사람들도 다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머니의 뒤를 따르며 중얼거린다.
“휴... 그래봤자 그냥 집에서 공부나 시킬 거면서. 이럴 때는 차라리 슬레인 선배님이 낫다니까...”
그런데 어머니가 루카스의 그 중얼거리는 소리를 얼핏 들은 모양이다.
“루카스, 혹시 조금 전에 뭐라고 그러지 않았니?”
“네...? 제가요? 아니, 저는...”
루카스는 그렇게 또 발뺌한다. 다행히 어머니는 그 뒤를 잘 듣지 못한 건지, 더 묻거나 하지는 않는다. 루카스는 안도하며, 그저 조용히 어머니의 뒤를 따라간다.
한편, 민과 친구들이 가 보려고 했던 게임기 앞에는, 금세 또 다른 사람들이 막 자리를 잡은 참이다. 그것도 민과 친구들이 이쪽으로 올 거라는 걸 미리 감지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에이, 오늘도 에어하키나 해야 되나...”
“에어하키?”
민의 말을 들은 토마가 바로 그걸 기다리기라도 한 듯 말한다.
“너 또 염동력으로 띄워놓고 너한테 유리하게 게임을 하려는 건... 혹시 아니겠지.”
“아, 아니야! 안 그런다고!”
민의 표정이 금세 변하더니, 얼른 손을 내젓는다. 혹시나 다들 오해를 할까봐 그렇지만, 문제는 그게 다른 친구들에게는 그렇게만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민은 한숨까지 쉬며 말한다.
“이번에는 절대 안 그래!”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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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3-07-28 19:52:41
역시 메이링이 생각하는 게 정답같네요.
이상한 짓으로 사람들의 속을 뒤집으려는 자는 일을 크게 벌이겠죠. 전국을 경악시킨 신림역 칼부림 사건도 범인이 일부러 유동인구가 많은 곳인 신림역 인근을 골라서 칼을 휘둘러 살인범죄를 저질렀던 것이고...
역시 사람의 취향은 다양한 법이네요. 메이링과 아냐가 정반대인 게 이렇게도 드러나네요.
루카스가 기피대상이 되는 건 자신만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저런 사람과 어울리고 싶어할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죠. 현실세계의 개념으로 치자면 게임플레이에 해킹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속칭 핵쟁이 내지는 치터(Cheater)같은. 게다가 배회하고 있다가 어머니에 들켜서 한소리 듣는 건 정말 골계 그 자체예요.
루카스에게 이 라틴어 문장을 말해주고 싶어졌어요. "루카스, 희극은 끝났다!!" 의 의미의.
Lucas, comedia finita est.
아무도 박수쳐 주는 친구가 없으니 plaudite amici는 차마 못 쓰겠네요.
시어하트어택
2023-07-30 22:22:40
초능력이 있든 없든, 저렇게 일을 크게 벌이는 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보고 싶어서가 가장 크겠죠. 축약어로 말하자면 '관종'인 것입니다. 그리핀도, 루카스도, 슬레인도 그건 다 마찬가지죠.
루카스가 저렇게 어머니에게 들켜 버리는 건 루카스에게 좋은 쪽으로 영향을 줄까요, 아닐까요.
SiteOwner
2023-08-30 22:16:06
메이링의 추론이 역시 상당히 날카롭군요.
하긴, 과시욕을 지닌 사람이 작은 것으로 만족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는 것은 시간문제.
루카스가 초능력으로 자신이 100% 이기게 하려는 그런 승부조작, 한두번은 통할지 몰라도 주변에서 그의 실체를 어렴풋이 알게 되면 대처법은 간단합니다. 그와 게임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그가 그 초능력을 발동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 슬레인에게도 허튼 짓 한다고 한소리 듣고, 어머니에게도 지적당하고...
그래도 그렇게 지적당할 때가 좋은 것입니다. 진짜 책임져야 할 상황에 대신 책임져줄 사람은 없습니다.
시어하트어택
2023-09-17 22:42:41
이른바 관심병 증세가 있는 사람은 그 관심이란 걸 받고 싶어서 별 짓을 다 합니다. 그게 뭐든지 간에 말이죠.
루카스의 초능력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정말 안될 게 없을 겁니다. 승부조작이라는 걸 입증한다면야 아주 강력한 처벌이 뒤따르겠죠. 그래서 오너님이 말씀하신 대로, 학생 때가 가장 좋은 겁니다, 루카스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