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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민의 눈에, 아이샤의 다리가 얼핏 흐느적거리는 것이 보인다. 순간 잘못 봤겠지 싶어 다른 곳을 본 다음, 다시 아이샤의 다리를 본다. 그러나, 여전히 다리는 흐느적거리고 있다. 그것도, 마치 오징어나 헤토스인의 다리처럼, 확실히!
“너... 다리 좀 봐!”
“다리는 왜?”
아이샤는 반문하려다가, 문득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아이샤의 눈에도 이제 확실히 들어온다. 흐느적거리고 있는 자신의 오른쪽 다리가.
“이... 이거, 왜 이래?”
“뭐야, 그 녀석... 설마!”
그림자 안으로 넣어 버리면 끝나는 것 같았는데, 거기서도 능력을 쓸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이샤, 그 녀석을 네 그림자에서 꺼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한테 달려들 텐데...”
“호렌처럼 되고 싶어? 봐봐, 네 왼쪽 다리도 점점 흐물거리고 있어!”
아이샤는 또다시 아래를 내려다보려 하다가, 깨닫는다. 왼쪽 다리에도 힘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점점 바닥으로 주저앉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얼른 그 남자를 그림자에서 다시 꺼낸다. 하지만 다리가 흐물거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대로 아이샤는 바닥에 주저앉는다. 어느새, 그 남자는 다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 아이샤의 앞에 서 있다. 마치 자신이 정복자라도 된다는 듯, 아이샤를 내려다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칭찬해 주지. 나를 가둔 것, 나를 꺼낸 것, 둘 다 말이야. 아이샤라고 했나?”
“맞아. 내 이름은 알아서 뭐 하게?”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너도 곧 저 이레시아인처럼 될 것이기 때문이지. 나 ‘말릭 데이비스’의 능력 앞에서는, 어떤 몸부림도 무의미하다!”
데이비스는 곧장 물컹거리는 오른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든 다음, 그대로 아이샤의 이마에 갖다 대려 한다. 아이샤의 눈앞에 데이비스의 손이 닿으려는 그때...
“음?”
발소리가 들린다. 데이비스는 막 아이샤에게 닿으려던 손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본다. 수민이 달리기 시작하고 있다. 마치 데이비스가 보라는 듯, 팔은 앞뒤로 흔들고, 다리는 한껏 과장된 자세로 달린다.
“도망간다고 해서 내가 못 쫓을 것 같았냐!”
데이비스는 아이샤를 내버려 두고, 곧장 수민을 쫓기 시작한다. 데이비스가 쫓아오기 시작하자, 수민은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 더욱더 팔다리를 흔들며, 화물칸 방향으로 달린다.
“네 녀석이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는 다 알고 있다. 분명, 화물칸으로 향하는 것, 맞지?”
“......”
수민은 계속 달린다. 뒤에서 들리는 데이비스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물칸 방향으로 계속 달린다. 하지만 결정적인 수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떡해야... 어떡해야... 문득 벽에 붙어 있는 호렌을 본다. 호렌은 아까의 그 흐물흐물해진 모습 그대로, 여전히 몸부림치고 있다. 수민은 호렌을 뒤로 하고 계속 달린다. 갈림길이 나온다. 바로 가면 화물칸이고, 옆으로 가면 주방, 침실, 화장실이 있는 곳이다. 수민은 냅다 오른쪽으로 꺾는다.
“머리를 좀 썼군. 화물칸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네 운명이 바뀌는 건 아니다!”
데이비스는 또다시 몸을 흐물흐물하게 만들더니, 이윽고 또다시 희멀건 점액 덩어리 상태로 녹아내린다. 점액 덩어리가 무서운 속도로 쫓아온다. 그냥 달려올 때의 두 배는 족히 넘는 속도로. 필사적으로 달린다. 수민도 속도를 올려 본다. 하지만... 그 점액 덩어리가 더 빠르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했을 텐데!”
수민의 눈에 또다시 갈림길이 보인다. 오른쪽은 주방과 화장실... 그리고 왼쪽은 침실, 그리고 공구 보관실. 수민은 곧장 왼쪽으로 뛰어들어간다. 그리고 공구함으로 손을 뻗는다...
“네 녀석이 어디로 갈지는 다 알고 있다. 분명 왼손으로 뭔가라도 잡아 보려는 심정이겠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수민은 왼손에 뭔가가 감겨 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점점 조여 온다. 물컹하면서도 단단한 것이! 손을 들어 본다. 그 희멀건 점액이 수민의 왼손, 아니 왼팔 팔꿈치 아래를 전부 휘감고 있다. 손가락 하나도, 심지어 손목조차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이래 가지고서는 뭘 할 수 없다... 불완전한 오른손과 꽉 잡혀 버린 왼손으로는.
“네 얼굴에서 방금 절망을 읽었지.”
수민의 왼손에서 데이비스의 승리를 확신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 볼까? 나는 네 팔뿐만 아니라, 너를 완전히 덮어 버릴 수 있다. 네놈의 이레시아인 친구처럼 말이야.”
“......”
“그런데 차라리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어. 그 녀석은 내가 직접 닿아서 능력을 사용하는 건 아니니까. 내가 직접 접촉한 채로 능력을 사용하면, 언제든 너를 ‘흡수’해 버릴 수 있다.”
“흡수... 라고?”
“그래. 말 그대로 흡수야. 완전하고도 영구적으로 내 일부가 되는 거지. 그렇게 해서 당한 녀석들이 지금까지 세 명이다. 네놈도 그 녀석들처럼 되기 싫으면, 순순히 베라네를 내게 넘겨라!”
흡수라니! 위험한 녀석이다... 이제껏 만난 자들 중에 가장 위험하다! 이 정도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는 처음이다.
“네놈의 온몸을 타고 오는구나... 네놈에게 직접 붙어 있는 덕분에 똑똑히 느껴진다. 네놈이 빠져든 절망이! 자, 결정해라! 베라네를 넘기느냐, 생명을 넘기느냐다!”
“너라면 내가 어떻게 할 것 같나?”
수민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데이비스에게 되묻는다.
“뭐라고?”
“내가 어떻게 할 것 같냐는 말이다.”
“그건 내가 알고 싶은 것이다! 빨리 묻는 말에나 대답해!”
데이비스의 목소리가 마치 화산 폭발 직전의 용암처럼 끓어오른다. 동시에 그 충격이 수민의 온몸에 전해진다. 특히 수민의 왼손은, 수십년 넘게 덩굴이 감긴 나무와도 같이, 더욱 억세게 비틀린다. 어느새, 희멀건 점액은 왼손뿐만 아니라 왼팔 전체를 감싸고 있다... 이제는 팔을 움직이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안 된다.
“네놈이 끝내 대답을 안 한다면, 내가 답을 주도록 하지!”
데이비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민의 온몸에 마치 전류가 직접 파고드는 듯한 찌릿함이 전해진다. 그런데 수민은 가만히 있다. 마치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뭐야, 왜 아무 반응도 없는 거지? 역시, 내가 답을 주어야만 하겠군!”
“데이비스,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알기나 하는 건가?”
그동안 움츠러들었던 수민의 목소리에 갑자기 힘이 들어간다. 순간 데이비스는 당황해서 수민의 팔에 감긴 것을 풀 뻔했지만, 곧바로 다시 수민의 왼팔을 단단히 조인다.
“헛소리 마라. 주의를 돌리려고 수작을 부리는 걸 모를 줄 알고?”
“주변 관찰 좀 잘 하란 말이다!”
그제야 데이비스는 깨닫는다. 엄청난 저온, 뼛속까지 파고들어 피까지 얼려 버릴 만한 한기가 깊이 파고든다. 점액화된 그의 온몸 여기저기에 스며든 한기는, 그를 수 초 안에 얼음덩어리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수민 또한 눈썹과 코, 코트, 바지, 신발 등 여기저기에 서리가 낄 정도고, 얼굴은 빨개지다 못해 온통 하얗게 변해가고 있다.
“우주선의 구조는... 전부 파악하고 있다며? 그런데 나를 굴복시키는 데 정신이 팔려서 말이지... 내가 냉동창고로 들어가고 있는 것도... 파악을 못 했나?”
“빨리... 날 풀어... 줘! 온몸이 얼어 버렸단 말이다!”
“글쎄... 그건 안 되겠는데.”
수민은 한기가 온몸을 파고들어 말이 제대로 안 나오는 와중에도, 왼팔에 달라붙은 채로 얼어붙어 떨어지지 못하는 데이비스에게 비웃음과 독기를 가득 섞어 말한다.
“두... 두 가지 선택해. 나하고 같이... 얼어 죽든지, 아니면 몸 좀 녹이고... 케이블타이에 묶여 있든지. 답은 내가 줄 테니까.”
“아... 알았어! 어떻게 되든... 좋으니까! 제발 날 좀 여기서... 여기서 꺼내 줘!”
“그렇게 나와야지.”
약 10분 후. 얼리버드 호의 조종석의 문을 열고 수민, 아이샤, 두 손이 케이블타이에 묶인 데이비스, 그리고 호렌이 차례대로 들어온다. 카르토는 조종석 한가운데 의자에 앉아 TV를 깔깔거리며 보고 있다가, 수민 일행이 들어오는 걸 보자, 입에 과자 부스러기를 묻힌 채로 그 자리에서 그대로 일어난다.
“화물칸은 좀 어때? 그것보다도 그 녀석은 도대체 뭐야?”
카르토는 데이비스를 가리키며 신기하다는 듯 말한다.
“아, 이 녀석? 하루 종일 숨어 있었대. 그건 그렇고, 너 너무 평안한 거 아니야?”
“아니, 평안하다니? 그것보다도 너는 왜 온몸이 뻘겋냐?”
“이 녀석 잡으려고 냉동실에 들어가 있다 나왔어.”
“너... 너 제대로 돌았구나!”
카르토는 정색하더니, 급히 자기 무릎에 덮고 있던 담요를 수민의 어깨에 덮어 준다.
“우와... 이거 서리 낀 거 좀 봐! 마치 신화 속의 ‘곤 타르’가 나타난 것 같은 기분이야!”
“곤 타르가 뭔데?”
“아, 얼음괴물 같은 거야.”
“얼음괴물이라니까 왠지 찜찜한데. 차 같은 거라도 좀 줘.”
카르토는 테이블 앞에 앉은 수민에게 녹차를 한 잔 갖다 준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니, 아까 냉동실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도 될 정도로, 온기가 안쪽에서부터 퍼진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찜찜하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 그리고 발신자 불명인데, 누군가에게서 연락이 왔어.”
“파디샤야?”
“파디샤는 아니야.”
카르토는 홀로그램 모니터에 통신 기록을 띄운다.
“그런데 그의 주장대로라면, 그는 파디샤가 누군지 알고 있어. 또 파디샤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줄 수 있다더라.”
수민, 호렌은 한숨을 푹 쉰다. 그것보다도 호기심이 든다. 파디샤가 정확히 누군지는 모른다. 호렌이 계약을 맺을 때도 그의 하청업자를 통해 맺었다. 그런데 파디샤가 누군지 안다고?
“믿어도 되는 사람인가?”
“주경 씨와 잘 아는 사람이라던데.”
삼촌을 안다니? 수민의 눈이 번쩍 뜨인다.
“정말? 그 사람하고는 만날 수 있어?”
“탄돌로 행성에 있는 ‘술타나’라는 도시에 우리가 정비를 받으러 갈 건데, 한 사흘에서 나흘 정도 기다리면 우리가 알려 준 곳으로 올 거래. 그때까지는 좀 기다려 달라더라.”
“술타나? 나름 대도시인데. 그 사람 만나는 건 둘째치고, 정비를 받을 곳이 있기는 해?”
“그런 곳이라면 있어.”
호렌이 의심스럽게 묻자 수민이 바로 대답한다.
“거기 정비업체 사장 중에 우리 삼촌과 잘 아는 사람이 있거든. 일단은 거기로 갈 거야.”
수민은 의자에 등을 기댄다. 고작 하루도 안 되었는데, 일주일 동안 겪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들을 겪었다. 순조로울 줄 알았던 여정은 처음부터 삐걱거릴 뻔했고, 베라네를 싣고 옮기는 과정에서도 공격이 있었다. 이제 겨우 하루다. 앞으로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는지... 기대가 1/4이라면 우려는 3/4이다. 기대와 걱정을 가득 품은 채, 수민은 내일을 기다린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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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갈
2019-09-17 12:38:37
몸의 일부분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서 흐물흐물해지고 만다...
본문에서도 묘사된 상황도, 그리고 삽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상황도 모두 끔찍해서 읽다가 정말 몸이 움츠러들고 속이 안 좋아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어요. 독자도 이런데 저 상황을 당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크게 패닉할지...
그런데도 수민의 대처는 의연하네요. 그리고 자신이 있는 환경이 어떤지 깨닫지 못한 데이비스는 지독한 추위에 상황이 역전되어 버리고 결국 이렇게...역시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을 잘 차려야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네요.
정비를 받을만한 장소가 있군요. 이것도 다행이예요.
SiteOwner
2019-09-22 20:29:28
스타크래프트의 저그를 꺼렸던 이유 중의 하나가, 영역내의 표면을 덮고 있는 점액질의 크립이 보기만 해도 영 속이 안 좋아져서였는데, 이게 그냥 지면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 일부분이 저런 상태가 되어 버린다면 정말 싫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너무나 놀란 나머지 기절하거나 그러지 못하더라도 극도의 공포로 인해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질텐데...
공포를 극복한 사람은 위기를 기회로 만듭니다. 그리고 역습도 가능하게 만듭니다.
우려가 기대의 3배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려가 100%이고 기대가 전무한 것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