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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학원가에 있는 식당 ‘일 첼레스테’. 시간은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다. 입구에서 먼, 구석에 가까운 테이블에 짙은 보라색의 교복을 입은 학생 2명과 캐주얼복을 입은 남자 한 명이 앉아 있다. 한 명은 세훈, 한 명은 주리. 그리고 또 한 명은 짧은 머리의 대학생, 다름 아닌 서언이다.
“참, 진언이 형은 어떻게 됐어?”
“진언이가 뭐?”
“그러니까... 그 경찰 시험에 붙고 나서 어떻게 됐냐고.”
“아. 작년에 한 6개월 정도 교육받고 나서 한 달쯤 전에 배치됐어. 미린경찰서 소속이니까, 만나기도 편할 거야.”
“어... 그래? 잘 됐네. 음...”
세훈은 표정을 고치고 말을 이어 간다.
“아, 그리고... 있지. 서언이 형. 그러니까...”
“왜? 또 그 2학년 후배 녀석 이야기야?”
서언은 세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말한다.
“전에도 말했잖아. 그런 건 단순히 기선제압 하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그런데 단순한 기선제압 목적이 아닌 것 같다니까. 평소에도 몇 번 보이는데 패거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나를 보고는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지나가고...”
“하... 그 녀석 또 그러네.”
서언은 그 문제의 학생이 누군지를 이미 알고 있는 듯, 별로 놀라지도 않으며 말한다.
“어? 형, 그럼 그 2학년 선배가 누군지 짐작이 가?”
“응.”
세훈과 주리가 서언의 입을 주목한다.
“짐작도 아니지. 100% 확실하다고. 이름은 ‘빈센트 클라인’이라고 하는데... 중학교 때부터 이미 여러 가지로 유명했어.”
“‘여러 가지로’라니?”
“간단히 말하자면, 입학하기 전부터도 초능력으로 유명한 녀석이었지. 아는 사람들은 별 볼 일 없는 능력이라고는 하는데,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 능력을 몇 번 보여 줘서 또래 녀석들을 압도했나 봐. 내 생각에는, 그 능력 자체를 보여 주는 것보다도, 적절한 상황에서 능력을 사용하면서 위압감이나 공포심을 느끼게 했을 것 같아. 네가 당한 것도 마찬가지지.”
“그러면 또 다른 피해자들이 많겠네.”
“그렇게 자기 존재감을 내보이고 다니니까 능력 자체는 별것 아니라도 학교 내의 초능력자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존재일 수밖에.”
서언은 잠시 말을 끊고는 물을 한 잔 마시더니 다시 입을 연다.
“그건 그렇고, 우리 가족 중에도 초능력자가 있는데...”
“어, 가족 중에?”
세훈과 주리가 반문한다.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진짜라니까. 내 삼촌, 고모들 중에 초능력자가 있거든.”
“뭐야...”
“다른 가족들은 아니라는 소리네?”
서언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가만히 입을 다문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을 짓는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을. 주리가 서언에게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혹시 무슨 능력을 사용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그건 당장은 안 알려 줄 거야.”
서언은 세훈과 주리의 궁금증을 살살 긁는다.
“왜냐하면, 너희들도 머지않아 만나게 될 테니까.”
그 ‘머지않아’라고 한 때가 도대체 언제일까? 궁금증이 도무지 해소되지 않는다. 주리는 다시 서언에게 물어 본다.
“그 ‘머지않아’라는 때는 언제지?”
서언은 뭔지 모를 미소만 지을 뿐 말이 없다. 말을 안 해주는 것으로 보아 두고두고 궁금증을 긁으려는 듯하다. 주리는 일단은 더 묻지 않기로 한다. 잠시 후, 서언이 입을 연다.
“그러고 보니까... 식당에 와서 가장 중요한 걸 빼먹었네.”
세훈과 주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들, 메뉴는 결정했어?”
“나는... 아마트리치아나.”
주리가 재빠르게 대답한다.
“또 그거냐. 벌써 몇 번째 먹는 거야.”
세훈이 주리에게 핀잔주듯 말하자 주리 역시 바로 받아친다.
“뭐가 많다고. 이제까지 여기 와서 3번밖에 안 시켰는데.”
“그럼 4번 중에 3번이 많은 거지 적은 거야?”
“......”
“그래서, 세훈이 너는 뭐 먹을 거야?”
“나? 나는... 봉골레 먹지.”
서언이 벨을 누르자 종업원이 테이블로 온다. 세훈과 주리가 처음에 이 식당에 올 때도 봤고 그 뒤로도 이 식당에 오면 항상 본, 바로 그 종업원이다.
“주문, 하시겠습니까?”
“여기... 크림소스 스파게티하고, 아마트리치아나하고, 봉골레 하나씩이요.”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문을 받은 종업원은 주방 쪽으로 간다.
“그런데...”
세훈이 말을 꺼낸다.
“내가 전에 메이링 씨하고 만났거든.”
“메이링 씨? 그 사람이... 누구더라? 아, 아! 우리 고모 친구였지. 지금은 변호사고.”
“응...? 형네 고모 친구라고?”
세훈은 주리를 돌아보며 말한다.
“너도 그거 알고 있었어?”
“응. 알고 있었지. 직접 만난 적도 있고.”
“아... 그래?”
세훈은 정색하고는 말을 잇는다.
“뭐... 아무튼, 그 메이링 씨가 초능력자 정보 조사도 하고 있는 거, 형도 알고 있어?”
“아... 그건 몰랐는데. 뭐 내가 평소에 그런 초능력과 엮일 일은 없으니까.”
“응...? 형은 초능력과 엮일 일이 없어? 삼촌이 있잖아?”
“아버지 직장 때문에 다른 가족들과 떨어져 살면 그렇게까지 다른 가족들과 엮일 일은 없지. 뭐 가끔 만나면 그런 초능력을 목격하기는 해.”
“아... 그건 그러겠네. 여기저기 많이 이사를 다녔다고 했지. 아무튼...”
“왜?”
“메이링 씨가 말하기를, 초능력자의 비율이 우리 학교가 다른 지역에 비해서 특히 많다는데.”
“하... 어쩐지, 내가 다녔을 때도 한 반에 두세 명씩은 꼭 초능력자가 있더라. 다른 학교는 그 정도는 아니라는데.”
“저... 정말이야?”
서언은 마치 자신의 말이 틀림이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듯 고개를 강하게 끄덕인다.
“메이링 씨가 그러는데, 우리 학교가 초능력자가 많은 건, 그 초능력자들을 끌어들이는 강한 초능력자가 있어서 그렇다고 그러더라.”
“클라인 정도면 그러지 않을까?”
“아니. 그 선배 정도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메이링 씨가 잘라 말했어.”
“글쎄... 클라인 말고는 딱히 의심이 가는 사람은 없는데... 그런데 그 정도 능력이 아니라니... 그럼 누구지?”
“형도 한번 그 사람이 누군가 한 번 찾아봐 줘, 알았지?”
“알았어.”
서언은 시원찮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세훈의 부탁이니 거절할 수는 없지만, 자신은 없는 듯하다.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테이블 옆에서 아까의 그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카트에는 세 사람이 주문한 음식들이 실려 있다. 종업원이 카트에서 음식들을 하나씩 꺼내 세 사람 앞에 놓는다.
“크림소스 스파게티, 맞으시죠?”
“네, 제가 시켰어요.”
“그리고 그 다음은... 봉골레...”
“네... 여기...”
세훈이 손을 그릇 쪽으로 내밀려는 그때, 세훈의 손이 뭔가에 닿는다. 아... 아차! 컵을 건드려 버렸다! 0.1초도 안되는 사이, 세훈의 머리는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곧이어 ‘쨍그랑’ 소리가 들리겠지...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쳐다볼 것이고... 나는 얼굴을 못 들 것이고... 또 돈을 물어 주어야 할 것이고... 세훈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꽉 감는다. 세훈의 머리가 점점 복잡해지려고 하는 찰나. ‘쨍그랑’ 소리 대신 들리는 소리는, 테이블 위에 ‘탁’ 하고 부드럽게 뭔가를 놓는 소리.
“손님, 조심하셔야죠.”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종업원이 그 컵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런데... 컵 안에 있는 물이 줄지 않았다! 분명 떨어졌으면 조금이라도 물이 튀는 게 정상인데... 그러고 보니, 축축한 촉감도 전혀 없다. 바닥에도, 바지에도, 신발에도, 어디에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말인가?
“네... 네. 감사합니다.”
세훈은 겉으로는 웃으며 넘겼지만, 속으로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방금 일어난 일은 믿을 수 없기는 하지만 모두 사실이다. 눈속임 같은 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입학식 날에 백화점에서 있었던 그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세훈은 목소리를 낮추고 주리와 서언에게 말한다.
“방금 저 종업원...”
“왜?”
“그...그게 있는 것 같은데.”
“응?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내가 직접 봤는데, ‘그 능력’이 있던데...”
“에이, 설마. 그런 게 쉽게 발견되는 것도 아닌데...”
서언이 가볍게 세훈의 말을 넘겨 버리려 하자, 세훈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다.
“아니, 서언이 형은 가족도 초능력자라면서 왜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내 말은 안 믿어? 방금 두 눈으로 본 건데...”
“하, 그랬어? 그렇다고 해도 그걸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건 좀 아니지. 조금만 목소리가 더 컸어도 주변에 있는 손님들이 다 들을 뻔했다고.”
그러고 보니 세훈은 얼굴에 평소에 안 세우던 핏기를 세우고, 낮추려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욱더 올라가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세훈은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린다.
“그럼 목소리 낮출 테니, 꼭 들어 줘.”
“알았어, 알았어. 일단 식사나 하자고.”
서언이 먼저 포크를 들자 세훈과 주리도 앞에 놓인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세훈은 입안에 파스타를 넣고 잠시 맛과 향을 음미한다. 역시, 봉골레 파스타는 언제 먹어도 처음 먹는 것 같은 맛이다. 다른 파스타들을 많이 먹으니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세훈은 문득 주리를 본다. 왜 주리는 아마트리치아나만 먹으려고 할까, 이렇게 봉골레가 맛있는데...
한참 맛있게 먹다 보니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파스타를 다 먹어 갈 때쯤, 세훈은 갑자기 무릎을 탁 하고 치며 말한다.
“아, 그러니까...”
“응, 아까 말하려던 거? 말해 봐.”
주리가 파스타를 입에 물고 말한다.
“아까 내가 실수로 컵을 쳐서 떨어트렸는데 말이야...”
“그래서?”
“아, 이제 깨졌겠다,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했는데, 깨지는 소리가 안 나더라.”
“......”
“그리고 그 종업원이 컵을 주워서 주는데, 아니 글쎄 컵 안에 물도 그대로 있고, 컵에 흠이 하나도 없고...”
“이제 알았어?”
주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다. 주리의 평소 말하는 태도는 예상할 수 있었지만, ‘이제 알았다’니?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2 댓글
마드리갈
2020-01-19 21:18:19
빈센트 클라인의 심리에 대한 분석이 정확하다면, 초능력을 구사한 그의 행동은 미지에의 공포를 활용한 전형적인 프레임짜기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 이것은 현실세계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어요. 꽤 예전의 일인데, 어떤 남자중학생이 성인여성을 성폭행하려고 젓가락에 신문지를 둘러 마치 그 안에 커다란 칼이라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위협했다가 성인여성에게 제압당하여 현행범으로 체포된 사건이 같이 생각나기도 했어요.
초능력자가 있든 없든 범죄나 이해불가의 일은 여전히 일어나겠지만, 확실히 있다면 그러한 일의 빈도가 낮다고는 말할 수 없겠네요. 크든 작든간에...
SiteOwner
2020-01-19 23:57:03
능력이라는 게 가치중립적인데, 이게 어떻게 발휘되는가가 무섭기도 하면서 또한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빈센트 클라인의 경우가 전자, 그리고 분명 엎어졌을텐데 언제 그랬냐는듯이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물컵이 후자의 경우라고 하겠지요. 하긴 초능력이 아니더라도 마음먹고 누군가를 해치려 들거나 도우려 하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따름이겠지요. 마치 과거와 현재의 전화사기 수법처럼...
게다가, 초능력자가 있는 가문의 존재도 확인했으니 세훈의 심정은 더욱 복잡다단해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