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널 창작물 또는 전재허가를 받은 기존의 작품을 게재할 수 있습니다.
세훈을 찾는 누군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여기 없습니다.”
이 목소리는? 앤드루의 목소리다. 그렇다면 세훈을 찾는 목소리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어디서 나를 속이려고? 똑바로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말했잖아요. 여기에 없다고요.”
앤드루의 어조는 단호하다.
“좋아.”
세훈을 찾는 그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당황과 놀라움이 섞인 목소리다.
“너, 이따가 보자고.”
이 말을 남기고 그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는다. 다행이다! 더 이상 세훈을 찾지는 않는 듯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앤드루를 세훈 대신 불렀다. 누구지? 그 유난히 굵었던 그 목소리는. 그리고 앤드루는 어떻게 되는 거지?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비숍의 병원 입원 소식을 들은 일이 있고 나서, 그 다음 주 월요일. 세훈은 지난 주말에도 계속 비숍과 앤드루 관련된 것만 생각났다. *나라의 말에 따라 잔잔한 음악도 듣고, 가볍게 산책도 하고, RZ백화점과 쇼핑몰도 갔다 오는 등 여러 가지를 해 봤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등굣길 역시 그 생각만 자꾸 나서, 지하철 안내방송을 못 듣고 내릴 곳을 지나칠 뻔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지하철역에서 내리고 나서도, 세훈의 머릿속에는 계속 그 생각만 가득하다. 심지어는 교문 앞에서 만난 주리의 인사도 못 듣고 지나칠 뻔했다.
그렇게 세훈은 교실로 들어선다. 그런데... 교실 앞자리의 책상 하나가 비어 있다. 다름 아닌 그 앤드루 카슨의 자리다. 순간 불안감이 든다. 평소 세훈보다 항상 일찍 자리에 앉아 있던 그였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하지만 세훈은 그냥 좀 늦을 뿐이겠지, 하며 별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함을 느낀 건 세훈만이 아닌 모양이다.
“앤드루 녀석, 왜 안 오지.”
“그러게. 전화라도 해 봐야 되나.”
“전화? 해 봤는데 계속 안 받더라. 무슨 일이지?”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앤드루의 빈자리를 보고는 한마디씩 하고 간다. 시계를 본다. 시간은 8시 57분. 세훈은 잠깐 일어나서 복도 쪽을 본다. 교실로 오는 사람은 이제 한두 명뿐. 세훈은 직감한다. 앤드루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 답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확히 8시 59분, 키라 선생이 무거운 표정을 하고 교실에 들어온다. 그리고 앤드루의 자리를 보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다음 입을 연다.
“여러분, 앤드루 카슨 군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어제 카슨 군의 아버지께서 급히 연락을 주셨어요.”
키라 선생이 딱 여기까지 말했을 때, 교실 안의 웅성거림이 더 커진다. 키라 선생이 조용히 한 손을 들자 웅성거림은 잦아들고, 키라 선생은 말을 이어나간다.
“입원한 곳은 메트로폴리스 병원 512호실입니다. 학기 초에 제 학생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카슨 군이 없는 우리 반을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분, 카슨 군은 조만간 회복되어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습니다. 카슨 군이 우리와 함께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이 말을 마치고 키라 선생은 고개를 숙인 채 교실을 나선다. 세훈은 길게 한숨을 내쉰다. 자책감이 든다. 그 날의 모든 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나서는 그때, 세훈은 앤드루가 그 선배에게 가겠다는 걸 막지 못했다. 세훈이 앤드루를 불러세워 보려 했지만, 앤드루는 이미 가장 먼저 교실을 나선 직후였다. 왜 그 때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는지, 억지로 붙들어서라도 막았어야 했는데... 수업을 위해 일어나서 A반 교실로 갈 때, 세훈은 고개를 뒤로 돌려 앤드루의 자리를 다시 본다. 그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그건 그렇고... 보통 미린 교육재단 학생이라면 미린대 부속병원에 입원하는 게 혜택이 더 큰데, 왜 하필 다른 병원일까? 사소한 것이지만 그것도 세훈에게는 궁금증을 더한다.
그 날 저녁, 미린 강 건너 북쪽의 ‘아체토’에 있는 메트로폴리스 병원. 세훈과 주리를 포함한 몇 명의 G반 학생들이 병원 입구에 들어선다. 손에는 크고 작은 가방이 하나둘씩 들려 있다. 우선은 안내데스크에서 병실에 들어갈 때의 주의사항에 대한 안내를 간단히 받는다. 일행이 엘리베이터로 향할 때, 세훈은 잠시 안내데스크에서 뭔가를 더 물어본 다음 일행 쪽으로 뛰어간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추고,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탄다. 엘리베이터는 잠시 후 5층에 멈추고, 일행은 내려서 곧장 512호실로 향한다. 그런데...
“방금 누가 우리 쳐다보는 것 못 느꼈어?”
일행 중 디아나가 불길한 느낌을 직감한다.
“그래...? 누가?”
디아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뭔가 말하려 일행을 한데 모이게 한다. 그때... 키가 크고 단정한 머리를 한, 미린고 교복을 입은 남학생 한 명이 일행이 있는 쪽으로 다가온다. 그 남자가 점점 다가오자, 일행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있는지 본다. 주변에 사람은 몇 명 없다. 그것도 멀리 앉아 있는 환자나 그 가족뿐. 이윽고 그 남학생이 일행 바로 옆에까지 다가온다. 그러나 그 남학생은 일행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행을 지나친다. 단지 일행을 한 번 쏘아보고 갈 뿐.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남학생이 일행에게 하려는 말은 분명하다.
“들어가자.”
세훈이 일행에게 말하자, 일행은 그 남학생의 눈치를 한 번씩 보며 512호실로 들어간다. 세훈이 마지막으로 들어가는데, 세훈은 혹시나 해 뒤를 한 번 돌아본다. 그 남학생은 뒷모습만 보인다. 안심하고 들어가려는 때... 그 남학생이 갑자기 뒤를 돌아본다. 세훈은 눈을 피하려고 했지만, 고개를 돌리기 직전, 그 남학생과 눈이 마주치고 만다. 순간 얼어붙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어찌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혼란스럽다. 하지만, 세훈은 단호하게 행동하기로 한다. 바로 고개를 돌려, 그 남학생을 못 본 척하고 병실로 들어간다. 뒷일을 생각하는 건 그다음의 일이다...
512호 병실에 일행이 들어서자, 옆으로 몇 명의 환자들이 누워 있는 것이 보이고, 맨 안쪽 창가 쪽에 누워 있는 앤드루가 보인다. 친구들은 저마다 준비한 간식이나 카드 같은 것들을 앤드루의 침상 옆에다 갖다 놓는다. 세훈과 주리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앤드루의 몸은 어느 한 군데 성한 곳이 없다. 몸 곳곳에는 붕대를 감고 있고, 군데군데 멍든 곳도 보인다.
“좀 괜찮아?”
일행 중 디아나가 묻자 앤드루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인다. 세훈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원래 말이 좀 없기는 해도 말을 아예 안 하는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의사 선생님이 뭐래?”
“한 얼마 정도 있으면 퇴원한대?”
“선생님이 너 빨리 보고 싶으시다던데...”
친구들의 다양한 질문에도 앤드루는 그냥 미소만 지어 보이거나, 단답형으로 대답하거나, 고개만 끄덕이거나 가로저을 뿐이다. 그냥 ‘계단에서 넘어져서 다쳤다’는 게 대답의 전부다. 방금 마주쳤던 그 남학생이 세훈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역시나.”
세훈은 조그맣게 말한다. 그리고 주리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을 보고 말한다.
“잠시만 앤드루의 침대 곁에서 떨어져 줄 수 있겠어?”
“어...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혹시 너희들 뭐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니, 그냥 잠시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서.”
세훈의 말에 친구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면서도 앤드루의 침대 곁에서 떨어져 앉는다.
“거, 무슨 일인데 그러니.”
옆의 침대에 누워 있는 나이 지긋한 환자 한 명이 고개를 들고는 말한다.
“들어 봤는데, 친구 사이인데 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도 있는 거야? 잘 몰라서 말이야.”
세훈은 그 환자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환자의 귀에다 대고 뭐라고 조그만 목소리로 말한다.
“아... 그렇군. 알았네. 친구들과 잘 지냈으면 좋겠구나.”
환자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세훈은 다시 앤드루의 침대로 다가간다. 세훈 옆에는 주리만 앉아 있다.
“아, 앤드루.”
세훈이 입을 연다.
“병상에 누워 있는데 처음부터 이런 질문을 하는 건 미안하지만, 조금만 물어볼게.”
“뭐... 뭔데?”
앤드루는 당황해서 되묻는다. 세훈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다시 묻는다.
“어떻게 입원하게 된 거야?”
“......”
앤드루는 입을 열지 않는다. 세훈은 생각한다. 역시 나의 감은 맞았다. 조금 더 물어보자. 앤드루에게는 미안하지만, 앤드루가 입을 열어 주어야 한다.
“우리 반 옆에 F반의 베리 비숍 알지? 너 포함해서 우리 반 전체를 자기 능력으로 조종했던 녀석.”
“그... 그게 왜?”
“그 녀석도 병원에 입원했는데, 바로 위에 6층에 입원했다더라.”
“그걸 어떻게 알아?”
“조금 전에 안내데스크에서 살짝 물어보고 왔지.”
“아... 이 이상은 안 돼.”
“어... 어째서?”
“......”
앤드루는 더 말하기를 꺼린다. 그러나 앤드루의 눈빛은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촛불처럼 떨리고 있다. 그리고 그 눈은 세훈과 주리를 바로 보고 있다. 말은 없지만, 그 뜻은 분명하다.?
“네가 왜 그렇게 말하기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지는 알겠지만...”
세훈은 조그맣게,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말해 줘야 해, 앤드루. 만약 여기서 말을 하지 않게 되면, 너는 안전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친구들은 계속 그 패거리에게 시달리게 될 거야.”
“......”
“하지만, 네가 말을 하게 되면, 완전히 해결되는 건 아니어도, 적어도 그 녀석들을 무너뜨리는 데에 대한 실마리는 얻을 수 있겠지. 부탁이야. 네 용기가 필요해.”
앤드루는 한숨을 한 번 쉰다. 그의 눈은 흔들리고 있다. 그는 창문 너머와 병실에 앉아 있는 친구들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본다. 하지만 친구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앤드루는 고개를 돌리고 싶다. 특히 그는 세훈의 얼굴을 바로 보는 것을 어려워한다. 며칠 전에 세훈에게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하라’고 한 사람이 바로 앤드루 아닌가? 그렇게 말해 놓고는, 정작 앤드루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 같아 가슴 속이 답답하다. 상처에서 오는 통증도 잊을 정도로.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2 댓글
마드리갈
2020-02-01 22:36:19
만신창이가 된 채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은 처연함 그 자체...
그래서 여러모로 많은 게 생각나다 보니 마음속이 복잡해지네요.
게다가, 그 원인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라면...
더 이상 쓸 말이 없어지고 있어요.SiteOwner
2020-02-02 21:11:51
집단은 개인의 단순합에만 머무르지는 않습니다. 즉 집단은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집단은 별개의 인격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개인들을 부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그 앤드루 카슨이 답답해하면서도 쉽게 속사정을 말하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집단의 속성은 반드시 개인의 단순합을 넘어선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특히 불의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경우에는 집단이 개인의 단순합 미만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고, 최악의 경우는 아예 없는 것보다 못할 경우도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