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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녹아든 그리움에게서

柔夜, 2020-03-10 14:55:31

조회 수
147

?열어둔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춥고 무거운 빗방울에 젖어 싸늘했다. 사모하는 사람이 사는 집 앞 양철문 앞에 서서 꽃다발을 든 채 초인종을 망설이는 것처럼, 봄이 발 딛다 멈춘 삼월 초하루였다. 잠들지 못해 겨울을 뒤척이다, 내내 먹어야 할 것을 잊어버린 약이 있었다는 걸 떠올린 어젯밤. 약 덕분에 오늘은 오전에 일어날 수 있었고, 덕분에 햇빛 없는 오후의 젖은 바깥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피부에 와닿는 공기는 이따금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갑고 싸늘했다. 두 번 말해도 모자랄 정도로 기가 꽤 셌다. 등을 돌리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만났을 때 느껴지는 시선처럼, 가진 것 하나 없이 아무 연고도 없는 길을 걸을 때 세상에 느끼는 억하심정처럼. 이제는 한때 알았던 사이가 되어버린 사람을 떠올릴 때 느끼는 거리감처럼 공기는 그렇게 쌀쌀맞았다.

?겨울잠을 자다 깬 곰처럼 부스럭거리며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 뚜껑에 먼지가 내려앉은 주전자를 물로 헹궈냈다. 물을 받아 가스 불을 올리고 겨우내 한 번도 꺼내지 않은 머그잔 또한 아까처럼 헹궈내고 커피 믹스를 뜯어 안에 비워냈다. 물이 끓을 때까지 방에 가서 의자에 앉거나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곤 했지만, 오늘은 그저 식탁 앞 의자를 꺼내 앉아 열린 베란다 너머를 내다보았다. 빗줄기는 눈에 선뜻 띄지 않을 정도로 가늘고 미세했다. 방충망 사이로 새어 들어왔는지 창 바로 앞 타일에 여럿이 모여 방울져있었다. 저 멀리 내다보이는 아스팔트 위 자그만 웅덩이나 젖은 타일이 일렁이는 것으로 비의 세기를 가늠하며 잠깐 허송세월하였다. 이윽고 수증기가 주전자 뚜껑을 밀어 올리려 애쓰는 소리가 대기열을 뚫고 귀에 다다랐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가스 불을 껐다. 컵 안에 모여 있던 알갱이는 진했다가 연한 갈색 액체가 되었고, 나는 컵을 들고 베란다에 나가 빗방울에 젖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두고 섰다.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잔을 잠시 창가에 둔 작은 서랍장 위에 올려놓고, 라이터로 불을 댕겼다. 인심이 메마른 바람에 소박을 맞은 손이 시려 울 때마다 잔을 잡고 달랬다. 하지만 손을 녹일 때마다 왜인지, 익숙한 일인 것 마냥 마음이 저렸다.


?담배는 입술 사이에 힘없이 끼워져 바람이 세차게 불 때마다 조금씩 까딱거렸다. 심지가 곧아질 때는 빨아들이는 순간뿐이었다. 안팎으로 시려운 몸속을 냄새나는 연기로 덥히며 사람을 떠올렸다. 떠나보낼 때 나를 보며 다른 건 다 되었고 부디 발병이랑 나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애써 섧게 웃던 사람. 나는 모닥불로 덥혀주려 했지만, 당신이 원하던 건 라이터처럼 자그만 불 한 줄기였던 사람. 반대로 나를 정월 대보름에 쌓아 올린 통나무 지피는 것처럼 불살랐지만 불씨는 고작 한 티끌이었다고 말했던 사람. 떠나갈 때조차 내게 빗자루 하나 쥐여주지 않고 쓸어야 할 재만 남겨두었던 사람. 자기가 맡은 일은 불을 지피는 것이었을 뿐이라 했던 사람.

?생각에 빠져 털어야 하는 것을 잊었던지 담배는 어느샌가 손가락 한 마디 만큼 짧아져 기다란 재를 손등에 스쳤다. 빗방울이 영근 타일 위에 떨어져 가루가 그 안에 녹아들었다. 나는 조용히 그 녹아듦을 바라보며, 손을 뻗어 컵을 잡아 커피로 입술을 축였다. 주머니에서 다시 한 개비를 꺼내 입술에 물고, 불을 제대로 붙이기 위해 입술로 꽉 물어 심지를 세웠다. 오늘 날씨에 서글퍼진 것이 스쳐 지나간 수많은 옛사람 중 누구 때문인지를 찾아낸 것 같기에, 이번 담배는 그 사람 생각을 위한 것이었다.

?그 사람은 입술이었고 나는 담배였다. 내 심지가 흔들릴 때면 술 한 잔 괜찮냐며 약속을 잡아 만나곤 했다. 그이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었고 나는 누구든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고팠다. 더욱이 나를 궁금히 여기는 사람이면 더 좋았다. 내 안에 응어리진 하소연의 표층을 긁어내어 꺼내도 재미있다며 들어주었으니까.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 우울을 버리기만 하진 않았다. 그 사람은 참,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순수했다. 그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때 묻음의 끝은 순수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따금 질문이라는 명목하에 내게 말로써 칼을 들이밀었다. 옆구리를 찔려도 나는 웃으며 그럴 수 있다고 답하곤 했다. 그 사람에겐 악의가 없다는 믿음이 있었고 뒷받침할 정도로 오래 안 사이라 함께 보냈던 시간을 믿었기 때문에. 순간이 지나고 같이 마셨던 잔이 쌓이고 쌓여갈 때마다, 그것이 그이에겐 맹목적인 신봉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리라.

?어느 순간 부담스러워했다. 칼은 더 날카로워졌다. 반격하지 않으면 당신은 큰 상처를 입게 될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나와 이야기를 나눈 순간이 있었다. 좁디좁은 바 카운터에 앉았던 날. 술이 참 맛있었던 날, 나는 그날 칼에 찔려 여러 앞에서 아이처럼 울 뻔 했다. 하지만 반격할 수 없었다. 바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썼기 때문에. 둘만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기에. 그래서 문자 메시지로 대화를 나눴고, 그제야 그이는 여태껏 볼 수 없었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달랬다.

?자리가 끝나고 택시를 타고서 늦은 밤을 달릴 때 그 이는 내게 말했다. 선을 넘는 말을 들으면 화를 낼 줄도 알고. 그래야 사람 같지 않나요. 당신 심기를 불편하게 한 건 미안해요. 하지만 나는 적어도 사람하고 이야기하고 마음을 나누고 싶었어요. 무슨 말을 해도 그럴 수 있지 하는 자동응답기 말고요. ……어른하고요. 그 달램 속에 그 이도 나도 찔린 곳에서 피를 철철 흘릴 뿐이었다.


?터미널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집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그이를 배웅하고서, 택시를 다시 잡았다. 문을 열고 타려다가, 기사에게 부탁했다. 미터기 꺾고 있으면 안 되냐고. 담배 한 대만 태우고 타겠다고. 도저히 못 참겠다는 느낌으로 말했다. 늦은 밤이었기에 행인도 별로 없었고, 내게서 술 냄새도 났기에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창문을 올렸다. 오늘처럼 그날도 바람은 참 쌀쌀했다. 쌀쌀맞았기에 그이와 팔짱을 꼈을 때 그토록 따뜻할 수 없었다. 눈이 한 아름 쏟아지는 날 바깥에 나가 몸을 적시며 장난을 치고 집에 돌아와 담요를 덮어쓰고 몸을 녹이는 것처럼 말이다. 팔짱이 빈 옆구리는 아직도 온기가 조금 일렁이는 듯했다. 그 온기를 갈무리하며, 담배 연기를 허공에 내뿜으며 생각했다. 다시는 만나기 힘들겠구나. 적어도 한동안은.

?나는 그이의 마음에 있는 허들을 넘지 못했던 것이리라. 점 하나만 고치면 되었기에 그리 찔러댔던 것일 테다. 고쳐 써보려 했던 것이리라. 나는 좌초해선 가만히 있었고 그이는 해류를 타고 많은 곳을 들른 끝에 변했던 것이리라. 기준은 변하기 마련이고, 내가 점 하나 때문에 같이 이야기하기 즐거운 사람이 아니게 된 것을 스스로 깨달았던 것일 테다. 좋아하기 때문에 아무 말 하지 않고 웃어 넘기는 것이 부담스러워진 것이리라. 그리고 내게 질문해본 것일 테다. 원하지 않던 답이 나왔던 거겠지. 그래. 그럴 수 있다. 전부 변하기 마련이니까.

담배꽁초를 보도와 아스팔트가 만나는 곳에 고인 물웅덩이에 던져넣어 끄고서 차 문을 열었다. 좌석에 앉아 문을 닫고, 목적지를 말한 뒤, 차가 굴러가는 것을 느끼며 차창 너머를 내다보았다.

?다시금 그이와 팔짱을 꼈던 옆구리를 손으로 몰래 더듬어보았다. 온기는 옛 흔적으로써 남아있을 뿐이었고, 바깥바람의 쌀쌀맞음이 옷감에 젖어 들어 손이 시렸다. 나는 그대로 멈춰 굳어선, 머리를 푹 젖히고 기사에게 들리지 않게 애쓰려 얼굴만을 찡그려가며 울었다.


?그땐 그랬다. 바람에 그리운 사람 소식이 실려 온다던가 하는 바람, 혹은 어쩌면 낭만은 믿지 않기로 한 게 꽤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왜인지 그랬으면 싶어졌다. 믿지 않기로 한 것을 다시 바랐다. 발병이랑 나지 말라던 내 바람은 가 닿았는가. 몸은 성한가. 그대 아직 옛날에 맛있는 술 나누며 하던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가끔 그립거든 편지라도 하나 남겨주소. 속으로 그렇게 읊조렸다. 타일에 담뱃재가 또 한 무더기 떨어졌다. 나는 잔을 집어 들어 타일에 커피를 아주 조금 찌끄리고, 베란다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바람을 막아두었지만 들이치던 서늘함이 아직도 맴돌아 온통 쌀쌀맞았다.


柔夜

20200310 1338 - 1440

즐거웠던 님을 기억하며

심규선 - 아라리

柔夜

Smoothie night

2 댓글

마드리갈

2020-03-11 23:16:31

오늘 몸이 안 좋아서 그런지, 글에서 느껴지는 여러가지의 냄새가 보다 진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있어요.

특히 담배냄새에는 굉장히 민감한 터라...


" 그 사람은 입술이었고 나는 담배였다." 라는 표현에서 운명과 슬픔을 느끼기도 했어요.

누군가에게는 그 둘이 전혀 인연이 없을 것이고, 설령 인연이있다 한들 관계가 영속적일 수는 없겠죠. 단속적으로는 이어지더라도. 그래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SiteOwner

2020-03-17 20:45:06

읽고 나서 생각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똑같이 일본어 발음이 센사쿠(せんさく)인 두 단어인 천착(穿鑿)과 전색(詮索).

한자는 완전히 다른 두 한자어가, 똑같이 파들어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파들어가면 손상이 있기 마련이지요. 지면에는 구멍이 나고, 마음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상처가 남습니다. 그것이 같이 느껴지면서, 이미 입춘이 시작된지 한달 반 가량 된 지금의 봄같지 않은 봄이 아프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작년에 크게 느낀 것이지만, 감정이 이전보다 급격히 줄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낭만을 믿지 않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요즘은 감정이 그다지 없습니다 참조). 그래도 다시 낭만을 믿어고 싶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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