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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50분, 미린고등학교 1학년 H반 교실. 이제 1교시 수업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10분 정도는 남은, 딱 적당한 그런 시간이다.
교실의 자리들은 한 자리 빼고는 다 차 있다. 여느 날처럼, 수업 시작 전의 교실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하다. 책상마다 삼삼오오 앉아서 떠드는 건 그나마 양반이고, 책상 위에 걸터앉아 AI폰을 가지고 내기 같은 걸 하기도 하고, 의자의 쿠션이나 방석을 던지며 놀기도 하고, 아니면 의자를 쌓아서 뭔가를 만들기도 한다. 박수를 쳐 가면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건 덤이다. 한두 명은 차분하게 책을 읽고 있지만, 그들도 때때로 지나가는 친구들의 잡담에 어깨를 들썩인다.
시끌시끌하고, 어수선하고, 그래서 더 활기찬 월요일 아침의 H반 교실이다.
그 평화로움 아닌 평화로움을 깬 건, 한 남학생의 목소리.
“얘들아!”
교실 문 너머로, 누군가가 목청껏 큰 소리로 H반 학생들을 부른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느라 바쁜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실 문 너머에 선 그 학생을 돌아본다.
그 남학생은, 다름 아닌, G반의 조세훈이다.
세훈을 보자, 앞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던, 고동색의 빗어 넘긴 머리를 한, 뿔테 안경을 쓴 남학생 한 명이 일어나, 세훈을 보며 반갑게 인사한다. 세훈도 그 남학생을 알고 있는 듯, 얼굴이 한층 더 밝아진다.
“아, 세훈아. 여기는 무슨 일이야?”
“오, 준후 아니야?”
이 사람은 H반의 부반장 박준후. 세훈과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다. 평소에도 어른들에게 인사 잘 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려 다니고, 봉사활동도 꾸준히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세훈도 준후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한다.
“왜 왔어?”
“뭐, 옆 반인데 오면 안 되나.”
준후의 눈에, 세훈 뒤에 서 있는 현애와 주리가 보인다. 준후는 현애와 주리에게도 눈웃음을 보낸다. 하지만 현애의 얼굴은 그렇게까지 즐겁지는 않다. 자꾸 그 소리가 들려온다.
히히히- 나라고 나-
어떤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태연하고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하며 남을 괴롭힌다는 건, 정말 성가시고, 무서운 녀석이 아니겠는가... 누군지는 몰라도 걸리기만 해봐라... 현애는 태연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칼을 간다.
세훈은 교실 안을 한번 슬쩍 돌아본다. 아는 얼굴이 몇몇 보인다. 창가 구석에 졸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푸른 머리의 여학생은 ‘니나 첼라코프스카’다. 다른 친구들도 보인다. 예를 들자면, 세훈이 초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김한결’, 춤을 잘 추기로 유명한 ‘제리 포드’도 있다.
다시 세훈을 보고, 준후는 장난스럽게 세훈을 콕콕 찌르며 말한다.
“그거 말고, 진짜 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아, 하하하, 잠깐 뭐 재미있는 거 좀 말해 주려고.”
세훈은 준후보다도 한층 더 능청스럽게 말한다.
“재미있는 거? 그게 뭔데?”
준후는 은근 기대하는 투로 말한다.
“말해 줘, 말해 줘! 도대체 뭔데 그렇게 긁어대는 거야?”
“아, 너희들! 너희들도 모두 한 번 들어 볼래?”
준후의 기대하는 태도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세훈은 목소리를 일부러 조금 더 키워서 말한다.
“내가 방금 엄청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냈는데 말이야.”
세훈이 교실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말하자, 처음 세훈이 부를 때도 돌아보지 않았던, 자기들끼리 잘 놀고 있던 다른 동급생들도 거의 모두 교실 문 앞에 선 세훈을 돌아본다.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는 것에 고무되었는지, 세훈은 잠시 H반 교실을 한번 싹 돌아본다.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 세훈의 입을. 세훈은 점점 더 신이 나서, 한껏 과장된 몸짓을 하며 말한다.
“‘ASSRA’라는 초능력 연구단체가 아주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냈는데 말이지...”
‘초능력’이라는 말을 듣자 몇 명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또 몇 명은 짐짓 기대하는 눈이다. 바로 옆에 선 준후는 그게 뭐냐는 듯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다.
“아침부터 또 그 이야기 시작이네. 요즘 초능력 이야기로 다들 귀찮게 굴던데.”
준후는 실망감을 강하게 드러낸다. 찰나의 시간에, 세훈은 자신의 말에 반응한 동급생들을 유심히 본다.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나 확인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다들 신기해하거나 기대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별로 관심 없어 하는 눈이지, 의심스러운 눈빛, 의심스러운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해 보기로 한다. 이대로 그만두고 돌아간다면 이도 저도 안 한 듯 분위기만 이상하게 만들어 버릴뿐더러, 아직 진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으니까.
“잘 들어, 잘 들어! 이제부터 진짜니까.”
“뭔데 그래, 뭔데? 어엉?”
“이상한 거 말하면 여기 다시는 못 들어올 줄 알아.”
거친 소리가 섞인 아우성이 H반 교실 여기저기서 들어온다. 몇몇은 한껏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세훈을 노려본다. 세훈은 겉으로는 짐짓 놀라며 저자세를 보이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미소를 짓고 있다. 슬슬, 이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
“좋아. 이상한 말 안 할 테니까, 그러면 잘 들어야 한다.”
세훈은 침을 꿀꺽 삼킨다. 그리고 입을 연다.
“초능력을 쓰는 사람은, 그 능력을 단기간에 많이 쓰게 되면, 신체의 관련된 부위가 점점 커진다고 하더라. 예를 들자면, 주로 손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점점 손이 커지게 돼. 특히 정신과 관련된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머리가 점점 커지게 될 것이고, 능력을 사용하는 횟수에 비례해, 머리는 점점 더 커지게 될 거라고 하는 그런 연구결과가 있는데...”
세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니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야! 이게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
니나는 대뜸 세훈한테로 와서, 눈을 부릅뜨고 마치 세훈을 잡아먹기라도 할 듯 목청을 최대한 키워 소리 지른다. 세훈이 순간 뒤로 나자빠질 뻔할 정도다.
“내 몸 어디가 커졌다는 거야!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니나는 잔뜩 벌게진 얼굴을 세훈한테 들이밀고는, 씩씩거리며 자리로 돌아간다.
”아... 아아아... 그래... 그래.“
세훈은 다시 한번, 살짝 H반 교실을 돌아본다. 세훈에게 아예 관심 없는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무슨 개소리냐는 듯 허탈해하며, 일부는 팔, 다리 등 여기저기를 만져 보며 세훈을 노려본다.
“그... 그래, 그래! 거짓말이지. 모두에게 사과하도록 하지.”
세훈은 험악한 얼굴을 한 H반 동급생들을 보고 두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말한다.
“하지만! 딱 걸려들었지 말이야. 그것도 단 한 번에!”
세훈 뒤에 선 현애와 주리의 눈에도 들어온다. 세훈의 바로 옆에 선 준후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만지고 있는 모습이.
“야, 박준후. 너, 텔레패스지.”
세훈은 대뜸 준후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깔고 말한다.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모습은 싹 사라지고, 마치 피의자를 심문하는 형사의 모습과도 같다.
“뭐, 뭐야! 그게 또 무슨 말이야!”
준후는 얼른 손에서 머리를 떼며 말한다.
“이건 그냥 머리가 가려워서 긁었을 뿐이야! 내가 무슨 텔레파시를 쓴다고...”
“끝까지 발뺌한다 이거지!”
세훈은 준후를 향해, 있는 악 없는 악을 다 써가며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준후는 순간 등 뒤의 교실 벽에 자기도 모르게 등을 기대지만, 태연한 얼굴은 변하지 않는다. 그 얼굴을 보니, 더 화가 치밀어오른다. 순간 한 대 쳐 주고 싶지만, 주먹을 꽉 쥔다.
대신에 발동한다. 세훈의 능력을. 만약 이 녀석이 텔레패스가 맞는다면, 준후가 내보낸 텔레파시는, 분명 모두에게 들리리라. 비록 그것이 음성이 아니더라도! 이런 확신을 품은 지 1초도 안되어...
조세훈, 남궁현애 이 자식들! 내가 너희들을 가만둘까 보냐!
들린다! 확실히! 그것도 아주 또렷하게! H반 교실 안에 있던 거의 모두가, 준후를 돌아본다.
“아... 아... 아...”
준후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고,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못하고, 혀끝에서 막힌다. 준후의 눈이 흔들리며, 현애, 세훈, 그리고 H반 교실을 번갈아 본다.
“반의 그 누구도 머리에는 손을 안 댔어. 너를 빼고는 말이지.”
세훈은 준후의 이마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는 살짝 민다. 준후는 당혹감과 분노가 섞인 눈으로 세훈과 현애를 번갈아 본다.
“그리고 모두한테 확실히 들렸지? 네 텔레파시 말이야.”
준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숙인 채, 이마와 손에서 식은땀만 흘릴 뿐이다.
“자, 이래도 인정 안 할래?”
세훈이 마치 윽박지르듯, 어쩔 줄 몰라하는 준후를 몰아붙인다.
다음 순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준후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현애와 세훈, 주리는 준후를 숨죽이고 지켜본다. 불길한 아우라가 느껴진다.
다시 고개를 든 준후는, 완연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몇 분 전까지 세훈과 농담을 나누던 어딘가 유쾌해 보이기까지 하던 얼굴은 어디 가고, 입꼬리는 기분 나쁘게 올라가 있고, 살기와 독기를 가득 품은 눈을 하고 있다.
“그래, 현애 너한테 텔레파시를 보낸 건 나야.”
준후는 입 한쪽을 찡그리며, 현애를 노려보고 말한다.
“역시, 듣던 대로, 성가시게 생겼어.”
“아, 그러셨어?”
현애는 애써 끓어오르려는 것을 누르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것을 누르려고 해도, 주리는 느낀다. 자신 바로 옆에서 나오는 한기를.?
“그러면, 말해 봐. 누가 너한테 이러라고 시켰는지.”
“하하하, 말해 줄까? 좋아. 말해 주지. 그건...”
♩♪♬
수업시간 벨이다. 9시 정각이다. 하필 이럴 때에!
“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절대 곱게 넘어가지는 않을 테니까.”
현애는 준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한마디 하고는, 세훈, 주리와 함께 G반 교실로 들어간다. 준후는 가만 서서 살기를 띤 눈으로 현애를 보다가, 현애가 들어가자, 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여... 여보세요?“
목소리가 들린다. 여학생의 목소리다.
”손을 좀 봐 줘야겠어. 그 녀석들한테 말이야!“
”아아, 그래. 언제쯤?“
”이따가, 점심시간에 말이지!“
”그래, 좋아. 점심시간에 보자고.“
전화가 끊어진다. 준후는 미소를 지으며 자기 자리로 가서 앉는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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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0-06-05 13:08:02
이렇게 멋지게 역습에 성공하다니...
블러핑이 이렇게 잘 먹혀들어가는 게 극적으로 재미있게 전개되었어요.
꽤나 평판이 좋은 박준후의 실체가 이렇게 백일하에 드러난 것을 보니 역시 한 길 사람 속을 알기 힘들다는 게 다시금 실감나고 있어요.
그나저나 니나 첼라코프스카는 대체 뭘 생각했길래 얼굴이 벌개지면서 폭주해 버렸는지, 흔히 하는 말로 머리 속에 음란마귀가 가득해서 뭔가 야한 생각이라도 한 것 같네요. 이렇게 상당히 꼴좋게 실체가 폭로되었으니 한동안 힘들것 같아 보이네요.
죠죠의 기묘한 모험 3부에서 쿠죠 죠타로가 선상에서 펼친 블러핑 공작에서 가짜 캡틴 테닐이 정체를 들켰을 때도 이런 분위기였을 것 같네요.
시어하트어택
2020-06-06 23:01:55
사실, 마드리갈님이 말씀하신 그 장면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죠. 언젠가 한번 써 보려고 했던 파트이기도 합니다.
이미지가 좋은 사람이 저렇게 추한 실체가 밝혀진다면 참 그 갭이 큽니다. 그걸 노리기도 했고요.
SiteOwner
2020-06-05 22:29:07
사람은 그 실체를 철저히 속이다가도, 뜻하지 않은 순간에 그 실체를 무심코 드러낸다고 하지요.
게다가 그 실체와 표면적인 모습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충격도 커집니다.
이전 회차에서 12분 뒤의 상황인 이번 회차는, 정체를 들킨 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겠습니다. 과연, 도둑이 제발 저리기 마련이고, 그래서 니나 첼라코프스카는 이상할 정도로 정색을 하고, 박준후는 자신이 문제의 텔레패스라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 버리고 표면상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비열한 캐릭터인 것도 스스로 폭로해 버리는 거겠지요.
정말 통쾌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국면전환을 계획하겠지만, 처음부터 이런 짓을 안 저지른 것만 못하다는 건 분명하겠습니다.
시어하트어택
2020-06-06 23:04:52
이런 반전의 묘미가 있는 법이죠. 조금 빠르게 쓰기는 했지만 상당히 공들여서 쓴 파트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경우는 충분히 있겠죠. 자신의 실체를 숨기고 겉으로는 아닌 척 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쓴 것처럼 극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