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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 월요일 미린고등학교의 점심시간. 분수대 앞 벤치에는 금발의 안경을 쓴 남학생 한 명이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텍스트 위주에 삽화 하나가 있는, 소설 페이지다. 금발의 남학생은 AI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분수대에서 튄 물방울이 안경에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계속 보고 있다.
세훈은 바로 근처에서, 이 남학생을 주시하고 있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라서 그런지, 더욱 관심이 간다. 하지만 뒤에서만 보니, 누군지는 모르겠다. 조금 더 가까이 가 봐야겠는데... 그렇게 마음먹은 세훈은 몇 걸음 앞으로 가 본다.
“음? 리하르트 선배잖아!”
누군지 확인한 세훈은 대뜸 벤치로 성큼성큼 다가가, 그 남학생의 옆에 앉는다.
“어? 누구야?”
AI폰을 보던 남학생이 옆을 돌아본다.
“조세훈, 너 어느새...”
“선배, 저 왔어요-”
“아니, 말도 안 하고 오면 어떡해!”
리하르트는 깜짝 놀란 듯, 세훈을 가볍게 미는 척하며 말한다.
“올 때는 살짝 말이라도 좀 하지.”
“역시, 재미있는 소설을 보고 있을 줄 알았다니까요.”
“아... 맞아. 내가 뭘 보고 있었냐면 말이지...”
리하르트는 화면을 넘겨서 소설 메인 화면을 보여준다.
[최강 냉동인간]
[작가 : 드릴맨]
[조회수 11,123,862, 추천수 36,412]
“드릴맨이요? 이 사람, 작년까지는 <아포칼립스 생활백서> 썼잖아요. 신작 냈나?”
“맞아. 4월부터 쓴 건데, 벌써 조회수가 이만큼 올랐어. 커뮤니티에서도 드릴맨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야.”
“그래요? 왜 난 몰랐지?”
세훈 역시 연재사이트 ‘소설이 좋아’에 들어가 본다. 과연, 오늘 랭킹 4위에 <최강 냉동인간>이 올라 있다.
“이상하다... 안 보였는데...”
“네가 관심을 안 두었으니까 안 보였던 거겠지. 안 그래?”
“그... 그런 것 같네요.”
“그건 그렇고, 내가 더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 줄까?”
“어? 뭐죠, 그 ‘재미있는 사실’이라는 건?”
리하르트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고, 얼굴은 뭔가 음모를 꾸미기라도 하듯 슬슬 주위를 살피며 말한다.
“드릴맨 작가가 어디 사는지, 혹시 알고 있어?”
“글쎄요... 선배님, 갑자기 그건 왜요?”
리하르트는 목소리를 더욱 낮춘다.
“우리 학교 근처야. 미린 시사이드센터 있지? 그 근처 빌라에 산다고.”
“네에에에?”
세훈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진다.
“정말요오오?”
세훈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주위에 지나가는 동급생, 선배, 후배들이 한 번씩 세훈을 돌아본다. 세훈은 당황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는다.
“야! 조용히 해!”
“네... 네.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됐어요?”
“어떻게 알게 됐냐고?”
그렇게 말하고는, 리하르트는 다시 한번 주위를 살핀다. 고동색 머리의 여학생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리하르트는 슬슬 그 여학생이 오는 걸 살피더니, 황급히 세훈에게서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AI폰을 보는 척한다.
“저기, 선배님.”
리하르트는 못 들은 척 애써 시선을 여학생 쪽으로 돌리지 않으려고 한다.
잠시 후.
“선배님?”
리하르트와 세훈의 옆에서, 또다시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세훈이 보니, 현애다!
“아니, 왜!”
리하르트가 현애를 보고는 애써 태연한 척 말하지만...
“나한테 무슨 볼 일이 있다고...”
“다 알고 온 거예요. 드릴맨 작가 사는 데 말하는 거였죠? 그걸 왜 숨기려고 그래요?”
“아니, 너는 도서부도 아니면서 왜 그런 걸...”
“다 들렸어요! 비밀스러운 말을 그렇게 남들 다 들리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
리하르트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머리를 긁는다. 어떻게든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머리를 팍 숙이고 AI폰만 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
“저, 선배님, 피하지 말고요.”
어느새, 리하르트의 바로 앞이다. 리하르트는 놀랐는지 고개를 확 들며 소리지른다.
“깜짝이야! 갑자기 왜 앞에서 그렇게 말하고 그래!”
“제가 언제 큰 소리로 말했나요. 그냥 말한 건데.”
“하... 그래. 드릴맨 작가에 대해서 뭘 알고 싶은데?”
“일단 어디 사는지 들었으니, 가 보죠. 미린 시사이드센터 근처라고 했죠?”
“맞아.”
리하르트의 입은 무겁다.
“그럼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아니, 네가 가겠다고?”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올라간다.
“너 도서부도 아니잖아! 이건 도서부원들한테만 말하려던 거였다고!”
“이미 들은 걸 어떡하나요.”
현애는 태연한 목소리로, 그러나 지지 않겠다는 듯 말한다.
“그러니까, 도서부원들 안 가겠다고 하면, 저 끼워 달라고요.”
“하...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리하르트는 마지못해 대답한다.?
현애가 자리를 뜨자, 리하르트는 막힌 것을 뱉어내듯 한숨을 푹 내쉬며, 세훈을 돌아본다.
“저 애 있잖아.”
“아... 왜요?”
“원래 저런 성격인 거야?”
리하르트의 목소리는 현애를 만나기 전의 온화한 목소리로 돌아가 있다.
“네. 전학 올 때부터 저랬어요.”
“그래...”
“왜요?”
“사람은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저렇게 당돌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리하르트는 연거푸 한숨을 푹푹 내쉰다.
오후 4시, 미린고등학교 남쪽의 주택가. 학생들이 자주 다니는 서쪽과는 달리, 사람들이 조금은 덜 다니는 쪽이다. 그래도 하교 시간이라 길에는 학생들이 종종 보인다.
세 명의 미린고 학생들이 양옆에 저택들이 늘어선 길을 걷고 있다. 금발의 남학생, 검은 머리 남학생, 그리고 고동색 머리의 여학생. 리하르트가 앞에 가고, 현애와 세훈이 조금 뒤에 따라가고 있다.
“결국 아무도 안 간다고 했나 봐요?”
현애가 실실 웃으며 앞에 가는 리하르트에게 말한다.
“이렇게 셋이서 가는 걸 보면요.”
“시끄러, 너...”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끓는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니, 놀리는 게 아니라, 저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고요.”
“그래...”
리하르트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한다.
“결국은, 이렇게 조촐하게 세 명끼리만 가게 됐네.”
“뭐, 엄밀히 말하면, 세 명만 가는 건 아니죠.”
“뭐... 뭐야?”
리하르트의 말은, 놀라움보다는, ‘어이없음’이 더 크게 묻어나온다.
“누구 마음대로 또 끌어온 거야?”
“제가 끌어오려고 끌어온 게 아니에요.”
현애가 또 능청스럽게 말한다.
“자기가 막 오고 싶다고 애걸복걸하는데 어떻게 막아요.”
“야, 그럼 네 선에서 막았어야지!”
“그 애는 드릴맨의 골수 팬이라서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는데 그럼 어떡하나요.”
“하... 좋아.”
리하르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또 한숨을 푹 내쉬고는, 가던 길을 멈추고 현애를 돌아본다.
“그 애 어디 있어? 네가 데려왔다는 애 말이야.”
현애는 대답 대신 주위를 둘러본다.
“음... 글쎄요? 지금쯤 온다고 했을 텐데...”
“아니, 뭐야. 그럼 설마 나를 속이거나 한 거야?”
“아니요, 분명히 온다고 했어요.”
“그러면 대체 누가 오는 거야?”
리하르트가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한다.
“적어도 누가 오는 건지는 말해 줘야 할...”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지려는 그때.
“선배님! 현애야! 세훈아! 기다렸지?”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 저택 너머에서, 점점 가까워진다. 그것도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 약간 많이 울리면서도 가는 목소리. 현애는 누구인지 알 것 같다.
다음 순간, 현애의 앞에는 큰 덩치의 여학생이 멈춰 서서 숨을 몰아쉰다.
“리나 왔어?”
“하... 왔어.”
“휴.”
리하르트는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왜 초대받지 않은 애들만 이렇게 오는 건가... 하지만 그런 말은 혀 바로 아래에서 멈춰 버리고, 조그맣게, 그것도 아주 조그맣게 한숨만 내뱉을 뿐이다.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 리하르트는 리나를 돌아본다.
“그래... 너도 드릴맨 작가 보러 가는 거야?”
“네, 맞아요!”
리나가 들뜬 얼굴을 하고 말한다.
“제가 드릴맨 작가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음, 뭐가 좋은 거지?”
“다 좋죠! 전개, 대사, 거기에 주인공하고 서브하고 케미까지!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팬인가 보구나, 너.”
“맞아요.”
리나는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낸다. 드릴맨의 전작 <전지적 도련님 시점>의 1권이다.
“이 정도로 팬이라고요.”
“후... 인정해야겠어.”
리하르트는 리나가 가져온 책을 보고 잠시 말이 없다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말을 꺼낸다.
“너 그런데, 도서부에는 왜 안 들어온 거야? 이렇게 책을 좋아하는데.”
“동물 돌보느라 바빠서 그렇죠, 뭐.”
“동물?”
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현애는 며칠 전의 그때가 다시 생각났는지 피식 웃는다.
“뭐, 좋아. 아무튼, 같이 가 보자고. 어딘지는 내가 다 알아 놨으니까.”
세훈이 주위를 돌아보니, 벌써 바다가 보이고, 벽돌로 지어진 빌라들과 상가, 오피스 건물들, 미린 라이트레일 고가, 미린 시사이드 센터, 공원 등이 보인다.
“선배님, 벌써 왔는데요. 이 근처 아니에요?”
“아, 그렇지, 참.”
미린 시사이드센터가 보이는 대로변의 한 빌라. 바다가 보이는 큰 방이 있는데, 한쪽 벽은 책과 이런저런 장식품들로 가득 차 있고, 그 옆에 있는 몇 권의 책이 쌓인 책상에서는 붉은 산발한 머리의 남자가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다. 남자의 오른쪽 얼굴은 저녁의 지는 햇빛이 감싸고, 창밖으로는 막 해가 지려는 주홍빛이 섞인 바다가 보인다.
이 남자의 이름은 주수영, 필명은 드릴맨. 전작 <아포칼립스 생활백서>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고, 지금 쓰는 <최강 냉동인간> 역시 그만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야, 오늘 벌써 <최강 냉동인간> 3회차를 썼잖아. 역시 지난 금요일하고 토요일에 자료수집을 열심히 한 보람이 있다니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벌어지며 만족감에 겨워 등을 뒤로 쭉 뻗는다.
“하... 오늘 목표도 초과달성했으니, 이제 슬슬...”
그가 막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려는 그때.
“수영 님, 수영 님.”
“왜 그래, *니르바나. 오늘 일도 다 끝났는데.”
“손님 왔어요.”
“손님이라니? 우리 집에?”
수영은 잠시 말을 머뭇거리지만, 곧 무언가를 생각해 내고는 손뼉을 친다.
“아 참! 누구 만난다고 약속했었지.”
“혹시 그 사람이, 미린고등학교 도서부장, ‘리하르트 폰 라이첸슈타인’ 맞나요?”
“아, 맞아. 혹시...”
수영이 말하자마자, 모니터에 현관 앞의 화면이 나타난다.
“이미 와 있네. 그것도... 4명씩이나.”
“문 열까요, 수영 님?”
“아, 열어 줘.”
빌라 3층의 현관문 앞. 현애와 세훈, 리하르트, 리나가 눈이 빠지도록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면 여기로 오실 테니 기다리세요.”
인공지능 *니르바나의 음성이 들리고.
문이 열린다.
보인다.
산발한 붉은 머리의 남자가.
그를 보자마자, 리하르트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큰 소리로 먼저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0-10-12 14:23:47
정말 오랜만에 코멘트하네요.
인기작가가 생활권내에 거주하고 있고, 그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임에 틀림없어요.
하지만, 그것을 반기지 않는 사람들도 분명 있기 마련이죠. 리하르트에게는 원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이 정말 달갑지 않을 것이고...
드릴맨이라는 필명의 작가 주수영은 괴짜같은 이미지의 인물.
그런데 선약이 있는 리하르트 이외에는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는데, 생면부지의 인물에게도 친절한 성격일까요?
시어하트어택
2020-10-12 23:21:40
수영 같은 경우는 현실에 존재하는 인기 작가들의 이미지를 섞어서 만들어 봤습니다. 나름의 상상도 가미해서 말이죠. 실제라면 저런 자신만의 작업실이 아니라 카페 같은 데 앉아서 글을 쓰고 있을 가능성이 높긴 합니다만...
수영과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는 뒤에부터가 좀더 재미있어질 겁니다.
SiteOwner
2020-10-21 23:46:15
인기작가가 되면 어떤 생활을 할 수 있을까에의 답 중 하나가 여기에서 보이는군요.
저도 언젠가는 출판물로 인기를 끌고 고수익을 내고 싶은 사람이라서 주수영의 생활상에 특히 눈길이 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팬이 찾아오는 것도 눈길이 가는군요.
사실 저도 저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책의 저자들로부터 가르침과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중 어느 원로 언론인은 올해에 타계했습니다만, 그분의 빈소를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참 코로나19 판데믹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고, 그것을 알게 된 게 이미 언론에 보도된 다음이었다 보니...그렇게 회한이 남기도 합니다.
시어하트어택
2020-10-22 23:30:51
저도 이런저런 상상을 해 보며 만들어 본 에피소드입니다. 인기 작가가 되어 팬이 직접 찾아온다면 그것 또한 재미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