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마녀가 군림하는 마신의 영지.
의식의 지평선을 넘어, 무의식의 오솔길을 따라 걷던 나는 오래지 않아 그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왠지 그리운걸.’
이곳은 전에 한 번 도달했던 장소.
내가 이드라의 사도가 되기 이전, 그녀의 화신과 처음 만난 공간.
그 당시에는 신기를 통해 우연히 새어 들어온 것에 불과했지만, 내 의지로 다시 돌아오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전신의 감각을 일깨우며 주변을 주의 깊게 살폈다.
허접한 마법사의 공방이나, 인간 귀족들의 영지에도 방위 병력은 마련되어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이곳은 신의 영지.
고대의 영웅 서사에서 그리듯, 어마어마한 방위 병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가능하면 환영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일단 이드라의 사도인 만큼, 쉽게 보내주지는 않을까?
미약한 기대를 품어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역시 내 희망 사항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사아아아-.
죽은 자의 원한이 시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을 타고 요사한 기운이 내 목덜미를 할퀴었다.
조금 차갑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바람.
하지만 사도가 된 뒤 얻게 된 칠감이 미풍에 섞인 다른 감정을 내게 알려왔다.
살기, 그리고 경계심.
숲이 자의식을 지니고 나라는 외인의 침입을 바라지 않는 걸까? 아니면 숲에 사는 이들의 낯선 이를 향한 공포심인가?
떠나라.
그 바람은 분명 내게 그렇게 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경고. 아마 내가 그 뜻에 반한다면 바로 행동을 시작하겠지. 하지만 나로서도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이곳을 떠날 수는 없다.
“미안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어.”
숲을 향해 대답하는 것인지, 아니면 두려움에 떠는 내 마음을 다잡기 위함인지. 억지로 큰 소리로 대답하며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에 화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변하는 풍경.
우웅-!
뭐지, 이건?
발목을 휘감는 불쾌한 감촉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시야를 아래로 내렸다.
찰박-.
이윽고 눈에 보인 것은 검고 끈적한 액체로 뒤덮여 있는 늪지대. 언뜻 녹인 초콜릿처럼 보이는 검은 오탁은 함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발목을 잡고 매달려왔다.
‘귀찮게 됐네.’
아무래도 쉽게 통과를 시켜줄 생각은 없는지, 평범한 이라면 걷는 것조차 힘든 환경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변할 수도 있었나?’
이 숲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시간적인 변화만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전에 내가 본 것은 이 숲의 일부에 불과했나 보다.
‘하지만 그래도 못 걸을 정도는 아니야.’
에스텔과 로즈마리의 훈련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들 장난에 불과하지.
그렇게 다시 한 걸음을 억지로 나서자, 이번에는 또 한 번 숲이 변화했다.
우웅-.
이번에 변화한 것은 날씨.
‘덥네.’
갑자기 전신을 짓누르다 못해, 온몸에 땀에 물들 정도로 더운 공기가 나를 짓눌렀다.
‘시간의 변화 정도는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했는데 말이지.’
전에 왔을 때도 이 숲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계절이 바뀌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이렇게 순환이 완성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1시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당시의 전체적인 기후만큼은 변하지 않았었는데…….
‘그 당시의 숲은 카다스랑 비슷한 수준이었지?’
비록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덥긴 하지만, 봄과 가을의 카다스는 쾌적한 환경을 자랑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기후는 남부의 우림을 연상시키는 극한의 열대.
‘완전히 날 엿 먹이고 싶은 모양이네.’
이건 좀 너무하지 않아?
내가 이드라의 사도인데 왜 이드라의 영역에서 이런 처우를 당해야 하는 건지.
솔직히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불만을 터뜨린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지만.’
어쩌면 이 숲을 통과하는 것 자체가 그녀의 본체를 마주하기 위한 시련일지도 모르고.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걸음을 내디뎠고, 기후로는 내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숲 역시 변화하지 않았다.
그래. ‘변하지는 않았다.’
찰박-.
진흙탕에서 뛰노는 어린아이가 내는 것 같은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괴한 그림자가 늪에서 몸을 일으켰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앙상한 두 팔. 못해도 3일은 굶은 사람의 것처럼 말라비틀어진 그것은 잠시 주변을 더듬더니 땅을 짚고 밀어내었다.
이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둥근 머리와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마른 몸통. 그리고 팔과 비슷한 앙상한 두 다리.
다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것은 이내 두 발로 일어서서 그 전체 모습을 선보였다.
거기에 서 있는 것은 외곽선만 보면 기괴하지는 않고 익숙하기 그지없는 생물.
‘인간?’
나와 같은 종족의 등장에 기뻐할 법도 하건만, 무언가 기묘한 위화감이 내 발길을 붙잡았다.
‘뭔가 이상한데?’
사람이 저렇게 움직일 수 있나?
삐걱-. 삐걱-.
마치 녹슨 경첩 같은 소리를 내는 녀석의 관절. 그것은 분명 인간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기괴한 모습에 잠시 녀석을 주의 깊게 살펴본 나는 이윽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저건 사람이 아니야.’
과거에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의 저건 도저히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다.
세월의 흐름에도 뼈는 삭지 않았기에 형태는 인간의 것과 같았지만, 근육은 늪의 오탁과 시간의 흐름에 집어 삼켜져 부패하고 녹아내린 지 오래. 인제 와서는 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마법적 의식을 통해 사령술사가 조종하는 해골인부(骸骨人夫, Skeleton Worker)라면 모를까, 일반적이라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리라.
그런데도 녀석이 움직일 수 있는 건, 다른 힘이 존재한다는 뜻.
휘리릭-.
녀석의 체내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기생식물의 것처럼 기괴한 넝쿨.
일반적인 식물의 넝쿨과는 다르게 끊임없이 움직이는 녀석은 꼭 두족류의 촉수라도 되는 것처럼 근육의 결을 대신해 진흙과 뼈로 이루어진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일전에 괴뢰(傀儡, Golem)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던 연금술사 친구가 농사 겸용이라고 보여준 진흙 괴뢰처럼 기괴하기 그지없는 모습.
하지만 감자 넝쿨을 몸에서 기르던 걸 제외하면 그냥 농사 도우미에 불과했던 그때의 괴뢰와는 다르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훨씬 위협적일 게 분명했다.
“아아아아-.”
오랜만에 일어나서 뻐근한 듯 관절을 꺾으며 주변을 살피던 녀석은 이윽고 입으로 기이한 소리를 토해냈다.
언뜻 듣기에는 신음 같기도 하고, 달리 생각하면 울부짖음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기이한 소음.
기분 나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내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하기에 가만히 지켜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후 펼쳐진 광경은 최악이었다.
찰박-.
찰박-.
찰박-.
일종의 신호였던 것일까? 소음에 화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늪에 잠겨있던 무수히 많은 그림자가 영면에서 깨어났다. 그 형태는 제각각.
‘인간, 요정, 난쟁이. 별별 것이 다 있네.’
그 절대다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것들. 특별한 능력이 있다면 모를까 신체 능력 면에서 내게 위협적이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일부만큼은 그리 쉽게 넘기지 못했다.
무리의 뒤쪽. 특이한 형태의 그림자들 또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말의 것을 한 반마족(半馬族, Centaur).
다른 건 늑대와 인간을 뒤섞은 야성적인 낭인족(狼人族, Lycanthrope).
거기에 이층 건물보다 큰 키에, 어지간한 소검보다 날카로운 뻐드렁니가 돋은 식인귀(食人鬼, Ogre)까지.
그 외에 일반인은 볼 수도 없고, 볼 이유도 없는 희귀한 종족들.
살아있을 때뿐만이 아니라 활시인이 되더라도 무섭기 그지없을 것들의 그림자에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아아아!”
이윽고 시작되는 무수한 괴성.
처음에는 단순히 기이한 소음에 불과했던 음성은 서서히 하나의 목적을 지닌 음률로 화했다.
그 음률이 의미하는 것은 찬가.
‘이드라를 경배하고 있어.’
녀석들도 그녀에게 홀려있는 걸까?
혹시 내가 이 숲에 처음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면 나 역시 놈들과 같은 꼴이 되는 거였을까?
소름 돋는 가능성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이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녀석들은 계속 노래하고 있을 뿐. 굳이 나를 어찌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무시하고 지나가면 되지 않을까?
어리석을 정도로 낙천적인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싸우는 건 아무리 그래도 체력 소모가 지나치게 크고, 피해 돌아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대체 몇 마리야, 이거?’
대충 세봐도 천마리는 넘어가는 게 분명. 이것도 단순히 감에 불과한 걸 고려하면,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의 두 배 이상일지 모른다.
‘일단 계속 가자.’
어려운 결심 끝에 다시 한 걸음을 나아가자,
끼이이익-!
녹슨 관절이 돌아가는 기이한 소리와 함께 녀석들은 일제히 나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르르르.”
그와 동시에 끝을 고하는 찬가.
이윽고 녀석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가래가 끓는 것과도 같은 불쾌하면서도 적의가 넘치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그냥 보내줄 것 같지는 않은데?
나를 바라보던 녀석들의 눈동자에 비친 감정은 분명한 살기!
찰박-!
이윽고 녀석들 나를 향해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싸워야 하나?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아마 녀석들은 일전에 나처럼 그저 휘말린 것에 불과한 이들. 마음 같아서는 싸우지 않고 해방해주고 싶을 따름이다.
하나, 그것은 고작해야 이상. 살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녀석들을 가능한 한 고통스럽지 않게 처리하는 것뿐이다.
“강림!”
나는 언제나처럼 기세 넘치는 목소리로 강림을 외쳤고, 변화를 기다렸다.
분명 그리 오래지 않아 세상이 찢어지는 것과 동시에 내 몸을 타고 전능감이 느껴질 터.
그런데…….
응?
‘왜 안 변하는 거지?’
“강림!”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몇 번씩 다시 외쳐보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어째서?
‘뭔가 잘못됐나?’
의심과 함께 목으로 향하는 손.
그리고 내가 느낀 것은 차가운 금속의 냉기가 아닌, 자신의 살결뿐이었다.
“신기가 없어?”
‘설마 이곳에서는 변신할 수 없나?’
예상외의 사태에 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아아아아!”
녀석들은 날 기다려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젠장!”
맨몸으로 내게 몰려오는 괴물들을 마주하며 나는 속으로 이드라와 이 세상 모든 것을 향해 온갖 욕설을 내뱉었다.
?
***??????? ***
?
‘흠, 드디어 도달하였느냐?’
숲의 깊은 곳에 있는 여신의 옥좌.
그곳에서 잠들어있던 꿈의 마녀는 조용히 눈을 떴다.
본디 이 숲은 그녀의 일부.
그녀가 원한다면 그 어떤 곳보다도 안전하지만, 역으로 그녀의 허락 없이 진입한 이에게는 무엇보다도 위험한 장소.
본디 그녀의 사도가 찾아온다면 위협은 모두 치워놔야 할 터.
[그건 아니 될 일이지.]
하지만 그녀는 이번만큼은 의도적으로 위협을 방치했다.
그녀의 사도가 원하는 것은 힘.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곳에 도달했다간 사도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옛날에도 이러한 시기가 있었을 터다.’
먼 옛날. 인간이 아직 털 없는 원숭이에 불과하던 시기.
신이 지상을 누비고, 용이 천공을 가르며, 마가 어둠에 도사리던 신화의 시대.
그 시절에도 신의 영지를 방문하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이는 신의 영지가 단순히 영지 이상의 공간이기에 일어나는 현상.
‘그 아이에게 있어 좋은 계기가 될 터.’
단순히 신의 본체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사도는 분명히 한 단계 성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본인의 격이 높아지기에 일어나는 현상일 뿐.
‘인간으로서의 강함은 여기까지 오는 길에 달성할 터.’
영지에서 겪은 고난이 그녀의 사도가 한층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그것이 평소라면 그저 잠들어있을 뿐인 저주받은 화석들을 깨운 그녀의 의지.
어쩌면 그녀의 사도는 나약하기에 그 잔해들의 파도를 꺾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을 테지만.
[그리되면 어차피 본녀를 마주하는 순간 살아남지 못할 터.]
‘그리고 본녀가 선택한 이가 그 정도 허접한 시련을 뛰어넘지 못할 리도 없으리라.’
거기에 의식이 시작하기 전, 그녀가 그에게 넘겨준 ‘조그마한 가능성’ 또한 그녀가 자신하는 이유였다.
그 조언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사도가 이곳에 오지 못 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자, 어서 오너라 본녀의 사도여.]
모시는 신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의식을 치른 사도의 얼굴을 떠올리며, 꿈의 마녀는 차가우면서도 아름다운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
***??????? ***
?
“하압!”
쿵-!
전력을 다해 장타를 뻗자, 본래 요정이었던 걸로 추정되는 괴물이 자리에 고꾸라졌다.
마르긴 했지만 분명 나보다 머리 하나 이상 큰 크기. 이전까지의 나였다면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였을 터지만, 몇 가지 사항이 겹쳐서 녀석들에게도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일차적으로 약해진 녀석들의 육체.
늪 속에서 근육이 썩었다는 것은 단순히 비유적인 의미는 아닌지, 덩치와 달리 녀석들의 힘은 그리 대단치 않았다. 속도와 내구성 역시 매한가지. 기괴해 보이는 생김새에 비하면 일반적으로 사령술사가 부리는 활시인에 비해서도 한참 떨어지는 녀석들이다.
그다음으로 영향을 준 것은 에스텔에게 배운 동물상형권.
아무리 녀석들의 육체가 나약하다고 하지만, 어중간하게 배운 격투기로 쉽게 상대할 수 있을 수준은 아니다.
아마도 하나를 쓰러뜨리는 데에만 해도 한참의 시간이 들 터. 그런 식으로 싸우다간 오래지 않아서 내 체력이 먼저 바닥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한 번. 어쩌다가 두 번.
대충 그 정도만 정타로 들어간다면 녀석들은 몸은 산산이 부서져 다시 늪에 삼켜졌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끝은 아니었지만.
치이익-!
녀석들과 싸울 수 있던 이유 세 번째, 이드라의 환염을 손에서 미약하게나마 피워내며 나는 쓰러진 녀석을 향해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처음 녀석 역시 쓰러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제대로 된 공격을 머리에 꽂아버리자마자 녀석은 형태가 무너져 흙으로 돌아갔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의 곧바로 일어났지.’
몸이 진흙으로 되어있기 때문일까?
머리가 부서져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닌 듯 녀석은 어렵지 않게 다시 일어났다.
그때 우연히 발동한 것이 이 능력.
‘계약 자체는 남아있을 거로 생각해서 한 도박이 먹혀들었어.’
이 세계의 구조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사도 상태에서 환염을 다스리던 감각을 흉내를 내자 손끝에서 미세한 환염을 피울 수 있었다.
‘뭐, 크기는 비교도 안 되지만.’
사도였을 때와는 달리, 기껏해야 작은 촛불 수준의 환염에 한숨이 나오면서도 나는 녀석들을 상대로 계속해서 싸워나갔다.
현재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은 싸움.
체력이 문제일 뿐, 이대로 계속해나간다면 어렵지 않게 모두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저 녀석들의 전투력은 미지수야.’
나는 후방에서 싸움에 나서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소수의 괴물을 슬쩍 흘겨보았다.
인간이나 요정 같은 평범한 형태를 한 나머지와는 달리 녀석들은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계속 저렇게 가만히 있어 주면 좋겠는데.’
일반 괴물보다 훨씬 강할 가능성이 큰 만큼 가능한 한 싸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어림도 없는 소원이었나 보다.
“우오오오!”
내가 녀석들이 나서지 않기를 바라기 무섭게 그중 하나가 움직였다.
처음으로 나선 것은 거대한 식인귀 형상의 괴물.
부웅-!
녀석의 어지간한 성인 남성의 허리보다 두꺼운 팔이 파공성을 내며 나를 후려쳐 왔다.
‘피하는 건……불가능해!’
크긴 해도 속도는 빠르지 않은 만큼 이 늪만 아니었으면 보법을 밟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정면으로 맞받아칠 수밖에 없다.
“하압!”
기합성과 함께 뻗어 나가는 장타.
직후 충돌이 일어나며 강렬한 충격이 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크윽!”
결과는 명백한 이쪽의 손해.
전신이 충격 때문에 너덜너덜해진 나와는 다르게, 녀석은 환염에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눈에 띌 정도의 상처도 보이질 않았다.
“젠장!”
육체 자체의 한계인가?
에스텔이 설명하길 마투술이란 기술과 신체 능력, 그리고 마력이 하나가 되어서 사용하는 기술.
기술은 에스텔이 인정했을 정도의 수준이고, 마력은 마도기사가 아닌 한 최적화시킨 방법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 그렇기에 신체 능력으로 어떻게든 때워보고는 있었는데, 아무래도 슬슬 한계에 봉착한 모양이다.
‘사도가 될 수 있다면 별문제가 되진 않을 텐데.’
사도의 육신은 필멸자의 영역을 벗어난 존재. 부족한 마력 운용 문제는 어렵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변신할 수 없는 상황.
“큭!”몇 번 더 공방을 주고받았지만, 손해만 쌓여갔다.
이대로 간다면 패배.
“빌어먹을!”
곰을 흉내 내는 권법인 만큼 곰 수준의 신체 능력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과 동시에 억지로 마력을 운용하며 팔을 움직인 순간.
퍽-!
녀석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조금 전 내가 낸 힘은 내 신체 능력으로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그르르르.”
녀석 역시 놀랐는지 잠시 멈춰서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
하지만 나의 머리는 쉬지 못한 채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을 되짚고 있었다.
그리고 도달한 것은 하나의 결론.
‘설마?’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을 벗어난 상황. 하지만 내가 익힌 마법인 둔갑술과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답은 하나뿐이다.
‘시험해 볼 가치는 있어.’
다시 한번 전신의 마력을 끌어올리며 괴물을 향해 팔을 휘두르는 순간.
우드득-!
기괴한 소리를 내며 내 팔이 변화했다.
펑-!
그리고 다시 터져나가는 녀석의 몸통.
그 어마어마한 힘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나는 뒤틀린 내 팔의 형태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형태는 분명히 곰의 앞발.
“역시.”
부분 둔갑(部分遁甲,Partial Shapeshifting).
전설에서나 나오던 둔갑술의 극의!
‘이길 수 있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나는 괴물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9 댓글
마드리갈
2020-11-22 19:07:46
오랜만에 이렇게 시프터즈의 새 에피소드를 접할 수 있게 되어 정말 기뻐요!!
이제 33화를 읽고 있어요.
이전에 나온 장소에 다시 임하게 되어 반갑기도 하겠지만, 마냥 반갑게 여길 수만은 없겠네요.
게다가, 기괴한 것들이 가득하고, 위협적이지는 않더라도 일단은 간과하기 힘든 존재가 가득...
그리고 그 우려는 사실이 되었네요. 아무리 약한 적이라도 수가 많다면 금방 중과부적의 상황이 되는데다 적의 정확한 상태를 알 수도 없고, 주인공 그레고르의 육체 자체의 한계라고 하더라도 그걸 따져서 실익은 없을 건데...난감하네요.
Papillon
2020-11-22 21:34:57
글 내용이 수정되었습니다. 코멘트 내용과 제가 기억하던 결말이 달라서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어째 A4 1장 분량이 누락되어 있었네요. 아무래도 실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마드리갈
2020-11-23 00:16:17
그러셨군요. 이제, 추가된 내용을 다시 읽고 있어요.
사과하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새로 읽은 뒤에 코멘트는 별도로 붙일 예정인데, 처음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지 고민되네요.
처음 코멘트에 대해서 의견을 구할께요. 존속을 원하시는지, 아니면 삭제를 원하시는지 회답을 기다릴께요.
Papillon
2020-11-23 00:55:23
음, 마드리갈 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작품에 대한 코멘트는 독자의 고유영역이기에, 인신공격이 아닌 이상 제가 왈가왈부 할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드리갈
2020-11-23 01:10:12
그러면, 존속시켜 둘께요.
의견제시에 감사드려요. 그리고 새로이 코멘트를 작성할께요.
언제나 좋은 컨텐츠를 기고해 주시는 점에 깊이 감사드려요.
마드리갈
2020-11-27 13:17:55
이번에는 새로이 감상평을 쓸께요.
실시간으로 환경이 급변한다는 것, 분명 무서운 일임에 틀림없어요.
현실의 산사태, 눈사태 같은 것도 공포의 대상 그 자체일텐데, 주인공 그레고르가 다시금 필멸자에게 허가되지 않는 몽환의 수해에 임하면서 변화를 맞이하는 건 보통 사람으로는 아예 생각의 영역 자체를 벗어나는 거겠죠.
급변하는 환경뿐만 아니라, 자신의 힘과 의지 없이도 움직이는 것이 있는 건 더더욱 끔찍하기 짝없어요. 그런데도 주인공 그레고르는 그 상황을 보고, 다른 힘의 존재를 간파하네요. 냉철한 상황판단을 할 수 있는 게 정말 다행이예요.
중과부적의 상황하에서 반전이!!
전설에서나 언급되었던 그 부분 둔갑이 그레고르에게 현실이!!
역시 이건 사도의 권능인가요? 주인공도 적도 모두 놀랄 게 당연하겠어요.
Papillon
2020-11-29 03:45:38
부분 둔갑에 대해 자세한 건 다음 화에 나오겠지만, 사도의 권능 덕에 얻은 것은 맞습니다. 물론 이드라의 권능은 그저 가능성의 구현에 가깝기 때문에, 아예 불가능한 능력이었다면 도달할 수 없었겠지만요.
SiteOwner
2020-12-30 00:42:36
삼라만상의 변화라는 게 그 자체로도 무서운데, 압축해서 한꺼번에 일어난다면 그 공포는 더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화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에는 역시 자신만큼은 중심을 잡고 있고 자신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주인공 그레고르는 그것을 간파하였고, 자신이 기준이 되면서 부차적으로 자신의 일부분을 둔갑시킬 수 있는 부분 둔갑을 전설에서 현실로 구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드라의 의도는 그렇게 그레고르가 스스로 터득한 것이군요. 진정한 성장으로 봐야 할 듯합니다.Papillon
2020-12-31 23:14:28
사실 그것이 키포인트이긴 하지요. 사도의 권능은 신의 힘이긴 하지만 동시에 본인의 힘이기도 하다는 것.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