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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블랙 실드. 현애, 세훈, 주리가 앨런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여느 때처럼 비토가 반갑게 맞아 준다.
“저희... 어디 앉으면 되죠?”
“아,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비토를 따라, 일행은 카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눈에 익다. 저번에 처음 비토를 만났던 그 자리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몽실몽실한 머리에 초록색의 교복을 입은 여학생은 루비다.
그리고 그 옆에 2명의 남자가 앉아 있는데...
“어? 발레리오 씨?”
베이지색 정장을 입은 남자는 발레리오다. 하지만 발레리오 옆에 있는, 후드를 푹 덮어쓴, 얼굴이 겨우 보일락 말락 한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저, 발레리오 씨.”
세훈이 목소리를 낮추고 묻는다.
“여기 이 분은, 혹시 누구시죠? 저희가 못 본 분인가요? 아니면...”
“아픔을 이겨내고, 용기를 내어 이 자리에 나왔지.”
“아픔을... 이겨내다니요?”
그 후드를 쓴 남자가 후드를 스르르 벗는다. 굳게 다문 입, 하지만 빛나는 눈. 거기에 모자를 하나 쓰면...
“엘더 경위님 아닌가요?”
“마... 맞아.”
엘더 경위의 얼굴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나타내듯 많이 초췌해졌다.
“혹시 무엇 떄문이죠, 이렇게 여기 다 모인 건?”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해서 그래.”
한편 VP재단 본부.
“이제 진짜 끝이다! 너희들에게 더이상 기회는 없어!”
짧은 머리의 여자는 수영과 파비안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책 두 권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제 책들에 걸린 능력만 해제하면, 바로 책들은 수영과 파비안의 머리 위로 낙하한다!
“잘 가라...”
막 능력을 해제하려는 그때...
“엇...”
움직이지 못하겠다. 발부터 해서, 손까지!
“도대체 이게... 웬 덩굴이...”
여자의 온몸을, 바닥에서부터 뻗어나온 식물의 줄기가 감싸고 있다. 다리와 팔을 덮은 줄기는, 이제 여자의 목까지 덮으려고 한다.
“무슨 짓이야... 설마... 배신자!”
“그래. 내가 화초에서 뻗어나온 줄기를 충분히 기를 때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지. 이제 네가 풀려고 해도 이미 늦었어. 안 그래?”
“그래... 나는 이렇게 묶였지.”
온몸이 묶였음에도 여자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너희 머리 위에는 아직도 두툼한 책 두 권이 떠서 너희 머리를 노리고 있는 걸 잊지...”
뭐라고 더 말해 보려고 했지만, 여자의 말은 거기서 더 이어지지 못한다.
공중에 떠 있어야 할 책이 보이지 않는다!
“아, 그거? 내가 고이 모셨지.”
식물의 줄기에 양팔과 양다리가 묶인 여자의 귀에, 이번에는 수영의 목소리가 들린다.
“모셨다니...”
“이렇게 말이지.”
어느새, 수영의 양손에 들려 있는 건, 여자가 수영과 파비안의 머리 위에 떨어뜨리려던 책들이다!
“이대로 내가 질까 보냐, 질까 보냐...”
보인다. 수영과 파비안의 눈에, 책장 전체가 여자에게로 향하려는 모습이!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다시 수영이 말하자, 여자에게로 향하던 책장이 다시 원상 복구된다.
“뭘 하든, 내가 다시 돌려놔 줄 테니.”
여자가 막 고개를 떨구는 그 순간.
지잉-
장 박사의 사무실 문이 열리고, 메이링을 선두로 해서 레아, 호렌이 차례대로 사무실 안에 들어온다.
“후! 여기는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걱정 마세요, 메이링 씨. 우리는 괜찮으니까요.”
“정말... 정말 괜찮은 거죠?”
메이링의 말에 수영, 파비안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 식물에 묶인 여자는 누군데요?”
“장 박사 하수인인가 봐요. 메이링 씨가 좀 물어볼래요?”
“아, 그래요...”
메이링은 더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여자를 본다. 옆에서는 레아가 녹음할 준비를 한다. 여자는 메이링을 한번 보더니, 냉소로 가득찬 웃음을 짓는다.
“자, 이제 한번 말해 보실까. 네가 우리를 공격한 목적은 뭔지, 장 박사가 너한테 뭘 시켰는지.”
“말해서 뭐하나? 나는 이미 끝났는걸.”
“뭐... 뭐라고?”
“너희들이 이 컴퓨터를 켜서 정보를 얻어내려고 한 모양인데, 이 컴퓨터는, 너희들이 오기도 전에 다 내가 포맷했거든?”
메이링의 눈에 보인다. 여자의 얼굴색이 푸르게 변해 간다! 저건 분명 중독 증상인데!
“흐흐흐... 1분만 있으면 다 끝나.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지!”
“이 녀석, 끝났다는 건...”
“도대체 너는 누구냐!”
호렌이 죽어가는 여자에게 다급히 묻는다.
“1분 동안 그건 말할 수 있잖아!”
“후... 그래... 열심히 싸웠으니 그건 말해 주지.”
여자는 점점 가빠지는 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내 이름은 레이양, 지구 출신이지. 동면되기 전에는 그냥 가정주부였고. 그분에 의해 잠시나마 새로운 생명, 젊음을 누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그 말을 마치자마자, 레이양이라는 여자의 숨이 끊어진다.
“이... 이봐! 뭐라도 더 말해 보라고!”
파비안은 이미 숨이 끊어진 레이양의 몸을 흔든다.
“그만두세요, 파비안 씨! 당신도 어찌 될지 몰라요!”
“네...”
파비안은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레이양에게서 손을 뗀다. 다시 한번, 파비안은 온몸을 떤다. 만약 조금만 더 늦었으면 파비안 자신도 레이양 정도로 세뇌당해 그대로 삶을 끝마쳤을 것 아닌가!
“참, 그리고, 레아!”
“네, 미레이 씨?”
“혹시 장 박사의 컴퓨터에서 유용한 정보 같은 거 빼낼 만한 거 있어?”
“아니요, 지금 찾아보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보이지는 않네요.”
“그야말로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네.”
메이링은 쓰러진 레이양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비록 적으로 만나 죽었기는 해도, 장 박사에게 세뇌당하지 않았다면 자신만의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연민마저 든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다...
“여기 없으면, 한번 엘더 박사님의 방에 가 보자. 거기에는 뭔가 있을지도 몰라.”
“저는 도망치지 않기로 했습니다.”
엘더 경위가 무겁게 입을 연다.
“그 장주원이라는 녀석이 제 가족을 왜 죽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 녀석에게 굴복하지 않을 겁니다. 결판을 봐야지요.”
“제 할아버지가 그랬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루비도 입을 뗀다. 엘더 경위를 바로 보지도 못하고, 애써 시선을 피한다.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닌데.”
“믿기 힘든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보통의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법이죠.”
비토가 엘더 경위와 루비 모두를 보고 말한다.
“제가 가장 친했던 그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거든요.”
“맞습니다. 저도 그런 용기가 필요했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사람을 앨런.
“자비에 씨가 실종되고 나서, 그간 모았던 자료들을 토대로 추적해 나간 결과, 끔찍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믿지 못할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관련된 사람들을 여기로 부른 거죠.”
비토의 목소리는 다른 때보다도 더 무겁다.
“마침내 여기서 몇 가지 진실들이 서로 만났으니까요.”
“진실들이... 만났다니...”
현애, 세훈, 주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는다.
“그게... 무슨 말이죠?”
“자, 말하겠습니다. 여기 발레리오 씨와 비토리오 씨는 이미 아시는 것이겠지만...”
앨런은 머뭇머뭇 말한다.
“어제 결정적인 증거를 하나 찾았습니다. 자비에 씨의 인터넷 기록과 통화 기록을 복원해내는 데 성공했거든요. 결과는... 일치했습니다. 놀랍도록요.”
“뭐가 일치했다는... 말인가요?”
앨런은 테이블 위에 홀로그램을 하나 띄워서 보여준다. 그래프로 나타낸 통화기록과 인터넷 기록이다. 붉은 선 아래에는 ‘자비에’, 푸른 선 아래에는 ‘엘더’라고 표시된 것이 보인다. 과연, 두 개의 그래프가 나타내는 패턴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붉은 선이 몇 개 보이지만 말 그대로 몇 개만 보일 뿐이고, 보라색 선이 더 많이 보일 정도로.
“이뿐만 아니라 주말에는 주로 미린중앙공원이나 미린 시사이드 센터 등지에서의 기록이 두드러지더군요.”
“거기는... 주말이면 할아버지하고 자주 가던 곳인데...”
엘더 경위가 뭐라고 해 보려고 하지만 말을 더 잇지 못한다.
“그 사실로부터 얻어진 결론, 그리고 모든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제 결론은 이겁니다.”
모두의 눈과 귀가, 앨런에게 집중된다.
“두 사람은, 동일인물입니다.”
“네... 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요?”
다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귀를 믿지 못했는지 다시 앨런에게 물어본다. 발레리오와 비토리오를 빼고는.
“자비에 씨가 엘더 박사님이고, 엘더 박사님이 자비에 씨입니다.”
“에, 저, 정말요?”
현애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장 박사 때문에 그 충격은 좀 덜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의 정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니.
“오해할 것 같아 말씀드리자면...”
비토리오가 입을 연다.
“앨런 씨에게 말씀드렸던 건 거짓을 말한 게 아닙니다. 엘더 박사님과 저는, 오랜 시간을 교류해 왔죠. 살아온 시간은 차이가 날지언정, 쌓은 우정은 컸으니까요. 저뿐만 아니라, 제 형도요.”
“그래요...”
다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품은 생각은 각자 다르지만, 둘러앉은 모두에게 있어, 한층 그 무게가 무거워졌다.
“그분은 이제껏 우리 재단을 거쳐 간 연구원들 중 가장 열정적이던 분이었네. 73년의 삶을 정열적으로 사셨지.”
발레리오도 입을 연다.
“물론 인생을 즐기자는 신조도 틈만 나면 우리 형제에게 말해 줬지. 자네도 할아버지가 틈만 나면 그 말을 해 주지 않았나?”
“저... 저 말인가요?”
“맞네, 엘더 경위.”
엘더 경위는 바로 말하지 못한다. 대신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는, 흐느끼기 시작한다.
“힘내게. 자네가 여기서 다시 절망하고 일어서지 못하면, 그거야말로 장주원이 가장 좋아하는 거니까.”
“알고는 있지만... 그걸 알고는 있지만...”
“그 녀석에게 죽은 자네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자네는 일어서야 해. 그것이 그 녀석을 이기는 길이야!”
“감사합니다... 다시 힘내 볼게요.”
엘더 경위는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린다. 동시에 엘더 경위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진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또 의문이 하나 들어요.”
현애가 무겁고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왜 하필이면 동면인들이었는지, 그리고 도대체 장 박사와 엘더 박사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런 게 또 알고 싶네요.”
“사실 우리도 정확히 알고 싶어. 장 박사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였을지.”
발레리오의 목소리는 더 무겁다.
“그리고 장 박사의 뒤를 봐주는 그 녀석도 보고 싶고.”
시간은 지나, 저녁 7시.
사람들과 헤어진 현애는 혼자서 미린중앙공원을 산책하는 중이다.
♩♪♬
메시지 도착음이 들린다.
AI폰을 본다. 메이링한테서 온 메시지다.
[엘더 박사님 방까지 보느라 늦었네]
[자세한 건 내일 이야기할 테니 내일 만나자]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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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0-12-31 21:26:05
자비에와 엘더 박사가 동일인물...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그래서 동선이 같았던 건가요...믿기지 않는 대반전에 정신이 멍해지고 한동안 할 말을 잊어 버렸어요.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후속되는 회차에서 나오겠지만, 세간의 상식을 그냥 여지없이 넘어서 버리네요.
다른 사람들과 헤어진 현애, 괜찮을까요. 누가 노리고 있을 듯한데...
시어하트어택
2020-12-31 23:06:39
사실 여러모로 충격을 받을 걸 생각해서 조금 더 나중에 공개하려고 했습니다만, 전개가 좀 급박하게 돌아가니만큼 여기서 공개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중요한 동기와 내막은 그 뒤에 또 공개할 테니까요.
SiteOwner
2021-02-19 22:46:09
수영과 파비안이 겨우 위기를 넘겼지만, 그 여자는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군요.
이름이 레이양이라니까 뭔가 묘합니다. 예전에 방송에 잘 나오던 피트니스 트레이너이자 방송인이 레이양이 같이 생각나다 보니...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던 터라 어딘가 허전한 느낌도 들고 그렇습니다.
이런 결과를 위해 동면 이후의 삶을 살았을까 하는 생각도 같이 드는 터라 메이링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다른 사람이라고 여겨진 두 사람이 사실 동일인물이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충격적이지요.
수퍼맨, 아이실드 21 등의 다양한 창작물에 등장하는 터라 이것 자체는 새롭지 않습니다만, 이렇게 시어하트어택님의 소설 속에서 그 진상이 밝혀진 것은 뭐라고 해야 하나, 꽤 참신하다 보니 충격이 배가되는 듯합니다.
시어하트어택
2021-02-21 23:34:23
많이 씁쓸함을 느끼셨다니, 제 의도가 맞아떨어졌군요. 제 생각대로 봐 주셨다니 감사드립니다.
사실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한 과정을 써 볼까도 생각했습니다만, 그걸 쓰다 보면 작품의 성격을 벗어나게 되는 것 같아서 생략했습니다. 나중에 이 작품의 개정판을 써보게 된다면 그 과정도 한번 서술해 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