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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토시 아이린구, 장 박사의 별장 근처 길가.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승부다!”
장 박사는 눈앞에 서 있는 현애를 보고 독기를 가득 담아 소리지른다.
“좋아. 받아 주지.”
“네 녀석이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너를 이 자리에서 죽일 정도의 각오는 했으니까.”
“그래? 그거 참 굳은 각오인걸. 안 그래?”
현애는 장 박사의 앞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두 발로 땅을 굳게 딛고 서서 말한다. 물론, 조롱 섞인 웃음도 함께다.
“그런 각오를 하고서 연구에 좀 더 매진하면 얼마나 좋겠어.”
“그래. 물론 나의 연구는 각오를 품을 만하지. 실제로 그렇게 해서 성과를 낸 것도 많고.”
장 박사의 목소리에 독기가 철철 흘러넘친다.
“하지만 내가 지금 무슨 각오를 품고 있는지, 너는 모를 거다.”
“그래. 지금 당장은 모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금방 알게 될 거야.”
순간 장 박사의 뺨에 닿는다. 찬 기운, 면도날 같은 기운이.
“이대로 널 때려눕혀 주기만 하면, 울고불고하면서 털어놓겠지!”
“하하하, 발상은 참 좋아.”
장 박사 역시 주먹을 꽉 쥔다. 또다시 현애의 뺨에 느껴진다. 저번 주 수요일의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 그리고 아까 전의 숨이 막혀 들어가는 느낌이 손끝에 압축되어 전해진다.
“하나만 물어보자. 네 녀석, 혼자 온 건가?”
“뭐 그렇다고 봐야지. 정 불안하면 한번 홀로그램으로 보든지.”
“좋아. 네 녀석이 왜 그렇게 자신감을 보이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자리에서 너를 처치할 수밖에 없다. 자, 와라!”
한편 그 시간, 장 박사의 별장 근처.
“그 아이, 유인을 잘 해낼 수 있을까...”
발레리오는 차에서 내려서, 장 박사의 별장 방향을 물끄러미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혼자 갔다 오겠다고 해서 보내 주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야. 프리모도 괜히 저렇게 혼자 갔다가 변을 당한 거고...”
옛날을 떠올리는 발레리오의 얼굴은 침울하다. 잠시 후, 그는 무전기를 꺼낸다.
“유인조, 유인조, 특이사항 있으면 연락하라.”
“없습니다. 계속 교란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알았다. 계속 현 상태 유지하라.”
“라저.”
그다음, 발레리오는 무전기를 들고 또 다른 데에 연결한다.
“메이링 씨, 거기는 혹시 특이사항 없나?”
“네, 이사장님. 시저, 마르코, 루비 모두 잘 있어요.”
“일단은 대기.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안전하게 대기하고 있게.”
“알겠습니다.”
알레한드로는 무전기를 입에서 떼고, 다시 타고 온 차 쪽을 돌아본다.
그런데...
“음?”
발레리오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분명 세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두 사람이다. 요원과 외제니. 조제는 어디로 간 것인가?
“외제니 양, 조제 엔히크스 군은 어디 갔나?”
“조... 조제요?”
외제니는 경황이 없는 얼굴로 양옆을 두리번거린다.
“글쎼요... 1분 전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스타크, 자네는 못 봤나?”
“네, 저도...”
스타크라고 불린 요원도 어쩔 줄 몰라 말을 잇지 못한다.
“하... 그래서 내가 개인행동은 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개인행동이요?”
“맞아. 내 동생 한 명을 그래서 잃었지.”
발레리오의 표정이 다시 침울해진다.?
“저, 이사장님.”
스타크 요원이 발레리오를 부른다.
“혹시 된다면 드론이라도 띄워 볼까요?”
“아니, 아직이야. 드론 같은 걸 띄우면 장 박사가 금방 알아챌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은 보류하겠습니다.”
“자, 덤벼라!”
“이쪽이야말로.”
현애와 후드를 벗어던진 장 박사가 잠시 눈빛을 주고받으며 신경전을 벌인다. 장 박사의 자주색 셔츠와 초록색 넥타이, 흰 바지가 매우 어색하게 보인다. 거기에 연령대에 맞지 않는,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인 얼굴까지.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살의가 증폭되어 보인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받아라아아아아아앗!”
선공을 지른 쪽은 장 박사.
공기가 무섭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 뺨에 묻는다. 한 점으로 빨려들어간다. 무섭게. 재빨리 몸을 오른쪽으로 피하자마자...
순간...
쾅-
“하아...”
폭발... 분명 조제와 외제니에게서 들었던 것과 같은, 그런 폭발음이다.
“공기를 압축해 터뜨린다는 게 이 정도일 줄이야...”
현애는 길바닥 한쪽에 자세를 낮추고 바짝 엎드려서,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쉰다.
“호오, 그 마른 잎사귀를 찢어버리는 것 같은 차디찬 한숨은 도대체 뭐지?”
장 박사는 현애를 도발하려는 듯, 한껏 목소리를 높여 가며 말한다.
“설마, 벌써 후회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재미없는데.”
“멋대로 지껄이지 마.”
“왜, 그런 빙하지대에서 바로 직송된 것 같은 한숨이 후회하는 게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이지? 내 귀는 틀리지 않는데.”
장 박사는 길바닥에 엎드려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현애를 보고 가소롭다는 듯 말한다.
“덤으로, 그 비굴해 보이는 자세도 말이지!”
“하, 장난하냐?”
“이 자식, 뭐야?”
“나하고 설마 농담 따먹기를 하려는 건 아니지?”
“그렇게 말하다니 아직도 여유로운가 본데...”
장 박사는 제법 가소롭다는 듯 말한다.
하지만 그런 여유도 잠시...
“음? 뭐야. 왜 발밑에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거지?”
발끝이 시리기 시작한다. 마치 거대한 빙하 위를 직접 딛고 선 것 같은 기분이다. 아니, 그의 두 발이, 얼음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이 기분은!
“제법 머리가 좋은데. 하지만 내 발만 얼려서 나한테 제대로 유효타를 먹이거나 할 수 있을 것 같나?”
“발? 발이라고 했어?”
“그래. 네 녀석은 지금 내 발만 얼리고...”
잠깐...
장 박사는 순간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한다.
다음 순간, 아래를 내려다본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
얼어붙었다.
그의 발이 딛고 선 길바닥, 모든 바닥이.
하지만 얼어붙은 건 그것뿐만이 아니다.
장 박사의 눈에 들어온다.
분명 투명해서 보이지 않을, 길바닥에 깔아 둔 공기방울들이 보인다.
모조리, 구슬처럼 되어, 얼어붙어 버렸다!
원래대로라면 길바닥에 주욱 깔린 채로 현애나 그 누구든지 발을 잘못 내딛기만 하면 바로 기폭시켰어야 할 공기폭탄들이 말이다... 하지만 저렇게 무력화되어 버렸다!
“이... 이 자식... 이 자식이...”
“왜, 나름대로는 머리를 좀 굴려서 써 보려던 수가 간파되어서 그런 건가?”
“감히 이딴 짓을...”
장 박사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더니, 주먹의 핏줄이 도드라지기 시작한다.
약 1초 남짓한 순간...
“받아라아아아앗!”
장 박사의 주먹이 날아든다. 마치 공기를 칼로 베어 버리듯, 무서운 기세로.
턱-
막혀 버렸다. 현애의 주먹에.
현애의 이마를 바로 앞에 두고서 막혀 버렸다.
분명 장 박사가 공세를 취하고 있을 텐데, 점점 밀려난다.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해도, 손이 마비될 것 같이 차가워진다. 마치 얼음 그 자체가 되려는 것과도 같이 말이다.
“소... 손을 얼게 하다니...”
장 박사는 서둘러 손을 뒤로 물린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시야를 가릴 정도의 뿌연 김이 새어 나온다. 주먹을 쥔 손을 펴자, 손등과 손바닥이 온통 시뻘겋게 되었고, 물집이 잡힐 정도로 퉁퉁 부었다.
“으... 으윽...”
“왜, 고통스러운가 봐?”
“너... 이... 자식...”
장 박사의 목소리가 끓어오른다.
“대가를 치르게 해 주지. 나한테 살려달라고 울고불고 빌 정도로!”
“하, 그래. 한번 해봐. 나를 질질 짜게 해 보라고.”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장 박사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지른다.
“각오해라아아앗!”
장 박사의 주먹이 날아든다. 현애의 얼굴을 바로 향하고.
“네 녀석의 각오, 이런 거였나?”
현애는 쉽게 장 박사의 주먹을 피한다. 그저 옆으로 몸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정도의 공격이라면...
하지만...
“읏...?”
숨이 점점 막혀오는 것 같다. 조금 전 장 박사의 주먹을 피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장 박사의 주먹을 피하자마자 숨이 안 쉬어지기 시작한다... 이 상황은...
“역시나, 숨이 막히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군.”
호흡이 어려워져 얼굴이 벌게진 현애를 보며, 장 박사가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한 표정을 하고 말한다.
“아까도 그 함정에 빠지더니, 지금도 그렇게 되었군. 그사이에 전혀 학습이란 걸 못 했나 본데. 안 그래?”
현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다시 자세를 똑바로 해 보려고 한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입 속이 칼칼해지니, 머리가 띵해지는 것 같고, 핑핑 도는 것 같고, 시선도 똑바로 잡지 못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싸우려는 의지는 더욱 불타오르는데, 몸이 잘 안 따라 준다...
“후... 아... 이 자식...”
“목이 칼칼하니 소감이 어떤가?”
장 박사는 벌겋게 된 오른손의 손등과 손바닥을 현애에게 보여주며, 분이 삭지 않은 얼굴을 하며 말한ㄷ.
“물론... 내 손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데에 비하면, 제대로 받아낸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순간...
못 겪어본 통각이 전해져 온다.
오른쪽 정강이...
현애의 오른쪽 정강이를, 장 박사가 있는 힘껏 걷어찬 것이다.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이 괴로움, 이 통증...
하지만, 주저앉으면 안 된다...
어떻게든 다리에 힘을 주고 선다.
오른쪽 다리에 어떻게든 힘을 준 채로, 막 장 박사를 노려보고, 반격하려는데...
공기가 확- 빠져나가는 느낌...
“약해빠졌군그래!”
장 박사의 일갈.
뻥-
현애 앞의 한 점에서, 공기가 확- 하고 터지는 느낌!
겨우 서 있던 다리가 휘청거리더니, 균형을 잃는다.
순간적인 충격에, 온몸이 휘말리더니...
털썩-
땅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후...”
장 박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땅바닥에 쓰러진 현애를 내려다본다.
“네 녀석도 이제 쓰러졌군. 이제 나를 막은 장애물이 또 하나 줄었어. 아니, 거의 다 없어졌다고 할까? 네 녀석은, 내가 고르고 고른 S급이었으니까!”
안도감, 그리고 전에는 좀처럼 못 느꼈던 두려움으로 그의 눈이 떨린다. 지금 이 앞에 있는 녀석, 언제 또 일어나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 그러니, 완벽하게 해치워야 한다. 완벽하게...
판단은 금방이다. 재빨리 해치우자!
손을 높이 들어올려, 오른손 검지손가락 끝에 공기를 압축시킨다. 기폭시키면 한 사람 정도는 족히 날려 버릴 것이다. 지금 땅바닥에 쓰러진 저 녀석, 장 박사 자신을 고전하게 할 만큼 강하기는 하지만, 불의의 폭발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을 터다. 그렇다! 지금이다, 지금!
모았다. 충분히 공기는 압축되었다.
이제 설치만 하면 끝이다...
손을 내리려는 그때...
“거기 있었구나, 장주원!”
한 남자의 분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장 박사에게.
“각오해라, 개자시이이이이익!”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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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1-02-13 23:28:10
오래전에 동생 프리모를 잃었던 발레리오의 기억이 이렇게 되살아나는군요.
그래서 현애를 보는 마음이 여간 복잡한 게 아니겠어요. 그래도 막을 수는 없는 것이고, 이런 숙명 속에서 발레리오가 어떤 마음을 가질지는 누구도 그 깊이를 쉽게 짐작할 수 없겠죠. 그럼에도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지휘하는 발레리오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네요.
원한을 많이 산 장주원은 이제 물러날 데가 없는데, 과연 응징당할 것인지...시어하트어택
2021-02-21 22:58:54
저런 상황에서 냉정해진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죠. 당장 저만 해도 저렇게 하라고 하면 아마 못 할 겁니다...
SiteOwner
2021-03-18 19:00:28
아무리 미약한 존재라도 작정하고 독기를 품은 채 존재감을 드러내면 역시 그 기세에 눌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작은 몸집의 개가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험악하게 짖거나, 펼치면 1m 정도 될법한 보통 크기의 뱀이 고개를 쳐들고 위협자세를 취한다면 역시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애도 그렇게 장주원 박사를 마주하고 있을 것입니다.
작전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계획대로 되어도 방심하면 안됩니다.
돌발변수란 언제나 있기 마련. 그런데 장주원 박사는 그것만큼은 염두에 두지 않았고, 허를 찔릴 것 같습니다.
시어하트어택
2021-03-21 23:05:18
'당랑거철'하고는 조금 다른 것이기는 합니다만, 확실히 저런 식으로 독기를 드러내면 강자라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겠죠.
저 역시도 그런 경우를 많이 겪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