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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터즈] Chapter11: 천사. Episode 45

Papillon, 2021-02-14 12:02:38

조회 수
137

여름날의 태양보다 환하게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에스텔은 야시장의 거리를 걸었다.

이것은 그녀 인생 최초의 밀회. 그리고 모든 최초가 그런 것처럼, 모든 것은 그녀가 예상하던 것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걱정하던 조금 음란한 일도 없었다.

은근히 기대하던 낭만적인 사건도 일어나진 않았다.

그저 걸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즐거운 것을 보며, 호의를 느끼는 상대를 곁에 둔 채. 그저 거리를 걸었다.

낭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일.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 평범함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따뜻하다.

마치 화로 속 자그마한 불길과 같은 따스함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그 온기는 왼손에 든 꼬치구이 때문일까, 아니면 오른손에 잡은 그레고르의 손 때문일까?

?

아무래도 상관없다.’

?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중요한 건, 이 감각을 영원히 느끼고 싶다는 사실 뿐.

그저 영원히 이어지기를…….

에스텔이 그러한 열망을 품었을 무렵.

?

?”

?

끝이 다가왔다.

시렸다.

그녀의 가슴 속 온기를 부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얼음장처럼 시린 냉기가 전신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여태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이한 냉기. 동시에 너무나도 익숙한 불길한 감각.

사도(使徒, Apostle)의 강림-.

신의 힘이 지상의 법칙을 덧씌울 때 일어나는 현상.

?

어째서……!’

?

당혹감에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한 방향을 가리킨다. 감각이 알려오는 위치는 그녀에게 익숙한 장소.

?

그 사내가 있던 곳인가?’

?

그녀의 머릿속에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척 보기에도 그리 질이 좋지 않은 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남자. 보통이라면 바로 잊어버렸을 터. 하지만 그가 자신과 그레고르를 향해 살의를 품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

설마 그자가 원인인가?’

?

그리 대단한 이는 아니었다.

그녀가 살짝 흘린 기세만으로도 겁을 집어먹고 시선을 피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존재보다는 지금 그레고르와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기에. 그래서 평소라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도 조용히 침묵했다.

하나, 그것이 이렇게 이어질 줄이야.

?

어떻게 된 거지?’

?

무수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설마 그 사내가 사도였던 것일까?

혹시 사도라서 살기를 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살기에 반응해 사도가 움직였는가?

모르겠다. 아니,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레고르가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밀회가 계속되기만을 바랐다.

?

말도 안 되지.’

?

자신이 떠올리고도 어처구니없는 소망에 그녀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사도에 둔갑술사이기까지 한 그는 감지 능력에서는 그녀보다 몇 수 위의 존재. 그녀가 어렵지 않게 감지한 것을 그가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

에스텔!”

?

그렇게 생각하길 무섭게, 다급한 표정의 그레고르가 그녀를 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향하는 방향은 인기척이 없는 골목. 아마도 보는 눈을 피해 사도로 변하려는 것일 터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이에 응해야만 할 텐데……. 어째서인지 발걸음이 지나칠 정도로 무거웠다.

?

에스텔?”

?

예기치 못한 사태에 그레고르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와 함께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목소리.

?

그냥 무시하면 안 되겠나?’

?

입속에서 맴도는 그 말을, 그녀는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에스텔의 이성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 역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침묵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다.

하나, 싸우고 싶지 않다.

그저 행복한 하루를 조금이라도 더 즐길 수 있게 해주길 바랐다.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

……아무것도 아니다.”

?

결국, 욕망과 이성의 전장에서 승리한 것은 이성이었다.

?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

아직 진득하게 남아있는 아쉬움을 에스텔은 그렇게 생각하며 억눌렀다.

아직 야시장은 4일이나 남았다.

오늘 놈을 쓰러뜨린다면, 앞으로 나흘 정도는 다시 행복을 느낄 수 있으리라.

?

강림!”

?

이어지는 그레고르의 변신.

?

처음부터 전력으로 가지.”

?

그 말을 끝으로 에스텔은 그레고르와 하나로 융합했다.

?

반드시 오늘 쓰러뜨려야 한다.’

?

투지와 함께 전장으로 향하는 에스텔.

그런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어둠이 피어나고 있었다.

?

?

*** ***

?

?

-!

대지를 뒤흔드는 일보와 함께, 시야가 급변한다. 이윽고 도달한 곳은 별이 흐르는 칠흑의 허공. 아름답게 빛나는 천상에 떠서, 나는 마찬가지로 환하게 빛나는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어디냐?

강림 이후, 녀석은 어떤 이상 행동도 보이질 않았다.

만약 녀석이 무언가 했다면 사람들이 반응을 보일 터. 그러나, 지금 야시장의 정경을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

분명 무언가 있어.’

?

강림이란 신의 힘을 지상에 펼쳐내는 일. 그리 크진 않으나, 신의 권세를 지상에 휘두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사도라고 해도 아무런 이유 없이 변하는 걸 옛 군주가 허락했을 리는 없을 터.

분명히 눈을 볼 수 없을 뿐,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

시야를 버린다.’

?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다른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진다.

청각, 촉각, 후각. 보통의 감각이 한계 이상으로 확장되며 지상을 훑는다.

칠감. 신의 감각이 극단적으로 날카로워지며 초월자의 흔적을 추적한다.

마지막으로 기감(氣感)이자 육감. 에스텔의 도움으로 극도로 강화된 무인의 감이 사람들의 행동을 읽어낸다.

?

!’

?

일정 범위 내에서만큼은 전지에 가까운 감지 능력. 그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량은 경탄스러울 정도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빠르게 찾아야 해.

욱신거리는 머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계속되는 탐사. 한계까지 집중력을 끌어써야 만 하는 상황이건만, 어째서인지 묘한 잡념이 뇌리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

에스텔…….’

?

문득 그녀의 이상 행동이 떠올랐다.

그때의 망설임은 전혀 그녀답지 않았다. 애초에 전투에 임하는 걸 망설이다니……. 그녀와는 결코 연이 없는 행동이다.

거기에…….

?

마음이 읽히질 않아.’

?

그 사실이 묘한 위화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융합 변이란 단순히 대상을 흡수해 힘을 강탈하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신뢰하는 이와 육체와 마음을 연결하는 권능. 그렇기에 본래라면 단순히 심화(心話, Telepathy)를 건네는 걸 넘어서 마음이 읽혀야만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서는 어떠한 마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나를 향해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것처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직감이 그렇게 속삭였다.

이번 일을 단순히 넘겼다간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 분명할 터.

?

나중에 얘기라도 해봐야겠어.’

?

큰 도움은 되지 않을지라도 침묵보다는 훨씬 나으리라.

그렇게 내가 마음을 정한 순간.

?

?’

?

무언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느껴졌다.

감지된 것은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

그것은 아득히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속도로 지상을 활보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상황.

하나, 나는 거기서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

어떻게 저기에 있는 거지?’

?

처음 녀석이 강림한 위치는 야시장 근처의 으슥한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녀석이 있는 곳은, 빈민가이긴 해도 야시장과는 거리를 둔 장소.

?

어떻게 된 거지?’

?

불가능하다. 몇 번이고 재고를 해봐도 같은 답만이 도출된다.

이동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사도의 힘을 동원하면, 같은 시간 내에 그 위치까지 이동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랬다간 지상은 초토화된다.

속도는 힘.

초고속으로 이동하는 인간형 물체는 그 자체만으로 파괴의 화신이다.

그런데 지상에 어떠한 흔적도 남질 않았다고? 하늘을 나는 것도 아닌데.

?

말도 안 돼!’

?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경악하고 있는 도중에도, 녀석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나?

잠시 고민을 해봤지만 결국 하나의 답으로 귀결된다.

?

일단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어.’

?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아무리 특이한 능력이라도 직접 본다면 이해할 수 있을 터.

콰앙-!

답이 떨어짐과 동시에 발이 허공을 박찬다. 그와 함께 빠르게 변화하는 풍경.

?

지금!’

?

목적지에 도달한 순간, 날개를 펴내 감속에 성공한 나는 허공에 떠서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

[갸하하하하! 이거 터무니없는 손님이 와버렸구먼!]

?

녀석 또한 나를 발견했는지 나와 얽히는 시선. 그런 녀석을 내려다보며.

?

드디어 찾았다.”

?

나는 으르렁거리듯 선언했다.

?

?

*** ***

?

?

거기에 있는 건, 내가 본 어떤 사도와도 다른 존재였다.

우선 외형.

녀석은 지금까지 내가 본 거인들과는 다르게, 기묘할 정도로 빈약한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녀석의 갑옷 중 대부분은 판금이 아닌 사슬로 되어 있었다. 금속판으로 만들어진 건 해골 형상의 투구를 제외하면 극히 일부. 묘하게 커 보이는 정강이와 발 부분을 제외하면, 급소를 보호하는 것이 전부였다.

기사리기보다는 용병이나 경보병에 가까운 모습.

그 외형만으로도 상당한 위화감이 느껴졌건만, 분위기는 그 이상이었다.

?

적의가 전혀 없어.’

?

녀석은 나를 향해 어떠한 적의도 보지 않았다. 그야말로 나와는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걸 전심전력으로 강조하는 모습.

그 행동에 살짝 긴장이 풀어질 것 같았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비록 내게 적의를 보이진 않고 있지만, 녀석은 여전히 위험하기 그지없는 존재. 그리고 이 주변 상황은 그것을 너무나 선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사람의 몸으로 만든 탑을 본 적이 있는가?

녀석은 그렇게 사람으로 만든 탑 위에 홀로 서 있었다.

탑을 만든 재료는 아무래도 빈민가의 무법자들일 터. 여전히 꿈틀거리는 것을 보아 기절은 했어도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인간 탑에서 벗어난 나의 시선이 다시 녀석을 향했다.

녀석은 조용하면서도 동시에 시끄러운 상태를 유지 중이었다.

조용한 것은 사도 본인의 입. 어째서인지 녀석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하나 그와는 반대로.

?

[갸하하하!]

?

녀석과 계약한 옛 군주는 시종일관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어지는 시끄러운 침묵.

?

[이봐 그냥 넘어가지 않겠어?]

?

그것을 깬 것은 결국 상대방 측의 옛 군주였다.

?

군주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겁니까?”

[. 이쪽의 아이는 부끄럼쟁이라서 말이야. 내 쪽이 나불대야 균형이 맞는 법이지.]

……그렇습니까?”

[갸하하하하! 나로서는 최고라고.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참는지 모르겠지만 난 언제나 떠들고 싶단 말이다! 당신은 어때, 이드라 누님?]

?

, 누님?

옛 군주에게서 나오리라고 생각지도 않은 말이 들려오자 뒤통수로 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뭐야 저거?

설마 저런 옛 군주도 있는 건가?

?

[분명 체통을 지키라고 말했을 터인데, 이타콰?]

[갸하하하하! 미안! 하지만 나는 이게 천성이라서 말이야! 고쳐지지 않는다고!]

?

이런 식으로 구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닌지, 저 이타콰라는 옛 군주의 행동에 이드라 님도 질린 듯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그냥 넘어가자고?

?

사도야행은 진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꼭 그래야 하나?]

?”

[아니, 나는 솔직히 그쪽으로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지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 재미있지. 툭하면 져서 질려버렸다고!]

…….”

[그래서 이번에는 내 파트너를 도와서 놀 거다! 진심으로 놀 거다! 그러니까 날 내버려 두라고!]

논다고요?”

?

이런 식으로?

아마 빈민가의 범죄조직 수괴들이 듣는다면 목덜미를 잡고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

[노는 거지! 너희 필멸자들에게 피해는 안 끼치잖아!]

저게 말입니까?”

[, 저 자식들은 제외! 저건 사회의 쓰레기들이니까 사람으로 치지 않는다! 거기에 죽이지도 않았잖아.]

…….”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애송이? 아가씨랑 하나가 돼서 돌아다니는 네 놈보다야 훨씬 건실한 것 같은데?]

?

아가씨? 설마!

?

융합 변이를 알아보는 건가?!’

?

일순, 내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융합 변이는 나만의 고유 권능.

이드라 님의 말씀에 따르면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바로 알아보지는 못하리라고 했는데…….

?

[저 모자란 놈만은 예외니라.]

?”

[저놈의 영혼 감지 능력은 옛 군주 중에서도 수위권. 아무래도 그 아이의 혼을 느껴서 추측한 것에 불과한 것일 터.]

[갸하하핫! 역시 누님이야! 나를 잘 안다니까!]

[시끄럽도다!]

?

과연 그렇게 된 건가.

두 신이 펼치는 만담은 잠시 뒤로 미뤄둔 채 나는 상황을 살폈다.

?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싸우는 것이 나을까?’

?

상대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 싸울 의향이 없는 건 확실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역시 다음에 다시 만나보는 것이…….

?

아니.

에스텔?’

녀석은 지금 처리한다.

?

놀라울 정도로 차갑게 식은 대답과 함께 에스텔이 내 몸을 움직였다.

?

이건?’

?

전에 보여줬던 일격 필살의 자세?

방어를 도외시한 채, 상대방을 일격에 제압할 때 쓰는 검세라고 했는데.

?

왜 지금 이걸?’

?

내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

[갸하하하! 협상 결렬인가?]

?

이타콰의 사도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대가 취한 것은 에스텔의 것과는 달리 철저히 무게 중심을 낮추는 자세. 마치 뛰어오르기 직전의 개구리처럼, 모든 힘을 하나로 모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아니 그것만은 아닌가?’

?

녀석의 근처에서 공기가 기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발아래로 모든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형국.

?

초고속 공격인가?’

?

그렇다면 이쪽도 대비해야 할 터.

그렇게 나 역시 에스텔의 의도에 맞춰 부분 둔갑으로 육체를 조율하는 순간.

?

[그럼 작별이다, 애송이들아!]

?

어떤 소음조차 남기지 않은 채, 빈민가의 천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

?”

?

설마 전투가 아닌 도주가 목적이었나?

?

놓칠까 보냐!

?

참룡(斬龍) 악어 사냥!

팔이 움직이며, 마력의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칼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용조차 일격에 갈라버릴 듯 거대한 반월형의 검기. 그 거대한 힘의 칼날은 초고속으로 상대를 향해 쇄도해나갔다.

?

피할 수 없다!’

?

조금 전 녀석이 보여준 속도가 한계라면, 공격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인지 녀석 역시 피하는 걸 포기했는지, 참격이 근처에 도달하기 전까지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적중한다!

그렇게 내가 두근거리며 상대를 바라보는 순간.

?

[갸하하하하! 제법인걸?!]

?

세상이 얼어붙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빛살보다 빠르던 검기가 굼벵이처럼 느려졌다.

그리고 동시에 감각과 어긋나는 육체의 움직임.

?

움직임이 느려!’

?

마치 끈적한 기름 속을 헤엄치는 것처럼 몸이 느리게 움직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렇게 의문을 가지는 것도 잠시. 나는 이어진 녀석의 움직임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느려진 공간 안에서 녀석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후우우우우웅-!

처음에 도약했을 때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녀석의 발아래로 모이는 바람의 신력. 극도로 압축된 그것은 이미 눈으로 보일 정도로 유형화되어 있었다.

?

설마?!

저 마력으로 공격해 오는 건가!’

?

같은 생각을 떠올린 건지, 마음을 통해 전달된 에스텔의 목소리에서도 경악이 실린 것이 느껴졌다.

만약 저거에 당한다면 쉽게 넘어가진 못할 터. 어쩌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긴장감이 극에 달할 때쯤, 압축된 공기는 한계를 넘었고.

콰아앙-!

녀석이 그것을 걷어차는 동시에 세상이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강맹한 공격은.

?

?’

?

없었다.

?

설마?’

?

눈을 뜨자 시야에 녀석의 모습은 없었다. 시각만이 아닌 어떤 감각에도 읽히지 않는 것이 이미 터무니없을 정도로 먼 거리를 이동한 것일 터.

?

도망쳤다고?”

?

이렇게 다 이겨 놓고도?

한순간에 몰려온 허탈감에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땅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이렇게 헤어진 이상, 다시 녀석을 만나긴 쉽지 않을 터.

?

『……미안하다.

?

내 심정을 읽었는지 죄책감이 묻어나오는 에스텔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어 부정의 의사를 보였다.

?

아니요. 에스텔의 잘못이 아니에요.”

?

오늘 나는 녀석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전략을 세웠다.

내가 생각한 것은 접전뿐.

도주만을 노리는 상대가 있으리라는 가능성 따위는 떠올리지 못했다.

?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

이번과는 전혀 다른 작전을 세워야 어떻게든 방법이 보일 터.

그렇게 고민에 빠지려던 순간.

?

?”

?

익숙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

어째서 저게 여기에?’

?

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들었다.

딱히 대단한 물건은 아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곳에 있을 물건 또한 아니다.

여기는 폭력 조직의 거처.

이렇게 어린애들이나 좋아할 법한 물건이 있을 리는 없다.

그런데 어째서?

?

설마?”

?

나는 갑작스럽게 떠오른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손에 들린 인형을 바라보았다.

한 소녀가 자랑스럽게 말하던, 수제 고릴라 인형을…….

?

?

*** ***

?

?

야시장 근처의 어둠 속.

?

우웩!”

?

갑주를 해체한 이타콰의 사도가 바닥에 구토를 쏟아내고 있었다. 언뜻 검붉은색이 섞인 것을 보아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할 터.

?

[, 역시 그 속도는 아직 못 견디는 건가?]

?

그런 자신의 사도를 보며 이타콰는 혀를 찼다.

공격을 맞지 않았음에도 이런 상태가 된 것은 단순히 가속의 부작용.

그의 사도는 육체적으로 지나칠 정도로 평범했다.

그것은 무투파인 그에게는 답답하기 그의 권능이 대부분 제약된다는 의미. 하나 그런데도 이타콰는 자신의 사도를 탓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더는 사도야행의 승리 따위는 바라고 있지 않으니.

?

[그럼 조금만 쉬자고, 파트너. 아직 장사를 접을 시간은 아니니까.]

우웩.”

?

그의 사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는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이타콰의 사도는 자신의 좌판으로 돌아왔다.

오래지 않아 좌판으로 다가오는 어린 손님.

?

[그러면 이제 다시 장사를 시작해볼까, 파트너?]

?

사도의 귓가에 이타콰가 작게 속삭인 직후.

?

빅토리아의 인형 가게에 어서 오세요!”

?

이타콰의 사도, 빅토리아는 활기찬 목소리로 손님을 맞이했다.

Papillon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4 댓글

마드리갈

2021-02-15 00:26:58

에스텔이 느끼는 평범함, 정말 소중하다는 게 더욱 강하게 느껴지네요.

특히 요즘의 일상이 판데믹 상황하의 무겁고 침체된 나날의 연속이다 보니, 저렇게 야시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에스텔의 즐거움이 오래 갔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상황은 또 그 기대를 배반하네요. 사도강림, 그리고 융합변이를 알아보는데다 "이드라 누님" 으로 여신 이드라를 지칭하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위협으로 다가오고, 빅토리아가 바로 그 이타콰의 사도였다니...


생각지도 못한 유형의 상대, 오히려 이런 게 무섭게 여겨지고 있어요.

Papillon

2021-02-26 03:45:35

이타콰&빅토리아 콤비는 다른 옛 군주&사도 콤비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지요. 차라리 그냥 싸우면 되었던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보니 그레고르가 고생을 하게 될 겁니다.?

SiteOwner

2021-03-18 19:01:24

몇년 전에 동생과 같이 일본여행을 자주 다녀올 때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다녔던 곳 중에는 한국에 잘 알려진 관광지도 있었지만, 일본국내한정으로 유명한 곳이라든지 전통시장, 구시가지 등도 있었고, 동생이 매우 좋아하고 만족했던 것도 생각나고 있습니다. 그게 같이 생각나면서, 에스텔이 그레고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읽히면서 마음 한켠이 따뜻해집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한쪽에서 싹트고 있는 불길한 사건에 마음이 눌리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존재감을 드러낸 미지의 존재는 역시 예상 밖이군요. 조용히 사라져 줄 것 같지 않아 불안해집니다.

Papillon

2021-03-23 02:12:42

빅토리아와 이타콰 콤비는 완전히 적이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이번 에피소드의 주요 인물이 될 예정입니다. 어떻게 상황이 진행될지는 앞으로의 전개를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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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ter 2021-02-26 143
1846

[초능력자 H] 100화 - 한 조각 맞춰진 퍼즐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2-25 125
1845

새벽의 연구 두 번째.

| 스틸이미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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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ter 2021-02-23 256
1844

[초능력자 H] 99화 - 차디찬 공기(4)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2-21 123
1843

[시프터즈] Chapter12: 질투. Episode 46

| 소설 4
Papillon 2021-02-21 128
1842

[초능력자 H] 98화 - 차디찬 공기(3)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2-18 129
1841

요 몇일 작업한거입니다.

| 스틸이미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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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씨 2021-02-17 137
1840

[초능력자 H] 97화 - 차디찬 공기(2)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2-14 131
1839

[시프터즈] Chapter11: 천사. Episode 45

| 소설 4
Papillon 2021-02-14 137
1838

[괴담수사대] X-8. 인생의 가치

| 소설 3
국내산라이츄 2021-02-14 132
1837

입춘 기념으로 그렸던 그림

| 스틸이미지 2
국내산라이츄 2021-02-12 149
1836

[초능력자 H] 96화 - 차디찬 공기(1)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2-11 144
1835

새벽의 가슴 연구(???)

| 스틸이미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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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ter 2021-02-11 243
1834

[초능력자 H] 95화 - 호랑이를 잡으려면...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2-07 153
1833

[시프터즈] Chapter11: 천사. Episode 44

| 소설 4
Papillon 2021-02-07 162
1832

두 달 전에 그렸던 고전게임 그림

| 스틸이미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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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ter 2021-02-07 186
1831

[COSMOPOLITAN] #A6 - Taxi Driver

| 소설 6
Lester 2021-02-07 166
1830

코마키 린 시리즈 1. 3시간의 가치

| 소설 6
마드리갈 2021-02-05 235
1829

[초능력자 H] 94화 - 불굴의 마리오네트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2-03 129
1828

[괴담수사대] X-7. 집착이 가져온 업

| 소설 3
국내산라이츄 2021-02-03 114

Polyphonic World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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