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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설마 잘못 이야기한 거 아니야? 누가 활보해?”
“파울리, 파울리 말이야! 레베카가 실패했어!”
“뭐? 레베카가 실패했어?”
전화 너머의 남자의 목소리가, 마치 볼륨을 확 올리기라도 한 듯, 확 올라간다.
“그게 무슨 말이야... 분명히 레베카의 능력이라면 실패할 리는 없잖아? 안 그래?”
“맞아. 그건 분명히 그런데...”
파란 조끼의 남자의 얼굴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레베카의 능력은 파울리 같은 능력자를 잡는 데는 최적이야. 레베카의 공간에 가둬져서 순순히 항복하지 않고 빠져나온 녀석은 지금까지 없다고. 그런데 어떻게 진 거지? 어떻게...”
“하, 됐고, 파울리 녀석 지금 어디로 가는데?”
“그 녀석, 호수 사원으로 가는 유람선을 탔어!”
“뭐... 뭐어어어엇?”
전화 너머의 남자는 경악스럽게 소리지른다.
“그럼 지금 여기로 오고 있다는 거 아니야!”
“맞아. 어쩔 수 없게 됐어. 레베카가 실패할 줄은 몰랐는데...”
푸른 조끼의 남자의 얼굴은 걱정 반, 울상 반이다.
“그래서? 내가 파울리 녀석을 쓰러뜨려 달라는 이야기야?”
“그... 그런 거지.”
“알았어, 알았어. 일단 내가 해 볼 거야.”
“고... 고마워.”
“짬 떠넘기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전화가 끊긴다. 푸른 조끼의 남자는 전화를 끊으며 한숨을 푹 내쉰다.
“후... 너무 믿기지가 않는데. 레베카가 실패했다니... 그건 그렇고, 파울리 녀석, 생각하면 할수록 참을 수가 없네. 콘라트만 죽으면 끝인 줄 알았더니!”
한편, 호수 유람선.
“우리 유람선 ‘레이크 파라다이스’ 호는 잠시 후 9시 30분에 선착장을 출발하여, 9시 35분에 호수 사원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은 행선지를 잘 확인하시어 착오가 없도록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오는 유람선 안에 들어선 일행은 각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미켈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현애가 앉은 걸 보더니 그 옆에 살며시 앉는다.
“호수 사원은 가이드를 하면서 백 번도 더 넘게 오는 건데, 아직도 처음 가는 것 같아.”
미켈이 조그맣게 소리를 낮추고 현애에게 말한다.
“정말? 미켈 씨는 여기 가이드인데? 보통 여행 가이드는 그 명소만 반복해서 가다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질리거나 그러는 경우가 많지 않아?”
“내가 뭐랬어?”
미켈이 반문한다.
“이 호수 사원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런 특별한 매력이 있다니까. 나는 거기에 확 빠져들어 버린 거고. 그래서, 지금도 백 번 넘게 왔고, 앞으로도 수백 번은 더 올 것이지만, 나는 여기가 질리지 않아. 전혀.”
“그래...”
눈을 돌려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 사원을 한번 본다. 아까도 충분히 사진을 찍으며 감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다른 각도에서 보니,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미켈의 말대로 새롭게 보인다. 아까 본 게 호숫가에 마주보고 있는 쇼핑몰 건물과 어우러져 판타지의 용이 웅크린 것처럼 보였다면, 지금 유람선에서 올려다보는 모습은 정말 말 그대로 수면 위에 우뚝 서서 위용을 뽐내는 신전의 모습 그대로다.
그렇게 잠시 넋놓고 호수 사원을 보고 있다가, 현애는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홱 미켈에게 돌린다.
“어... 혹시...”
“왜?”
물어 보려는 게 잠시 생각이 안 났는지, 현애는 ‘어- 어-’를 몇 번 반복하다가, 이윽고 무릎을 탁 치고 입을 연다.
“미켈 씨가 아까 말했지 않아?”
“뭐?”
“동업자가 있다고.”
“아... 동업자?”
미켈은 약간은 난처한 얼굴을 하고 말한다. 말해 주고 싶지는 않다는 듯한 표정이다.
“스코프 같은 경쟁업체 녀석들이 그런 거잖아. 내가 아니라.”
“아니, 그럼, 그 동업자가 있다는 말은 뭔데? 아까 미켈 씨를 습격한 레베카라는 녀석이 아예 실체가 없는 걸 지어낸 건 아닐 거 아냐?”
“맞아. 그건 사실이지.”
“응? 동업자가... 정말 있어?”
현애는 어지간히 놀랐는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지를 뻔하다가, 겨우 입을 틀어막는다. 미켈이 자기 입에 손가락을 가져가자, 현애의 목소리는 마치 개미 애벌레가 내는 소리처럼 쪼그라든다.
“가이드는... 가이드는 당신 한 명 아니었어?”
“정확히 말하면 나와 내 동업자들은 팀을 이루어 활동하고 있어. 여러 명으로 되어 있는데, 만나 보면 알게 되지.”
“정말?”
“좀 있다가 오늘 일정 다 끝나고 만날 수 있을 거야. 원래는 내 동업자들은 너 같은 관광객들은 만나지 않는 건데, 네가 어찌해서 업계 사정에 말려들게 되었으니, 네게만 특별히 만나게 해 줄 거야.”
“응? 나한테만 특별히 만나게 해 준다고?”
현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는지, 미켈에게 되묻는다.
“다른 일행도 있잖아. 그런데 왜 하필 다 빼놓고 나한테만 만나게 해 준다는 거야?”
“아, 원래 내 동업자들은 고객들 접촉하지 않고 일하거든. 분야가 분야인지라.”
“그래? 어떤 일을 하는데?”
“그건 만나면 알게 될 거야.”
“그래...”
어느덧 유람선은 점점 호수 사원에 가까워지고 있다.
“승객 여러분, 잠시 후 레이크 파라다이스 호는 호수 사원에 도착합니다. 내리실 분들은 미리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나오자, 현애는 시간 날 때 최대한 물어 보기로 했는지, 목소리를 줄이면서도 빠른 말로 미켈에게 묻는다.
“그런데 미켈,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네가 속한 그 팀은 여행사하고는 무슨 관계야?”
“뭐, 말하자면... 우리 팀하고 계약을 맺은 거지. 경쟁이 좀 치열해서, 많게는 한 건에 수십 팀이 달라붙기도 해. 너희 같은 경우는 정말 급박하게 벌어진 일이라서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유람선이 살짝 흔들린다.
“도착했나?”
미켈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언제 작은 소리로 말했냐는 듯 큰 소리로 말한다.
“자, 여러분! 호수 사원에 도착했습니다. 내리셔서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호수 사원에 첫발을 내딛자, 아까와는 또다른 힘이 일행을 잡아끌기라도 하는 듯하다. 벽돌로 된 사원의 수면과 접한 계단에 한 발을 딛자마자,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 머리가 띵하다. 진짜로 뭔가에 맞은 건 아니지만, 멀리서 본 것과 가까이서 직접 발을 딛는 건 매우 느낌이 다르다. 한 발 한 발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마다 그 잡아끄는 강도는 더 세진다.
“이야... 이거, 몇천 년 전에 지은 거잖아?”
외제니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으며 말한다.
“어떻게 호수 안에 이걸 지을 생각을 한 거지?”
“난들 알겠나. 이걸 지은 이레시아인들한테 물어 보면 되지.”
그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옆에서 말하는 조제도 적잖이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한다.
“아니, 무슨 말이 그래?”
“내가 타임머신 같은 거만 있으면, 당장 가서 알아 오는 건데!”
“자자자, 여러분!”
말없이 앞서서 계단을 오르던 미켈이 뒤따라 올라오는 일행을 돌아보고서 큰 목소리로 일행을 부른다.
“이 사원이 어떻게 이 호수에 지어졌는지 알고 싶으시다고 했죠?”
“네-!”
“여기 호수 사원으로 할 것 같으면, 이 사원이 지어질 당시에는 호수의 수면이 지금처럼 높은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호수라기에는 좁고, 강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넓은 편인, 강의 일부였다고 하죠. 그때 당시에는 평범하게 건물들 사이에 세워진 강변과 산을 조망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상류와 하류의 강줄기가 어떤 이유로 흐름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서, 이곳에는 호수가 형성되었고, 사원 밑에 있는 도시는 수몰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테르미니 호수가 만들어지고, 이레시아인들은 호수 밑에 수몰된 도시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 뒤로 또 세월이 지나서 인류가 호숫가에 자리를 잡아 지어진 도시가 바로 테르미니입니다. 제 설명은 여기까지고, 이제 호수 사원의 높은 데까지 직접 올라가서 감상하시겠습니다.”
설명을 마치자마자, 미켈은 다시 일행보다 앞서서 계단을 쭉 올라간다. 계단을 올라가며 보니, 계단 하나하나가 아직도 반듯하다. 지어진 지 수천 년은 족히 되었음에도. 그리고 분명히 벽돌인데, 밟고 올라가는 데 발에 가해지는 충격이 정말이지 적다. 마치 쿠션을 밟고 올라가는 느낌이다.
“오, 여기 발이 안 아픈데?”
세훈이 앞서 올라가는 현애에게 말한다.
“정말? 어... 나도 그런 것 같네. 발이 하나도 안 아프고...”
열심히 걸어서 딱 가운데 지점까지 올라갔는데도, 올려다보니 아직 계단이 100개는 족히 남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발이 편하다. 쉬지 않고 계단을 많이 올라갔다는 것조차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이 계단에 우리가 모르는 속임수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겠지?”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러면 우리가 여기를 무사히 올라가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그렇게 계속 걸어가니, 어느덧 계단이 끝나는 지점이다. 다 올라오고 밑을 내려다보니, 사원을 떠나는 유람선이 마치 한 폭의 그림 안에 들어온 것처럼 보인다. 숨이 별로 안 찬 건 덤이다. 심지어 체력이 젊은 시절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 편인 나라차의 부모님조차도, 하나도 숨 차하지 않고 한껏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다.
“이야, 우리가 여기를 한 번에 올라왔단 말이야?”
“족히 100m 정도는 넘어 보이는데...”
“그러게. 분명 다른 데서 이렇게 한번에 올라갔으면 숨이 차서 구경하고 할 여유도 없을 텐데.”
뒤따라 계단을 올라가던 시저가 잠시 허리를 숙여 계단을 만져 본다.
“그래. 확실히 다른 돌계단에 비해서는 조금 부드럽네.”
한편, 사원 정상부에서 가까운 어느 돌출부의 난간에서는, 몸집이 크고 등산 모자를 쓰고 등산복을 입은 한 남자가 유람선 선착장에서 올라가는 계단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참 계단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남자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온다. 투블럭의 검은 머리, 큰 키, 그리고 등에 맨 작은 배낭. 다름 아닌 미켈. 그가 미켈인 것을 확인하자, 남자의 얼굴이 대번에 확 굳어진다.
“음... 파울리 녀석,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
남자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 말한다.
“전화로 들어서 그나마 대비는 할 수 있었지만, 되도록이면 직접 상대하는 건 피하려고 했는데... 결국은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었군...”
남자가 주먹을 꽉 쥔다.
“하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게 된 이상, 상대해 주는 수밖에... 그리고 콘라트 녀석이 뺏어간 우리의 정당한 몫도 돌려받아야 하고! 내가 해 보겠다!”
몸집이 큰 남자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린다. 그의 꽉 쥔 주먹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몇 번 돌출부를 배회하던 남자는 어느새 거기서 사라진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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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SiteOwner
2021-05-14 20:58:23
예상과는 달리 이번 회차에서는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군요.
그래도 갈등이 해소된 건 아니고 이후에 표면화될 갈등이 잠깐 유예된 것일 따름이겠지요. 이번은 그것을 위한 전초전일 것이고...폭풍전야같아서 긴장이 좀 더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여행에서는 처음에 안 보이던 게 두번째 이후에 제대로 보이는 게 많습니다. 미켈도 그 매력을 알고 있는 것이겠지요. 언제나 설렌다는 게 참 좋습니다.
호수에 이런 역사가 있었군요. 평범한 하안이 모종의 이유로 폐색호(堰止湖, Dammed lake)가 형성되면서 이레시아인이 만든 구시가지가 수몰되고 지구인의 신시가지는 새로운 호반에 형성된 현재의 테르미니...이해했습니다. 쿠션감이 뛰어난 돌도 재미있군요. 화산탄 등의 물에 뜨는 돌도 재미있습니다만...시어하트어택
2021-05-16 21:34:34
저도 그래서 한 번 가 봤던 곳을 다시 가 보는 일이 좀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전에 봤던 곳이 좀더 새롭게 다가오더군요. 여행을 업으로 하는 건 아니어도 직접 몸으로 느껴보니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드리갈
2021-05-18 15:51:58
요즘같이 사실상 세계 각국이 봉쇄된 상황이 작년에 이어 지속되다 보니 더욱 그리워지네요, 여행, 그리고 전에 찾았던 여행지를 다시 찾고 싶어진다는 생각이. 그러고 보니 사세보에 다시 가 보고 싶어지네요. 2019년말에 가려 했다가 갑자기 악천후로 국제여객선이 출항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보니...
현애가 뜻하지 않게 그 소동에 말려들었다 보니 미켈이 동업자들을 만나게 해준다는데, 이런 오퍼가 저에게 온다면 전 고사할 것 같네요. 하이리스크 로우리턴의 상황일 게 뻔하니 선택할 이유가 없어요. 게다가 갑자기 나타난 맛있는 먹이의 안에는 독이나 낚시바늘이 숨겨져 있을 공산도 크니까요.
미켈을 보고 있는 그 남자가 말하는 "우리의 정당한 몫" 운운은...글쎄요. 동의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닐 거예요.
시어하트어택
2021-05-23 15:40:27
뭐, 일을 같이 하자는 건 아니니까요. 저는 저렇게 해도 만난다는 배짱은 없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