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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키 린 시리즈 2. 아직 틴에이저도 아니지만...

마드리갈, 2021-06-12 23:11:01

조회 수
212

코마키 린 시리즈
2. 아직 틴에이저도 아니지만...


1985년 4월 15일, 도쿄 치요다구 소재의 최고재판소(最高裁判所, 대법원).
살인미수의 혐의로 기소되여 형사재판을 받게 된 일본 헌정사상 최연소 피고인 코마키 린(小牧凛)에 대한 판결이 나오는 날이었다.
코마키 린. 1972년 6월 29일생으로 만 13세의 생일을 두 달 남짓 앞두고 있었던 그녀는 1984년 4월에 도쿄대학 이과1류(東京大学理科一類, 공학부 및 이학부)에 최연소로 입학한 미모의 천재소녀로 주목받았으나, 그해 1학기에 일어났던 언론인의 스토킹을 뿌리치다 중상해를 입힌 혐의로 피소되어, 살인미수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날, 최고재판소의 오후 일정이 시작되자 판결이 나왔다.
"피고 코마키 린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피고는 소정의 절차에 따라 형사보상을 신청할 수 있다. 이상."

무죄의 확정판결을 선고받은 린, 그리고 린의 부모와 변호인단은 퇴정절차에 따라 묵묵히 법정을 빠져나왔다.
대기중이었던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플래시를 터트리는가 하면 마이크를 들이대고는 질문을 퍼부었으나, 일행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지 않은 채 최고재판소 건물을 빠져나갔다. 12세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류 패션모델을 연상케 하는 유려한 스타일의 날렵한 정장차림의 큰 키의 그녀 또한 표정없이, 그러나 곧은 자세와 다소 큰 보폭을 취하며 최고재판소 청사를 나가서는 주차장에 대기중인 검은색 고급승용차를 탔다.
린은 승용차의 뒷좌석 왼쪽에 앉아서 그저 무표정하게 창밖을 볼 뿐이었다.
창밖의 도쿄만(東京湾)은 그저 지난날과 다를 바 없이 푸를 뿐이었고, 그 푸른 수면 위에는 여전히 여러 배가 오가는데다 상공에는 하네다공항(羽田空港) 착발의 여객기가 여전히 오갈 따름이었다. 도로며 건물이며 할것없이 구조물도 그대로였다. 그렇게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풍경 속에서, 린의 표정도 자세도 변함이 없었다. 조수석에 탄 아버지도, 바로 옆에 탄 어머니도 굳이 말을 걸려고 하지는 않았고, 그렇게 2시간 가까이를 침묵 속에 달린 끝에 요코스카(横須賀)의 생활거점으로 돌아왔다.

준비된 저녁 축하연에서, 린은 귀가 도중 승용차 안에서 생각한 시를 낭송하며 그간의 법정투쟁에서 노력한 모든 사람들에게 정중한 감사의 인사를 올렸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송구스러움과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모두가 박수를 치며, 어린 나이에도 흔들림없이 당당하게 임해온데다 격조높은 시로 감사의 마음까지 담아낸 린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린의 바로 옆에는 아직 첫 돌이 지난지 한 분기도 안된 어린 여동생 나유(奈由)도 보모의 돌봄 아래 앉아 있었고, 그 나유가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는 것을 보자 린은 그제서야 표정이 풀려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축하연이 끝나자, 어머니가 린에게 말을 걸었다.
"린, 대학측에는 결석계를 미리 내놨으니 이번주에는 등교안해도 돼. 이번주는 마음껏 쉬렴. 마음놓고 나유와도 놀아주고. 알겠지?"
"예, 하지만 형사보상청구와 민사소송 건은..."
"그건 그때 할 일이고, 더 멀리 뛰기 위해서는 잠깐 쉬는 것도 좋으니까. 린, 알았지?"
"예."

그렇게 저녁 축하연이 끝나자, 린은 거실에서 석간신문을 읽은 후 목욕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옷을 모두 벗은 린은 거울 앞에 섰다. 12세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성숙한 미모는 린 자신의 긍지였다. 이미 170cm를 가볍게 넘은 큰 키에 어떤 그라비아 아이돌에도 지지 않는 건강미녀의 모범같은 유려한 바디라인, 어디에든 잡티나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하고 건강한 흰 피부 등은 자신의 눈에도 확실히 만족스러운 것들이었다.
린의 시선은 고간에 머물렀다.
그곳은 역시 어머니 및 나유의 것과도 동일하게 생긴 것으로, 남자인 아버지의 것과는 당연히 완전히 달랐다. 그것을 확인하면서 린은 순간 쓴웃음을 지으며 거울을 향해 독백하듯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이는 것도 여자이고 내 생활방식도 여자의 것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유전자는 왜...그리고 왜 나에게..."

린은 자신이 완전 안드로겐 불응증(Complete Androgen Insensitivity Syndrome)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알았을 때는 자신이 괴물인 건가 하고 놀라고 죽고 싶을만큼 혼란스러웠지만, 최소한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수준이 되었다. 여전히 이것이 가족 안에서만 공유되는 대외비인 점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지만.
원리 또한 알고는 있었다. 인간의 Y염색체에는 SRY 유전자라는 게 있고, 1차 성결정관여단백질을 암호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그러나 자신은 SRY 단백질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고 1차 성결정이 여성으로 된다는 것은 이미 생물학을 공부해서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째서(How)" 에의 대답은 될지언정 "왜(Why)" 에의 대답이 되지는 않았다.
물론, 이미 생물학의 연구서나 논문을 읽어봤던 린은 매년 이런 식의 유전자 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사람이 드물게나마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학계에 알려진 출현빈도와 일본의 인구를 생각해 보면 자신같은 사람이, 유전자 수준에서는 남성이지만 표현형은 여성인 사람이 연간 40명 내외 태어난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게 하필이면 왜 자신인가 하는 반문에의 답만큼은 여전히 구할 수 없었던 린은 그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몸에 대한 진실을 알고 미쳐 날뛰던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제압당하면서 들었던 말을 다시금 생각해 볼 뿐이었다.

"잘 들어, 린!! 넌 괴물 따위가 아냐, 진정해!! 넌 소중한 내 딸이다. 그리고 넌, 딸이면서 동시에 아들이다. 우리가 가족인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 않나? 린, 진정해!!"

입술을 깨문 채로 욕조 안에서 생각에 잠겼던 린은, 목욕을 마치고는 몸과 모발을 말리고 나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침대 위에 맨몸으로 누운 린은, 조명을 끈 채로 천장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코마키 린, 1972년 6월 29일생, 성별 여. 만 12세..."

자신의 공식 프로필을 말하고 나자, 자신에 관련된 주요사건도 음성으로 내었다.
"AIS라는 유전자결함 보유, 최연소 도쿄대학 이과1류 합격, 미모의 천재소녀, 프랑스의 격투기 사바트(Savate) 제4레벨인 강블랑(Gant Blanc) 공인유단자, 포터블 수퍼컴퓨터 카노푸스 프로젝트 최연소 출자자, 최연소 살인미수죄의 피고인, 1985년 4월 15일, 무죄 확정판결...아직 틴에이저도 아니지만, 파란만장하구나, 12년 인생이..."

순간 울컥하려던 그녀가, 숨을 한번 내쉬고는 미야자와 켄지(宮沢賢治)의 시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아메니모마케즈, 카제니모마케즈, 유키니모나츠노아츠사니모마케누(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시를 모두 암송하자 바로 잠든 린은, 다음날인 1985년 4월 16일 아침 일찍 잠에서 깨었다.
눈은 충혈되었고, 얼굴 곳곳에 눈물자국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전에 없이 밝은 얼굴로.
미리 결석계를 내놓은 터라 다음 등교일이 4월 22일로 잡힌 린에게는 지난 여름방학 때나 겨울방학 때보다도 4월 16일 하루가 더욱 자유롭고 편안했다. 무죄를 선고받았기에 노심초사해야 할 일도 없고, 또한 큰 선물 하나가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이 날은 중요한 물품의 지정배송일이기도 했다.
이미 오전이 끝나기 전에, 그 중요한 물품은 도착해 온 상태였고, 린은 1층 메일룸에서 물품을 수령하기만 하면 되었다.
일본의 첨단기술기업을 필두로 세계각국의 오피니언 리더 및 각방면에서 공인된 천재 등의 합동프로젝트로 개발, 제작된 포터블 수퍼컴퓨터 카노푸스(CANOPUS) 프로젝트의 컴퓨터 본체인 카노푸스32(CANOPUS 32) 및 예비교체부품이 온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세계적으로 급격히 추진되었던 마이크로프로세서의 32비트화, 컴퓨터의 고성능화 및 소형화를 추구한, 실내에서 개인이 혼자의 힘으로 옮길 수 있는 정도의 전동타자기와 비슷한 크기의 폼팩터로 만들어져 있고 상부덮개 안쪽에 16:9 화면비의 액정디스플레이를 내장한 것으로, 1GB의 메인메모리와 128GB의 메인스토리지를 장착하고 있음은 물론 부동소수점 연산능력도 16GFLOPS에 달할 정도로 시대를 앞서가는 물건이었다. 물론, 돈 많은 모험가들이 단가 70만 달러나 하는 고가의 것을 사들여서 대체 무엇에 쓸 건지 하는 등의 비판도 일본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빈번했다. 게다가 이 프로젝트에는 린이 세계 최연소 출자자였고 금액 또한 결코 12살 여자아이가 선뜻 출자하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했던 까닭에, 세간의 관심도 안 쏠릴 수가 없었다.

린은 그 카노푸스32를 수령하자마자 포장을 풀고 사용설명서를 읽은 후에 전원 및 통신회선을 연결하였다.
카노푸스32는 정말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빠르고, 화면은 이전까지의 컴퓨터의 단말기 화면의 것이라기보다는 35mm 영화필름이 상영되는 스크린을 그대로 옮긴 것같이 선명하고 미려했다. 또한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의 로마자로 표기되는 언어는 물론 러시아어같이 키릴자로 표기되는 언어, 가나와 한자가 혼용되는 복잡한 문자환경이 전제된 일본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표기되는 히브리어같이 특수한 환경을 요하는 언어의 입출력도 실시간으로 바로 사용가능해졌다. 린은 전날 최고재판소에서 무죄의 확정판결을 받은 그 순간에도 무표정했던 린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희색이 가득한 채 국내의 통신서비스는 물론, 미국의 컴퓨서브(Compuserve), 프랑스의 미니텔(Minitel) 등의 해외 통신서비스에도 접속하기도 하였다.

"출자한 돈이 아깝지 않네...좋아."
이미 카노푸스 프로젝트에 5억엔을 투자해둔 린은 테스트 결과를 이렇게 자평하였다.

저녁식사 이후의 늦은 밤.
수행원들도 모두 퇴근했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여동생 나유도 먼저 잠자리에 들어 결국 린 혼자만 넓은 거실에 남았다.
린은 방에서 카노푸스32를 갖고 와서 탁자 위에 놓고는 전원, 통신회선 및 TV 신호케이블을 연결하고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를 켜서 서류의 틀거리를 만들었다. 그 작업이 끝나자 탁자 위의 리모컨을 집어들고 TV를 켰다. 소니(SONY)의 퍼스널컴퓨터 히트비트(HitBit) 광고가 나왔다. 당대의 인기절정의 여성아이돌가수 마츠다 세이코(松田聖子)가 나오는 그 광고에는 "세이코의 컴퓨터 히트비트가 드디어 16비트로 더욱 강하고 아름답게 태어났어요" 라는 마츠다 세이코의 음성과 권장소매가격 69,800엔을 보여주는 자막도 나왔다.

린은 광고가 끝난 후 카노푸스32를 보며 다시금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내 카노푸스32의 단가라...히트비트 1천대분은 그냥 넘네. 그러니 세간에서 시끄러운 것도 무리는 아닌가..."

이미 전날의 석간신문에 나온 TV편성표를 읽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이름이 곧 방송될 TV 화면의 프로그램 이름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린은 갑자기 미간에 힘을 주었다.

[특별시사진단 - 코마키 린 사건에 대한 대학가 드레스코드에의 여성학적 고찰]
[특별게스트 - 소장파 여성학자 시게노부 치즈코(重信千鶴子) 박사]

"나시테, 난바시욧토(なして、何ばしよっと)..."
"왜, 뭐하는 짓거리야" 라는 의미로 거칠게 내뱉은 후쿠오카의 사투리 하카타벤(博多弁) 문장이 거실을 잠시 울렸다. 수도권 생활 이후로는 표준어상용으로 전환했다 보니 간혹 큐슈(九州)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 아닌 한은 되도록 하카타벤을 쓰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런 평소의 태도보다 말이 앞서고 말았다.

사건은 분명, 황색언론 종사자가 다른 어려 보이는 여학생을 린으로 착각하여 스토킹했다가 린이 그것을 보고 애꿎은 사람을 괴롭히지 말라고 나서서 그를 제지한 데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이후 린이 스토킹의 표적이 되어 버렸다가 그 언론인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린의 머리에 카메라 망원렌즈를 내리쳐 살해하려 했던 것을 린이 반격하여 로우킥으로 그 언론인을 주저앉혔고, 그 언론인이 복합골절을 입어버린 것이었다. 당시 린이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는 데에서 하이힐이 위험한 무기로 간주되어 특수상해 혐의로 기소되었다가 린이 사바트 유단자라는 것이 알려져 공소장의 요지가 살인미수로 변경되어 버린 그 사건은 불과 1년 전의 것이라서 주요 정기간행물에는 빠짐없이 보도된 사건이고, 틀리고 싶어도 각 도서관에 비치된 책, 마이크로필름 및 전산자료 덕분에 틀리면 그게 이상할 수준인 사건의 본질이, 그 시사진단에서만큼은 필사적으로 집요히 부정되고 있었다.

"시게노부 치즈코...? 그 누구와 성씨가 같네? 일족이라면, 그 누구는 지금 행방불명이라는데, 저 양반은 방송에도 나오네?"

린이 떠올린 그 누구는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 1972년에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벤구리온 국제공항에서 자동소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져 100여명을 살상한 그 일본적군파의 간부이자 테러현장에서 사살당했던 오쿠다이라 츠요시(奥平剛士)의 배우자로 위장결혼했던 그 시게노부 후사코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974년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의 프랑스대사관을 점거한 인질극의 주동자로, 탈출한 뒤 국제지명수배를 받고 있지만 행방이 묘연해진 그 시게노부 후사코를 떠올리게 된 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계속되는 방송에는 이런 주장이 나왔다.
"요즘 국내의 대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의 복장에 대해서는 성의 상품화에 너무도 무감각하다는 비판이 일본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심심찮게 있는데, 시게노부 박사님, 어떻게 보십니까?"
"사실, 일본문화의 기저에 있는 이이토코토리(いいとこ取り), 즉 좋은 것만을 따서 취하는 사고방식의 부작용 같습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미니스커트 열풍, 고도성장에 따른 여성의 대학진학률 증가 및 일본문화 전반의 미의식 추구에 대한 강한 열망이 이렇게 현대의 여대생들의 패션스타일 유행으로 구체화되는 거라고 보는데 말이죠..."

화면 속 시게노부 치즈코가 잠깐 말을 끊다가 이었다.
"그런데, 백번 양보해서, 그 여대생들의 유행이 문제가 없더라 하더라도, 그것도 어른이 되고 나서 이야기지, 이번의 코마키 린인가 뭔가 하는 그 천재소녀? 아무리 키가 크고 가슴이 크든 뭐든간에 애잖아요. 뭐, 어제 최종승소했다는데 여전히 12살이라면서요? 같은 나이면 이제 중학생. 그런 애가 어른 흉내를 낸다는 건 100년도 일러요. 그러니 아무리 대학이 성인들의 사회라고는 해도 지켜야 할 드레스코드는 있고, 특히 능력이 뛰어난 조기입학자 미성년자의 경우는 대학생이라도 행동의 범위를 제한하는 게 맞을 것입니다. 그게 성의 상품화를 막고 학생 본인에게도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 여성계를 필두로 사회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코마키 린이라는 그 천재소녀에 닥친 비극을 본보기로 일벌백계. 그게 필요합니다. 사실, 가슴과 다리를 내놓고 다니는 자체가 성의 상품화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반여성적인 작태인 건 의심할 여지도 없습니다만."

린은 홍차를 담은 잔을 들다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는 잔을 잡은 손을 다시금 놓았다.
그리고, 켜져 있는 카노푸스32를 이용하여 방송을 보면서 무엇인가를 써내려 나갔다.
시게노부 치츠코의 발언이 나올 때마다 날카롭게 화면을 응시하기는 했지만, 무엇인가를 쓰는 속도만큼은 느려지지 않았다.

방송이 끝나자, 뒤이어 음반광고가 하나 나왔다.
"전유럽을 열광시키는 이스라엘 출신의 007 카지노 로얄 출연 여성가수 달리아 라비(Daliah Lavi)의 베스트앨범, 드디어 일본발매!!"

독일어 가사의 노래가 한 곡 흘러나왔다.
"Wer hat mein Lied so zerstört, Ma?"
"Wer will mein Leben so zerstören..."
나오는 노래의 제목인 '누가 내 노래를 망쳤는가' 를 비틀어서 '누가 내 인생을 그렇게 망치려 드는지...' 라고 자조하는 린의 독일어 음성이 문장의 끝에서는 조금 떨렸다.
뭔가를 한참 기록한 린은 데이터를 저장하고 카노푸스32를 껐다. 그리고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는, 자신의 방에 갖고 들어간 카노푸스32를 책상 위에 놓은 후 침대에 누워 얼굴까지 이불을 덮고 바로 잠을 청했다.




[2화 설정 및 배경지식 안내]
전반적인 캐릭터설정은 공작창의 코마키 린 시리즈 - 집필방향 및 주인공의 개략적 신원을 참조하시면 되어요. 

린의 대략적인 외모는, 기성 창작물의 캐릭터로서는 시원찮은 그녀를 위한 육성방법(冴えない彼女の育てかた)의 카스미가오카 우타하(霞ヶ丘詩羽)와 거의 비슷하되 키가 조금 더 큰 차이만 있어요. 1985년 시점에서의 린은 키 174cm(=5피트 8½인치)로, 이후 평균 2년에 1인치 수준으로 커져서 17세의 생일을 맞기 전인 1990년의 봄에 최종적으로 183cm(=6피트)가 되어요.
외출복의 스타일(바로가기) 및 실내복의 스타일(바로가기)은 각각의 링크를 참조하시길 부탁드려요.
음성이 가장 비슷한 성우로는 키타무라 에리(喜多村英梨, 1987년생)가 있고, 공식사이트의 보이스샘플 중 2번째의 나레이션(ナレーション) 부분이 거의 동일하다고 생각하시면 되어요(공식사이트 바로가기).

4월 15일 밤에 잠들기 직전 린이 암송한 미야자와 켄지(宮沢賢治, 1886-1933)의 시는 미야자와 켄지 사후인 1934년에 발견된 자필원고에 남겨져 있는 것으로, 1931년 11월 3일부터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원문은 이하에 소개하는 링크에서 열람할 수 있어요(원문, 일본어).

소니 히트비트(SONY HitBit)는 1980년대 소니에서 발매한 8비트 MSX 퍼스널컴퓨터로 "사람들의 히트비트(ひとびとの、ヒットビット, 히토비토노, 힛토빗토)" 라는 광고문구로 당대를 풍미했어요. 특히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여성아이돌가수 마츠다 세이코를 기용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어요. 광고영상의 하나를 소개할께요(유튜브 바로가기).
폴리포닉 월드에서는 이 히트비트가 업그레이드되어 16비트 프로세서를 사용하는 제품도 출시되어요.
2화에 등장하는 카노푸스32는, 현실세계의 컴퓨터와 비교하자면, 2001년에서 2003년에 걸쳐 출시된 32비트 프로세서인 인텔 펜티엄3의 3세대, 코드네임 투알라틴(Tualatin)과 최소한 대등한 수준의 속도를 내었어요. 16GFLOPS라는 부동소수점 연산능력은 1997년에 체스 세계챔피언 가리 키모비치 카스파로프(Гарри Кимович Каспаров, 1963년)와의 대전에서 승리한 딥 블루(Deep Blue) 수퍼컴퓨터의 1.4배 정도. 즉, 작중의 카노푸스32는 현실세계의 2000년대 전반에 나왔던 최고가의 노트북과 최소 대등한 정도의 성능을 발휘하는 노트북인 것이죠.

폴리포닉 월드에서도 현실세계와 동일하게 1972년 5월 30일 이스라엘 텔아비브 벤구리온 국제공항에서 일본적군파 소속의 일본인 3명이 자동소총과 수류탄으로 공항내에서 무차별 총격테러를 저질렀어요. 테러범 중 적군파간부 오쿠다이라 츠요시(奥平剛士, 1945-1972) 및 교토대학 재학생 야스다 야스유키(安田安之, 1972년 사망)는 현장에서 사살되었고, 카고시마대학을 나온 오카모토 코조(岡本公三, 1947년생)는 범행직후 이스라엘 공항경비대에 붙잡혀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고 복역했다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과의 포로교환에서 석방되어 레바논으로 간 뒤에 잠복생활을 하다 1997년에 레바논에서 검거된 후 금고 3년을 선고받고 만기출소후 일본으로 송환되었어요. 2021년 현재는 실어증 등의 문제로 병원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이스라엘에서의 복역 때 고문을 많이 받아서 정신이상이 생겼다는데 진위는 여전히...

또한, 오쿠다이라 츠요시의 서류상 배우자였던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 1945년생)는 헤이그 프랑스대사관 인질극 이후 탈주해서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지명수배가 이어지다가 사건발생 26년만인 2000년에 오사카에서 체포되었어요. 이미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밀입국하여 신분을 숨기고 오사카에서 생활하고 있었지만, 간간이 위조여권으로 일본과 중국을 왕래하기도 했는데 특유의 행동방식이 자주 목격된데다 무심코 남긴 지문 등으로 신원이 특정된 끝에 여권법 위반으로 경찰에 체포되었고, 재판에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은 후 2021년 현재는 도쿄의 의료교정시설인 국제법무종합센터(国際法務総合センター) 산하 동일본성인교정의료센터(東日本成人矯正医療センター)에서 항암치료를 받으며 복역중에 있어요. 형기만료는 2022년.


달리아 라비(Daliah Lavi, 1942-2017)는 이스라엘의 가수, 배우 겸 모델로, 1967년작 007 시리즈 영화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에 출연했어요. 배역은 영국의 비밀 정보원인 디테이너(The Detainer). 위에서 소개한 노래는 유튜브에서도 들을 수 있고(유튜브 바로가기), 이전에 포럼에서도 언급한 바 있어요(가사가 여러 언어로 된 노래를 모아볼까요? 참조).

마드리갈

Co-founder and administrator of Polyphonic World

6 댓글

대왕고래

2021-06-13 01:32:31

파란만장하네요, 법정에도 가게 되고, 스토킹에, 쓸떼없는 3류 방송에 언급되기도 하고... 곤란하네요, 이래저래.

그래서 대단하네요, 그런 걸 버틴다는 게. 멘탈이 대단하네요.

마드리갈

2021-06-13 15:45:09

린에게의 1984년은 정말 감당하기 힘든 한 해였죠.

더없이 높은 성취를 이룬 반면, 생래적인 유전자결함이라는 문제도 알게 되었는데다 자신이 세간의 관심사로 소비되고 있었던 것에 굉장히 힘들어했고, 급기야는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자로 인해 기소되어 살인미수의 최연소 피고인이라는 기록도 세우게 되는 등, 일반인으로서는 전혀 감당할 수 없는 고초를 겪기도 했어요. 특히 폴리포닉 월드의 일본은 형사미성년자라는 개념이 폐지되었다 보니 소년범에 대한 예외가 없어졌는데 이게 린에게 아주 불리한 상황이 된 것이었어요.

미국의 변호사 광고에, "저질렀다고 유죄가 아닙니다(Just because you did it doesn't mean you're guilty)." 라는 게 있어요(사진 바로가기). 이런 게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면 린처럼 불리해질 수도 있어요. 특수상해죄의 성립요건 중에 위험한 물건의 휴대도 있는데, 린이 하이힐을 신고 있는 것으로 보통의 12세의 여자아이가 하이힐을 신지는 않으니까 그것이 위험한 물건이라는 주장이 수용되는가 하면, 린이 공인유단자인 것도 있어서 정당방위의 피해자로서 비난가능성이 더 큰 그 파파라치가 도리어 린을 살인미수범이라고 몰아붙이는 게 가능했다는 게 불합리하지만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죠. 법의 세계란 그래서 꽤 무서운 게 많아요.


게다가, 일본에서는 전파가 공공재라는 인식이 옅다 보니 방송에 자유도가 높고, 그래서 민방채널도 많아요. 영상물 속의 간접광고도 규제가 적다든지, NHK와는 다르게 상당히 실험적인 방송도 가능한데다 TBS의 일요극장 등은 진중하고 심도있는 드라마로 정평있기도 해요. 물론 역기능도 있어서, 명예훼손의 여지가 큰 방송도 가능하고, 변태적으로 가학적인 컨텐츠도 있어요. 이를테면 잇테큐같은 것. 전 그런 것을 매우 싫어해서 그런 프로그램은 시청하지 않아요.

일본에서는 그런 게 많았죠. 예전에 호랑이님께서 기고해 주신 일본 버블경제 시절은 참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고 하죠에서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컨텐츠가 있었고, 가수 오카다 유키코(岡田有希子, 1967-1986)의 자살 보도는 일본 황색저널리즘이 얼마나 미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했어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오카다 유키코가 투신자살한 시신 사진이 그대로 주간지에 실리기도 했어요. 머리가 깨진 채 혈액과 뇌수가 흘러나오는 장면까지 보도한 당시의 주간지 포커스(FOCUS)는 큰 비판을 받게 되었고, 그 사건 이전에는 속칭 냥냥사건(ニャンニャン事件)이라고 불리는 15세의 인기 여성아이돌이 섹스를 한 뒤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공개한 사건으로도 물의를 일으킨데다 1990년대에는 유명인의 장례식 때 입관 직전의 시신의 얼굴사진을 촬영하는 등의 문제도 수차례 일으켰어요. 물론 그 포커스라는 주간지가 올린 공도 있긴 해요. 1999년에 일어났던 오케가와 스토커 살인사건(桶川スト?カ?殺人事件)에서 당시 포커스의 저널리스트 시미즈 키요시(?水潔, 1958년생)가 사이타마현 경찰보다 먼저 범인을 포착하였고 경찰의 수사포기를 고발했다든지 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이미 숱한 사회문제를 양산했고 피해자도 많이 생겼던 것이죠. 게다가 그 포커스 잡자의 수법은 다른 매체에서 모방되면서 결국은 독자들이 금방 식상함을 느끼기도 하고 그래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가 결국은 2001년에 휴간되는 운명을 맞이했어요. 즉 일본의 1980년대는 그런 황색저널리즘의 황금기였고, 그 상황이 거의 그대로 재현된 동시대의 폴리포닉 월드에서도 그 문제가 터졌는데 그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은 사람이 바로 린이라는 것이죠. 과연 이런 인생, 선택할 수 있다면 바로 주저없이 선택할 수 있을까요?

시어하트어택

2021-06-15 22:18:08

시게노부 치즈코라는 이름을 처음에 보니 제가 어렴풋이 알 것 같던 사람인가 싶었는데, 제 예상 그대로군요. 그나저나, 어디서 본 것 같은 '평범한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마드리갈

2021-06-16 12:37:27

역시 알아보셨군요.

맞아요, 등장하는 각종 캐릭터의 이름 중에는 현실세계의 인물을 모티브로 한 게 있어요.

시게노부 치즈코는 본문 및 후기에서 밝혀놓은 것처럼 성씨는 극좌 테러리스트 시게노부 후사코에서 따온 것이죠. 참고로, 치즈코라는 이름은 실존인물에도 창작물의 캐릭터에도 드물지 않게 쓰이지만, 실존인물 중에는 특히 전투적 페미니즘으로 유명하고, 스커트 밑의 극장,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등의 저서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일본의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1948년생)가 잘 알려져 있어요.


소설에서의 각종 인물, 사건, 배경은 현실세계의 것과 완전히 동일하게 되면 그건 이미 소설이 아니라 논픽션이 되고, 완전히 다르면 생경하게 여겨지기 쉽고, 그 균혐점을 찾기가 참으로 어렵죠.

Lester

2021-06-17 19:40:44

잘 읽었습니다. 중간 즈음의 신형 컴퓨터 카노푸스(별자리인지 이집트의 미라 제작용 단지인지는 모르겠지만)의 등장과 그에 대한 설명이 다소 장황해서 흐름을 해치는 것만 빼면 충분히 흥미로웠네요. 시게노부에 관해 무언가 공격적인 내용을 쓰고 있겠구나 싶기도 하고.

마드리갈

2021-06-18 13:46:27

감상평에 깊이 감사드려요.

등장하는 신형 컴퓨터 카노푸스(Canopus)의 유래는 용골자리 알파(α Carinae), 남극노인성 등으로도 불리는 별이예요. 그리고 1983년에 일본의 고베에서 설립된 방송장비, 소프트웨어 및 컴퓨터 주변기기 기업으로 현재는 캐나다의 그래스밸리(Grass Valley)의 일본총판으로 재편된 기업의 이름이기도 하죠. 이집트의 미라 제작용 단지인 카노픽 자(Canopic jar)는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았어요.

역시 카노푸스 관련 설명이...그 부분은 처음에 쓴 부분이 좀 부실하다고 판단되어서 내용을 더 집어넣었는데...예리하게 보셨어요. 좀 더 함축적으로 설명할 방법을 고안해 봐야겠네요.


코마키 린이 1985년 4월 16일 밤에 녹화하고 기록한 내용이, 결국 36년 후인 1화에서 쓰이게 되죠.

그리고 1985년에 방송에서 여성학을 방패로 린을 비난하였던 시게노부 치즈코는 2021년 시점에서 일본페미니스트총연합회의 이사장으로서 코마키 린을 찾아와서 거짓 사업계획서로 린과의 직접면담을 신청한 뒤에 금전을 요구했다가 역공당하게 되었어요. 그것도 총무부장 및 재무부장과 같이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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