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스타강사 출신은 아니고 학원강사로서의 경력은 지역사회에서 꽤 괜찮은 강사 정도로 활동한 게 전부입니다만, 요즘 화제가 되는 킬러문항에 대해 나름대로의 견해를 좀 풀어놓을까 싶습니다.
제목에서도 이미 밝혀놨듯이 킬러문항은 만들기 매우 쉽습니다.
예전에 학원강사 시절에 학생들에게 말했던 것을 조금 인용하자면, "영어시험에 러시아어 안 낸다" 를 비틀면 되는 것입니다. 영어시험에 영어의 영역 밖에 없는 러시아어를 집어넣으면 그 러시아어 문제는 러시아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킬러문항이 되어서 그들이 임하는 시험에서의 목적달성을 좌절시키는 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해 버리면 너무 티가 나도 날 수밖에 없으니까 실제로 킬러문항은 이것보다는 약간 더 정교하게 나옵니다. 일단 교과목의 내용에는 포함되지만 자세한 것은 정규교육과정의 밖에 있는, 그야말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레벨의 것으로 내면 됩니다.
제 경험담을 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일단은 학생 때. 크게 2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수학. 국민학교 3학년 때 국민학교 4-6학년 과정 및 중학교 전학년의 수학까지 선행학습을 해 본 적이 있긴 합니다. 당시에 다녔던 국민학교 내에서 수학경시대회에서 충분히 입상할 만한 학생이 저밖에 없었다 보니 학교 차원에서 그렇게 교육을 받아보기도 했고 그렇게 수학경시대회에 나가서 상위권 입상을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시 생각나는 문제가 다항식의 인수분해라든지 입체도형을 보고 전개도를 추청해서 입체도형의 표면적 일부를 산출해내는 문제같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영어. 작년 여름에 쓴 글인 영단어로 쓴 답안으로 부정행위자 취급을 받은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영어에 대한 집착은 지금 생각해도 꽤나 무서운 수준이어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이미 중학교 전과정 영어는 끝냈고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대학영어나 대학원영어 시험을 쳐도 상위권은 충분히 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잘 시청했던 방송도 주한미군용 방송채널인 AFKN이었을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도 영어천재로 불렸고 대학에 진학해서도 교류가 있었던 영문학과나 영어교육과 학생들이 저에게 고급영어관련으로 자문을 구할 수준이 되었음은 물론 카투사(KATUSA)로서의 군복무 때에도 당시 있었던 대대의 부대대장인 미군 소령의 통역병으로서 차출될 정도였습니다. 한편으로 클래식 음악에 취미가 있다 보니 이것과 연이 닿아서 독일어와 라틴어도 공부했고 그것에 힘입어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수준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특수한 사례일 뿐입니다. 국민학생 때 수학에 미쳐봤고 중학생 및 고등학생 때 영어에 미쳐봤다 보니 그 분야에 대해서는 타인에 비해 압도적인 수월성을 지녔지만 그게 다른 분야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다른 교과목에서는 고득점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압도적인 수준이라고는 하기 힘들었다 보니 한계도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통칭 수능 킬러문항은 모든 영역에서의 수월성을 요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가는 최단루트는 바로 몇몇 스타강사들이 집어주는 솔루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학생은 시간과 노력을 단축하여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고 강사는 고수익을 얻고. 참 아름다운 윈윈 비즈니스모델같은데 실상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 킬러문항 솔루션이 정말 강사의 예측력과 분석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면 그 강사는 그야말로 신입니다. 그리고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학생이라도 그런 강사를 찾을 것이며, 또한 제가 그런 강사가 될 수 있다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았고, 오히려 부정행위의 카르텔에 불과하다는 게 드러날 따름입니다.
여기서 기사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드러나는 '카르텔'...前 수능 출제위원이 킬러문항 만들어 판다 (2023년 6월 21일 중앙일보)
이렇게 전직 수능출제위원이 킬러문항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이상 교육환경의 생태계가 어떻게 조성될지는 더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뉴노멀이 되고 학생들은 이것을 바꿀 힘이 없으니 적응해야 하는 것. 이렇게 조성된 생태계에서는 킬러문항의 제조자 이외에는 전직 출제위원이 권력이나 시장지배자가 되고 일타강사는 그 생태계에 종속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립니다. 즉 킬러문항은 수험생들을 겨누는 칼날만이 아니라 일타강사의 위상과 수입을 겨누는 칼날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다시 수월성을 요하는 문제 이야기로.
이런 문제를 만들면 교과목의 내용에는 포함되지만 정규교육과정의 밖에 있는 문제가 완벽히 만들어집니다.
한국지리 과목에서 이런 문제를 낸다면 어떨까요?
(문제)
휴전선 이남의 한반도 및 부속도서의 면적은 100,363km2이다. 이것을 이용하여 프랫설에 따른 지오이드 하부의 한반도 지각질량의 추정치를 구하라. 단위는 1,000kg을 1톤으로 나타낸 메트릭톤(Tonne, Metric ton)이다.
(정답)
1.2206*1014톤
사실 이것은 한국지리의 문제를 위장한 지구과학문제입니다. 단지 출제의 대상이 한반도 및 부속도서내에 포함되기에 한국지리의 것으로 보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프랫설(Pratt Hypothesis)이란 영국의 지질학자 존 헨리 프랫(John Henry Pratt, 1809-1871)이 주장한 지각평형설(Theory of Isostasy)로 지각의 질량이 어디에서나 균일하여 맨틀과의 경계면의 깊이가 거의 일정하다는 것으로 오늘날에는 높은 산일수록 하부지각도 두꺼우며 또한 대륙지각의 밀도가 해양지각의 것보다 낮다는 에어리설(Airy Hypothesis)에 밀려 사장된 이론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킬러정보가 3개 숨겨져 있습니다. 한반도의 평균해발고도가 448m인 것, 알려진 대륙지각의 평균밀도가 2.7g/cm3 및 지오이드의 개념. 예의 두 정보를 언급하지 않게 되면 이런 지식을 전수받지 못한 학생은 아무리 사고능력이 좋아도 이 문제를 풀 수 없게 되는데다 또한 표면중력이 균일한 가상의 지구표면인 지오이드(Geoid)를 기준으로 한 상부지각의 질량과 하부질량은 같아야 융기나 침강이 일어나지 않고 맨틀 위에서 평형을 이루게 된다는 것도 배우지 않으면 지오이드 하부질량을 추론해 낼 수 없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한국지리인 척하는 지구과학 및 과학사 문제이고 프랫설은 이미 사장된 학설이라서 정규교과과정에서도 다루지 않는 것인데다 대륙지각의 평균밀도는 에어리설에 기반한 것이어서 실제로 이 문제를 잘 풀었다고 하더라도 지구과학 지식의 향상이나 학습능력 증대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즉 문제를 위한 문제일 따름입니다. 이런 것을 갖고 제대로 된 문제이니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좋든 싫든 문물은 바뀌어가고, 효용성을 잃는다고 판단되면 퇴장하기 마련입니다.
킬러문항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건 수천 수만년 이어진 유구한 전통도 아니고 불과 10여년 정도 이어진 현상인데다 다른 것보다 라이프사이클이 더 길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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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대왕고래
2023-07-02 18:43:15
킬러 문항. 초등학생 때 수학경시대회 나갔는데, 아직 배우지 않은 엇각 문제를 봤던 기억이 나네요. 그냥 엇각 문제였어요, 별다른 응용도 없는.
다들 모를 게 뻔하다는 생각에 아예 시험 주최측에서 각도기를 허용해버렸죠.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주최측도 어쩔 수 없었던 킬러 문항이었던 거네요... 저는 아버지한테 배워서 그걸 각도기 없이 풀었지만요.
그런 식으로 주최측도 이건 아니다 하고 생각하는 극한의 고난이도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저처럼 남들보다 조금 더 알았다는 이유로 그걸 푸는 일부 학생들이 나올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이건 솔직히 능력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더 알고 왔는가 아닌가를 평가하는 게 되는거죠.?
시험은 모두가 동일한 지식을 배운 상태에서, 능력을 평가하는 방향으로 가야 맞다고 생각해요.
SiteOwner
2023-07-02 21:09:31
대왕고래님께서 경험하셨던 사례도 킬러문항이 아주 내기 쉽다는 것을 그대로 증명합니다.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냥 학생들의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손쉽게 내놓고 어려운 도전과제를 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교육계 각각에 포진해 있으니 결국 이렇게 공정성이 고도로 요구되는 대학입시에서까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최소한의 공정성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정당성은 약해집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그 다음은 스포츠선수의 약물복용이 당연한 러시아나 게임플레이에서 핵이 당연한 중국같은 불공정하고 불투명한 사회로 가는 것밖에 안 남았습니다. 지금이 궤도수정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SiteOwner
2023-07-26 22:17:57
[2023년 7월 26일 추가]
교육부에서 하반기 중에 가이드라인을 마련하여 교사들이 사교육업체에 모의고사 문항을 만들어주고 돈을 받는 행위를 원천차단하기로 나섰습니다. 교사의 모의고사 문항 개발판매행위는 학생들을 사실상 사교육으로 내모는 것임은 물론 공교육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해치는 것으로 엄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고 이에 따라 경찰청 및 교육청과 뜻을 모아 처벌할 것이 강조될 것입니다. 단 시중에 공개적으로 판매되는 출판사 문제집 저술은 이전과 동일하게 허가됩니다.
이 코멘트의 작성에 참조한 기사를 소개합니다.
학원 돈 받고 만드는 '킬러문항' 원천 차단…교육부, 하반기 가이드라인 마련 (2023년 7월 25일 데일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