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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2시. 미린 고등학교의 정문은 하교하는 학생들로 북적인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하는 이야기는 제각각 다르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하나같이 밝다.
그런데, 여기 근심어린 얼굴을 하고 교문을 나서는 학생이 한 명 있다. 그는 바로 다름 아닌 세훈이다. 마치 망망대해 속의 무인도처럼, 세훈은 그렇게 외롭게 교문을 나서고 있다. 아무리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보여도 항상 옆에 친구가 적어도 한두 명씩 있었는데, 오늘 세훈 옆에는 아무도 없다. 하다못해 주리마저도 오늘은 세훈 곁에 보이지 않는다. 세훈은 대로변으로 걸어나가서, 그대로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마침 선선하게 바람이 불고 있다. 화단의 꽃들과 나뭇잎들이 바람에 흩날린다. 그러나 나무들마저도 마치 세훈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듯 보인다.
지하철역에 들어가서, 개찰구를 지나고, 승강장에 선다. 잠시 후 승강장에 열차가 들어서고, 세훈은 그 열차에 탄다. 빈자리에 앉아, 세훈은 AI폰을 꺼내 메시지를 본다.
‘오후 2시까지, 지하철 아체토역 2번 출구에서 100m 서쪽에 있는 폐건물로 올 것. 다른 사람들은 같이 오지 말 것이며 너 혼자 와야 함.’
다름 아닌, 수요일에 전화 온 그 선배의 메시지다. 세훈의 눈동자는 파르르 떨지만, 이내 세훈은 주먹을 한 번 꼭 쥔다. 어차피 그저께 그 선배의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 각오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체토라면... 세훈의 머릿속 퍼즐이 또 하나 맞춰진다. 밑에는 메시지가 또 하나 보인다.
세훈이니? 나 파라야. 어제 말했던 것 기억나지? 장소는 어딘지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마.
세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윽고 열차는 미린역에 도착한다. 열차에서 내린 세훈은, 7호선 ‘동부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환승통로로 향한다. 가는 길에 세훈은 어제 파라를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파라 씨가, 도대체 뭐로 나를 도와준다는 걸까? 아무래도 궁금하다.
미린역에서 다섯 정거장. 세훈은 아체토역 2번 출구로 나온다. 아체토역은 지하철 동부선과 ‘아체토 트램’의 환승역으로, 주변은 주거지 위주의 지역으로 동구의 주요 번화가 역할을 하고 있다. 저번에 앤드루의 병문안을 위해 갔던 메트로폴리스 병원 역시 이 역에서 멀지 않다. 동쪽이 메트로폴리스 병원이 있는 방향으로, 주로 아파트나 오피스텔이 보인다. 그 반대쪽인 서쪽은 그렇게 높은 빌딩은 없어 보인다. 즉, 단독주택이나 빌라 위주의 지역이다. 그대로 그 선배가 알려 준 대로 서쪽으로 걷는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 세훈과 눈을 마주치는 사람은 없다. 세훈은 개의치 않고 그대로 걷는다. 어느덧, 선배가 말한 100m 지점에 다다른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폐건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세훈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대로변 안쪽에 13층 높이의, 짓다 만 건물 하나가 보인다. 아체토역 동쪽에서는 그냥 평범한 정도의 건물이지만 서쪽에서는 꽤 두드러져 보인다. 12층까지는 그래도 외벽도 덮어 놨지만 13층은 뼈대가 드러나 보인다. 그나마 덮어 놓은 외벽도 색이 다 벗겨졌다. 어쩌다 저렇게 버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그 선배가 저 건물로 불렀는지 알 것 같다. 세훈은 곧장 폐건물로 향한다. 그 폐건물로 가는 길 역시 대부분이 3~4층 정도의 오래된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폐건물까지 가는 길에 세훈은 또 몇 명의 지나가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아까 대로변에서 본 사람들과 다른 점은, 여기서 만난 사람들은 세훈을 한 번씩 흘겨보고 지나간다는 점이다. 차라리 무관심이 나을 정도로, 그들의 눈빛은 별로 반갑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적대적인 눈빛은 ‘서곡’일 뿐.
문제의 폐건물에 다다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건물 앞에는 몇 명의 남녀 학생들이 대기하고 있다. 모두 동급생들로, 익숙한 느낌이 있는 얼굴들이다. 자주 본 얼굴들은 아닐지라도, 지나다니면서 한두 번씩 마주치는 얼굴들이다. 거기에다가 항상 세훈과 마주칠 때면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 건 덤이다. 세훈은 일단 그 폐건물 앞에 멈춰 선다.
“너 말이야.”
그 학생들 중 한 명이 세훈을 보고 말한다. 평소에도 세훈을 보면 비웃는 웃음을 흘리던, 그 여학생 2명 중 한 명이다.
“시간이 없는데 여기서 얼쩡거리지 마.”
세훈은 그 여학생을 살짝 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선배님은 건물 안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빨리 들어가.”
세훈은 애써 그 동급생들의 얼굴을 피하며 폐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폐건물 안에 들어서자, 으스스한 느낌이 피부에서부터 차차 스며들기 시작한다. 오들오들 떨리는 이 느낌. 단순히 추운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거의 없다시피 한 조명과 그 틈새로 비쳐오는 햇빛, 그리고 퀴퀴한 짓다 만 건물의 냄새, 메스꺼운 공사장의 공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으스스한 느낌을 더욱 북돋우고 있다.
세훈은 우선 1층을 둘러본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로비가 나오는데, 여기저기 공사 자재가 널브러져 있고, 엘리베이터가 있어야 할 곳은 텅 비어 있다. 이 방 저 방에 들어가 본다. 하지만 그 선배의 모습은커녕, 사람의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로비로 나와서, 계단을 올라간다. 폐건물 특유의 냄새가 더 진하게 난다. 2층에 다다른다. 그 특유의 폐건물 냄새는 여전하다. 2층에 올라가서도, 1층에서 했던 것처럼 주변을 둘러본다. 역시나, 그 선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3층으로 올라가 본다. 3층도 마찬가지. 4층으로 올라가 본다. 폐건물 냄새가 한층 더 진하게 난다. 세훈은 4층을 둘러본다. 4층은 다른 층들과는 달리, 방들이 좁고 많다. 또 다른 층들과는 달리 창문 하나 없다. 로비 쪽을 빼놓고서는. 한층 더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 그 방들도 하나하나 들어가 본다. 역시나, 그 선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5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으로 향하려는 그때...
“어딜 그렇게 헤매나?”
세훈의 등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금방 떠오르지는 않는다.
“누구신지...”
세훈은 뒤를 돌아보며 볼멘소리로 말한다. 검은 후드티를 입고 덩치가 큰 한 남자가 서 있다. 등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인마.”
그 사람이 다시 입을 연다. 세훈보다 머리 반 정도는 더 커 보이는 키, 잘 정돈된 머리, 그리고 싸늘한 눈빛. 이제 알았다. 그저께 통화한, 그 목소리... 그 목소리다!
“선배를 봤으면 인사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선배? 선배...라고요?”
세훈은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태연히 말한다.
“정말 우리 학교 선배님, 맞는가요?”
“우리 학교가 아니면 너를 이렇게 알아볼 리가 없잖아, 엉?”
그 선배는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 건 기본적으로 머리에 넣고 다녀야 할 것 아니야!”
한껏 목소리를 높여 놓고 제풀에 지쳤는지, 그 선배는 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간다.
“똑똑히 기억해 둬라. 한 번만 말한다. 내 이름은 김예준이다. 미린고등학교 2학년이지. 할아버지는 메트로폴리스 의료재단 이사장이시고, 아버지 역시 의사를 하고 계시지. 나 역시 의사가 될 것이고.”
잠깐... 메트로폴리스 의료재단? 바로 떠오르는 건 메트로폴리스 병원, 그것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비숍이나 앤드루가 미린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거기 입원했는지 알 것 같다. 세훈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하나 맞춰진다.
“네 녀석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지... 빈센트와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친구였지. 서로 의기투합이 잘 되었고, 그래서 부족한 건 서로 도와 가면서 지냈지. 자연히 클라인이 보살펴 주는 후배들은 내 말도 잘 듣게 되고 말이야.”
세훈은 자세는 바로 했으나, 머리는 삐딱하게 하고 듣고 있다. 예준은 계속 말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며칠 전에 빈센트가 내게 특별히 부탁하더군. 조세훈이라는 1학년생이 있는데, 설득을 해서든 힘을 동원해서든 어떻게든 자기 앞에 무릎을 꿇게 해 달라는 거야. 왜 하필 너를 콕 집어 말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둘도 없는 친구의 부탁이니 들어 주지 않을 수가 없더군. 그래서 후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가 직접 너를 만나 보겠다고 했지.”
“하, 그랬군요.”
“말 똑바로 해라. 내가 시간이 남아돌아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니니까. 잘 생각해라. 선택의 기회는 한 번뿐이다. 안 그러면 네 앞길이 어떻게 될 건지는 네가 더 잘 알 거다.”
예준의 말에 세훈은 잠시 생각하는 척한다. 애써 머리를 굴려 본다. 이 선배도 분명 초능력자일 가능성이 큰데... 어떻게 대처하지? 어떻게 해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지?
1분이 지나도 대답이 없자 예준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 높여 말한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선배, 설마, 제가 그렇게 순순히 무릎을 꿇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세훈의 그 말을 듣자마자 예준의 이마에 즉각적으로 혈관이 드러나고 눈은 벌겋게 충혈된다.
“이 자식이! 선배의 말이 말 같지 않지?”
예준의 목소리는 또 아까처럼 올라간다. 세훈은 미동도 없다.
“좋아. 너의 그 건방진 생각, 내가 직접 고쳐 주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금이나마 웃음기가 남아 있던 예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진다. 동시에, 세훈은 예준에게서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다. 썩 이상한 느낌이지만, 이미 겪어 본 적 있는 느낌이다. 세훈은 그 느낌이 어디서 온 건지를 즉시 알아차린다. 클라인을 처음 만났을 때, 바로 그때다! 에너지가 발산되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상한 느낌만큼은 확실히 클라인을 만났을 때의 것과 유사하다.
“내 능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지.”
예준이 말함과 동시에, 그 느낌은 더 강해진다. 예준은 오른손에 주먹을 쥐고, 목에 일부러 더욱 힘을 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다!”
그 말과 동시에, 예준은 옆에 있는 벽을 오른손으로 강하게 내려친다.
쾅!
둔탁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 자리에는 희뿌연 먼지가 피어오른다. 뿌옇게 그곳을 덮은 먼지는 천장으로 올라가 세훈의 시야를 덮어 버릴 정도로 피어오른다. 세훈은 그 먼지가 피어오르는 자리를 유심히 본다. 잠시 후, 먼지가 걷히고, 예준이 내려친 벽이 드러난다.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져 있다. 세훈은 눈을 한 번 비비고 눈을 깜박인 다음 그곳을 다시 본다. 벽에 구멍이 나 있다! 그것도 둥그런 형태로!
세훈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추리를 해 본다. 먼저 이것이 단순한 ‘블러핑’에 불과한 경우... 이건 아닌 것 같다. 뭔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확실히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민하고 있군. 안 그래?”
예준이 비웃는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너는 분명히 이렇게 생각하겠지. 지금 내가 손으로 이 벽을 쳐서 부순 게, 단순히 속임수일 거라고 말이지. 예를 들자면, 일부러 사전에 벽을 약하게 만들어 놓은 다음, 네가 여기에 왔을 때, 딱 적당히 여기를 쳐서 구멍을 내 보인 거라고 말이지. 안 그래?”
“......”
“하지만 말이지!”
예준이 이렇게 말할 때, 예준은 어느새 왼손에 주먹을 쥐고 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예준은 주먹을 쥔 왼손으로 벽을 힘껏 때린다.
쾅!
또 한 번 둔탁한 굉음이 울린다. 그리고 또 먼지가 걷히자, 이번에도, 역시나, 벽에 구멍이 뚫려 있다. 그것도 더 크게!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2 댓글
마드리갈
2020-02-12 21:35:53
사람의 도량은 힘을 가졌을 경우 그 힘을 어떻게 행사하는가로 드러나기 마련이죠.
선배 운운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치안의 사각지대인 폐건물 등으로 혼자 오도록 유인한 뒤에 힘으로 굴복시키겠다는 게 뭐가 그렇게 자랑스러운지, 정말 자랑스럽다면 경찰서 앞마당에서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실소가 안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런 비겁한 술수의 끝이 마냥 좋기만 한다면, 그런 상황이 지속되는 세계는 이미 건전성을 잃었다고 봐야겠죠.
SiteOwner
2020-02-14 20:22:58
폐건물로 혼자 오게 하는 것,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이더라도 결국은 비겁한 술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목적은 고립무원한 상황에서 다수의 힘을 보여서 굴복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위에서 동생이 말한 것처럼 그것이 자랑스럽지 못하니까 결국 공권력이나 자신보다 강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선택지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예준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망각하는 듯합니다.
폐건물에서 그러다가 갑자기 붕괴사고라도 난다면 자신만은 예외적으로 무사할 거라 믿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