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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시 55분. 점심시간이 다 끝나고, 오후 수업이 시작하기 5분 전이다. G반 교실은 평소와 다름없이, 상당수의 책상들이 채워져 있고, 학생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하든지, 아니면 혼자 앉아 책이나 AI폰 같은 것들을 보고 있다. 세훈은 평소보다 좀 빠른 걸음으로 교실로 들어온다. 주리는 세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혀를 차며 말한다.
“에휴... 너, 공원에 다녀온 거 아니었어? 머리는 왜 또 그렇게 헝클어진 거야?”
“하... 말도 마. 또 습격을 받았어.”
“습격이라니? 누가 또?”
“그... 안경 쓴 녀석 있잖아! 중학교 3학년.”
“아... 누군지 알겠다. 그 은신 능력이 있다는 애 말하는 거지?”
“맞아... 이름은 하마나카 마히로였고...”
“뭐 어떻게 한 건데?”
“공원에 분수대하고 음수대 같은 곳으로 이어지는 배수로 안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능력이 있더라. 배수구 같은 곳으로 발만 나오게 해서 공격할 수도 있나 봐. 뭐 어쨌든 결국에는 물을 잔뜩 먹이기는 했는데...”
“물을 잔뜩 먹여? 그 애, 안 죽었어?”
“죽기는. 숨 잘만 쉬더라. 자기가 알아서 일어나서 교실로 돌아갔겠지.”
세훈은 자기 자리에 가서 털썩 앉는다. 주리는 세훈의 자리로 천천히 걸어오며 말한다.
“참, 너는 그 행사 간다는 거 결정했어?”
“동인 행사? 아...”
세훈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주리에게 되묻는다.
“너는 어떻게 결정했는데?”
“말도 마. 나도 교실에 들어가니까, 그 뭐냐, 만화부 애들이 자꾸 와서 사정하기에, 할 수 없이 가겠다고 했어. 그거, 토요일이지, 아마?”
“그래. 거기서 보겠네.”
세훈은 한숨을 푹 하고 내쉬고는, 신세 한탄조로 말한다.
“그건 그렇고... 왜 요즘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많을까. 아까 동인행사 건도 그렇고, 또 그 뭐냐, 클라인 패거리가 나한테 자꾸 시비를 걸어오는 것도 그렇고... 숨 돌리고 쉬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 같아. 아주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하곤 하지. 만약 나한테도 우리 학교 몇몇 애들처럼 초능력이 있으면, 생각만으로도 남을 조종하는 능력이 있어서, 모두를 내 앞에 무릎꿇게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아니면, 내 마음대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모든 게 내 마음먹은 대로 될 텐데.”
“네 마음 다 알아. 아는데...”
주리는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보는 듯한 눈을 하며 세훈에게 말한다.
“네 생각대로만 모든 게 다 된다면, 이 세상은 참 재미없을 거야. 그렇지?”
“하긴 그래.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재미’와는 영 거리가 머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 선배가 왜 나를 굴복시키려고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더 힘들어.”
세훈은 또 한 번, 마치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푹 하고 쉰다. 조금 전의 한숨보다 더 무겁고 깊은 한숨이다.?
“과연 벗어날 수 있기나 한 건지...”
“내가 너의 상황이 아니어서 크게 조언을 해 줄 수는 있을지 잘 모르겠는데...”
주리는 조금 더 말에 무게를 실어 말한다.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말이 있어. 그리고 애초에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이라면 신이 인간에게 주지도 않았겠지. 그걸 명심했으면 해.”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다.”
그렇게 말하고는, 세훈은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본다. 금방 수업시간을 알리는 멜로디가 울린다.
그날 오후 3시. 정규 수업은 다 끝났고, 부 활동 시간. 세훈은 가방을 다 싸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선다. 요즘 들어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평소 걸음걸이가 입학하기 전에 비하면 약 3분의 2 정도로 느려진 것 같다. 발걸음이 느려진 건 클라인을 처음 만나고 나서부터 그런 것이지만, 오늘은 특히 더 그렇다. 형언할 수 없는 무게가 세훈의 두 어깨를 짓누른다. 자꾸 주저앉고만 싶다. *나라는 ‘움직이지 않으면 영원히 지고 만다’고 했지만... 그게 또 며칠이나 지났다고, 세훈은 또다시 절망감에 빠져 주저앉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내지를 못한다.
평소라면 교실에서 5분이면 다다랐을 도서관. 오늘은 걷는 데 10분도 넘게 걸린다. 그렇다고 해서 세훈이 주변 풍경을 감상하거나, 아니면 만나는 친구 또는 선배, 후배와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늦게 갔다거나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세훈은 순전히 냄비처럼 부글부글 끓는 머리를 붙들고, 10kg 모래주머니를 찬 것과도 같은 두 다리를 옮기느라 그렇게 시간이 들었을 뿐이다. 얼굴에는 먹구름이 가득 껴 있고, 입에서는 자꾸만 거친 숨이 나온다.
“어? 조세훈 선배님, 맞죠?”
익숙한 여학생의 목소리가 세훈의 뒤에서 들린다.
“너... 누구였더라?”
세훈은 익숙한 목소리에 반가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계를 풀지 않는다. 반가움과 경계심이 뒤섞인 목소리는 기묘하기까지 하다. 세훈도 말한 순간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정도다.
“저요, 저! 츠츠지모리 사이, 모르겠어요?”
“아... 맞아...”
세훈은 뒤를 돌아본다. 갈색의 긴 생머리, 오른쪽 눈의 안대, 그리고 교복 주머니에 주렁주렁 달린 배지들까지. 사이가 맞음을 확인한 세훈은 경계를 푼다.
“그런데 여기는 웬일이야? 혹시 너도 독서부였나?”
“아... 아니오... 저는... 만화부인데...”
“만화부라... 어울리게 생겼네.”
“네...? 어울린다고요?”
“아... 내가 방금 어울린다고 했나?”
세훈은 자기가 말해 놓고도 어리둥절해한다.
“너는... 정말... 어울린다고 생각해?”
“네... 제게 잘 맞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
“아참, 선배님! 그건 그렇고요.”
사이는 처음 봤을 때, 그 과장된 말투로 말한다.
“혹시 선배님도 ‘코믹 피에스타’ 오시나요?”
“아, 나도 가기로 했어. 뭐, 마지못해서 간다고 한 것이기는 한데... 그거 신청을 받으러... 무려 공주님이 직접 오셨지, 아마?”
“에, 그래요? 공주님이요? 그... ‘로젠가르텐’ 성 쓰는?”
“맞아, 나타샤라고, 나하고 같은 1학년이야. 그건 그렇고, 너는 신청했어?”
“저도 토요일날 가는데요. 당연한걸요!”
“아... 그래? 알았어. 그러면 토요일날 보자.”
세훈은 뭔가에 쫓기듯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 한다.
“어? 선배님. 왜 그렇게 서둘러요?”
“아... 아니야. 아무것도.”
“에이, 뭔가 있는데요. 뭘 그렇게 숨기는 거예요?”
“그건... 천천히 알아도 돼. 나중에 말해 줄게.”
“에이... 선배님이 왜 그러는 건지 안다니까요? 저도 레아한테 대충은 들었다고요.”
“어... 그래? 정말?”
“네...”
사이의 말투는 다시 침착해지고 톤은 낮아진다.
“전에 말했죠? 뭉치면 강하다니까요.”
“아... 그래... 그랬지.”
“너희들...”
세훈과 사이 옆에서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길래...”
세훈은 또, 그 경계와 반가움이 한 데 뒤섞인 긴장 잔뜩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경계하는 눈으로 옆을 돌아본다. 세훈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주리다. 손에는 어디서 난 건지, 아이스크림을 하나 들고 있다.
“하... 난 또 누구라고...”
“왜 요즘 그렇게 긴장하는 거야? 전에도 말했잖아.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지 말라니까?”
“아, 그런 거 아니야. 단지 긴장되니까...”
“그럼 됐고. 그건 그렇고,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이는 다시 그 과장된 높은 톤으로 말한다.
“주리 선배님도 행사 가죠?”
“아... 나도 가지.”
“그러면, 토요일날 봐요.”
“어... 그래. 토요일날 보자.”
세훈은 사이와 헤어지고 나서, 주리와 잠시 어색하게 눈이 마주친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주리도 그런 세훈의 눈빛이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뭔가 도움을 바라는 것 같기는 한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같다. 이 상황에서 뭐라고 해 줘야 하나...?
약 30초 동안의 어색한 시간이 흐른 후, 주리가 입을 연다.
“다시 한번 말할게. 네가 뭘 말할지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지 마. 알겠지?”
“아... 알았어. 고마워.”
세훈은 주리와의 어색한 시선을 겨우 거둔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주리와 헤어지고 나서, 계속 도서관으로 향한다. 그런데... 도서관에 가까워질수록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그 이상한 느낌은 세훈의 온몸을 마치 항상 입는 옷처럼 감싼다. 익숙하고도, 불길한 그런 직감. 뭐지... 이 기분은. 이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야, 아니겠지. 세훈은 이내 고개를 젓는다. 의도적으로, 세훈은 그런 느낌을 받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며 도서관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 느낌, 세훈이 개학 이래로 ‘그들’과 만날 때마다 느끼는 그 이상한 직감은, 지금 역시, 점점 더 강해져 오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마침내 도서관 앞에 다다랐을 때. 그 이상한 느낌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아니 확실히, 세훈의 얼굴을 잡아 쥐고 있다. 잔뜩 긴장이 되니, 잘 열리는 문도 한 번에 열리지 않는다. 두 번의 시도 만에, 문이 열리고, 세훈은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도서관 안은 적막에 둘러싸여 있다. 도서관이라면 으레 조용한 분위기에서 책 넘기는 소리만 들릴 터... 하지만, 지금의 이 조용함은 그런 종류의 조용함이 아니다. 평소에 느끼는 도서관의 조용함이라면 마음을 안정시키고, 자세를 바르게 해 주며, 글과 삽화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긍정적인 의미의 조용함인데, 이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생기가 느껴지지 않고, 온통 메마르고, 모래폭풍을 정면으로 얻어맞는 듯한, 그래서 마치 죽음의 세계에 온 듯한, 그런 조용함이다.
그러고 보니, 평소 독서부 시간이라면 입구에 으레 서 있을 그 선배도 안 보인다. 도서관 내부도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온도가 조금 높은 것 같다. 이 이상한 느낌... 대체... 이건...
세훈의 머리가 무거워진다. 어딘가에 앉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 서가 옆에 의자가 하나 있다. 그 의자에 앉는다. 그런데 세훈의 눈에 들어오는 게 하나 있다. 웬 사람 한 명이 저 멀리 쓰러져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누구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독서부원인 건 확실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대체 이건... 무슨 일이지? 하지만 세훈의 생각이 거기서 더 뻗어 나가려 할 때, ‘어떤 것’이 세훈의 머리를 강하게 짓누른다. 아까 전 세훈이 도서관에 들어가기 전에 느낀 불길한 예감보다 더 강하게 사로잡는 그 이상한 느낌. 그러나 예전에 비숍과 싸웠을 때의 그것과는 또 다르다. 이번의 것은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졸리기만 하다. 몸에 힘이 스르르 다 빠져나간다. 몸이 점점 나른해져 어딘가에 기대고 싶어진다. 세훈의 몸은 자연스럽게 벽에 밀착한다. 뭔가가 이상하다, 눈을 떠야 하는데... 떠야 하는데... 그러나 세훈의 눈꺼풀은 그대로 스르르 내려간다. 저항이고 뭐고 해 볼 틈도 없이, 세훈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고 만다.
얼마 후, 세훈은 눈을 뜬다. 도서관이 아닌 이상한 곳이다.?
“어...? 여긴 어디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한 번 둘러본다.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곳이다. 세훈이 있는 곳은 온통 벽돌로 이루어진 좁은 방. 전등이나 그 외의 기계장치들은 일절 없고, 문과 창문이 하나씩만 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메말라 비틀어진 민둥산뿐.?
“어디야... 여기는?”
세훈은 방 밖으로 나가 본다. 큰 방이 펼쳐져 있다. 그 큰 방에도 전기나 기계 같은 건 일절 없다. 그저 횃불이 방을 밝힐 뿐, 그 외에는 온통 어둑어둑하다. 더더욱 알 수 없다. 여기가 어딘지, 뭐 하는 곳인지.?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2 댓글
SiteOwner
2020-03-02 20:26:59
일전을 벌이고 나서 한시름 돌리고 나니 이번에는 또 낯선 공간으로의 소환...
정말 집요하군요. 대체 목적이 뭔지 모를 정도로,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위치크래프트워크스에서 타카미야 호노카를 노리는 탑의 마녀 5인이 생각납니다. 거기서는 타카미야 호노카의 몸 속에 깃들어있는 에버밀리온을 노린다는 것이 설정되어 있다 보니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 세훈에게는 무엇을 얻어내려고 그러는 건지...그냥 무릎꿇리기만이 목적은 아닐 것 같습니다.
마드리갈
2020-03-03 21:38:47
하마나카 마히로의 능력의 정체는, 물길을 통해 움직이는 거였군요.
그렇다면, 수로가 없는 곳에 위치해 있거나, 설령 있더라도 침수 등의 돌발사태로 자신이 멀쩡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면 무력화된다는 이야기...역시 장점만 있고 단점이 없는 능력은 없는 게 이렇게 증명되었어요.
그나저나, 세훈에 대한 마수는 정말 이상하네요.
왜 그렇게 굴복을 시키려 하며, 온갖 초능력을 동원해서 함정에 빠트리려는 걸까요.
사실 단순히 세훈이 싫거나 걸리적거려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을 지경이라면 방법은 간단해요. 세훈을 죽이는 것이죠. 제3의 인물을 초능력으로 조종하여 세훈에게 흉기를 휘둘러 죽게 만다는 편이 더욱 효과적이고, 용의자 특정이 더욱 힘들죠. 클라인 패거리의 경우는 계속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