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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패러디에 목을 매다보니 '이 요소를 어떻게 부풀릴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원래 빈약한 원본을 보충하기 위해 부족한 정보를 토대로 유추하여 새로운 설정을 덧붙이는 경우가 많았네요. 그러다 보니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저 인물의 이름과 외모, 심하면 이름만 미리 주어져 있느냐의 차이였죠. 그나마 짜투리 설정임에도 데드 라이징 시리즈의 사이코패스나 용과 같이 시리즈의 서브스토리처럼 대략적인 인과관계가 주어져 있으면, 시점을 다르게 하거나 결말을 다르게 하는 식으로 변화를 주면 돼서 편하지만요. (그리고 이걸 내가 독자적으로 만들었는지, 꼭 여기에 기대야 나올 수 있는 스토리인지 하는 고민이 남지만요)


그래서 패러디에 기대서 스토리를 만드는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해 보니, 자잘한 소재 하나하나가 아닌 해당 에피소드의 주역이 되는 인물 위주로 구상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당 인물의 선악론을 떠나서 무언가를 원했기에 그걸 둘러싸고 여러 사람이 뛰어들어서 이야기가 생긴 만큼, 그 '무엇을 원했는지'를 따지면 그에 따라 요소를 걸러낼 수 있다는 거죠. 쉽게 말해 그 주역 인물에게 소재들을 던져줘서 뭐가 좋고 싫은지를 따질 수 있다는 겁니다. 다만 그러려면 주역 인물에게 조건이 붙더군요.


(1) 주역인 만큼 목적이 확실해야 한다. 목적이 확실하지 않으면 에피소드가 좌초한다.

(2) 가능하면 여러 번 등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인물로 새 사건을 구상하는 것보다 기존 인물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게 낫다.

(3) 주역의 호불호가 확실해야 한다. 한계가 확실해야 필요 이상으로 이야기가 커지지 않는다.


뭐 모든 에피소드에 해당되지는 않을 겁니다. 이게 의뢰인이 될 수도 있고, 목표물이 될 수도 있고 그러니까요. 또 여러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흑막인 경우엔 떡밥을 뿌려둬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저는 떡밥을 미리 뿌려둘 줄만 알지 예상치 못했던 것을 떡밥으로 승화시키는 것까진 어려워서 못하겠더라고요. 게다가 말은 이렇게 거창하게 했는데 이대로 어디까지 구상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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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예시를 들기 위해 GTA 시리즈에서 '임무'를 주는 캐릭터들을 분류하면 이렇습니다. 소개글은 공식 사이트의 형식 비슷하게 써봤습니다. 다만 이 게임 특성상 주인공 외의 인물들은 특별히 뒷배경을 설정하는 경우가 드물어 적당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1) 프랭크 텐페니 (GTA: 산 안드레아스)

프랭크 텐페니는 로스 산토스의 길거리 갱단 전담반인 C.R.A.S.H. 소속의 경관입니다. 민중의 몽둥이... 아니 지팡이죠. 농담 아니에요. 시민의 치안을 위해서 갱단에게 무진장 악독하게 대하니까요. 정확히는 '말 안 듣는' 갱단이요. 그럼 말을 잘 들으면 어떠냐고요? 칭찬과 '배려'가 기다릴 것입니다. 이런 걸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라고 하지 않나요?

→ 목적은 갱단들을 자기 발 아래에 두고 이득을 빨아먹는 것. 그러니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애초에 LA 폭동의 주범인 경관들의 패러디거든요.


(2) U. L. 페이퍼 (GTA 4)

리버티 시티의 신문사인 '유나이티드 리버티 페이퍼'의 직원입니다. 일단은요. 이름? 중요합니까? 직함? 중요합니까? 도시에 테러리스트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여러분은 그저 그의 연락처만 받아가서 '테러리스트'를 찾아내 '응징'한 뒤에 전화로 보고하면 됩니다. 참 쉽죠? 애국이라는 거 어렵지 않습니다.

→ 사실 정보기관의 일원이라서 목적은 불확실하지만 소속이 소속이니만큼 국가의 안전을 중시하겠죠. 그래서 역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위의 텐페니보다는 합리적이고 또 인간적인 편입니다.


(3) 카센 켄지 (GTA 3)

리버티 시티 야쿠자의 와카가시라, 번역하자면 부두목입니다. 두목인 카센 아스카의 남동생이기도 하죠. 명예와 의지와 예절을 중요시하는 사람으로써, 그는 여러분에게 철저한 충성과 노력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의 충성은 과연 조직을 위한 것일까요, 그의 누나를 위한 것일까요?

→ GTA 시리즈의 초기작이라서 캐릭터 설정이 불명확한 점을 감안해 마지막에 시스콘 의혹을 담아봤습니다. 그래도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네요. 목적은 불확실하지만.


(4) 일리에나 파우스틴 (GTA 4)

리버티 시티의 러시안 마피아 조직들 중 하나인 파우스틴 브라트바의 두목 미카일 파우스틴의 아내입니다. 조폭의 마누라이니 기세등등하지 않겠냐고요? 아닙니다. 그녀는 그저 젊었던 시절의 친절한 미카일과 꾸밈없는 옛날이 그리울 뿐입니다. 그러니 그녀를 존중한다면 그녀 앞에서 폭력은 보이지 마세요.

→ GTA 4에서 랜덤 인카운터 중 하나에서 등장합니다. 남편 미카일이 폭력과 마약에 취해 난폭해지자 그의 마음을 돌리려 해도 소용이 없어 좌절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 '딸에게 추근대는 남자를 응징해라'라는 부탁을 받을 때 그 남자를 죽일지 두들겨패고 보낼지를 선택할 수 있는데,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지만 해당 캐릭터가 몇 번이고 죽이진 말라고 부탁하는 걸 보면 어느 쪽이 정사인지는 알겠죠?




이런 식으로 주역 인물의 성격과 목표를 구체화시키면 그에 따라 '할 일(=임무 = 에피소드)'이 생겨난다는 걸 알았습니다. 주역 인물을 어디까지나, 얼마나 많이 설정할지는 부차적인 문제이지만 적어도 해결사물인 건 변함이 없으니 이렇게 하는 게 더 쉽더군요. 한바탕 고민을 했으니 이걸로 단 하나라도 확실한 캐릭터를 만들어 봐야겠습니다.

Lester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4 댓글

마드리갈

2020-10-16 23:17:00

역시 무엇을 중심으로 하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지네요.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다면 창작과정에서의 난이도도 낮아지는데다 캐릭터에 따라서 고유한 성격은 물론 관계적 위치도 만들어지고 자연스럽게 할 일도 생성되는. 캐릭터설정이 중요한 이유가 이렇게 드러나네요.


이렇게 잘 배울 수 있었어요.

그리고 고찰과정과 결론을 이렇게 포럼에 올려 주신 점에도 깊이 감사드려요.

Lester

2020-10-17 01:58:04

막상 생각해보면 나무위키에서 소설작법/구체적 요소를 수정하며 추가했던 얘기들인데, 정작 제가 써먹을 생각은 못하고 애먼 곳에서 떠들고 있었네요. 아무튼 인물이 목표를 가지고 행동하면 사건이 저절로 따라온다는 점은 창작이든 현실이든 똑같은 것 같습니다.

SiteOwner

2020-11-18 21:19:42

역시 발상의 전환은 좋은 결과에의 지름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Lester님께서 사고방식을 도출해 내신 것은 창작을 위한 좋은 과정이기도 하며, 또한 이것을 통해서 여러가지를 많이 배우기도 합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지요. 사건은 인격이 없어서 구체화하기 힘들지만 인물에게는 인격이 있어서 구체화하기 쉽다고.

Lester

2021-01-07 05:44:09

사실 사건을 구체화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하루 동안에 벌어진 일을 모두 늘어놓아도 되니까요. 다만 말씀하신 대로 인격, 풀어서 말하자면 '어느 부분을 중시하는지'가 없으면 어려워지긴 합니다. 가령 누군가가 넘어졌다고 했을 때 실수에 집중하면 웃음을 유발할 수 있겠지만 부상에 집중하면 심각한 이야기가 되겠죠. 특히 요즘 같은 겨울에는 더더욱이요.


원론 자체를 정리하는 것은 쉽지만, 이것을 실제로 응용하기는 너무나 힘이 드네요. 만든 사건이 재미있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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