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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린고등학교 근처 주택가.
“네 녀석의 소위 ‘시간의 덫’에서 빠져나오는 법은 간단하지. 때려눕히면 간단하니까.”
세훈이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를 노려보며 말한다.
“바로 이렇게!”
세훈의 주먹이, 빠르게 남자를 향한다! 하지만 남자는 그저 물끄러미 세훈의 주먹을 바라만 볼 뿐이다. 여유롭게 팔짱까지 끼고.
“훗, 해 볼 테면 해 보라고.”
“무슨 근거로 그런 자신감을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오해라!”
세훈의 주먹이 막 남자에게 닿으려는데...
그 다음 순간.
“어? 뭐야?”
되돌아와 있다!
세훈의 남자를 향했던 주먹도, 몇 보 앞이나 갔던 세훈의 발걸음도!
전부 몇 초 전으로 돌아와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뭐냐고? 이게 바로 시간의 덫이라니까? 너희들은 완전히 갇혀 버린 거고.”
“그렇게 둘까 보냐아아앗!”
세훈은 이번에는 남자에게 발길질을 해 보려 하지만...
또다!
또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있다. 마치 거짓말처럼,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분명히 주먹을 내지르고, 발차기를 한 건 생생히 남아 있는데...
“역시 내 말을 들어먹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니까, 자꾸만 무의미한 시도를 하는 것 아닌가? 안 그런가?”
“무의미한 시도라고 했냐, 방금?”
“그래.”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땅바닥에서 뭔가를 줍는다.
그건...
“이 녀석, 어떻게...”
조제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남자가 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바닥에 있는 조제의 오른손.
“이것들 멍청하기는.”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또다시 몇 초 전으로 돌아간다. 분명, 세훈과 조제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은 그대로인데!
“도대체가 뭐가 맞는 게 하나도 없단 말이야, 너희 녀석들은!”
남자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듯,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다.
“아, 하나는 제대로 짚었지! 나를 때려눕히면 된다는 거! 하지만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내가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너희들을 노려보고 있는데?”
그 시간, 수영의 집.
“휴... 그 녀석 오늘은 꼭 잡고 말 거예요.”
“이 동네에 오래 전부터 도깨비불이 나왔나 보죠?”
“아니요. 딱 어제부터였어요. 어떤 녀석이 초능력으로 장난을 치고 있는 거죠.”
♩♪♬
또다시 울리는 수영의 집의 벨소리. 모니터로 밖을 내다보니...
“어? 누구지, 이 여자는?”
“드릴맨 작가님 맞으시죠?”
파라의 얼굴이 보인다. 수영은 일부러 웃음기를 싹 빼고서 말한다.
“그쪽은 혹시 누구십니까.”
“저는 무로제약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파라 사라고사라고 합니다.”
“제약사에서 저희 집에 올 일은 없을 텐데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저는 무룽메이링 변호사님이 보내서 왔어요!”
“음? 메이링 씨요?”
수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속으로는 메이링을 원망한다. 내가 작가지, 무슨 해결사나 흥신소 사장인가... 그래도 면식이 있는 사람 부탁이니, 일단은 들여보내 주기로 한다.
“알겠습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파라가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하하하, 저야말로.”
수영은 가식적으로 웃다가, 파라의 걸음을 주목한다. 약간 기계적인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음? 실례된 말씀인데, 다리가 아주 살짝 묵직해 보이는 것 같은데...”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의족이에요, 둘 다.”
파라는 의외의 질문에도 태연히 웃으며 말한다.
“그러고 보니까 <최강 냉동인간>에도 사이보그 캐릭터가 있었죠, 아마?”
“어, 잘 아시네요! 혹시 제 소설을 많이 읽어 보신 건가요?”
“아니오, 그냥 ‘스텔라위키’ 같은 데 찾아보니까 나오던데...”
“아...”
수영과 파라는 어색하게 웃는다. 그리고 잠시 후.
“도깨비불 때문에 오신 거죠?”
“아... 사실은 그렇죠.”
파라가 방 안을 보니, 한쪽 소파에 파비안이 앉아 있는 게 보인다.
“그럼 혹시, 이 분도?”
“맞아요. 똑같이 도깨비불 때문에요.”
파라는 잠시 심각한 얼굴로 먼 데를 보다가, 다시 수영을 본다.
“그러면 그 녀석은 언제쯤 잡게요?”
“아마, 오늘 해가 지고 나면 잠복했다가 잡으러 가지 않을까 하네요.”
“오늘 저녁이라고요? 그러면 늦잖아요!”
“아니, 파라 씨, 녀석은 저녁에 나타나서 도깨비불을 사용하는데, 저녁에 안 잡으면 언제 잡자고요?”
“녀석은 빨리 잡을수록 좋지 않아요? 이럴 때면 방심할 텐데?”
“도깨비불이 안 보이는데 무슨 수로 잡아요?”
“제게 좋은 방법이 있어요.”
“아, 알겠어요. 오늘 일을 위해서 아침에 글을 좀 써야 하니까, 쓰면서 들어 볼게요.”
수영은 컴퓨터 앞에 앉는다.
미린고등학교 근처 주택가.
“우리가 그딴 협박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니, 진짜라니까?”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한다.
“내 시선이 이렇게 너희들을 향하고 있는 이상, 너희들이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그만두고 나한테 무릎을 꿇고 내 처분을 기다리는 편이 너희들에게 있어서 최선일 텐데?”
남자의 말대로다. ‘시간의 덫’에 갇힌 때부터 지금까지, 남자의 시선은 세훈과 조제 두 사람에게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였다. 세훈과 조제의 시도가 모조리 실패로 돌아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세훈과 조제는 주먹을 꽉 쥐고, 남자에게 달려들려고 한다.
“소용없다니까? 오히려 그렇게 하면 나한테 확 띌 거 아니야! 자포자기한 건가?”
남자의 말에도 세훈과 조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돌격 앞으로’ 할 것만 같다.
“멍청하기는! 이제 다시 1분 전으로 되돌려 주겠다!”
검은 셔츠의 남자가 다시 능력을 발동하려는데...
퍽-
“크...윽...”
남자의 뒤통수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진다. 눈앞이 핑핑 돌고,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다.
“뭐냐... 도대체... 어떤 놈이... 어떤... 녀석이...”
겨우겨우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확인한다.
뒤에서 일격을 날린 사람은 외제니다!
하지만 그가 능력을 쓸 새도 없이...
움직일 수가 없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 보려고 했지만, 입도 움직이기가 힘들다...
완전히 그대로...
“으윽... 다시 얼어버릴 것 같다...”
남자가 처절하게 겨우 내뱉는 말도 잠시, 남자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동상처럼 되어 굳어 버린다.
“하, 된 건가.”
남자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자, 세훈은 시계를 본다.
8시 21분.
풀렸다. 검은 셔츠의 남자의 ‘시간의 덫’이.
“다행이야. 시선 밖에서 일어난 일은 대처를 못 하나 봐.”
쓰러진 남자를 보고 외제니가 무덤덤하게 말한다.
“그나저나 너무 간단하게 끝났는걸.”
“하, 그런가? 나는 한 사흘 정도는 못 빠져나올 줄 알았는데.”
“하하하, 사흘 정도는.”
외제니의 얼굴은 웃고는 있지만 전혀 유쾌한 웃음은 아니다.
“한 달은 지난 것 같았어, 그 끔찍했던 시간에는.”
그때다. 세훈의 눈에 두 사람이 이리로 달려오고 있는 게 보인다.
“현애하고... 주리잖아.”
세훈은 현애와 주리를 향해 손을 흔든다.
“뭐야, 너희들도 누구한테 습격받은 거야?”
“아, 괜찮아. 상황은 이미 다 끝났거든.”
“어... 그래?”
현애가 보니, 한쪽에 동상처럼 굳어져서 쓰러진 남자가 한 명 보인다.
“아까 그 VP재단 요원들 다시 불러야 하나?”
“뭐야, 너희도 공격당했어?”
“어. 나는 말고 현애만.”
“그래, 고생이 많네.”
“이제는 그러려니 하지.”
현애는 실실 웃는다. 마치 10년 정도는 전쟁터에서 싸우고 온 것 같은 사람의 웃음이다.
“근처에 발레리오 씨 있으니까 직접 오라고 해도 되려나?”
“바쁘신 분인데 직접 올까.”
“일단은 연락해 봐야지.”
현애가 메시지를 보낼 동안, 주리가 세훈을 툭툭 친다.
“어? 왜?”
“메이링 씨하고는 언제 만나기로 했어?”
“이따가 점심시간에 발레리오 씨네 집에서 보기로 했어. 점심시간 한 시간 정도면 끝날 수 있을 것 같아.”
8시 40분, 도라고등학교.
교문을 들어가려던 시저의 눈에 누군가 보인다.
키는 작지만 그래서 돋보이는 남학생.
“어? 마르코잖아!”
시저는 곧바로 마르코에게 달려간다.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
마르코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다. 활기에 넘쳤던 전과는 확 달라진 분위기. 그걸 보는 시저의 마음도 무너져 버릴 것만 같다. 그래도 반가움이 앞선다. 소식조차 알 수 없었던 친구를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무서웠지... 그 녀석들, 너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
여전히 마르코는 말이 없다. 아니,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충격을 많이 받았겠어. 하지만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돼.”
“,,,,,,”
여전히 마르코는 말이 없다. 하지만 얼굴은 조금 펴진 듯하다. 이내, 마르코는 시저의 뒤를 따라 교문을 지난다.
오전 10시, 수영의 집.
“저, 그래서 드릴맨 씨.”
“왜 그러죠, 파라 씨?”
“혹시 다 쓰신 건가요?”
파라가 말하자마자 수영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네, 다 썼죠. 파라 씨에서 따온 단역도 하나 넣었고요.”
“작업 시작한 지 1시간도 안 됐는데요?”
“1시간‘이나’ 됐죠. 보통 1회차 쓰려면 30분 정도 걸리거든요.”
“그럼 저하고 지금 잡담도 하고 하면서 그걸 다 쓴 건가요?”
“하하하, 그렇죠.”
“그건 그렇고, 이제 나와 봐요. 제가 그 동안 설명한 작전을 실행할 단계예요.”
수영이 나오자, 파라는 수영, 파비안과 마주 앉고 주변 지역의 홀로그램 지도를 띄운다.
“자, 우선은 제가 구인광고를 하나 올려 보죠. 그러면...”
30분 후, 미린 시사이드센터 앞 삼거리. 오전 시간이라 평소보다는 많이 한산한 편이지만, 그래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몇몇 보인다.
미린 라이트레일의 역 출구 앞에 파라가 서서 피켓을 하나 들고 있다.
[특수효과 담당자 급구]
[월 300만 리라 보장, 조건은 추후 협의]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무시하고 지나가는 사람, 흘긋흘긋 보고 지나가는 사람, 헛웃음을 짓는 사람 등. 그 누구도 피켓을 유심히 보는 사람은 없다.
그러던 중...
“어, 안녕하세요!”
개성 넘쳐 보이는 점퍼와 청바지를 입은 남자 한 명이 파라를 보고 인사를 건넨다.
‘이때다.’
파라는 직감한다. 이 사람이다! 하지만 섣불리 나서면 안된다...
“아, 안녕하세요. 구인광고 보고 오셨죠?”
“네. 특수효과 담당자 모집한다는 광고 게재하신 분이죠?”
“맞아요. 조명담당자 있죠.”
“이쪽으로 오세요.”
파라는 남자를 근처의 베이호텔 1층에 있는 카페로 안내한다.
얼마 후, 베이호텔 카페.
“자,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그네이셔스 로욜라 곤트라고 합니다. 보통 ‘이기 곤트’리고 하죠.”
“아, 좋아요, 이기 곤트 씨. 그럼 혹시 주특기라고 할까... 잘 하시는 특수효과가 있을까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이기는 의기양양하게 말하더니, 천장에 뭔가를 띄워 준다.
연푸른색의 불타오르는 구체 하나.
파라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도깨비불! 저건 확실히 도깨비불이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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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1-01-12 19:18:28
참 여러모로 인연이라는 게 기이해요.
4, 5명 정도를 거치면 세계의 사람들이 이어진다는 말은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는데, 살면서 점점 그 말이 맞다는 게 느껴지고 있어요. 게다가 동시대적으로도 그런데 동면인의 존재가 있는 이 세계에서는 그 연결고리가 수평적으로뿐만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이어지고 있는 게 실감나고 있어요.
전작 밀수업자에서도 등장했던 파라 사라고사가 이렇게 메이링의 요청으로 수영을 찾아가게 되고, 결국 이렇게 수영은 여러 인물들을 잇는 포털사이트같게 되네요. 이런 유대가 앞으로의 사건전개를 어떻게 바꿀지도 주목되어요.
시어하트어택
2021-01-18 23:19:00
수직적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라... 아직은 환상 속에서의 이야기겠지만 기술이 발전하면 현실에 실현되겠지요. 아직 저로서도 실감은 그렇게 많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SiteOwner
2021-02-22 18:58:30
미국 건국초기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의 발언 하나가 생각납니다. 세상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2가지 중 하나는 죽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금이라고. 이 말은 시간과 금전이야말로 더없이 중요한 요소인데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또 다른 각도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시간조작능력이 최강의 능력으로 묘사되는 게 많을 듯합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3부의 디오의 스탠드 더 월드가 그렇게 무서운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의 역전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정말 무서울 것 같습니다. 시간의 불가역성이라는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전제가 깨지면서 상황의 이상함을 "내 감각이 잘못되었나?" 라고 상황변화를 그렇게 해석할 것이 분명할테니까요.
역시 사슴을 쫓는 자는 숲을 못 봐서 쫓다 보니 깊고 어두운 숲 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아주 늦게서야 깨닫기 마련입니다.시어하트어택
2021-02-27 12:17:40
사실 저렇게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야지 만약에 자기 인지 밖에서 일어나는 것도 감지가 가능하다면 정말 신의 능력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