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떠나실 생각입니까?”
바람과 함께 귓가를 간지럽히는 걱정 어린 목소리에 에스텔은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익숙한 여인의 얼굴.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로즈마리, 에스텔의 유모이자 검술 스승, 그리고 친우의 얼굴에는 에스텔의 결심을 막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런 친우의 걱정을 덜기 위함이었을까?
“짐을 챙긴 수고를 생각하면 잠깐이라도 떠나야지.”
평소와는 달리 어울리지도 않는 시답잖은 농담을 하는 에스텔. 본인이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어색하게 웃는 그녀의 손가락은 자신이 메고 있는 거대한 배낭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레고르와 보어헤스 백작의 결투 이후로 벌써 사흘이 지났다.
결투에서 이기기 위해 그레고르가 절치부심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끝난 이후에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바로 소여 백작.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가?
결투 당일 쿠엔틴 회장에게 큰 창피를 당한 이후에도 그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가 꺼내든 카드는 에스텔과 다른 사도와의 정략결혼.
파혼하자마자 혼담을 꺼내 드는 비상식적인 작태에 보어헤스 백작가에서 분노한 것은 당연지사.
다른 가문들 역시 눈살을 찌푸린 채 소여 백작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그들보다도 가장 진노한 이는 따로 있었으니.
그레고르는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소여 백작의 집무실로 쳐들어갔다.
그런 그레고르가 마주한 것은 소여 백작의 한 마디.
“이번 혼담을 무효로 돌렸을 뿐, 그 이후 정략결혼을 시도하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네만?”
놀라울 정도로 허술한 억지에 그레고르는 할 말을 잃었다.
아마 본래의 소여 백작이라면 절대로 이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판에서 오래 활동한 대귀족인 만큼 화는 나지만 반박할 방도가 없는 논리를 내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그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사도야행은 한 세대에 한 번 이상 개최되지 않는다.
이는 바꿔 말하자면, 소여 백작에게 기회는 한 번뿐이라는 이야기.
사도야행에 우승하기 위한 그의 계획은 이미 붕괴 직전이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폭주하는 미친 소 그 자체.
하지만 그 미친 소를 막은 건 그가 예상하지 못한 존재였다.
[경청하라, 소여의 아이들아.]
백작이 가문 중역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진행하는 중, 가문의 모든 이의 머릿속에서 여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드라, 꿈의 마녀. 그리고 소여 가문을 지금의 대귀족으로 만들어 준 옛 군주.
[그대들의 주인이자 신으로서 명하노라. 소여 백작, 저 아둔한 배교자에게 심판을 내리거라.]
본래라면 그녀의 직접적인 개입은 불가능할 터. 하지만 두 가지 사건을 통해 그녀는 인세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인과율을 얻었다.
첫째로 소여 백작은 그레고르가 방문한 날 이드라를 직접적으로 모욕했다.
신성모독은 어떤 신이든 넘기지 않는 대죄. 이는 이드라는 복수라는 명분을 얻었다.
그리고 둘째, 그는 이드라의 사도인 그레고르를 억지를 통해 기만하고자 하였다.
만약에 그가 결투의 결과를 받아들였다면 이드라가 직접 나서지는 못했을 터. 하지만 그가 결투의 결과를 뒤엎으려고 하면서 ‘사도의 개입’으로는 안된다는 사실을 세상에 각인시켜 버렸다.
그야말로 자신이 만든 덫에 스스로 들어간 꼴.
그렇게 소여 백작은 자신의 노예라 여겼던 이들의 손에 구금되었다.
‘참 얄궂군.’
끌려가며 악을 써대던 소여 백작의 모습을 떠올리며, 에스텔은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소여 백작이 한 명이라도 ‘진짜 충성’을 얻어낸 이가 있었다면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테지. 어쩌면 끌려가는 그를 돕겠다고 뛰어드는 자 역시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걸어둔 ‘상위 권력자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저주’는 이번에는 그의 목을 조여왔다.
이드라는 가문의 신.
자신이 가문 내 최고 권력자라고 생각했던 소여 백작은 더 높은 권력의 손에 몰락했다.
아무래도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는 처지가 되겠지.
그것이 고작 어제 일어난 일.
그리고 오늘.
몰락한 소여 백작의 딸은, 가문을 떠난다.
“내가 남아 있어 봐야 가문에게는 폐만 되겠지.”
현재 소여 가에서 그녀는 실로 미묘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가문의 신과 그 사도의 총애를 받는 최고 요인.
유폐된 죽은 권력의 딸이자, 가문 쇄신의 걸림돌.
소여 백작 몰락 사건의 원인.
호감, 증오, 공포.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실로 복잡한 존재.
그런 이가 지금 가문에 남아 있어봤자 좋을 것 하나 없을 터.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떠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의 이야기일 뿐.
감성으로서는 도저히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로즈마리의 표정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실 예정입니까?”
결국 잡을 명분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로즈마리는 찌푸린 얼굴로 에스텔의 거취를 물었다.
“일단 그레고르와 함께 할 예정이다.”
“그 고유 권능 때문이로군요.”
고유 권능 융합 변이.
그레고르의 설명에 따르면, 그와 친밀한 이와 합체해 그 능력을 재현하는 권능.
저번 결투에서 에스텔과 합체한 그가 휘두르던 힘을 생각하면 그에게 있어 에스텔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일 터.
“그것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로즈마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에스텔은 다른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사도의 모습이 아닌, 평소의 모습으로 웃고 있는 그레고르의 얼굴.
“그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무엇을 말입니까?”
“자신은 혼자 싸울 수 없다더군. 함께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
“그런 말을 들었으니 같이 있어 줘야 하지 않겠나? 몇 번이나 나를 구해준 은인이고, 동시에 내…… 친구니까 말이다.”
무언가 어색한 것일까? 마지막 한 마디를 꺼내는 에스텔의 얼굴은 묘하게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걸 보고 로즈마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무언가 알아챘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그렇군요.”
마치 다 자란 자식의 모습을 보는 어미의 것처럼 기쁨에 찬 로즈마리의 미소.
“돌아오실 때는 셋이서 오시길.”
갑작스러운 한 마디를 남기고 로즈마리는 에스텔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응?”
그 마지막 한 마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에스텔.
하지만 머지않아 그 의미를 깨달았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누가 본다면 달궈진 쇠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새빨간 색.
이를 식히기 위함인지 에스텔은 서둘러 정원을 가로질러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자신의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감정을 아직 깨닫지 못한 채.
?
*** ***
?
“안녕하……괜찮아요?”
소여 가의 저택 정문에서 기다리길 한참.
무언가 어색한 태도로 걸어 나오는 에스텔을 보며 나는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다.”
마치 망가진 자동인형처럼 기묘한 어조로 대답하는 그녀.
‘역시 충격이 큰 걸까?’
아무리 안 좋은 일만 있었다고는 해도 자신의 가문이다. 그런 곳에서 반쯤은 쫓겨나듯이 밖으로 나오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마음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으리라.
‘위로라도 해야겠지?’
이럴 때는 상대가 좋아하는 걸 사주는 것이 제일이다.
“저기 에스텔. 새로 찾은 식당이…….”
“아니, 아니 괜찮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아니니까.”
진짜 상심이 심한가 보네.
그 에스텔이 먹을 것을 마다하다니.
이전까지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다른 방법은 없나?
나름대로 고민해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잠시 후.
에스텔의 입에서 스치듯 나온 말에 나는 사고의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아무렇지도 않게 툭 뱉어낸 한 마디건만,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다
내가 혼자 산 지도 대충 10여 년.
익숙해지긴 했지만, 자취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은 집.
그동안 에스텔은 나랑 같은 방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신기를 받아 갈 생각밖에 없었고, 이후로는 블레어 때문에 바빴기에 숙소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그녀가 가문으로부터 독립한 이상, 집은 따로 구해야만 할 터.
‘거기에 식비랑 생활비 같은 건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까지야 소여 가의 재력을 동원해 물 쓰듯이 돈을 써왔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다.
만약 똑같은 기세로 돈을 쓴다면?
‘하루도 안 돼서 파산이지.’
역시 대책이 필요하다.
‘일단은 직업부터 구해야 하나?’
그런 내 고민을 읽은 것일까?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그새 마음을 추스른 것일까?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에스텔은 평소와 같은 씩씩한 태도로 내게 말을 건넸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정 안되면 그대가 책임지면 되는 일 아닌가?”
“네?”
갑자기 이게 뭔 소리래?
“그대 때문에 가문에서 이렇게 나와야만 했는데 책임져주지 않을 텐가?”
“그건…….”
“거기에 나와 그대는 이미 몸을 하나로 겹친 사이가 아니던가?”
“네?”
설마 이거 융합 변이에 대해 말하는 건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는 옳은 말이지만,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니 그게 무슨?!”
“설마 그렇게까지 해놓고 책임지지 않겠다는 건 아니겠지?”
묘하게 지나가던 행인들의 시선이 날카롭다.
아마도 나를 귀족 아가씨 인생을 망친 놈팡이로 여기는 것이겠지.
‘나이=애인 없던 기간’이었던 나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었지만, 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농담이다.”
내 억울한 표정이 재미있었던 걸까?
싱글거리며 웃던 에스텔은 말 한마디로 갑자기 상황을 정리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하는 방향은 분명 내 숙소가 있는 곳.
[호오, 저 아이도 제법 변했구나.]
“그러게요.”
나는 이드라 님의 말씀에 동의를 표하고는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직장이나 숙소를 잡는 정도는 내가 도와줘야겠지.’
정 안되면 마스터에게 사정사정하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에 비하면 사소한 고민을 하면서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건 그렇고 에스텔의 귓가가 좀 붉어진 것 같은데…… 괜찮은 건가?
?
*** ***
?
카다스 빈민가 구석의 어둠 속에서 ‘그림자’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그의 시야에 비치는 풍경은 빈민가의 한 구역을 점거한 거지들.
“오늘은 일진이 좋은데?”
그들은 길을 잃고 이곳에 온 고아 소녀 한 명을 둘러싸고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왜 이러세요?”
좋지 않은 영양 상태 때문일까?
얼굴만 보면 10대 초반 정도로 보이지만, 마르고 키가 작아 7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였다.
정상적인 남성들이라면 이런 아이를 ‘여자’로 생각하지는 않을 터.
하지만 사지 멀쩡한 ‘여자’를 보기 힘든 이곳의 거지들에게는 나이 같은 건 소소한 일에 불과했다.
질릴 때까지 가지고 놀고, 죽으면 요리해 먹는다.
이것이 지옥도나 다름없는 카다스 빈민가의 일상.
‘그림자’는 그 광경을 그저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은 그의 소관이 아니었다.
정의감 따위는 이미 수백 년 전에 버렸다.
분노는 더 거대한 상대를 향해서만 아껴두어야만 한다.
음심? 이미 인간의 육체를 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 상황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건 지금 이 상황이 아니라, ‘이후에 벌어지는 일’이니까.
철퍽-!
“뭐야?!”
자신들의 뒷머리에서 느껴진 차가운 충격에 거지들은 고개를 돌렸다.
“이게 뭐야?”
아프지는 않지만 축축한 감촉. 손을 뻗어 보니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눈?”
겨울철 하늘에서 내리는 새하얀 결정.
눈에 묻은 새하얀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넌 또 뭐야?”
거지들과 소녀 사이에는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 있는 건 갑옷을 입은 괴인이었다.
보통 갑옷을 입었다면 기사라고 느낄 터. 하지만 거지들은 절대로 상대를 기사라고 여기지 않았다.
하긴 그럴 수밖에.
지금 눈앞에 있는 이가 입은 갑옷은 좋게 말하면 ‘날렵’했고 나쁘게 말하면 ‘빈약’했다.
저런 갑주로는 자신들이 든 몽둥이도 막지 못할 터.
‘왔군.’
하지만 그림자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저 괴인, 빈민가의 사도야말로 그가 기다리던 존재였으니까.
“뭐야 넌?”
거지들은 자신들을 방해한 이에게 분노를 퍼부었다.
당장이라도 공격을 할 것처럼 험악한 기세. 하나 사도는 이들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어린아이뿐.
“괜찮니?”
공포에 떠는 아이를 향해 그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눈을 감으렴.”
어찌 들으면 여성 같고, 달리 들으면 변성기 전의 소년 같은 목소리.
“이 자식이!”
그 목소리 덕에 자신감을 얻은 거지 중 하나가 매를 휘두른 순간.
“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으악!”
그리고 그 즉시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지들은 없어진 자신들의 동료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이거?”
차라리 죽었다면 이해하리라. 마법사 중에서도 그럴 수 있는 이들은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건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섰다.
수천 걸음 밖.
그곳에 있는 건물 3층에 동료가 산 채로 매달려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순간 이동이라고 착각했겠지.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잖아?”
그들은 갑옷 괴인을 분명 계속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한 괴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이건 개……!”
지나친 공포로 생존 본능이 마비된 것일까?
욕설을 퍼부으며 거지 한 명이 움직이는 순간, 다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의 모습이 나타난 곳은 근처에 있는 다른 건물의 외벽.
“으아아아!”
마지막 남은 거지가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지 오래.
결국, 그들 모두 건물 외벽에 산 채로 매달렸다.
범인은 물론, 이름난 마법사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괴현상.
[훌륭하군.]
하지만 그림자는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은 보지 못했겠지만, 그에게는 보였다. 저 사도가 악인들을 건물 외벽에 매달아 놓는 과정이…….
[실로 훌륭해.]
새롭게 생긴 말을 바라보며 그림자는 웃었다.
[이제 다음 무대를 준비할 시간이로군.]
저 정도라면 약간의 양념만으로도 충분한 시련이 될 터.
예상보다 빠르게 자란 ‘예측 외’의 존재를 시험하기 위해 그림자는 다시 움직였다.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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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갈
2021-01-21 15:21:32
사도야행의 기회 자체가 아주 드문 것이라서 사실상 유일한 기회를, 소여 백작이 스스로 걷어차버렸네요. 이드라는 완벽히 명분을 얻었고, 그리고 소여 백작은 자신의 룰에 따라 그렇게 몰락해 버린 것이네요. 이렇게 역설적인 상황은 누구도 절대 탓할 수도 없겠죠. 이미 때는 늦었고...
이제 그레고르와 에스텔에 남은 현실의 생활 문제를 읽고 있다 보니 분명 심각하게 머리를 싸쥐고 고민해야 할 상황인데, 에스텔의 기묘한 화법에 갑자기 실소가 나오네요. 솔직히 당황했어요. "거기에 나와 그대는 이미 몸을 하나로 겹친 사이가 아니던가?" 라든지, "설마 그렇게까지 해놓고 책임지지 않겠다는 건 아니겠지?" 라는 말은 사정을 모르는 제3자가 들으면 분명 오해할 거예요. 게다가 여자인 에스텔이 남자인 그레고르에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제가 에스텔이라면 절대 저런 표현을 쓰지 못했을 듯...
카디스의 빈민가의 상태, 끔찍하군요.
그리고 그곳에 나타난 "그림자" 가 벌인 일은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이것 또한...
Papillon
2021-01-22 00:50:35
사필귀정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자승자박이라고 할까요? 한 번 뿐인 사도야행에서 우승하기 위해 쌓아왔던 악덕으로 인해 소여 백작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업보가 돌아온 것이니 후회해봤자 늦은 것이죠.
에스텔의 발언 수위가 올라간 원인은 융합 변이의 부작용 아닌 부작용입니다. 구체적인 부작용(?)에 대한 설명은 다음 화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카디스의 빈민가는 끔찍한 상태죠. 빈민가의 사도는 일단 그곳을 돌아다니는 인물인데, 악인은 아닙니다. 사도의 정체는 다음 장에 밝혀질 예정입니다.
SiteOwner
2021-02-25 18:18:24
세상 일에는 법으로 금지되거나 하지는 않지만 공연히 내세울만한 것은 못되는 행위가 있습니다. 즉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문제없는 일과 위법의 테두리에 확실히 속하는 것들의 사이에 위치한 것들이 그러합니다. 예전에 썼던 글인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에서 비판한 것도, 위법이 없다는 정치인들의 발언이 온세상에 떠들어댈만큼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것입니다. 소여 백작의 태도 또한 그렇게 보입니다. 그냥 혼담이 깨진 게 아니라 그렇게 공개적으로 상황이 엎어진 것을...
안되겠군요. 타인의 경험 등으로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으로 배워야 합니다. 소여 백작은 스스로 만든 원칙에 따라 자승자박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깨달을 가능성은 요원합니다.
당장 현실의 문제에 접하게 되면 정말 답이 없기 마련입니다.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살아온 에스텔의 앞날은 이전의 상식으로는 헤쳐나갈 수 없는데...
그런데 에스텔이 구사한 묘한 화법이 심각해야 할 상황을 상당히 재미있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나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나 암병동같은 소설의 상황보다는 훨씬 좋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사람이 산채로 건물벽에 매달리는 상황은 확실히 기괴하고 무섭습니다. 실제로 그런 광경을 보면 미쳐 버려도 이상하지 않겠지요. 그것까지는 아니지만, 유년기에 살던 동네에서 이웃집 부모가 자녀에게 벌을 준다고 한겨울에 발가벗겨서 그 몸에다 물까지 뿌려서 내쫓았던 상황이 다시금 생각나서 몸서리쳐지기까지 합니다.Papillon
2021-02-26 03:43:26
소여 백작은 자승자박의 대표적인 예시지요. 나름대로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라는 생각에 한 일이긴 한데, 그 때문에 결국 자기 목을 조여오게 되었으니까요.
사람이 산 채로 매달리는 상황은 확실히 기괴하죠. 그게 대체 언제 어떻게 매달아 놓은 건지 알 수 없다면 더욱더 그렇고요. 다만, 카다스 빈민가의 상황이 워낙 개판인지라 저 정도는 자비롭게 보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