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보육원이라더니 꽤 괜찮은 여자들이 있잖아?”
?
흙먼지 부는 날의 유리창처럼 탁했던 제스의 눈동자에서 기이한 불꽃이 피어났다.
그 작은 불씨의 이름은 음심(淫心).
그는 밀랍처럼 끈적한 눈빛으로 두 여성-근처에 있는 쭉정이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을 훑어보았다.
극도로 분노한 듯 행동하던 것과는 달리 기실 제스는 괴물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다. 이번에 그가 괴물 때문에 입은 피해는 아무래도 좋은 것. 그런 것에 열정을 투자하기에는 그가 살아온 날이 너무나 거칠었다.
물론 적은 피해는 아니다.
조직의 간부는 무사했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말단 조직원은 팔다리가 완전히 망가져 병신이 되었다.
조직의 본부 역시 무너졌다. 이름 없던 범죄 조직의 말단으로 시작한 그가 처음으로 접수했던 건물. 그 상징성 때문에 허름한데도 불구하고 본부로 삼았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 그곳은 폭삭 무너져 건물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다른 조직원들은 길길이 날뛰었지. 하지만 제스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다시 충원하면 그만인데.’
?
사람이야 빈민가에 넘쳐나고, 건물 역시 마찬가지. 마음에 드는 건물은 빼앗으면 되고, 괜찮은 녀석은 수하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 정도 피해쯤은 하루만 지나도 충분히 복구할 수 있다,
하지만 피해가 치명적이든 말든, 그는 보복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빈민가의 왕이다. 그리고 왕인 이상, 하찮은 놈들은 자신에게 거슬러서는 안 된다.
그것이 그가 세운 철칙. 그런데 이번에 그 괴물은 그 선을 넘어버렸다.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
그를 빈민가의 왕으로 만들어준 직감이 그렇게 속삭였다.
왕이 상처를 입은 순간, 절대성은 깨진다. 상처에서 흐른 피를 먹기 위해 들개들이 몰려들 테고, 언젠가 왕의 자리를 탐할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
철저한 응징.
원인이 된 이를 짓밟아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애꿎은 말단 녀석을 고문했고, 그놈이 횡설수설 내뱉은 말에 따라 보육원에 왔다. 그 괴물 놈과 이곳이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원장을 죽이고 아이들은 죄다 팔아버리면 최소한의 면이 서리라.
그 과정에 싸움 따위는 있을 수 없겠지. 실로 지루하기 그지없는 일일 터다. 그렇기에 제스는 열정 없는 눈으로 하루를 보낼 생각을 했었다.
헌데, 예상외의 ‘수익’이 지금 그의 눈에 들어왔다.
?
‘마음에 드는군.’
?
입맛이라도 다시듯, 혀로 입술을 핥은 그는 음탕한 기색이 가득한 눈으로 두 여인의 몸을 훑어보았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아직 어려 보이는 계집이었다. 키도 작고 빈약하고 마른 몸. 단련하긴 했지만, 안는 즐거움이 있으리라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반반한 얼굴과 이국적인 갈색 피부. 하룻밤 가지고 놀고 부하들에게 노예로 넘기기에는 조금 아까운 계집이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
‘최고로군.’
?
작은 불씨였던 눈동자 속 음심이 거센 지옥 불이 되어 타올랐다.
최고의 여자였다.
반반한 얼굴은 보기만 해도 즐거웠고, 풍만하면서도 탄력적인 몸매는 안는 즐거움이 있을 것 같았다. 머리카락은 흑단처럼 검어 왕의 상징으로 두면 좋으리라.
그야말로 하반신을 뜨겁게 하기에 최고의 여인.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에 드는 건…….
?
‘마법사로군.’
?
그의 시야가 여인의 옷을 가린 제복에 고정되었다.
익숙한 옷이다. 그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그의 기억이 옳다면 저것은 아마도 심부름꾼 길드의 복장. 비록 한미하다고는 하나, 심부름꾼 길드는 도시에서 인정한 마법사 길드였다.
?
‘이거 정말 운이 좋아.’
?
정말 하늘이 자신을 돕기라도 하는 걸까? 제스의 입가에서는 도저히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어제 괴물 놈이 습격했을 때, 그는 목적이 있어 자리를 비워야 했다.
그의 목적은 한 사람을 찾는 것.
외모도 모르고 이름도 몰랐다. 하나 성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소여. 카다스 4대 귀족 가문 중 하나.
소여 가문에서 누군가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스는 쾌재를 불렀다.
마침 마법사가 필요하던 참이다. 지금 그의 조직이 지배하고 있는 것은 카다스 빈민가뿐. 도시 전체의 암흑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마법사는 필요조건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때가 나빴던 걸까? 그의 집을 찾았을 때는 이미 그가 외출한 지 오래였다.
‘뭐, 하지만 이제는 아무 상관도 없지.’
누군지 모르지만, 여기에서 마법사를 만나지 않았는가? 그것도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자신이 찾던 사람이 눈앞의 인물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제스는 여자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
“이봐, 아가씨. 나랑 얘기 좀 할까?”
?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가까워질 때도 여자의 표정이 점점 구겨져 갔다.
평범한 사내라면 기분이 나쁠 법한 태도. 하나, 외려 그 모습이 잠자리에서의 표정을 상상하게 만들어 제스는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
“짧게 얘기하지. 내 밑으로 들어와라.”
“거절한다.”
?
생각해볼 만한 이유 따위는 없다는 듯이 조금의 유예조차 보이지 않고 돌아오는 대답. 이번에는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그는 포기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
“돈이라면 원하는 대로 주지. 거기에 내 바로 밑 자리를 주마.”
“그따위 자리는 필요 없다.”
“거기에 즐길 거리도 마련해주지.”
“즐길 거리?”
?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성의 모습. 그런 여성을 보고 씩 웃으며, 제스의 손이 그녀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휙-!
살짝 움직이는 것으로 엉뚱한 허공을 짚는 두툼한 손. 그 손이 무언가를 움켜쥐는 것 같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명백했다.
?
“이게 무슨 짓이지?”
?
차갑게 굳는 표정과는 별개로 뜨거운 노기가 깃든 여인의 목소리.
?
“‘즐거운 일’이지. 매일 낮, 매일 밤. 쾌락에 신음하도록 해주마.”
“상남자십니다, 두목!”
?
휘파람 소리까지 내면서 추임새를 넣는 부하들의 목소리. 녀석들이 낄낄거릴수록 여자의 얼굴은 일그러졌지만, 제스의 미소는 더욱더 짙어져 갔다.
극도로 분노한 것일까?
그의 눈앞에 있는 여인의 얼굴색이 시시각각 변하며, 전신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겨우 안정을 되찾은 건지, 여인의 눈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거기에 있는 것은 제스가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쭉정이 같은 사내.
그만두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그의 모습에 제스는 속으로 낄낄거렸다.
?
‘머저리 자식.’
?
그는 저런 못난 사내들을 많이 보아왔다. 고작해야 무섭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내나 여동생, 심지어 딸이나 어머니조차 자신에게 내어주던 사내들. 그 사내들 앞에서 여자를 범하고 죽여버리는 것이 제스의 취미생활 중 하나였다.
?
‘저따위 놈은 필요가 없지.’
?
여자와 같은 옷을 입은 걸 보아 마법사인 건 분명하지만, 자신에게 반항할 생각조차 못 하는 겁쟁이다. 저런 놈이 조직에 들어와도 방해만 되리라.
?
“저 새끼는 그만 신경 쓰지 말고 나랑 얘기나 계속하지.”
?
이내 사내를 완전히 의식에서 지워버린 채, 제스는 손을 뻗었다. 다시 한번 노리는 것은 저 여자의 가슴. 하지만 그의 손이 제대로 뻗어지기도 전에,
퍽-!
둔탁한 충격이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
“어떤 새끼가……!”
?
소리가 제법 크긴 했지만, 그리 아프진 않았다. 하지만 감히 자신을 건드렸다는 생각에 그의 표정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빠르게 범인을 찾아 움직이는 그의 두 눈동자. 이윽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처음에 훑어보았던 어린 계집이었다.
?
“뭐 하는 짓이지, 꼬맹이?”
?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제스는 꼬마에게 말을 건넸다.
그를 아는 이가 본다면 놀랍도록 자비로운 태도. 아마 평소의 그라면 당장 주먹을 날려 이 계집아이의 머리통을 부수었을 터. 하지만 반반한 얼굴 덕에 제스는 그냥 이따가 ‘가지고 놀아’주기로 했다.
?
“너는 나중에 보자 꼬맹아.”
?
다시 한번 울리는 위협적인 목소리. 하지만 그런 그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
“뭐래 등신이.”
?
그와 함께 차갑게 굳는 표정.
?
“이 애새끼가!”
?
이윽고 제스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보육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
?
?
*** ***
?
?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에스텔에게 추근대는 저 덩치 큰 사내의 모습을 보며, 나는 기억 속 책장을 뒤져보았다.
한동안의 시간 끝에 찾아낸 것은 한 사람의 이름.
제스, 빈민가의 왕.
마법도 뭐도 없는 평범한 인간인 주제에, 빈민가를 장악한 희대의 범죄자.
길드 마스터가 나름 주의해야 할 인물이라고 나눠준 리스트에 적혀있던 이름이다.
당시에는 그저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넘겼지. 가능한 한 만날 일이 없기를 속으로 빌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건 공포가 아니었다. 그저 에스텔에게 무례하게 구는 상대에 대한 불쾌감과 상황이 꼬여서 귀찮을 뿐.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가 무서워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빅토리아, 에스텔, 그리고 나.
셋 모두 마법도 못 쓰는 범죄자에게 두려움을 느낄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에스텔은 마도기사. 그것도 이 도시에도 한 손으로 뽑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다. 그녀가 진심으로 검을 휘두른다면, 10분 이내에 여기에 있는 왈패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는 사도다. 사도로 변신하기만 하면 지상에 있는 필멸자 중 견줄 수 있는 대상은 거의 존재치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 둘의 특징을 모두 보유한 존재. 사도일 뿐만 아니라 상형권과 부분 둔갑 덕에 어지간한 마도기사보다 맨몸 전투력이 높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귀찮아지지 않는 건 아니지만.
?
‘귀찮아졌네.’
?
나는 짜증이 가득 담긴 눈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나랑 에스텔은 함부로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다. 저런 깡패들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옆에 있는 빅토리아가 문제이다.
사도로 변한다면 숨어들어온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맨몸으로 싸우자니, 무력은 충분하지만, 여전히 지나치게 강하다.
?
‘의심하겠지.’
?
나는 머릿속에서 슬쩍 빅토리아의 반응을 떠올려보았다.
처음에는 분명 즐거워할 터.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알아챌 것이 분명하다.
결국 숨기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저 녀석들을 날려버려도 되는지 내게 묻는 에스텔에게 거부의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
‘일단 어떻게든 조용히 처리해야 할 텐데.’
?
잠시간의 고민. 하지만 이 고민은 오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것도 내가 머리를 굴리게 한 원인 때문에.
?
“이 새끼가……!
?
귓가에 속삭이듯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그와 함께 내 옆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작은 갈색의 그림자.
퍽-!
잠시 후 익숙한 충격음이 들리며 빅토리아의 두 발이 제스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잠시간 이어진 정적.
?
“뭐 하는 짓이지, 꼬맹이?”
?
워낙 체급 차이가 크기 때문에 밀리진 않았지만, 목소리로 보아 분노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골치 아픈 판에 이어지는 빅토리아의 도발!
?
‘빌어먹을!’
?
오늘은 일이 꼬이는 날인가?
서서히 올라가는 제스의 손을 보며 나는 서둘러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형태가 뒤틀리는 한쪽 손,
우드드득-!
골육이 눈에 보일 정도로 기괴하게 움직이며, 내 손의 형상이 짐승의 것에 가까워졌다.
가능하면 들키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온갖 이드라 님을 포함한 온갖 신에게 기도하며 내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
“강림!”
?
세상이 얼어붙으며 익숙한 감각이 내 전신을 덮여왔다.
?
‘이런 미친?!’
?
생각보다 막 나가는 빅토리아의 행동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사도로 변할 것쯤은 예측하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예상한 것은 나랑 에스텔이 주의를 끄는 사이에 주변 어딘가에서 변하고 오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저 범죄자들이 모두 보고 있는 앞에서 변신한다고?
?
‘위험해!’
?
등줄기를 타고 차갑게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4대 가문, 사도야행의 주최자는 사도야행에 대한 정보가 세간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중에서도 ‘사도의 정체’에 대한 것은 극비 중의 극비다.
사도의 힘으로 범죄를 저지른 것?
아무렇지도 않다. 그저 살짝 흔적을 조작해 마법사가 한 일로 만들면 그만이다.
하지만 사도로 변하는 것을 남 앞에서 들킨다?
?
‘빌어먹을.’
?
어쩌면 저 범죄 조직뿐만이 아니라 보육원 모두가 위험할지도 모른다.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뱉었지만, 이를 알아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
‘될 대로 되라지.’
?
아무래도 오늘은 정말로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날인 모양이다.
?
?
*** ***
?
?
“뭐야, 저건?”
?
손을 뻗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전신을 덮친 이상한 감각에 제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은 익숙하면서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각.
냉기.
단순히 물리적인 실체를 넘어, 영혼까지 얼려버리는 눈보라.
그것을 눈치챈 순간, 어느새 모든 것은 그 차가움이라는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꽈드드드득-!
공간이, 시간이. 얼어붙을 리가 없는 ‘개념’들이 그대로 차갑게 식어간다. 공간이 뒤틀려 시야가 흐려지고, 몸 역시 굳어 움직임이 극도로 느려진다.
?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입으로 크게 외쳐보지만, 나오라는 목소리는 흔적조차 없고, 대신 입 앞에서 차갑게 얼어붙은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다.
어쩌면 저것이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제스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
‘젠장!’
?
도망쳐야 한다.
그의 생존본능이 맹렬히 경고 신호를 보내왔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현상이 뭔지는 모른다. 왜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원흉이 무엇이든 극도로 두려운 존재라는 사실.
하지만 그는 곧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
‘움직여! 움직여! 움직이라고!’
?
몇 번이고 몸부림쳤지만, 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냉기에 잠식된 지 오래인지, 관절은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인체의 자유를 빼앗기는 것과 동시에 엄습해오는 극한의 공포.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사태의 원흉이 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하아아아아-.”
?
해골. 제스는 눈앞에 있는 상대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지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푸른 금속으로 만들어진 해골은 그의 앞에서 기괴한 빛을 내며 빛을 내고 있었다.
?
“머저리 자식이,”
[와서는 안 되는 곳에 왔네.]
?
이윽고 귓전을 울리는 두 존재의 목소리. 그중 하나는 조금 전 그 앞에서 건방 떨던 계집의 것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처음 듣는 한 사내의 목소리였다.
마치 관찰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제스를 바라보는 괴물. 잠시 후 녀석은 오른손을 들어 제스의 볼을 툭 치더니.
퍽-!
갑자기 촛불이 꺼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
‘사라졌나?’
?
잠시간 찾아온 안도감. 하나 잠시 후 또 다른 공포가 그를 침습했다.
?
“끄악!”
?
분명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거늘, 수하의 비명이 너무나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근처에서 들리던 소리. 하지만 어딘가로 끌려가기로도 한 듯, 부하의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
“끄악!”
“살려!”
?
그 하나를 시작으로 조금씩 늘어나는 비명.
마치 희생제를 치르는 현장처럼, 촛불이 꺼지는 소리와 함께 사람이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었다.
?
‘젠장! 젠장!’
?
신체가 얼어붙은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비명과 촛불 꺼지는 소리가 다가올수록, 오줌을 지릴 것 같은 공포가 심장을 옥죄여왔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생존본능의 경고. 하지만 얼어붙은 육체는 그 어떠한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점점 가까워지던 비명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
“이제 네”
[차례네?]
?
갑작스럽게 신기루라도 나타난 것처럼, 녀석은 어느새 눈앞에 서 있었다.
?
‘빌어먹을!’
?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 좋지는 못하다고 생각하던 두뇌에서 그 생각만이 계속 떠올랐다.
분명 답이 있을 터다.
그 답을 맞힌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의 기대와는 달리 서서히 올라오는 상대의 손. 마치 뱀이 먹잇감을 노리듯 느긋하게 움직이던 그것은 어느새 제스의 입을 가렸고.
쾅-!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마치 갑작스럽게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 자신이 맨몸으로 음속을 돌파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제스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의식을 잃었다.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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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1-02-28 21:03:09
한 지방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고 군림할 수 있다는 건 분명 능력이 좋아야 할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봐서 제스는 확실히 유능해요. 하지만 그 유능함의 실체는 그 자체로도 칭송할 수 없는데다 인격은 아예 논외의 사항이네요. 제스의 인간관은 역시 그거네요.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그런데 사도로 변신하게 된 빅토리아의 행동은 계산한 것일까요, 아니면 충동일까요? 저는 후자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는데, 정말 그래도 괜찮을지...
제스의 그 철칙이 자신의 몸을 크게 때릴 철퇴가 될 것 같은데...생각보다도 그 시기는 빨랐네요.
하지만 이미 후회해도 늦었겠죠.
Papillon
2021-03-05 02:35:13
제스는 무능한 인물은 아니죠. 하지만 사람의 가치를 우습게 보다 보니 거대 세력의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삼국지의 여포나 원술이 그러했 듯이, 이런 인물도 조건만 갖추어지면 대형 사고를 치기 마련입니다.
나중에 자세히 나오겠지만, 빅토리아의 행동 원리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나이도 어릴뿐더러 여러 가지 이유로 사도의 능력에 대한 고찰이 부족한 상황이죠.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나중에 공개됩니다.
SiteOwner
2021-04-02 20:16:21
"사슴을 쫓는 자는 숲을 못 본다" 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음욕에 눈이 어두워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뭔가 해보려는 제스, 그리고 수치와 분노에 앞뒤를 안 가리고 폭주해버린 빅토리아의 만남은 그렇게 좋을 리가 없게 되는 게 필연일 것입니다. 둘 중에서 제스가 받을 피해가 더욱 커야 최소한 자정능력과 존재가치를 지닌 사회라고 해야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결론은 보나마나겠지만요...
제스가 어떤 꼴을 당할지가 볼만하겠습니다.Papillon
2021-04-04 12:02:52
자기가 사는 세계에 매몰되어 있다보니 정작 상대가 뭔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죠. 머리가 좋지만 동시에 모자란 이가 자주 보이는 행동입니다.
제스의 결말은 좋지 않을 겁니다. 가깝게도 멀게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