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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터즈] Chapter 13: 어긋남. Episode 50

Papillon, 2021-03-21 12:03:51

조회 수
154

빈민가, 아이린 보육원.

교회의 첨탑 덕에 빈민가의 일반적인 건물보다 살짝 높은 지붕 위에서 빅토리아는 살짝 멍한 표정으로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보육원으로 통하는 좁고 지저분한 골목길의 모습. 약간 음산한 길 위에는 오늘따라 들고양이의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았다.

?

그 녀석들 늦네…….”

?

그렇게 텅 빈 길목을 바라보며 그녀는 오늘도 찾아오기로 한 친구를 기다렸다.

?

바보 같아.’

?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녀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고작해야 이틀이다. 솔직히 말해 친우가 아니라 그냥 지인 수준으로도 포장하기 힘든 인연이다.

물론 기간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인연 역시 있겠지. 하지만 그 둘과 자신의 관계가 그러할까?

?

그럴 리 없지.’

?

그레고르 정도는 어떻게든 친한 관계라고 포장할 수 있겠지. 하지만 에스텔을 상대로는 도저히 그리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진실을 말하자면.

?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았지.’

?

빈민가에서 오랜 기간을 살아온 그녀가 아니더라도 에스텔이 그녀를 꺼리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

그래도 두근거리는걸.’

?

어쩔 수 없다. 기다리게 만든 녀석들이 나쁜 거다.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타인의 탓이라 억지로 우기며,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그들을 기다렸다.

?

[그렇게나 그 자식이 마음에 든 거냐, 파트너?]

?

그런 그녀의 모습이 신기하다고 여겼는지 그녀의 파트너가 말을 걸어왔다.

이타콰, 바람을 걷는 이.

겨울철 눈보라를 상징하는 이 경박한 친구는 그녀가 우연히 이 허리띠를 손에 넣은 이후, 늘 그녀와 함께였다.

?

신이라고 했던가?’

?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소개하던 이타콰의 말. 하지만 빅토리아에게 이 친구는 신이라기보다는 그저 동네 모자란 아저씨처럼 느껴졌다.

?

그 덕에 좀 더 자연스럽게 친해졌지만.’

?

살짝 무례해 보일 수 있는 생각을 얼굴 아래 감춘 채, 그녀는 무심히 파트너의 의문에 답했다.

?

그렇지.”

[갸하하하!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너도 어린애는 어린애로군. 아니, 오히려 어른이라 그런 건가?]

무슨 소리야?”

[친구가 아니라 임을 기다리는 게 아니냐 이거지.]

그게 무슨, 아니! 절대로 아니야!”

?

이타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의아한 표정을 짓는 빅토리아.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 의미를 파악하자 얼굴이 녹아내릴 듯 붉게 물들었다.

?

[오오, 그렇게 필사적으로 부정하니까 더 그럴싸한데? 첫눈에 반했다, 뭐 대충 그런 건가? 갸하하하하! 파트너 소녀구먼!]

아니라니까!”

[갸하하하하하하!]

?

당황한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심술인지. 필사적인 빅토리아의 부정에도 이타콰는 그녀를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

?

결국, 포기한 채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빅토리아. 그녀의 경험상 이럴 때 휘말려봐야 오히려 피곤해질 뿐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겉모습과는 별개로, 그녀의 머릿속은 이타콰가 언급한 한 이야기에 꽂혀 있었다.

?

그레고르랑 연인이 된다니…….’

?

한순간 그 광경을 떠올려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그녀와 그레고르가 만난 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고작해야 이틀.

물론 친구가 되기에도 짧은 시간이지만,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기에 남녀가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한 기간은 아니다.

거기에 설령 진짜라고 하더라도…….

?

에스텔이 있으니까…….’

?

살벌한 빈민가에서 오래 살아온 만큼 빅토리아는 눈치가 빠른 편이다. 그런 그녀는 에스텔이 그레고르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때문에 자신을 껄끄러워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제치고 그레고르가 자신과 사귀게 된다.

?

그럴 리가.’

?

그레고르가 바보가 아닌 이상, 에스텔이 아닌 자신을 선택할 리가 없었다.

선머슴 같은 자신과 여신 같은 에스텔.

누가 봐도 답은 뻔한 것이 아닌가?

물론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받아들이기 좋은 내용은 아니지만.

?

!”

?

자신도 모르게 빅토리아의 입에서는 혀 차는 소리에 이타콰는 놀리는 것을 멈추었다.

그러길 잠시.

?

[장난은 여기까지만 해두고.]

?

평소와는 다른,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그녀의 허리띠에서 들려왔다.

?

[상대에게 지나치게 마음을 주진 마라.]

?

마치 북풍을 연상시키는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파트너의 목소리에 빅토리아는 왠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

그게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다. 지나치게 타인을 신용하지 마라.]

그 둘이 나쁘다는 거야?”

[아니. 그 둘이 악인이라는 건 아니다. 적의 따위도 없어. 하지만 사람은 악의만으로 싸우게 되는 건 아니다.]

…….”

[친한 이라도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상처받는 건 너겠지. 사람을 너무 믿지 마라. 그것이 너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살아온 이로써 내가 줄 수 있는 조언이다.]

?

그렇게 단순한 지인이 아닌, 옛 군주로서의 발언을 이어가는 이타콰는 어째서인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갑작스럽게 무거워진 분위기에 빅토리아는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침묵을 견디지 못한 것일까?

?

[갸하하하하! , 진지한 건 여기까지. ,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말라고.]

?

이타콰는 평소 이상으로 과장되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그의 노력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지만.

?

배신이라…….’

?

그 단어를 떠올린 빅토리아의 눈동자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배신.

그녀에게 있어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는 아니다. 아니, 빈민가에 살다 보면 일상에 가까운 개념이기도 하다.

?

하지만…… 처음으로 사귄 친구인데…….’

정말 그렇게 될까?”

[글쎄? 나도 모르지. 하지만 준비는 해두는 게 좋아, 파트너. 그게 사람이니까. 갸하하하하!]

?

섬뜩함과 쓸쓸함.

그 두 감상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빅토리아는 멍하니 골목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걱정하던 상황이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올 줄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

?

*** ***

?

?

왠지 분위기가 좋질 않네.’

?

양쪽에서 냉기를 날리고 있는 두 여성의 눈치를 살피며, 나는 살짝 몸을 떨었다.

길드 마스터와의 대화 직후, 에스텔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 이후.

?

도저히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지.’

?

마스터가 에스텔의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야말로 당장이라도 칼을 빼 들고 자살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고 할까?

솔직히 그녀와 함께 의뢰에 나서도 될지, 아니 그걸 넘어서 그녀와 대화해도 괜찮긴 한 건지 모를 정도였다.

그래서 오는 내내 어떻게든 에스텔을 기분 좋게 해주려고 했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 결국 나는 빅토리아가 나 대신 어떻게든 해결해주길 바랐는데…….

?

왜 이쪽도 이 모양인 건데?’

?

속으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슬쩍 돌려보니, 빅토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분하다 못해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히 인형을 만들고 있는 모습.

어제랑 그제 시끄럽게 굴던 소녀라고는 솔직히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

?

먼저 말해주면 고맙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럴 낌새는 전혀 보이질 않았다.

?

에휴.’

?

그렇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이 상황을 어떻게 넘길지 고민했지만, 도저히 답이 보이질 않았다.

?

이럴 때 오드리가 있다면 도움이 되었을 텐데…….’

?

이 자리에 없는 든든한 후배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듣기론 오드리는 장기 의뢰를 나갔다고 한다. 어떤 귀족 노인의 저택을 관리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조금 고되긴 해도 보수도 넉넉한 편이라고 한다.

?

오드리라면 잘하겠지.’

?

꼼꼼한 성격인 만큼, 어지간한 전문 집사보다 잘 해낼 것이다.

?

잠깐 그러고 보니……,’

?

그 편지는 어떻게 됐지?

문득, 한 장의 편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블레어. 이골로냑의 사도였던 자이자, 저주받을 살인귀.

그는 내게 권능에 대한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편지 배달을 요구했다. 본래대로라면 내가 직접 그 편지를 전했어야겠지만…….

?

여긴 제가 아는 주소인데요?’

?

편지 봉투에 쓰여있는 주소를 본 오드리는 그렇게 말하며 나 대신 배달을 해주기로 했다.

?

별일 없겠지?’

?

개인적인 연줄을 이용해 여러 번 편지를 조사해보았지만, 딱히 이상한 것이 발견되진 않았다.

그저 단순한 손편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발신인이 녀석인 만큼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일단 눈앞의 일이나 걱정하자.’

?

어차피 지금 내가 고민해봐야 할 수 있는 건 없겠지.

나는 편지에 관한 생각은 접어둔 채 다시 주변을 살폈다.

한참 동안 이어지는 고민.

?

일단 하나씩 처리하자.’

?

결국, 고민 끝에 내가 내린 답은 간단한 선택과 집중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정해야 할 것은 누구의 일에 먼저 집중하느냐는 것인데.

?

우선 빅토리아의 상황부터 알아보는 게 좋겠지?’

?

에스텔의 상태를 보아하니 쉽게 해결될 고민은 아닐 것이다. 지금 괜히 먼저 말을 걸었다간 오히려 상황만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

거기에 마침 적당한 대화 소재도 있고 말이지.’

?

나의 눈이 완성을 앞둔 고릴라 인형을 향했다.

여전히 어지간한 기성품보다 훨씬 높은 품질. 예전에 내게 자신 있게 보여준 적이 있었으니, 저걸 소재로 말을 거는 걸 꺼리지는 않으리라.

?

전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잘 만들었네. 혹시 전에 어디서 재봉 같은 걸 배운 적이 있는 거야?”

! …….”

?

과연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는지 곧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에 불과했는지 대답 도중에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그 정도면 충분. 거기에 부끄러워서 붉어진 피부를 보아하니, 나는 이게 정답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좋아, 계속해서 이 화제로 파고 들어가 볼까?’

?

단서를 잡았으니 이제 남은 건 최대한 밀어붙이는 일뿐!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능한 한 모든, 그리고 친절해 보이는 질문들을 쏟아내었다.

혹시 아이린 수녀님이 가르쳐주셨나?

인형을 좋아하는가?

왜 고릴라인가?

사실 마지막 질문은 진짜로 궁금했던 것이긴 하지만, 기왕 물어볼 거 지금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어지는 질문의 공세.

?

하아……. 왜 자꾸 물어보는 건데?”

?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는 없었는지, 결국 빅토리아가 패배를 선언했다.

?

그야 네 태도가 이상하니까 그렇지.”

그렇게 티가 나나?”

당연하지, 난 네 친구니까.”

친구…….”

?

친구란 말이 뭔가 이상하기라도 한 것일까?

빅토리아는 무언가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

저기 묻고 싶은 게 있어.”

?

질문을 던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살짝 떨리고 있었다.

?

우린 정말 친구인 거지?”

?”

혹시 배신하거나 그러진 않지?”

?

배신……?

예상외의 단어에 살짝 놀라서인지 나는 선뜻 대답하질 못했다.

?

…….”

?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부정하고 싶지만, 솔직히 찔리는 면이 없잖아 있었다. 당장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 자체가 그녀가 사도라는 점 때문이지 않은가?

물론 어지간하면 그녀를 먼저 공격하진 않겠지. 지금처럼 그녀가 선을 넘지 않는다면 굳이 싸워야만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

이런 생각 자체가 배신은 아닐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

마음 한구석에서 살짝 죄책감이 피어났지만, 나는 이를 억지로 짓누르며 대답했다.

?

, 그렇지? 배신 같은 건 안 하는 거지?”

그래.”

?

그 대답을 기다려왔던 것일까?

근거 따위는 하나도 없는 발언이었건만 어조가 눈에 띄게 밝아진 것이 느껴졌다.

?

좋아, 일단 이건 수녀님에게 배운 건데…….”

?

이후 빅토리아는 마음속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풀렸는지, 신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처음에 만났을 때와 똑같은 익숙한 모습. 어린아이 같은 그 행동에 나는 살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렇게 한참의 대화가 끝나고.

?

맞다. 오늘 야시장에 팔러 갈 때 너도 갈래?”

?

마지막으로 빅토리아 건넨 질문.

평범한, 그리고 생각해보니 나올 법한 질문. 그 질문에 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쨍그랑-!

무언가가 깨져나가는 소리가 고막을 흔들었다.

소리의 근원지는 에스텔이 있는 장소.

고개를 돌려보니 손에 들고 있던 유리잔을 깨뜨린 에스텔이, 마치 원귀와 같은 모습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저기 괜찮아요, 에스텔?”

?

그 모습에 걱정이 되어서 내가 다가서는 찰나.

?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

무언가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것 같은 목소리로 에스텔이 내 팔을 잡았다.

?

?

*** ***

?

?

쨍그랑-!

눈앞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낫건만, 깨진 것이 손에 든 유리잔인지 마음속 무언가인지 에스텔은 알 수 없었다.

그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빅토리아가 한 제안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뿐.

야시장.

고작해야 한 단어에 불과하지만, 그녀에게 이는 단순한 이 아니었다.

그곳은 그녀에게 있어서 추억의 장소.

가문을 나온 이래, 처음으로 그녀가 그레고르와의 시간을 즐긴 공간.

?

그곳마저 빼앗아가겠다고…….’

?

싫다.

그저 그 생각만이 뇌를 가득 채웠다.

그곳만큼은 절대로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 추억만큼은 더럽혀지지 않길 바랐다.

그렇지만…….

?

내가 뭘 할 수 있지?’

?

이 자리에서 사도를 상대로 검을 뽑을 것인가? 고작해야 인간인 그녀가? 당장 오늘 아침에만 해도 처참하게 당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인간의 모습을 한 사도에게.

?

빌어먹을.’

?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

그렇기 그 고민의 늪에서 그녀가 꺼낼 수 있던 고작해야 한 마디였다.

그렇게 그레고르와 에스텔은 빅토리아와 아이들을 놔둔 채, 단둘이서 보육원 마당으로 향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낮이 끝나고 있었다. 푸른 하늘은 노을에 침범당해 붉게 물들고 있었고, 공기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낮이 밤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에스텔은 괜히 더 기분이 나빠졌다.

?

저기 에스텔. 뭔가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요?”

?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런 에스텔의 마음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레고르는 그저 어리숙한 질문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

그렇다.’

?

그런 그레고르의 질문에 에스텔은 답답함을 느끼며 그저 속으로만 대답했다.

자신은 괜찮지 않다. 그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 이 보육원에서의 일을 가능한 한 빠르게 끝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둘이서 함께 야시장을 걷고 싶다.

하지만 뭐라고 말하기 싫었다. 아니 그걸 넘어서 이 복잡한 감정을 도저히 말로 옮길 수 없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감정의 해류.

?

……그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

결국, 그 속에서 건져 올린 한 가지 질문은, 너무나도 근원적인 의문이었다.

?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말 그대로다. 그대에게 나란 대체 무엇인가?”

그야 당연히 친구…….”

“‘친구인가? 정말 그게 전부인가?”

?”

?

여전히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 에스텔은 그 익숙한 모습이 이번만큼은 꺼려졌다.

?

어떻게 해야 하지?’

?

솔직히 말하기는 부끄러울뿐더러, 어째서인지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그렇지만 돌려 말하는 건 내 전문이 아니지.’

?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두 생각의 결투. 결국, 승리를 쟁취한 쪽은 사실을 말하는 쪽이었다.

?

그레고르. 나는 그대가 좋다.”

?

미사여구 하나 없는 고백이 에스텔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

그야 저도.”

그런 의미가 아닌 것쯤은 그대도 알지 않나?”

?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는지, 침묵을 지키는 그레고르.

?

하지만 최근 나는 모든 게 싫어지려고 한다. 그대도, 사도야행도, 그리고 나 자신도…….”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나는 그대에게 뭐지? 그저 평범한 친구에 불과한 건가? 단순한 전우인 건가? 더 뛰어난, 더 유용한 동료가 나타나면 버려지는 그저 소모품에 불과한 건가?”

그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어째서!”

?

터져버릴 것만 같은 격정.

마치 입에서 피를 토하는 것과 같은 감각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

어째서 나를 그렇게 대하는 건가? 나와 그대가 공유하던 추억을 남과 나누는 것인가? 왜 내가 특별하다고 여긴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건가?”

…….”

난 정말 그대에게 뭐냔 말이다!”

?

폭풍이 끝나자 남은 것은 정적이었다.

마치 분노한 용처럼 모든 것을 토해낸 그녀 앞에서 그레고르는 그저 침묵을 지켰다.

어색하고 꺼림칙한 시간. 그 시간이 흐른 끝에 침묵은 깨어졌다.

?

에스텔.”

?

붉게 물들던 푸른 하늘이 자색을 넘어 남색에 가까워졌을 무렵, 그레고르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

말해라.”

솔직히 에스텔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거든요.”

?

만약 오드리가 봤다면 그럼 제가 여태까지 선배에게 한 건 뭔데요?!’라고 분노할 말을 하는 것도 모른 채, 그레고르는 그저 그렇게 대답했다.

?

그런가…….”

결국 이루지 못할 것이었나?’

?

그 좌절감에 에스텔의 눈가가 살짝 흐려지려는 찰나.

하지만 에스텔은 여전히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 중 한 명이에요.”

한 줄기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

저는 솔직히 사도야행에서 우승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저 에스텔에게 받은 은혜를 갚을 생각뿐이었죠. 하지만 에스텔이 가문을 등진 이후로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저는 이겨야만 해요. 에스텔에게 다시 좋은 삶을 줄기 위해서라도…….”

…….”

이곳에 온 것도 그 때문이에요. 저는 빅토리아를 친구로 여기고 있어요. 하지만 에스텔과 비교하면, 당연히 에스텔을 우선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만약에 빅토리아와 에스텔이 서로에게 검을 들게 된다면…….”

?

살짝 떨고 있는 에스텔의 어깨를 감싸 쥔 채, 그레고르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

전 주저 없이 빅토리아를 쓰러뜨릴 거에요.”

?

그 말을 끝으로 그레고르는 다시 입을 닫았다.

서늘한 밤바람이 에스텔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에스텔은 그 추위를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눈앞에 있는 그레고르의 눈을 바라보았다.

?

무슨 말을 해야 할까?’

?

고백을 능구렁이처럼 넘긴 것에 화내야 할까? 아니면 자신을 우선한다는 말에 기뻐해야 할까?

답이 나오질 않는 문제라고 생각하며 에스텔은 살짝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

그렇다면 됐다.”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

그렇게 한 개의 폭풍이 진정되려던 상황에서.

?

뭐야, 그렇게 된 거였나.”

?

눈보라가 들이닥쳤다.

빅토리아.

지나치게 늦는 그레고르와 에스텔을 걱정해서였는지, 그녀는 간식을 든 채 근처에서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

작게 웅얼거리는 것 같지만 똑똑히 들리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끝났을 때.

?

강림!”

?

세상이 얼어붙었다.

?

Papillon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4 댓글

마드리갈

2021-03-21 22:40:50

그레고르, 에스텔, 빅토리아 모두가 혼란하네요.

게다가 의심과 오해가 계속 확대되고, 정말 누가 무슨 말을 꺼내더라도 상황이 더욱 어색해질 것 같네요. 나아질 가능성은 없어 보이고. 빅토리아에 대한 이타콰의 조언 또한 꽤나 섬찟하게 느껴지고 있어요.

그레고르가 에스텔에 대한 마음을 확인시키려는 상황에서 하필이면 빅토리아가 그 순간을...


그리고 갑작스럽게 강림...이렇게 나쁜 상황이 벌어질 수가...

Papillon

2021-03-23 02:11:05

어찌 보면 그레고르가 쌓아왔던 업보가 한순간에 터졌다고 볼 수 있겠죠. 에스텔과 진심으로 대화를 나누지 않은 것. 빅토리아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 하지만 죽음에 이르지 않는 나쁜 상황은, 성장을 위한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레고르와 에스텔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봐 주시길.

SiteOwner

2021-04-10 20:14:32

사람의 입장이라는 게 개인에 따라 각인각색이지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봐 온 바로는, 쌍둥이형제자매에서도 그랬습니다. 거의 똑같이 생긴 일란성쌍둥이조차 미묘하게 다른데, 어떻게 살아왔는지 만나기 이전에는 접점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같을 리는 없겠습니다. 그래서 그레고르, 에스텔과 빅토리아의 생각이 각자 다른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좋은 중재자가 되어 줄만한 오드리는 없군요. 다른 일로 인해 장기간 떠나 있고...

결국은 3자가 어떻게든 해결해야겠습니다만, 셋 다 미묘한 데에서 부족함이 있다 보니 그게 문제입니다.

그에 이어서 타이밍이 정말 최악이군요. 갑자기 일어난 강림 상황에 갑자기 경련이...

Papillon

2021-04-11 11:50:34

오드리의 부재가 치명적이지요. 비록 전투 쪽에서 도움은 되질 않지만, 오드리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한 이유가 있습니다.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도 상항을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는 하죠. 세 사람의 인연은 이제 시작이지만 그 전개는 순탄하지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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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teOwner 2013-09-02 2345
공지

아트홀 최소준수사항

| 공지사항
  • file
마드리갈 2013-02-25 4690
1872

[초능력자 H] 105화 - 가이드 도착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4-28 128
1871

[괴담수사대] XI-2. 꽃다발

| 소설 6
국내산라이츄 2021-04-28 167
1870

피규어뮤지엄W에서 찍어온 사진들.

| 스틸이미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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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하트어택 2021-04-25 156
1869

[시프터즈] Chapter 14: 불꽃. Episode 55

| 소설 4
Papillon 2021-04-25 139
1868

[초능력자 H] 104화 - 그 남자, 미켈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4-23 123
1867

[초능력자 H] 103화 - 우연하지 않은 조우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4-21 120
1866

[시프터즈] Chapter 14: 불꽃. Episode 54

| 소설 4
Papillon 2021-04-18 128
1865

[단편] 뜨겁게 차갑게

| 소설 4
  • file
시어하트어택 2021-04-17 124
1864

[초능력자 H] 102화 - 공항에서 호텔까지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4-16 122
1863

[초능력자 H] 101화 - 여행, 시작!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4-14 126
1862

[시프터즈] Chapter 13: 어긋남. Episode 53

| 소설 4
Papillon 2021-04-11 125
1861

[시프터즈] Chapter 13: 어긋남. Episode 52

| 소설 4
Papillon 2021-04-04 125
1860

[시프터즈] Chapter 13: 어긋남. Episode 51

| 소설 4
Papillon 2021-03-28 130
1859

틈틈이 그려본 그림 2점.

| 스틸이미지 4
  • file
시어하트어택 2021-03-27 132
1858

모여봐요 철도모형의 방

| 스틸이미지 10
  • file
마키 2021-03-25 196
1857

[시프터즈] Chapter 13: 어긋남. Episode 50

| 소설 4
Papillon 2021-03-21 154
1856

[괴담수사대] XI-1. snowball

| 소설 3
국내산라이츄 2021-03-16 133
1855

[괴담수사대] Prologue-XI. 백면단도

| 소설 3
국내산라이츄 2021-03-16 136
1854

[시프터즈] Chapter13: 어긋남. Episode 49

| 소설 4
Papillon 2021-03-14 132
1853

이발소 그림

| 스틸이미지 4
  • file
Lester 2021-03-14 138

Polyphonic World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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