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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궁전의 정전 안을 한 남자가 이리저리 서성였다. 그의 이름은 헌터 발도. 나이는 50세. 현재 제국의 황제다. 그의 복식은 분명히 황제의 복식이되, 그가 취한 행동에서는 황제의 위엄이 하나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분명히 황제는 황제이되, 황제가 아닌 것이다.?
“하...”
그는 자괴감에 한숨만 흘릴 뿐이었다. 어쩌다가 내가 이 지경에까지 떨어졌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황제다. 하지만 그가 정상적으로 제위를 계승한 것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다. 제국이 세워진 지 30년이 조금 넘었는데 황제가 무려 5번이나 바뀌었다. 그것도 1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다. 헌터의 형제들 사이에 쟁탈전이 이어졌고, 그 이후 즉위한 조카는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등의 폭정을 벌이다가 거기에 맞선 막시밀리안 로젠가르텐에게 폐위되고 죽음을 맞았다. 막시밀리안은 올해 47세로, 군에서 소장으로 전역하고 광산을 경영하다가 그의 조카의 폭정에 맞서 거병했고, 여기에 호응한 세력들이 모여 마침내 그의 조카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때 이미 대세는 기울었지만, 막시밀리안은 바로 제위를 넘겨받지 않고 헌터의 또 다른 조카를 황제로 세웠다. 그러나 그는 막시밀리안에게 사사건건 대항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다음 해에 폐위되었고, 뒤이어 세워진 황제가 그였다.
그는 황제이되 황제가 아닌 1년 반을 지내 왔다. 분명히 황제라고 한다면 국민들에게 그의 위엄을 보이고, 온 제국에 통치력을 행사하는 것이 일이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입헌군주국의 군주라고 해도 그보다는 훨씬 권한이 많을 것이다. 모든 정무와 황실에 관련된 일은 막시밀리안을 거쳤고 처음에 그가 제위에 올랐을 때 내심 기대했던 '막시밀리안에 대한 의회의 반기'는 애초에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의회 역시 그를 편들어 주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잠시 자리를 맡는 것뿐. 그를 황제의 자리에서 폐할 것은 예정되어 있었다. 무엇을 해 보고 싶어도, 막시밀리안은 이미 제국 총리대신 겸 국방장관으로서 행정력과 군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었다.
정전 한가운데 있는 옥좌를 볼 때마다, 그리고 거기에 앉을 때마다, 그의 한숨은 켜켜이 쌓여 갔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막시밀리안이 아니었으면 황제의 자리에도 오르기 힘들었을 거라는 사실을 그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냥 막시밀리안에게 제위가 돌아갈 때까지 무탈하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최소한 황궁 안에서는 그의 권위에 따라 줄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아니었다. 황궁의 사람들 역시 완벽하게 막시밀리안을 따르고 있었다. 황궁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보고도 예를 갖추지 않았다. 그들이 예를 갖출 때는, 막시밀리안이 황궁에 들어왔을 때뿐이었다. 최근에는 그를 보고 '헌터 선생'이라고 한다든지, 아예 대놓고 '허수아비 황제' 등의 뒷담화를 한다든지 하는 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런 수모도 하루 이틀이면 모를까, 2년 가까이를 그렇게 하니 아무리 허수아비라고는 해도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막 그것이 폭발했을 때가 바로 어제, 그를 모시는 시종이 면전에서 대놓고 그를 조롱하고는, 그가 달려들자 '처신이나 잘 하쇼, 황제 양반'이라며 면박을 주었다. 당연히 화가 난 그는 시종의 멱살을 잡았지만, 시종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오히려 태연히 말했다.
“이보쇼, 이런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 같소? 죽일 테면 죽여 보쇼. 그래 봤자 로젠가르텐 총리가 살려 놓을 테니. 황제 양반도 알잖습니까? 제국의 모든 행정과 군사를 누가 장악했는지. 다행인 줄 아십시오. 로젠가르텐 총리 같은 분이니까 그나마 당신 목숨이 붙어 있었던 거요. 당신 조카 같은 인간이, 그런 폭군이 하나만 더 황제를 했다면 당신 목숨도 없었을 거고!”
시종이 그렇게 막 나가는 말을 입에서 내뱉어도, 그는 그저 멱살을 잡고서 시종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칠 수만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비분을 삭일 뿐이었다. 그런 그의 뒤로 “운 좋은 줄 아시오!”라는 시종의 말이 들렸다. ‘망할 로젠가르텐 녀석!’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그리고 저녁.
“휴...”
그가 한숨을 내쉬자, 옆에 있는 황후가 한마디 했다.
“또 면박당하고 오신 건가요?”
“그렇소... 또 그렇게 됐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겁니까? 황제다운 모습을 좀 보여 주실 수는 없는 겁니까?”
“미안합니다...”
그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말마저도 겨우겨우 내뱉은 말이었다. 황후는 그런 모습이 더욱 안타까웠는지 한소리 했다.
"3년이면 참을 만큼 참은 거잖습니까? 이제 정말 뭐라도 좀 하세요. 당하고만 살 수는 없잖습니까?"
“......”
“아이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나요? 아버지가 불쌍하다고요. 이 말을 되도록 안 하려고 했는데...”
황후는 이제 서러운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알겠소...”
그는 굳게 입을 다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참아 왔던 시간은 이제 끝났다. 그동안 먹구름 안에 들어 있는 것만 같았던 머릿속이 깨끗하게 맑아졌다. 그도 이제 뭔가를 해야 할 때다. 그렇게 결심했다.
침전에서 다시 정전으로 나오는 길. 그는 몇 번이고 주먹을 꽉 쥐었다. 결심은 했지만, 그의 노력이 결실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나라를 다시 정상의 궤도에 올려놓을 수만 있다면, 제대로 된 황제로 역사에 남을 수만 있다면, 앞으로 다가오는 무슨 풍파든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우선은 이 황궁부터 바꿔놓을 것이다. 그렇게 막시밀리안과 대항할 세력을 갖추고, 의회에 지지세력을 늘려가서 언젠가는 막시밀리안을 축출하고 제국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막 그가 결심하고 옥좌로 향할 때쯤.
황궁 공보관이 뒤에 수많은 인원들을 이끌고 정전에 들어왔다. 저녁 9시를 한참 넘긴 시간이었다. 평소 들어오는 시간이 아닌 데다가, 공보관밖에 안 되는 사람이 뒤에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오는 것도 이상했다. 그가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자마자, 공보관이 뭔가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상하원 합동회의는 헌터 발도를 황제위에서 폐한다. 이 결정은 익일 자정부로 시행된다. 황제에게는 연금이 지급될 것이며, 정해진 곳에서의 거주가 허락될 것이다...“
설마설마 했건만, 의회마저 완벽하게 막시밀리안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 말해 보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공보관!”
“폐하께서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그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높여도 공보관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뒤에 데려온 인원들에게 눈짓을 주며 그를 둘러싸라는 지시를 하기도 했다.
“무슨 말을...”
“폐하께서 뭘 생각하시는지 다 압니다. 하지만 그런 헛된 기대는 버리시고 대세를 따르는 편이 폐하에게 좋을 겁니다. 발도 가문의 제국은 끝났습니다.”
“지금... 협박하는 건가!”
공보관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러신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다. 이 기세를 로젠가르텐 총리에게 보였다가 남은 가족들의 목숨마저 위협할 건지, 아니면 순순히 따를지는 폐하의 선택입니다.”
“.......”
그 말을 듣자마자 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는 듯하다. 다리마저 힘이 풀리며 풀썩 주저앉으려는 것을, 양옆의 사람들이 부축했다.
“순순히 따르시면 목숨은 보전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마지 못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구나... 드디어 끝났구나. 32년 전, 그의 아버지 로버트가 문을 연 이 제국을 그의 손으로 닫게 되었다. 자기 할 일을 다 끝냈다는 듯 공보관 일행이 정전을 나서고, 정전 안에는 그 혼자만 남았다.
“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서러움이 북받치고, 슬픔이 극에 달하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차라리 후련했다. 거짓으로 가득 찬 굴레를 벗어던졌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이 온 감정이 하나로 응축된 웃음을 터뜨리며,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폐위된 헌터와 가족들은 준비된 차를 타고 쓸쓸히 황궁을 나섰다. 몇몇 사람들이 배웅을 해 주기는 했지만, 그것뿐. 이렇게 끝났다. 그의 가문의 제국은 끝난 것이다.
정문을 나서는 길에, 지나치듯 보인다. 검은 의전 차량에서 내려서 수많은 인파의 환영을 받으며 황궁으로 들어서는, 막시밀리안 로젠가르텐이. 얼굴을 서둘러 돌린다. 그리고 못 본 척하고, 셔터를 올린다. 마치 이 황궁에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그는 멀리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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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 정리하다가 문득 써 봤습니다. 개연성을 맞추고 거기에 맞는 설정을 추가하다 보니 쓰게 되었죠.
참고로 작중 시점은 AP 599년. 현재 쓰는 작품들의 시점에서 딱 400년 전이죠.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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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2-03-28 00:14:03
"왕관을 쓰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라는 격언이 생각나는 한 장면이네요.
그리고 본의 아니게 주어진 직위일지언정 그 직위에 있으면 싫든 좋든 그 직위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겠죠. 그래도 폐위 후의 평온한 삶을 조건부로 보장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
막시밀리안이라는 이름이 담은 함의가 여러모로 짙게 느껴지네요.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라든지,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 시대를 이끌다 실각했던 막시밀리앙 로베르피에르라든지...위대함이란 과연 무엇인지...
시어하트어택
2022-04-24 21:32:14
아무래도 막시밀리안은 창업군주이다 보니 막시밀리안 1세 쪽에 더 어울리겠죠. 아무래도 그건 즉위 이후를 다룬 작품을 하나 써 봐야 하겠지만, 그가 세운 제국이 쭉 이어져 온다는 걸 감안한다면 최소한 로베스피에르 쪽은 아닐 듯합니다.
SiteOwner
2022-04-14 00:25:11
쿠로사와 아키라(?澤明, 1910-1998) 감독의 1980년작 영화 카게무샤(影武者)에 나오는 타케다 신겐을 닮아서 그의 죽음을 숨길 목적으로 내세워진 그 도둑은 자신이 타케다 신겐으로서 대접받자 정말 자신이 타케다 신겐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카와나카지마의 싸움에서 정말 그처럼 돌진하지만 전사하고 시신은 강에 떠내려갑니다. 그런데 문제의 헌터 발도는 일단 진짜 황제이면서 전혀 대우받지 못하는...참으로 기묘하군요. 그런 직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나마, 폐위되어 그것으로 죽지 않고 그 뒤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어하트어택
2022-04-24 21:34:59
나름 모양 좋게 황제에 오르려고 임시로 세워 둔 인물이다 보니, 역사에 이름이나 남기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다행인 일이겠죠. 더군다나 평온한 삶을 보장받았으니 그것으로 더 다행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