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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그림이 왜 이러냔 말이야!”
“무슨 말이야? 나 제대로 준 거 맞는데.”
민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아이란은 은근히 더욱 성질이 난 건지 얼굴까지 찌푸려 가며 다시 입을 연다.
“무슨 아이돌 만화책에서 몇 페이지 넘기니까 유아용 만화가 나오냐고!”
아이란이 민이 보라는 듯 그 책의 페이지를 몇 장 더 넘기자, 이번에는 크레파스로 대충 그린 듯한 초원의 그림, 그리고 유아들의 그림체로 그린 동물들이 나온다. 어린아이들이 빈 도화지에다가 그냥 대충 그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그림 말이다.
“내가 한 거 아니야!”
“어? 네가 뭘 했다고?”
“나는 제대로 준 거라니까?”
아이란이 생각해 보니, 그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관심사가 애초에 다른데 신경 쓸 일도 적지 않겠는가. 거기에다가, 그 유아용 그림들은 아이란의 눈에만 보이는 건지, 민이나 다른 부원들에게 물어봐도 모두 거기에는 남자 아이돌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말한다. 페이지를 다시 앞으로 넘겨 본다. 분명히 아이돌 멤버들이 잡담을 하는 장면이었어야 할 페이지에는, 웬 펭귄과 악어 캐릭터, 그것도 유아들에게 딱 맞는 비율의 캐릭터가 나온다. 책 자체가 잘못 나온 건 아닐 테니, 이건 분명히 누군가의 장난일 터다.
“나 원 참, 무슨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성질이야?”
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에이, 오늘 또 이상한 일 일어나려는 건가...”
민이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옆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유와 리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민의 옆으로 와서 앉는다. 그리고 마치 민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리카가 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연다.
“아... 이번에도야. 어제 본방도 놓쳤다고!”
“뭘 놓쳐...?”
민은 되묻다가, 어제 리카가 <셀렉트 원> 본방 사수를 못 했다고 분을 삭이지 못하던 걸 떠올린다. 어제의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다면, 오늘도 또 무슨 불상사가 있었단 말인가.
“아, 알았다, 알았다고. 어제는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그러니까...”
리카는 거친 숨을 한번 몰아쉬고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한다.
“너무 놀다가 보니까 그만... 시간이 지나가 버렸어...”
“뭐야, 난 또 뭐라고.”
민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쉬다가, 문득 리카가 유의 손끝에서 나오는 전기를 보고 뭐라고 하는 모습이 들어온다. 어느새 다른 또래 부원들 몇 명도 모여앉았다.
“어, 이거였냐? 네 초능력이라는 것은.”
“아, 맞아. 얼마 전부터 생겼더라고.”
“야, 보잘것없는 능력이라며!”
유가 그렇게 말하자 금발의 남학생이 못 믿겠다는 듯 말한다.
“다들 속인 거잖아! 전기가 얼마나 센 건데!”
“뭐,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가...”
“어째... 나보다는 네가 코라에 더 가까워 보인다?”
리카가 스파크를 보자마자 하는 말. 민도 알고는 있다. <셀렉트 원>의 코라는 번개의 여전사로 불리면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단발머리와 근육질 체형, 그리고 주인공과 맞먹는 활약상 덕분이다.
“그래. 외모는 정반대지만.”
“하, 하하하! 맞아. 외모까지 비슷하면 내가 질투했을걸.”
한편, 아이란은 다시 한번 추리를 시작한다. 관심사가 같지 않은데 이런 장난을 할 리는 없고, 범인은 비슷한 관심사를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선배들이라면 좀 더 수준 높은 장난을 할 것이고, 후배들은 감히 이런 짓을 할 생각도 못할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아이란에게 짚이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 사람은 바로...
“나디아, 너지, 또!”
바로 나디아를 찾는데, 마침 아이란의 눈에 나디아가 딱 들어온다. 바로 옆에서, 홀로그램을 틀어 놓고 태연히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다. 마치 자신은 신경 쓰지도 않겠다는 듯한 그 모습이 아이란의 화를 더 돋운다.
“야, 나디아! 뭐 하는 거야!”
“하, 참, 보면 모르나?”
나디아는 여전히 태연한 자세를 보인다. 아이란은 자신의 관심 밖이라는 듯 말이다. 하지만 아이란이 살짝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디아는 아이란을 매우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책 원래대로 해 놓지 못해?”
“내가 왜 그렇게 해 줘야 하지?”
오히려, 나디아는 당당하다. 그 모습을 본 아이란은 금방이라도 나디아에게 달려들고 싶지만, 그러기가 힘들다. 어느새, 눈앞에 있는 나디아의 얼굴과 맞은편에서 책을 보는 한 남학생의 얼굴이 서로 바뀌었다. 거기에다가, 얼굴이 아주 흔들려 보이기까지 한다.
“네 수작이 뭔지는 잘 알아. 내가 하는 연성이며 팬아트며 그 모든 게 시기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
“틀렸어. 전혀 이상한 데를 짚었다고, 너는.”
“그럼 뭔데?”
그 사이, 아이란의 폰 내부의 AI가 모은 나디아의 SNS 키워드 모음에는 나디아의 관심사가 표시되는데, 아이란이 관심이 있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소설은 몇 개 표시되지 않는다. 서로 관심사가 다른데 왜 저리도 열을 내는 건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던 그때.
“너 그렇게 티 내고 다니는 거,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까?”
“그랬던 거냐...?”
아이란에게 있어서, 이건 차원이 다른 발언이다. 지금까지 아이란에게 도전했던 사람들은 열이면 열 연성 문제나 선호 작품 문제였다. 그런데, 아이란의 취향 자체를 부정하다시피 하는 저런 말은, 아이란의 깊은 속을 이리저리 후벼판다. 그러건 말건, 다른 부원들은 아이란과 나디아에게 눈길조차 주고 있지 않지만. 가끔 흘끗흘끗 돌아보는 민은 그저 한마디 할 뿐이다.
“좀 조용히 보자.”
“하...”
아이란은 가만히 나디아를 노려보다가, 중얼거린다.
“내가 이것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데...”
“......”
여전히 그러건 말건, 나디아는 애니메이션에 눈길을 주며, 아이란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좋아, 요 근래 가장 안 좋은 기억을 너한테 일깨워 줄 테니...”
아이란이 그 말을 실행에 옮기는 건 별로 어렵지 않다. 굳이 최면을 쓰거나 기억을 들여다보거나 하지 않아도 된다. 안 좋은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아이란의 능력이면 되니까.
“자, 네가 몇 초 후에도 그렇게 여유있게 네 일에나 몰두하고 있을지, 보자고.”
그러고 나서, 아이란은 가만히 시계를 본다. 몇 초 지나자...
“으앗! 이게 뭐야!”
별안간 나디아가 소리를 지르며, 테이블에 짚고 있던 오른손을 확 뗀다. 그 순간, 카페 안에 있는 부원들이 대부분 나디아를 돌아본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느긋하게 <그린 마스크드 파이터>의 지난 회차를 몰아보고 있던 지온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몇 주 뒤에 있을 ‘코믹 페스타’ 행사 참가 준비에 골몰하던 윤진은 웬일인지 가만히 앞에 있는 홀로그램 프레젠터만 들여다보고 있다. 지온이 보니, 나디아의 표정은 어제 지온과 처음 대면했을 때의 그 표정 그대로다. 극히 신경질적이면서,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범인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그 표정 말이다.
“뭐야, 설마, 그 범인이 또 여기 있는 건가?”
지온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손으로 여기저기 짚어 본다. 당연히도 어제의 그 축축함이 묻어날 리는 없다. 그리고 다시 시선이 나디아에게 향하는데, 나디아는 어느새 다른 손도 테이블에서 떼고는 식은땀을 흘리며 좌우를 돌아본다. 그 축축한 것이, 또다시 나디아를 엄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뭐야, 어디야... 어디 있는 거냐고!”
“하, 너 바보냐?”
마치 덫에 걸린 희생물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란은 나디아의 등 뒤에 대고 그것 보라는 듯 말한다. 자신을 돌아보는 나디아에게 그것 보라는 듯 대놓고 웃어 보이는 건 덤이다.
“꽤 성공적인 것 같은데. 너도 내가 겪은 아픔, 조금은 느꼈겠지?”
“아니, 전혀.”
하지만 나디아는 조금도 지지 않겠다는 듯한 얼굴이다. 오히려, 이제는 아까의 그 아이란의 취향에 대한 반감에 추진력을 얻기라도 한 건지, 두 눈이 더 타오르는 듯하고, 마치 아이란을 금방이라도 두 눈에서 나오는 빛으로 불태워 버리겠다는 듯하기도 하다.
“뭘 모르나 본데, 내가 네 취향이 싫다는 것만으로 이러는 것 같아?”
“다, 당연하지. 네가 지금까지 나한테 한 말도 그거였잖아?”
“천만에.”
나디아가 그렇게 말하자, 이제는 아이란의 시야가 점점 불투명해지기 시작한다. 눈앞에 연기나 모래 같은 걸 뿌려놓은 것 같다.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서 더욱 거슬린다.
“네 취향을 왜 그렇게 이리저리 설교하고 다니는 건데? 그것부터 좀 말해 보자.”
“뭐...?”
아이란은 그렇게 반문은 해도 뭐라고 반박할 거리가 없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아이란이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취향을 대놓고 퍼뜨린다든가 하지 않았으면 민이나 다른 후배들이 아이란이 좋아할 만한 책을 ‘알아서’ 가져다줄 일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야... 그게 좋았으니까, 다른 애들도 좀 알아 줬으면 해서.”
“자꾸 시끄럽게...”
나디아와 아이란이 설전을 벌이는 쪽을 흘끗흘끗 돌아보던 민이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막 일어나려 할 때.
“어, 뭐야!”
윤진이 민의 허리를 쿡 찌른다.
“왜 그래!”
“섣불리 나서지 말고, 하던 거 해. 내가 도와 달라고 할 때만 와 주고.”
“지금 나서야 할 때 아니야?”
“네 마음은 알겠는데, 그래도 좀 기다리고 있어. 이런 데 쓰기에 네 능력은 너무 세다고.”
“...알아.”
민은 한마디 하고는 자리로 돌아가 앉아서, 아까 보던 책을 편다. 하필 아까 보던 부분이 막 이야기가 재미있어지려는 찰나여서 그런지 다시 폈는데도 잠시 앞의 내용을 되짚느라 가만히 앉아 있다.
“야, 왜 그냥 왔어?”
유와 리카가 기다렸다는 듯 민의 옆으로 다가가 묻는다.
“저 선배들 말리려고 나간 거 아니었어?”
“윤진이 형이 그냥 들어가래.”
“왜? 네 능력이 필요해서 간 거 아니야?”
“아... 아직은 아닌 것 같아.”
“어... 그런가?”
리카가 민이 한 말이 조금은 믿기지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한다.
“네 능력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여기 다른 부원들이 다 달려들어도 이기고도 남을 만한 것 같은데.”
“에이, 아니라니까. 괜히 나섰다가 더 귀찮아질 것 같아.”
민은 어느새 나디아와 아이란이 서로 대치하는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아까 가져온 만화책을 펴고 보기 시작한다. 그걸 보던 유와 리카는 흘끗흘끗 나디아와 아이란 쪽을 보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우리라도 가서 뭐라도 해야 하나...”
“에이, 가만히 있어.”
“야, 너까지 이러기냐, 리카? 누구라도 나서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솔직히 저 언니들 막을 힘 없거든.”
“겨우 그거였냐.”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SiteOwner
2022-08-20 21:39:44
누군가에게만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 정말 기분나쁘기 마련입니다.
사실 학교나 직장, 각종 단체 내의 집단괴롭힘이나 집단따돌림 등도 그러합니다. 특정인에게만 "너만 이상하다" 라고 몰아세우는 식으로 몰아붙여서 나중에는 스스로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되어 버리는 이런 것이니까요. 그나마 문제의 책이 물리적으로 내용이 변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불행중 다행일까요.
나디아와 아이란의 충돌도 언제 일어나도 안 이상했던 것 같군요.
취향이나 예술관의 차이는 역시 성인이라고 해도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기 마련인데, 어린 학생들의 경우라고 해서 결코 다를 수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충돌에 의외로 윤진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관망하는 게 이상합니다. 무슨 복안이 있는지는 현 시점에서는 모르겠지만...시어하트어택
2022-08-21 21:43:42
나디아와 아이란, 둘 모두의 입장에서 이 상황은 불쾌한 상황입니다. 따라서 둘의 대치는 꽤 살벌한 편이죠. 그리고 그 원인은 서로에게 있고요.
분명 윤진은 모두에게 안 좋은 상황은 피하려고 할 겁니다.?
마드리갈
2022-08-21 18:06:53
펼쳐진 상황, 여러모로 살풍경하네요.
게다가 아이란의 상황인식과 대처가 상황을 더욱 곤란하게 꼬아 버렸어요. 과연 아이란의 추측대로 나디아가 그런 짓을 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으로 얻을만한 메리트는 지금까지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볼 때 없어요. 표현을 바꾸자면, 그렇게 괴롭혀서 그 자체로 즐겁다든지 예전에 무슨 원한이 있어서 갚아줬다는 그런 것도 아니고...
윤진의 대응도 미증유의 상황.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네요. 게다가 리카는 아예 막을 힘이 없다고 체념해 있고.
시어하트어택
2022-08-21 21:51:36
아이란이 한 관심사에 푹 빠져 있으니, 주변 상황도 왜곡되어 보일 수밖에 없는 거죠. 하지만 이 상황은 언젠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입니다. 하지만 분명 답은 있겠죠. 예상했던 답은 아닐지라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