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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파 시리즈] 더러운 손

로크네스, 2013-12-23 23:54:40

조회 수
436

어차피 제가 쓰는 글은 태반이 살벌한 얘긴데, 경고가 딱히 필요할까요? 물론 필요하죠. 왜냐면 이거 로맨스 소설 시리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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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손

 

나이든 손은 쓰다듬는 모든 것을 더럽히는 듯 보이나, 기도를 위해 맞잡고 있을 때는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젊은 손은 쓰다듬고 사랑으로 감싸기 위해 만들어졌다. 너무 빨리 서로 맞잡게 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앙드레 지드 

 

내가 예전부터 생각하던 게 하나 있어. 뭐냐 하면, 현재 인류는 교통수단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거야. 자동차는 물론이고 기차, 비행기, 여객선, 그런 다인승 교통수단의 존재가 인류의 몸과 마음을 좀먹고 있어. 걷고, 뛰고,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벗어나 편하게 앉아서 목적지까지 향하는 건 결코 자연스러운 게 아니야. 헛소리라고? 그래, 헛소리지. 순도 백 퍼센트의 헛소리지. 진심을 말하자면 물론 이래.

“도대체 언제 도착해요, 교수님? 심심해 죽겠네!”

“이제 30분 지났어요.”

30분! 1800초! 어마어마한 시간이잖아! 2년 전 벨기에까지 비행기 타고 오기까지의 그 끔찍한 시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긴 하지만, 어릴 때 설날에 친척집까지 갈 때 막히는 고속도로 안에서 보낸 지옥에 비하면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30분이라는 시간은 자동차에 갇혀서 보내기에는 너무 길어. 지난번에 바뇌로 갈 때는 늦은 밤이어서 잠이라도 잤지, 지금 같은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이 굉장히 지루하다고. 덧붙이자면 8월 들어서 알게 된 건데, 실험가운은 통기성이 별로 좋지 않아서 날이 더울 땐 끈적거리네. 그냥 벗어버릴까.

“다시 입으세요. 더운 건 알겠지만, 다른 사람도 있잖아요.”

이런 반응 나올 줄 알았지. 교수랑 둘이만 탄 거였으면 속옷까지 벗어버렸을 텐데, 지금 이 승합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거든. 남자고, 교수랑 비슷하게 나이가 들었고, 정장으로 몸을 빈틈없이 감싼 데 더해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얼굴에마저도 빈틈없이 굳은 표정으로 완전무장을 한 걸 보니 굉장히 지루한 사람인 게 분명하지. 저런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호흡곤란이 올 것 같아. 가능하면 목소리만은 듣고 싶지 않은데, 이런, 말을 하잖아.

“긴장이 안 되나? 네가 곧 만나게 될 사람은 평범한 녀석이 아닌데.”

으으, 저 목소리 좀 들어 봐. 기계가 말하는 거 같잖아. 사법 관계자, 그 중에서도 정말로 중요한 사건만 담당하는 높으신 분다운 목소리야. 딸이 꽃병이라도 깼다간 기물파손죄로 고소해서 손해배상을 청구할 사람이 분명하다고. 게다가 ‘곧’ 만날 사람이라니, 아직 도착도 안 했거든?

“이 나라 최악의 범죄자를 만나러 가는 거다. 강간범, 소아성애자, 연쇄살인마, 지능적이고 교활하고 폭력적인 괴물이란 말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괴물이 차 안에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옷을 못 벗는 게 그 사람이랑 무슨 상관이 있냔 말이야. 말은 딱딱한데 논리가 하나도 없네.

“지금부터 긴장해야 한다는 거다. 그 여유로운 태도, 녀석을 흥분시킬 만한 옷차림,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을 만났을 때는 진지하게 하길 바란다. 이번 수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너에게 달려 있으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교수는 곧바로 나한테 너무 큰 부담을 주지 말라면서 남자랑 싸우기 시작했고, 나는 그 지루한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귀를 막아버렸어. 차는 내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느리게 달렸고, 그래, 전부 무시하자.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아무리 지루하고 목적지가 아무리 지루한 곳이라도 지금 나한테는 갈 이유가 있는 거잖아. 벨기에에 처음 올 때가 그랬고, 지금도 그런 상황이니까 어쩔 도리가 있나. 참는 수밖에.

 

그러니까 상황을 조금 정리해 보도록 할게. 지금은 8월 14일, 공휴일인 성모승천대축일을 하루 앞둔 날이야. 동시에 루벤에서는 사람이 우글우글 몰리는 음악 페스티벌 ‘마크트록’이 열리는 중이기도 하지. 그 페스티벌이 유럽 전역에서 얼마나 유명하고 얼마나 유명한 뮤지션들이 많이 참여하는지에 대해서 내가 하등의 관심도 없으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겠지? 유학생 그룹이 오늘 아침에 단체로 모여서 출발하게 되어 있었고, 나는 거의 몇 주 전부터 여기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온갖 수를 생각해두고 있었어. 좋은 변명을 생각해내지 않으면 비엔나 봉봉은 반드시 나를 저 지옥으로 질질 끌고 갈 거니까. 쓸데없이 감은 좋아서 어설픈 거짓말이나 꾀병은 또 안 먹히더란 말이지. 귀찮은 여자라니까.

그래서 바로 며칠 전 금요일에도, 어떻게 하면 마크트록에 끌려가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아침 상담을 받으러 갔는데, 교수 사무실 안에서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살짝만 열고 훔쳐보니까 글쎄 낯선 사람이 하나 있더라고. 심장이 멈춰버릴 것처럼 지루한 정장 차림의 지루한 아저씨, 그래, 지금 차를 운전하고 있는 그 사람이었어.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

“스텔라, 네 협조가 필요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잖아?”

그리고 교수는 반박하는 중이었고,

“아직 어린애야. 그리고 치료에 진전도 없어서 굉장히 불안정하기까지 해. 당장 흉악범하고 만나게 할 수는 없어.”

남자는 더욱 필사적으로 반박하고 있었어.

“그 애가 어떤 앤지 알아, 스텔라. 네 논문을 읽었다고. 죄책감도 없고 가학적이고 잔인하고 범죄적인 노출광. 어린 여자아이가 흉악범과 대면해서 단서를 이끌어내야 한다면, 이 벨기에에 그 애만큼 적합한 애는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어.”

세상에, 저런 모욕적인데다가 근거까지 없는 비난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니. 모욕을 당한 당사자로서 이 시점에서 나서줘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잖아. 문을 벌컥 열면서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노출광은 아니거든요, 아저씨.”

실험가운 안에 속옷만 입고 다니긴 하지만, 속옷 위에 실험가운은 확실히 입고 있거든요? 갑작스러운 난입에 남자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지루하리만치 빠른 속도로 평정을 되찾았어. 남을 노출광이라고 불렀던 주제에 침착한 척 하면서 나한테 악수를 청하는 게 아주 기분 나빠. 그래서 좀 철저하게 무시하기로 마음먹었지. 악수도 받아주지 않고, 말도 안 붙이고.

“이 이상한 사람 누구에요, 교수님?”

교수를 이름으로 부르는 걸 보면 옛 친구나 그런 거겠지? 내 예상이 맞았어. 교수의 대학 동기인데, 지금은 경찰에서 일하고 있다더라고. 교수한테 중요한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다나. 그 중요한 부탁이 뭔지 아까 엿들은 것만으로는 조금 알기가 힘들었는데, 뭐 그거야 기다리면 설명이 나올 일이지. 곧 남자가 무슨 서류를 펄럭펄럭 넘기면서 입을 열었어. 와, 목소리도 중저음이라 짜증나.

“최근에 ‘핸드픽커’가 체포된 건 알고 있겠지?”

설명을 할 때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하란 말이야, 멍청아. 내 표정을 읽은 남자는 한숨을 가볍게 쉬더니(누가 할 일인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어. 그리고 이건 아주 조금 덜 지루한 이야기였어.

“지금으로부터 30년도 더 전에, 성폭행 흔적이 있는 여자아이들의 시신이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총 서른다섯 구,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애부터 중학생까지, 사람이 없는 도로변이나 강에서. 발견된 장소는 벨기에 전역이었지만 모든 시신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기에 단독범의 범행으로 결론지어졌지. 아이들의 양 손이 전부 잘려 있었던 거다.”

몇 년에 걸쳐서 범행을 저지르면서도 잡히지 않은 그 범인에게는 아이들의 손을 가져간다는 의미에서 ‘핸드픽커’라는 별명이 붙었다. 범인은 아이들을 공원이나 공공장소에서부터 미행하다가 어느 순간 납치했고, 항상 똑같은 수법으로 강간 살해했다. 부검 결과 모든 아이들은 과다출혈로 죽었고, 범인은 먼저 아이의 양손을 자른 뒤 죽을 때까지 강간한 것으로 밝혀졌다. 진짜로 이 남자 이런 말투로 말했다? 무슨 다큐멘터리 내레이터야?

“그런데 30년 동안이나 못 잡았어요? 와아, 이 나라 수사능력을 알 만하네.”

“30년 전에 돌연 범행을 멈추고 사라졌으니까. 그러다가 바로 며칠 전에 범행을 재개했는데, 이번에는 목격자가 있어서 아이가 납치당하기 전에 붙잡힌 거다. 64세의 레오폴드 브리에르. 신분을 세탁한 채 지내고 있었지만, 가택 수색을 했더니 확실한 증거품이 나왔지.”

모든 피해자들의 소지품, 그리고 말라비틀어져 미라가 된 작은 손 서른다섯 쌍. 이 얘기를 하면서 남자는 아주 가볍게 몸을 떨었어. 나는, 뭐, 사실 크게 감흥은 없었고. 몇 달 전이었다면 아마 엄청 흥미를 가졌겠지만 지금은 좀 그렇거든. 범죄자 얘기, 이젠 질렸어. 지루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 생각을 하면 할수록 우울해질 뿐이라고. 우울함이 도저히 가시지를 않아서 물건을 부수는 빈도도 늘었단 말이야. 기숙사 관리인 표정이 점점 썩어가고 있다니까. 그런 상황에서 지루한 사람이 지루한 범죄자 얘기를 가져왔으니 내 기분이 어떻겠어? 비아냥거리고 싶은 기분밖에 안 들지.

“그런데 왜 저한테 왔어요? 승진 축하받고 싶어서?”

“그걸 생각하기에는 아직 남은 일이 있다.”

그러니까 승진 생각이 없는 건 아니란 거네!

“범인의 집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희생자들의 소지품 이외에도 신원을 확인 가능한 다른 아이 세 명의 소지품이 발견되었다. 조회 결과 30년 전에 실종된 아이들의 명단에 있는 이름이었고, 정황상 놈의 희생자가 된 것은 확실하지만 놈의 집에서 그 아이들의 손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애들도 죽였는지, 죽였다면 시신은 어디에 유기했는지, 그걸 알기 전까지는 수사를 종결지을 수 없다는 거죠? 하지만 저는 아는 바가 전혀 없으니까 범인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래요?”

“바로 그 부분이 문제다. 놈은 전혀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아. 무슨 질문을 해도 똑같은 대답만을 반복한다.”

드라마틱하게 말을 끊은 걸 보니 내가 뭔데요? 하고 물어보기를 바랐겠지만, 글쎄, 난 그럴 생각이 없는데. 내가 물어보지 않아도 어차피 말할 거잖아? 실제로도 그렇게 했고.

“내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 이외에게는 아무것도 말해줄 생각이 없다, 그렇게 말하더군.”

아하, 상황 이해했음. 이 사람들은 지금 하루라도 빨리 사건을 종결시켜서 국민감정이라든지 이런저런 압박을 피하고 싶은 거지. 옛날에도 벨기에에서는 마르크 뒤트루인지 뭔지 하는 아동 성폭행범과 관련해서 정치권까지 얽힌 스캔들이 크게 일어났었고,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는 거야. 그래서 경찰은 몸이 달아 있는데 범인은 입을 다물고 있다 이거지. 그렇다고 진짜 순진한 애를 불러다가 희대의 살인마하고 대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인데, 하필 이 아저씨가 예전 친구 논문을 읽다가 딱 좋은 사람을 발견했다는 얘기야. 지적이고 명철하며 살인범과 맞설 용기까지 겸비한, 그래, 내가 스스로 이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하네. 가학적이고 무자비하고 동정심이 없어서 괴물과 맞닥뜨려도 충격을 안 받을 것 같은 애를 몰래 데려다가 범인에게 질문을 시키겠다는 게 경찰 상부의 입장인 거지. 이거 참 무리한 부탁이네. 교수가 질색할 만도 해.

“안 된다고 했잖아.”

자기 환자를 데려다가 비밀리에 살인마랑 대면시키겠다는데 찬성하면 교수 옷 벗어야지. 안 그래? 아니, 적어도 상식적으로는 그렇잖아.

“저 애한테 필요한 건 미친 범죄자가 아니라 친구들이야. 풍부한 감정 경험이라고. 범죄자의 심리를 읽어내는 건 수사관의 역할이지 저 애 역할이 아니잖아?”

“이게 유일한 방법이야, 스텔라! 어려 보이는 경관을 어린애로 가장해서 들여보내는 것도 실패했어. 형량 협상도 실패했어. 놈의 아내랑 자식들 얘기를 하면서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어. 그 놈은 정말로 어린애하고만 대화할 작정인 거야. 저 애가 유일한 희망이야.”

나 같은 애를 유일한 희망이라고까지 말하면 좀 부끄럽지만, 그걸 제외하면 이 다툼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가질 않네. 둘 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잖아. 교수는 내가 그 친구라는 유학생 그룹하고 있을 때마다 얼마나 큰 지루함을 느끼는지 전혀 모르고 있고, 내가 미친 범죄자라는 것도 모른다고. 한편 저 역겨운 남자는 나를 도구로 써먹을 생각 가득이지. 진절머리가 나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뭣보다 내가 지금 관심을 가져야 할 건 전혀 다른 부분이야.

“그 사람한테 아내랑 자식이 있다고요?”

의외잖아, 안 그래? 범죄자가 이중생활을 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의외인 건 의외인 거잖아?

“그래, 가족이 있다. 범행을 저지르던 시점부터 가지고 있던 장거리 트럭 운전기사라는 직업도 있고,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놈이 범인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 했다더군. 30년 내내 범죄 기록도 하나 없고 주변 애들을 건드렸다는 증거도 없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자면, 서른 명 넘는 여자애 손목을 잘라서 과다출혈로 죽을 때까지 강간하고 손을 기념품으로 보관해 둔 미친 소아성애자가 가족도 있고 직업도 있고 평범하게 잘 살고 있었어? 30년 동안이나 사고를 안 쳤어? 그게……, 어떻게 가능해? 그렇게나 많이 강간하고 살인한 사람이, 범행 세부사항 어디를 봐도 강박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충동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그 모든 충동을 참아낼 수가 있단 말이야? 광기어린 충동으로 움직이던 놈이 어떻게, 어떻게 30분도 아니고 30년 동안이나 참을 수가 있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믿을 수 없는 일이야.

난 벨기에에서 겨우 2년 살았고, 고작 그 2년 동안 몇 번이나 지루해 미칠 뻔했어. 그 전에도 마찬가지였어. 어릴 때부터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방화, 동물 학대, 기물 파손, 여동생 살해, 그 외 다수. 나는 이 끔찍한 권태를, 권태가 가져오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충동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어. 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보다도 두 배는 더 긴 30년이라는 세월을 참아냈어. 가족을 만들었어. 같은 직업을 계속 유지했어. 애들을 건드리지도 않았어. 뭔가, 분명히 뭔가 방법이 있었을 거야. 항상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기회만 되면 꿈틀거리면서 뇌에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는 쾌락, 기대감, 충동, 그 모든 것을 잠재우는 그 사람만의 비법이 있었던 게 분명해.

그리고 그건 내게도 필요한 거야.

약으로는 너무 부족해. 무기력해진다고 해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는 건 아니야. 정말 지루함을 참을 수 없을 때는 약을 먹는다고 해도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아. 사람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고 잡아 뜯고 깨물고 베고 가르고 토막을 내고 구워서 바비큐로 만들어버리고, 이것도 솔직히 질렸는데 더 나은 게 생각이 안 나서, 그래서 저런 것들이라도 하고 싶어져.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고작해야 자명종 시계를 망가뜨리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짜증나고, 또 지루하고, 그러면 또 화가 나고 충동이 생겨서, 이상 반복. 아까 교수가 말했지? 내가 전혀 나아진 게 없다고? 맞는 말이야. 이대로라면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아. 그나마 가장 전문가에게 치료받기 위해서 그 애의 말을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도 치료가 안 되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해? 그 애한테 돌아갈 수 없게 되면 이 지루한 세상에 내가 있을 곳은 어디야? 그런데 마침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 거야. 30년 동안이나 자신의 충동을 억제해 온 희대의 범죄자가, 어쩌면 내 치료를 가장 획기적으로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적의 사나이가. 지금은 재미를 따질 때가 아니야. 지루하겠지만,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지만, 그래도 이건 다시없을 기회니까,

“할래요.”

교수님, 그런 얼굴로 보셔도 이미 제 마음은 굳어졌답니다. 이런 기회를 놓치는 건 범죄에요. 그리고 아저씨, 좀 티 나게 좋아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고요, 할 말 더 있으니까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아줄래요?

“조건 몇 개를 달게요. 첫째, 이미 생각은 하고 계시겠지만 이 일은 관계자를 제외하면 철저히 비밀로 해 주세요. 이런 일로 알려지고 싶지 않거든요.”

경찰하고 엮이는 건 솔직히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말이지.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을 생각해보면 경찰하고 친한 것도 이상하잖아?

“그리고 둘째. 어차피 당신들 내 이름 제대로 발음 못 하는 거 아니까, 관련 문서에서든 회의실에서든 제 이름을 언급할 땐 대신 가명을 쓰세요.”

왜냐면 혹시라도 벨기에랑 한국에서 무슨 공동수사를 할 일이 있을 때, 내 이름이 한국 경찰의 귀에 들어가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거든. 사실 이건 변명이지만. 가명을 써 달라는 건 아주 상징적이고 개인적인 이유에서야. 이건 내 인생을 건 중요한 일이니까, 결혼식에서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졸업식에서는 학사모를 쓰는 것처럼 중요한 일에는 그에 맞는 이름을 써야지. 오래 된 예복을 옷장에서 꺼내 입는 것처럼, 내가 쓸 이름은 이거야.

“소녀 A. 이렇게 부르도록 하세요.”

이 이름으로 불리는 건 두 번째네. 응, 두 번째치고는 나쁘지 않은 느낌이야.

 

그래서 나는 지금 ‘소녀 A’라는 그리운 이름을 걸치고 이 나라 최악의 아동성범죄자가 갇혀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어. 최악 대 최악인가, 한국의 자존심을 걸고 국위선양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물론 내 목적은 그게 아니야. 30년처럼 느껴지는 몇 시간이 지나고 목적지에 도착, 온통 지루한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건물 안으로 향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어. ‘핸드픽커’ 레오폴드 브리에르라는 사람에게서 어떻게든 충동을 억누르는 방법을 얻어내는 것. 아무리 지루하더라도 해야 하는 일.

“이쪽 방이다.”

딱 봐도 그쪽 방인 거 같더라. 다들 힐끗힐끗 쳐다보잖아.

“마음의 준비는?”

글쎄, 그런 게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나를 선택한 거 아니었나? 머리의 준비라면 뭐 확실히 되어있지만. 레오폴드 브리에르의 알려진 일생, 한적한 시골의 엄격하고 독실한 기독교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30대에 트럭 운전기사로 취직, 네에 네에. 이것만 보면 어쩜 이렇게 지루한지. 내게 있어 중요한 건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가 아니라, 너무 지루해져서 맛이 가기 전에 빨리 목표를 달성하고 나오는 게 아닐까 싶네.

“할 일이 뭔지는 알고 있겠지? 아이들의 행방, 죽였다면 시신의 위치. 이걸 알아내는 일은 너에게 달렸다.”

아, 그것도 있었지. 지루하겠지만 뭐 그것도 일단 물어볼까. 그 사람이 여자 취향은 좀 깐깐해도, 자기 맘에 드는 여자애만 보면 헤롱대면서 있는 거 없는 거 다 말해주는 부류일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정말 덜 지루할 거야.

 

그런데 아니더라고. 모든 준비가 끝나고 삭막하기 짝이 없는 잿빛 취조실에 들어가서, 강화유리 저편에 앉아 있는 60대 남자를 보는 순간 느꼈어. 이건 쉽게 끝나지 않겠구나, 하고. 머리는 반쯤 벗겨졌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자글자글하지만 체격은 건장하고, 내가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계속 비비고 쓰다듬고 있는 손에는 분명히 힘이 있어 보이고, 계속 이쪽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눈빛은, 그래. 순수하게 기분 나빴어. 위아래로 흩어보고, 핥는 것처럼 쳐다보고, 입맛까지 다시고. 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계속 말은 없고. 먼저 말을 걸어주길 바라는 건가? 그렇다면야 뭐, 배우는 입장이니만큼 기꺼이.

“레오폴드 브리에르 씨 맞죠? 그것 참 의미심장한 이름이네요.”

브리에르는 슬쩍 미소를 띨 뿐 여전히 반응은 없었어.

“이 나라엔 유명한 레오폴드가 하나 있었잖아요? 레오폴드 2세, 벨기에의 국왕. 콩고를 지배하던 당시에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원주민들의 손을 잘라낸 걸로 유명한 아저씨.”

원하는 대로 말 걸었으니까 제발 반응 좀 해라. 당신까지 지루한 사람이면, 나도 조만간 강화유리 안쪽에 갇히는 신세가 될 거란 말이야. 내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녀석은 입을 열었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예상대로 움직여주는 사람은 아니었어.

“그래, 꼬마 아가씨. 나는 아가씨처럼 조숙한 여자아이를 좋아한단다.”

으엑, 목소리 진짜. 기름을 한 바가지 끼얹은 것 같네. 저런 목소리 들으면서 죽었을 애들이 좀 불쌍하긴 하다.

“어른인 척하고, 어른처럼 행동하고, 어른하고 맞먹으려 들고. 하지만 속은 어디까지나 어린아이지. 그 옷은, 과학자처럼 보이고 싶었던 거니? 귀엽구나. 정말 귀여워. 작은 천사들. 그런 아이와 같은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거란다.”

도대체 이 아저씨는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어린애는 맞지만 말이지. 다들 귀엽다고 하는 것도 사실이고. 비엔나 봉봉이 귀엽다고 난리 칠 때도 참 싫었지만 이거랑은 비교가 안 되는구나. 손을 계속 만지작대면서 브리에르는 소름끼치는 눈빛과 목소리를 계속 보내왔고, 그래,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 정말로 정말로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도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그래, 그러렴.”

“어떻게 30년 동안이나 참고 버틸 수 있었죠?”

이거 카메라로 경찰들이 다 보고 있는 거 아는데, 일단 해답을 얻고 나야 뭐가 될 것 같단 말이지. 브리에르는 잠시 손도 멈추고 말도 멈추고 약간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봤어. 하지만 예상대로 원하는 대답은 해주지 않았지. 대신 돌아온 건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종류의, 요점을 가장 불쾌한 방법으로 피해가는 대답이었어.

“그건 별로 귀엽지 않은 질문이구나. 안 그러니?”

“그럼 귀여운 질문은 뭔데요? 당신이 애들 셋을 추가로 죽였냐고 물어보는 거? 시체는 어디 있냐고 물어보는 거?”

이번엔 또 대답 없음. 뭐야, 이 아저씨! 지루함의 정도를 넘어서, 자기 할 말만 하고 아예 반응이 없잖아! 이럴 거면 도대체 왜 여자애한테만 말해주겠다고 한 거야? 내가 이 상황에서 도대체 뭘 해야 돼? 그래, 유혹을 해야 되나? 여기서 옷 벗고 춤이라도 출까? 하나만 벗으면 속옷인데!

“대답을 듣고 싶니?”

그걸 말이라고!

“하지만, 그래, 두드리면 열린다, 해 줄 말은 이것뿐이구나.”

그리고 이걸 대답이라고. 그렇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해답이란 없다 이거구나. 앞으로의 내 삶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만들어 줄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저 사람 말마따나 두드려서 열어야 되는 거구나. 난 이래서 이 세상이 진짜 싫어. 자동차랑 똑같아. A에서 C로 가기 위해서는 B라는 끔찍하게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되잖아.

 

그런다고 그만둘 수는 없지만.

 

경찰들한테는 승진이 걸려 있겠지만 내겐 인생이 걸려 있어. 병의 치료가 걸려 있어. 내 사랑스러운 만나, 내 사랑스러운 소돔과 고모라를 얼마나 더 빨리 만날 수 있는지가 걸려 있어. 그러니까 비록 지루해 죽을 지경이더라도 뭔가 얻어가야 해. 브리에르 저 아저씨는 비록 난공불락처럼 보이긴 해도, 결과적으로는 30년만에 일을 저질렀다가 센스가 떨어지는 바람에 체포된 안쓰러운 변태에 불과하잖아? 이건 풀 수 있는 문제야. 적어도 그 애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풀 수 있었을 거야. 그 애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으면서도 주변 모든 것을 빠짐없이 보는 그 눈으로, 먼저 대상을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았을까.

일단 뭐부터 시작하지? 그래, 저 손. 여자애들의 손을 절단한 범죄자가 자기 손을 쓰다듬고 있어.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는데. 뭔가 힌트가 하나 더 주어지지 않으려나, 아니면 내가 직접 두드려서 구해야 되나.

“오, 무서운 눈빛이구나.”

그래, 말해. 말하라고. 역겹고 지루한 말투지만 뭐라도 말을 하라고.

“그런 눈이 귀여운 거란다, 조숙한 아가씨. 오직 아이들만이 세상을 그렇게 볼 수 있지. 나이를 먹으면 둥글어지고, 세상에 맞서는 대신에 익숙해지고, 자기 나약함을 인정해버리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그런 거란다.”

빙고. 말할 줄 알았지. 이 사람 아까부터 계속 성경을 인용하고 있잖아. 아이와 같은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다, 두드리면 열린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린다, 전부 다. 모든 책이 그렇듯이 성경도 지루하지만, 그래도 어릴 때 부모님 따라서 교회에 다녔던 지루한 기억을 되새겨보면 의외로 몇 군데 재밌는 구절이 있었단 말이야. 이를테면 바로 이 구절이 그렇지.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응?”

아까까지만 해도 능글맞게 웃고 있던 사람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오르는 건, 언제 봐도 참 괜찮은 광경이란 말이야. 아무래도 내가 직격타를 날린 것 같네. 시골의 독실한 신앙인 가정에서 자랐고 계속 성경을 인용하는 걸 볼 때, 아이들의 손을 자른다는 특징적인 행위 뒤에는 분명히 이 구절이 있었을 거야. 아마 손을 자르는 이야기 중에는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것일 테니까.

“그렇게 희생자를 고른 거였네.”

대답 없음. 하지만 이번엔 그 성격이 조금 달라. 내가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해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그 증거로 지금 눈빛이 완전히 바뀌었잖아? 사람이 기대하고 있으면 거기에 부응해 주는 게 상식적인 행동이라고 배웠다고.

“전 귀여운 얘기엔 별로 소질이 없긴 한데요, 그래도 말할게요. 필요한 이야기일 것 같아서.”

그러니까 이런 얘기야. 레오폴드 브리에르는 공공장소, 공원이나 번잡한 거리에서 희생자를 물색했거든? 그런데 아무 여자애들이나 납치했을까? 아니, 소아성애자에게도 특별한 취향이란 게 있어. 이왕이면 마음에 드는 여자애를 고르고 싶고, 그래서 자신만의 조건에 맞는 아이를 선택한다고. 이 사람의 경우에는 그 방법이 성경 구절과 관련되어 있었어.

“손이 범죄를 저지르게 하면 찍어버리라. 당신은 공공장소를 돌아다니다가, 우연이든 아니든 당신을 먼저 손으로 건드린 여자아이를 희생자로 선택했어요. 여자가 자기를 먼저 유혹했다고 변명하는 건 어떤 종류의 성범죄에서든 흔한 변명이죠. 당신도 다르지 않아요. 우연히 건드린 게 당신이 느끼기엔 유혹하는 행위였고,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아이를 납치했겠죠. 어린아이가 어른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건 죄를 짓는 거니까 성경에 나온 그대로 손을 잘라버리고. 이제야 이해가 되네.”

하지만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지. 왜냐면 범인이 자신의 손을 계속 쓰다듬고 있다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정보거든. 손을 잘라낸다는 구절에 집착하는 사람이 자기 손을 만지는 습관이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야. 그건 아마도 그 특정한 구절에 집착하게 된 계기와 관련이 있겠지.

“그리고 내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손을 만지기 시작했으니까, 소아성애자인 당신의 성욕하고 어떤 관련이 있겠죠. 그 증거로 지금은 내가 말하는 것에 집중하느라 성욕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손 쓰다듬는 것도 멈췄잖아요? 제 생각에는, 당신이 그 구절에 집착하는 이유는 스스로도 그에 대한 트라우마와 공포가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래서 성욕을 느낄 때마다 무의식중에 공포가 되살아나 손을 쓰다듬는 거죠. 어릴 때 흔히 짓는 성욕에 대한 죄 중에, 손하고 관련된 게 뭐가 있으려나?”

와아, 저 표정! 말하지 말라고는 차마 못 하고! 하기야 나라도 이런 얘기라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저씨. 어차피 당신의 부끄러운 과거는 내가 만천하에 까발려 줄 계획이니까. 바로 이렇게.

“자위하다가 걸렸죠? 하! 표정 보니까 딱 맞혔네. 엄격한 집안이었으니까, 아마 성경 구절을 들먹이면서 심하게 혼을 냈겠죠. 손이 죄를 짓게 했으니 찍어버려야 한다고. 그 트라우마 때문에 아직도 성욕을 느낄 때면 무의식적으로 손을 만지죠. 어른이 돼서 소아성애 성향이 드러났을 때 그게 범죄 수법에 반영된 거예요.”

대답해 봐, 대답해 보라고. 화를 내도 좋고 울어도 좋다고. 나는 어느 쪽이든 다 좋아하는 포용력이 좋은 사람이니까. 뭐, 충격받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고.

“그런 말……, 정말 귀엽지 않아. 귀엽지 않아.”

“말했잖아요? 그럼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죠. 나머지 애들은 어따 갖다 버렸어요?”

이쯤 되면 나한테 숨겨봐야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다 말하는 게 맞지 않아? 그런데 이 아저씨는 안 그랬어. 정말 상상 이상으로 지루하고 끈질긴 아저씨라니까. 그래도 이제는 난공불락이 아니고 내 이해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어. 이를테면 이 사람은 소아성애자고, 특정한 취향이 있고, 기념품으로 손을 모으는데 그게 발견되지 않은 피해자들이 있고, 그런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취향에 정말로 딱 맞는 아이를 찾았다면, 과연 평소에 하던 것처럼 손목을 간단히 잘라 죽일 수 있었을까? 내가 보기엔 그 애들은 적어도 즉시 죽지는 않았어. 장거리 트럭 운전기사니까 벨기에 어딘가에 비밀스러운 장소를 만들어두고, 거기에 애들을 감금해둔 다음에 찾아가서 계속 범했을 거야. 그럼 먼저 이 아저씨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그 취향이 정확히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보면 되겠네.

어라, 생각할 필요 없잖아? 처음부터 말했으니까. 조숙한 아이라고.

자기를 먼저 유혹했다고 생각하는 아이를 강간하고 죽인 건 그런 애가 싫어서가 아니었어. 오히려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런 짓을 한 거지. 다만 그런 정도의 유혹만으로는 이 사람의 취향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가 없었을 뿐이야. 왜냐면 진짜로 조숙한 여자아이를 좋아하니까. 자기한테 먼저 호감을 보이거나, 먼저 말을 걸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적극적으로 ‘유혹’했던 아이였겠지. 아이에게서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고 호감을 느끼는 거야.

“혹시 나는 싫어요?”

그래서 이렇게 짜증나고 지루하게 구는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란다. 다만……,”

“다만?”

브리에르는 아주 천천히, 기분 나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어.

“너는 좀 다르구나.”

그러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어. 허리를 펴고, 몸을 이쪽으로 기울이고. 아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느낌. 자기를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지, 자기가 던지는 힌트를 얼마나 주워 먹을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는 그 눈빛. 줄여서 말하자면 게임 시작, 그런 얘기지. 슬슬 지루해서 죽을 것 같지만 어디 마지막까지 어울려 줄까.

 

침묵 속에서 브리에르가 먼저 입을 뗐어.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말하자면 이게 게임의 룰이라는 거지. 성경 구절이 힌트다, 이걸 가지고 어디 원하는 답을 얻어내 보아라. 동시에 하필 이 구절을 선택한 건 그거겠지? 자기가 애들을 학대했다면서 수사관들을 도발하려는 거. 물론 나는 이런 지루한 도발에 먹혀들 사람이 아니지만. 정말이지, 애들을 잘 구워서 식당 손님들한테 내놓았다고 했어도 내가 눈썹 하나 깜짝했을 것 같아? 나는 그저 이 게임만 빨리 끝내고 답이나 얻어 가면 그만이라고.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나는 고개를 저었고, 그랬더니 바로 다음 구절이 브리에르의 입에서 튀어나왔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뭐야, 이건. 구차한 자기변명인가? 어릴 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자기가 범죄자가 되었다고 주장하려는 거? 사실여부랑은 상관없이 그건 내가 전혀 원하는 얘기가 아닌데ㅡ아니야, 그렇다고만 보기에는 ‘길’이라는 단어가 수상해. 처음에 경찰들한테 말했던 것처럼, ‘아이’인 나한테 피해자들이 있는 장소로 가는 ‘길’을 가르쳐줄 생각인 걸까? 이런 불확실하고 질질 늘어지는 심리 게임은 좋아하지 않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한번 떠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이런 식으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이거 맞나? 옛날에 교회에서 자주 들었는데.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봐, 내 기억력이 의외로 꽤 괜찮다니까. 지금 브리에르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자기가 답을 알고 있으니까, 적절한 질문을 던지면서 그게 무엇일지 한 번 알아맞혀 보라고. 정말이지 끝까지 불쾌하기 짝이 없어요. 난 당신하고는 달라서 성경을 달달 외우지는 못한단 말이야. 고작 이런 구절로 직구를 던지는 게 고작이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번역하자면 ‘시간 끌지 말고 슬슬 말하시지’, 아마 녀석도 이해했을 거야. 표정이 그렇거든. 내가 어디까지나 어울려주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조금 더 달콤한 힌트를 주겠다는 느낌? 아니면 희망사항?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그래, 희망사항이었네. 이 아저씨한테 명쾌한 답을 바란 내가 잘못이지. 찬송가 어디에 있었던 구절 같기는 한데, 이게 무슨 소린지 도저히 모르겠다니까. 게다가 젖 먹는 아이라고? 이 사람 그렇게 어린 애들을 건드리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자기가 애들을 키우긴 했지만, 어라, 잠깐, 그래, 이 사람 분명히 가족이 있었다고 했지. 아내도 있고 애들도 있고. 이거랑 관련이 있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직접 물어보면 이 지루한 아저씨는 분명히 대답 안 해주겠지? 우리 집에 분명히 성경 구절 새겨진 장식용 액자 같은 게 있었는데, 거기 나온 구절이 뭐였더라. 그 구절을 던지면 먹힐 것 같은데. 매일 지겹게 봐서 분명히 기억하고 있단 말이야.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아 진짜 뭐 이렇게 길어,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아 까먹었잖아…….”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그래, 그거. 정답으로 처리해주는 거야? 의외로 또 말이 통하는 아저씨네. 내가 해답에 거의 다 도착한 게 분명해. 브리에르는 말을 마치고 또 한참 동안이나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어. 정말 지겨운 싸움이었지만 결국엔 뭔가 해낼 수 있었던 거야. 으으, 저 짜증나게 만족스러운 얼굴을 보라고.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그렇구나.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렇게 많은 애들을 강간하고 죽인 사람이 왜 갑자기 범행을 멈추고 결혼해서 애까지 낳았을까? 왜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한테만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을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을까? 브리에르의 마지막 말로 모든 게 명확해졌어.

범행 도중에 브리에르는 정말로, 정말로 마음에 드는 여자애를 만났어. 조숙하고 매력적이고 어른스러운 아이, 한 번 강간하고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고,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은 그런 아이들. 사랑을 느꼈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그건 빈말로라도 내가 자신 있는 주제는 아니니까. 적어도 상당한 수준의 호감은 있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이 사람은 그런 아이를 어떻게 하려고 했을까? 사람이 사람을 정말로 좋아하게 되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야 간단하지. 내 사랑과 계속 같이 있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으니까, 일단 납치해 두고, 자기 말을 잘 듣도록 때로는 친절하게 대해주고 하다 보면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노예가 되어 철저히 복종하고, 자기 신분처럼 그 애들 신분도 세탁하고, 그러면 다음에 울리는 것은 결혼 행진곡.

하지만 과연 브리에르의 마음에 든 여자애가 하나뿐일까? 그렇게나 많은 애들을 강간하고 다니다보면 조숙한 여자애들도 많이 만나게 될 거 아냐. 마침 직업도 장거리 트럭 운전기사. 사방을 여행하다가 맘에 드는 여자애를 만나서 다시 호감을 느끼면 또 납치해서, 벨기에 여기저기에 저마다 다른 신분으로 다른 가정을 꾸리고 살 수 있지. 이 사람이 자주 다녔던 지역을 중심으로 수색하다 보면, 지금은 아내가 되어 있는 다른 희생자 두 명도 찾을 수 있을 거야.

“어때요, 이번엔 귀여웠어요?”

브리에르는 대답 대신 느리게, 싱글싱글 웃으면서 손을 들어 박수를 치기 시작했어. 짝, 짝, 짝. 나는 더 큰 박수갈채를 받을 자격이 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하도록 할래. 정말로 정말로 지루한 시간이었어. 사이렌이 울리고, 슬슬 이 변태하고도 작별인사를 해야겠네.

“그 전에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강화유리 저편의 문이 열리고, 권총으로 무장한 수사관들이 브리에르를 데려가려다가 순간 멈칫했어. 아직 얘기 안 끝났어요, 이 사람들아. 브리에르의 시선은 수사관이 들어오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고 나한테 계속 고정돼 있더라고.

“물어보렴.”

말 안 해도 물어볼 거야. 내 인생이 걸린 질문이니까.

“어떻게 30년 동안이나 참고 버틸 수 있었죠?”

저 표정! 깜짝 놀라는 표정! 자기 앞에 지금까지 앉아 있던 아이가, ‘조금 다른’ 여자아이가 정말로 어떻게 다른 아이였는지 이제야 조금 이해하기 시작한 거네! 대답하라고요, 아저씨. 당신하고 나는 비록 성적 취향도 다르고 범죄 수법도 다르지만, 그래도 크게 보면 비슷한 점도 꽤 있잖아.

“그래, 말해 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어떻게 그 충동을 참을 수 있었는지. 어떻게 모범적인 직장인이자 가장으로 살아갈 수 있었는지. 30초도 30분도 아닌 30년 동안이나. 아내 덕분이었을까? 성욕을 분출할 수단이 생겨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되었을까? 하지만 정말 그것만으로 범죄적인 충동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까? 내 의문에 대해 브리에르는 큼지막한 양 손을 펼쳐서 강화유리에 대고, 깜짝 놀랄 정도로 부드럽게 웃으면서 대답했어.

“가족이 생기니까 시간도, 돈도, 모든 것이 부족하더구나. 어떻게든 자제해야만 했지. 그러던 도중에 떠올렸단다.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성수를 찍는 걸.”

아, 아 그러니까,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매일 아침 손을 씻었단다. 수십 번씩, 아주 깨끗하게. 그러고 집을 나서면서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깨끗이 씻었으니 더럽히지 말아야지, 절대로 더럽히지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정말 귀여운 아이를 보았을 때도 참을 수 있었단다.”

그런 방법이 있었어! 그래, 손을 씻는다는 행위 자체가 죄책감을 덜어주는 기능이 있다고 들었어, 심리적으로 손을 씻는 건 곧 죄를 씻는 것과 같은 거야! 그러니까 손을 씻어서 깨끗이 하고 나면, 여자애한테 손을 뻗으려다가도 무의식적으로 생각이 드는 거야. 이러면 손이 더러워질 거야, 그러니까 하지 말아야지, 하고! 이 방법은 분명히 효과가 있어. 먹히는 방법이야. 하지만……,

“30년, 그래, 30년만이었지.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날, 그 날 그 조그만 아이가 내 손에 아이스크림을 묻히고 지나가기 전까지는.”

손이 더러워지는 순간 이 방법은 효력을 상실해. 그래서 30년 만에 다시 범행을 저지르려 했고, 그래서 다시 붙잡힌 거야.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 브리에르 본인도 일을 저지르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떠올렸을 거야. 그래서 지금 나한테 이렇게 말하고 있잖아.

“너는 똑똑한 아이니까,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니까, 분명히 이것보다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낼 수 있겠지. 꼬마 아가씨, 뱀처럼 지혜로운 아가씨.”

그 말이 마지막이었어. 브리에르는 수사관들에게 이끌려 유리 저편을 걸어 천천히 사라졌고,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어. 내가 가만히 서 있는 건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야. 머릿속이 너무 바빠서 지루함이 조금 늦게 찾아온다는 뜻이니까. 브리에르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문이 열리면서 나한테 무슨 나쁜 영향은 없었는지 당장 상담을 해야겠다는 교수가 뛰어 들어왔을 때도 내 머릿속을 휘젓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어. 교수의 질문이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괜찮나요? 정말로 괜찮나요?”

그래, 어쨌든 시도해 볼 가치는 있을 것 같다. 인생은 실험이니까. 끊임없는 실험만이 삶을 조금이나마 더 즐겁게, 더 낫게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해야 할 실험은,

“저, 교수님?”

지금 해야 할 실험은 당연히,

“잠깐 화장실에서 손 좀 씻고 와도 될까요?”

그래, 먹혔으면 좋겠네. 이 방법이 약만큼이나 효과가 있었으면,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이 내 삶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으면, 노트북이며 마우스며 샤워기며 주변 사람들을 조금 더 오래 데리고 있을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어. 적어도 이 나라 최악의 범죄자 ‘핸드픽커’한테도 30년 동안이나 효과가 있었던 거잖아? 나한테는, 나한테는 30년도 필요 없어. 빨리 치료를 마치고 그 애한테 돌아갈 거야. 그때까지만, 그 애가 나한테 다시 즐거움을 줄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단 말이야. 그게 몇 년이나 걸릴까? 나는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아니야, 버텨내야만 하는 거야. 이 방법이 효과가 없으면 조금 바꿔서라도, 또 조금 바꿔서라도, 벨기에에서 한국으로 돌아가서 그 아이를 이 손으로 처음 만질 때까지.

 

물이 차갑네.

 

지루한 감각이지만, 앞으로 잘 부탁해.

 

-----

 

그래서 손은 깨끗하게 씻어야 하는 겁니다.

 

로크네스

Queerer than we can suppose

1 댓글

마드리갈

2021-01-13 21:55:57

손이라는 신체부위는 참 여러가지를 말해주죠.

그래서 수상술이니 수지침이니 하는 것들이 있어왔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기에 사람과의 관계형성이 손을 잡고 싶어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반면에 손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이렇게 끔찍한 손 절단 및 수집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게 어쩌면 인간의 잔혹한 면에 내재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그나저나 푸파의 옷차림, 괜찮은 걸까요. 최소한 제 상식선에서는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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