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교 이야기
작년 12월 대강당에 글을 쓴 뒤로 자퇴 대신 휴학을 생각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고 계속 고민했습니다. 휴학 신청을 받는 직전까지 망설였지만, 생활 패턴이 많이 무너진 상태였고 부정적인 감정에서 쉬었다간 이도저도 이루지 못 할 것 같았기에 이번 학기까진 다녀보자 결심했습니다. 막상 학기를 시작하니 입학한 동기 중 절반이 안 보였기에 놀랐어요. 남자들이야 군대 문제와 관련해서 안 보일 것 같다 예상했지만, 여자들이 안 보일줄은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다행스럽게도 그간 친분을 다져놓은 동기들은 모두 들어와있었습니다. 오히려 복학한 선배들의 얼굴을 외우느라 고생했네요.
학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학과별 해외문화탐사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에 신청해서 발표를 한 일이 있었어요. 처음엔 교수님의 제안으로 팀이 이뤄졌고, 동기들과 후배들이 모여서 자료를 조사하고 제작하고, 발표 연습을 해서 올라갔죠. 비록 떨어졌지만 같이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어요.
가장 놀랐던 건 팀을 리드한 동기 언니의 마음가짐이었어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혼자서 자료를 제작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는데, 다음날 "혼자서 한다면 전부 할 수야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의 배울 기회를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고 했거든요.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반드시 붙는다는 전제를 염두에 두고 진행했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자료를 조사해오고 개개인을 믿어줬어요. 지금까지 제 주변의 어른들은 모든 걸 혼자서 해내는 사람, 남에게 맡기느니 내가 빨리 끝내버리는 초인적인 사람이었기에 더욱 생각할 거리가 많았어요.
발표를 진행하는 동안에 동기들과 이야기하면서 저에 대한 평가를 듣게 된 것도 기억에 남아요. 제가 학교생활을 하는 것에선 진심으로 좋아서 한다는 게 느껴져서 다들 주목했고, 교수님들도 가장 좋아하는 학생이라 꼽으셨대요. 칭찬을 듣는 건 익숙하지 않아서 민망했지만, 지금까지의 저를 부정하던 느낌이 씻겨내려가서 정말 기뻤어요.
이 외에도 교수님의 신작 소설 사인회에 참석한 일, 매년 있는 영성수련 행사에서 독특한 종교적 관점을 들은 일이 특히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입학한 때부터도 인상 깊은 일이야 많았지만, 이번 학기는 특히 기억에 남을 일이 생긴 것 같아요.
2. 아르바이트 이야기
처음으로 아르바이트한 친척의 식당과 편의점에서 정신적으로 크게 상처를 받아서, 아르바이트는 다시 안 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원하는 걸 제때 살 수 없다는 불편함, 용돈을 받을 때마다 드는 죄책감, 결정적으로 중간고사를 끝마친 후 매일같이 드는 쓸모없는 인간이란 자괴감을 떨쳐내고자 하는 욕망에 자리를 물색하게 되었지요. 다행히 가까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게 되었어요.
처음 일하는 환경이라 잔뜩 얼어붙고 긴장해서 갔는데, 막상 분위기는 굉장히 편안하더라구요. 하루종일 일하는 시간이라 아침을 먹고 왔더니 오히려 놀라면서 (....) 밥을 제공해주니 다음부턴 그냥 오라고 하시더군요. 일이 익숙해지는 한달간은 주방 일보단 설거지를 위주로 맡긴다고 하셨는데, 막상 들어가니깐 식기세척기가 떡하니 서 있어서 기계에 넣기만 하면 되었구요. (....) 설거지가 밀리기 전에 해치우려고 그릇을 문지르고 있으면 쉬었다 하라고 오히려 권유하셔서 이렇게 있어도 되나 하고 안절부절했어요. 주방 담당 분들이 수시로 말을 붙이고 이야기를 들려준 덕분인지 이제 2주째가 지났지만 마음은 벌써 1년을 다닌 듯 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약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홀을 담당하는 분과 이야기가 안 된다는 점이예요. 홀 분은 주방 분들과는 편하게 이야기하지만 제가 말을 붙이면 입을 열려고 하질 않아서 벌써부터 미움받은건가 하는 생각도 간혹 들어요. 그렇지만 제게는 같이 일하는 주방 분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하고, 이야기도 잘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다지 큰 걱정거리는 아니예요. 오히려 주방 일에 얼른 익숙해졌으면 하는 갈망이 더욱 크네요.
돈많은 백수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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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SiteOwner
2014-05-14 22:33:35
숙독하느라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잘 빠져 나오셨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모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불식될 기회가 마련된 것이야말로 다시 없는 호재로 보입니다.
그 언니분의 말씀이 옳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은 협업과 분업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협동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성장하는 과정은 정말 중요한 법입니다.
그리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의 일에 잘 적응하고 계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홀 담당과 주방 담당은 일단 일하는 영역이 다르니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열리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니까 조급해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이전보다 좋아진 근황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휴양중인 제 동생에 대한 격려도 아울러 고맙습니다.
대왕고래
2014-05-16 15:51:33
꽤 좋아지신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앞으로도 더욱 좋은 모습 보고 싶습니다.
아르바이트라...저는 해 본 적이 없어요.
부담이 든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요? 그래서 생각하셨던 것들을 보니까, 역시 제가 너무 모자란 느낌도 들고 그렇네요.
팀 발표에 대한 것도 봤어요. 언니분 말씀이 마음에 와 닿네요. 혼자서 할 수도 있지만 다른 조원들에게는 이득이 되지 않죠. 진짜 이득은 체험이니...
아무튼 정말 좋은 체험을 많이 하셨어요.
마드리갈
2014-05-18 20:27:47
그러셨군요. 전반적으로 많이 좋아진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예요.
저는 사정상 1년 휴학을 해야만 했던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복학 후 사람들이 저를 보고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며 걱정을 했던데, 아스타네스님이 느꼈던 상황인 여자동기들이 안 보이는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 같아요.
현대사회에 필요한 것은 개개인의 역량이기도 하지만, 그 개인들의 역량을 같이 빛나게 할 수 있는 팀웍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어요. 그 점을 주변인들에게 배울 수 있는 아스타네스님은 상당히 복받았다고 보여요.
뭐랄까, 이런 시선은 조심스럽지만요, 인정받고 자존심도 올라가고, 사는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니 많이 성장하신 게 느껴지고 있어요. 그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좋은 소식을 들려 주셔서 정말 깊이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