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널 창작물 또는 전재허가를 받은 기존의 작품을 게재할 수 있습니다.
삐비빗- 삐비빗-
3월 3일 월요일의 아침. 시계는 7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세훈은 눈을 비비며 누운 채로 시계를 본다.
“아... 뭐야.”
세훈은 알람을 끄고 다시 잠자리에 든다. 그로부터 또 10분 후.
삐비빗- 삐비빗-
또다시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다. 세훈은 또다시 침대에 누운 채로 손을 시계로 뻗어 알람을 끄려고 한다. 그 때...
“일어나세요, 세훈 님. 7시 30분이에요. 학교 가야죠.”
세훈의 인공지능 ‘NURI’의 목소리다.
“으으음...”
“세훈아! 안 일어나고 뭐해!”
곧이어 들리는 다른 목소리. 이건 세훈의 어머니 이진의 목소리다.
“아... 엄마. 일어날게요.”
세훈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계는 7시 31분을 가리키고 있다. 세훈은 그 길로 방을 나와 세수를 간단히 한다. 화장실을 나와 식탁에 앉는다. 테이블에는 토스트가 차려져 있다.
“너 오늘 고등학교 가는 첫날인데 너무 늦는 거 아냐?”
“아... 이 정도쯤이야... 빨리 먹고 가면 되죠!”
“빨리 먹어.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한다.”
“참, 아빠는요?”
“아빠? 오늘 좀 일찍 나갔어.”
“......”
세훈은 토스트를 베어물어 먹으며 TV를 본다. 아침 뉴스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간추린 소식입니다. 세나토 시의 부동산 가격이 1년 연속으로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국토건설성이 종합 부동산대책을 늦어도 이번 달 10일까지 발표하기로 하였습니다. 아테나 행성이 행성 발견 350주년 기념제를 이번 달 8일에 12개주 공동으로 개최합니다. 성간교통성은 최근 자주 출현이 보고되고 있는 미확인 천체와 관련해, 우주선 운행 회사들에 특정 항성계에서의 주의를 당부하였습니다. 스틸레지드에 있는 제1 인공지능 연구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뭘 그렇게 넋놓고 있는 거야?”
이진이 또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빨리 안 가?”
“아, 알았다니까요.”
세훈은 먹는 속도를 높인다. 깊게 맛을 못 보는 게 불만이지만 어쩌랴. 어느덧 식사를 다 한 세훈은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한 다음 방에 다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다. 시계를 보니 7시 48분. 자신도 모르게 앞에 있는 교복을 한 번 만지작거린다. 대체로 자줏빛 바탕에, 상의에는 금색 단추가 달려 있다. 다른 학교들의 교복들에 비하면 화려하거나 특이하거나 세련되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다 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보니, 앞에 고등학생이 한 명 서 있다. 세훈은 다시 미소를 짓는다. 이제... 진짜 고등학생이구나!
곧이어 세훈은 가방을 챙긴다. 어차피 첫날이라 아무것도 가져갈 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뭐 하나 빠진 것 있나 다시 한 번 살펴본다. 확인이 끝나자 세훈은 가방을 옆에 끼고 방을 나선다. 이진이 또 한 마디 한다.
“뭐 빠진 거 있어? 또 다시 돌아와서 챙겨가지 말고.”
“없어요. 다 보고 나왔는데.”
“그래도 한 번 다시 봐. 너 항상 보면 빼먹는 것 많잖아.”
“에이! 없다니까요.”
이진은 그래도 영 못미더운 듯한 얼굴로 말한다.
“그럼 알았어. 이따가 전화해.”
“왜... 왜요?”
“그 때 되면 알아. 알았지?”
“다녀오겠습니다!”
세훈은 집을 나선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창밖을 본다. 창 밖에는 모처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보인다. 세훈은 또다시 자기도 모르게 교복을 만지작거린다. 괜히 기분이 좋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한다. 42층에서 지하 2층, 마천루가 가득한 풍경에서 지하상가로 바뀌는 건 1분도 걸리지 않는다. 지하 2층에 도착하자, 가지각색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지하철역 쪽으로 가고 있다. 세훈과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여럿 보인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세훈이 아는 얼굴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다, 이 아파트단지에 내가 아는 얼굴이 하나쯤은 있을 텐데... 다들 먼저 가 버렸을지 모른다. 아니면 아직 안 나왔든가. 시계를 보니 지금 시간은 아침 7시 50분이다. 게다가 지금 세훈이 있는 곳은 지하철역 입구 바로 앞이다. 세훈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분명히 있을 텐데...
세훈은 잠시 서성이다가 지하철역 출입구 안으로 들어선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다. 역시 세훈이 찾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개찰구 안으로 들어간다. 한 계단만 내려가면 승강장이다. 가지각색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정장을 입은 회사원들, 그 외에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하지만 세훈이 아는 얼굴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상하다... 분명히 있을 텐데... 세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그래도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다. 분명히 있을 텐데... 어느덧 승강장에 발을 디딘다. 주위를 둘러본다. 역시,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다.
“잠시 후 미린, 미린 방면으로 가는 급행열차가 도착합니다. 열차에 타고 내리실 때 혼잡하오니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나오고, 잠시 후 열차가 도착한다. 내리는 사람들이 내린 다음, 세훈은 앞에 선 사람들을 따라 열차 안에 탄다. 열차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그래도 다행히 팔을 움직일 공간 정도는 있다. 세훈은 출입문 위에 있는 스크린을 본다. 스크린에는 광고가 나오고 있다. 맨 처음에는 RZ백화점 광고가 나온다. 백화점이야 주말이면 친구들과 지겹도록 갔다. 그 다음에 나오는 건 여성용 화장품 광고다. 세훈은 볼 것도 없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번 8월에 한다는 오디션 광고다. 음... 오디션이라... 노래 실력 하면 나도 좀 할 것 같은데... 아니, 아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해야 되는데... 바로 그 때.
“이번에 도착할 역은 미린역입니다. 5호선 및 미린 라이트레일로 갈아타실 수 있습니다. 이번 역은 타고 내리는 승객이 많은 편이므로 내리실 때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버... 벌써? 그렇다면... 바로 다음 역인데? 세훈은 주위를 둘러본다. 세훈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큰일이다! 이 대열에서 좀 물러나 있어야 안전한데... 하지만 세훈이 그렇게 생각할 틈도 없이,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일제히 내린다. 세훈은 사람들 틈에 떠밀려 열차 밖까지 밀려나온다. 그나마 열차 밖으로 나오자마자 재빨리 사람들 속에서 빠져나온 게 다행이다. 세훈은 일단 한숨을 돌리고는 다시 열차에 탄다. 그리고 아까 탔던 만큼보다는 못하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열차에 탄다. 세훈이 가만히 보니 그 중에는 세훈과 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들이 좀 있다.
“음... 잠깐...”
세훈이 가방을 들어서 뭔가를 보려는데, 갑자기 열차가 덜컹 하더니, 세훈의 몸이 중심을 잃고 옆으로 기운다. 세훈의 등이 누군가에게 닿는다.
“아... 아...”
세훈은 뒤를 돌아본다. 짧은 머리를 한, 보통 사람보다 머리 반 정도는 더 커 보이는 사람이 거기 서 있다. 곧바로 세훈의 얼굴이 붉어진다.
“아... 죄, 죄송...”
“미안해할 것 없어.”
그 사람이 손을 저으며 말한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세훈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잠시 후 미린대학역에 도착합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내리실 때 발밑을 한 번 더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나온다. 이제 내려야 한다. 세훈은 가방을 꼭 쥔다. 이윽고 문이 열린다. 그 사람은 문이 열리자마자, 세훈이 뭔가 말을 해 보기도 전에, 누구보다도 빨리 뛰어서 계단을 오른다.
“휴...”
세훈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속도로 열차에서 내린다. 계단을 올라가며 보니 대학생이나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온통 같은 교복뿐이다. 혹시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지만, 역시 익숙한 얼굴은 안 보인다.
“하... 정말로 이상한데. 이 시간이 사람이 가장 많을 시간일 텐데...”
아무리 둘러봐도 세훈이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계단 위를 올려다봐도, 개찰구 쪽을 돌아봐도. 역시 없다.
“하는 수 없지...”
계단을 올라가려다가, 세훈은 편의점을 발견한다. 곧장 음료수 코너로 간 세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레드 소다’ 하나를 꺼낸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하나 더 꺼낸다. 아무래도 하나보다는... 2개가 낫겠지... 계산을 마치고 나가려니 점원이 세훈을 불러세운다.
“손님, 잠깐만요!”
“에... 뭐... 뭐 잘못된 거라도...”
“아니, 다름이 아니라, 못 보던 얼굴이라...”
“아, 신입생이거든요.”
“그... 그렇군요. 그럼 또 오세요!”
편의점을 나서자마자, 세훈은 출입구의 계단을 오른다. 방금 전보다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시간을 보니 8시 10분. 출입구 밖에 나와 보니 큰 도로가 보이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큰 육교도 하나 보인다. 도로 맞은편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고 건물이 몇 채 있는데, 미린 대학의 캠퍼스다. 그러고 보니까 세훈이 오늘부터 다니게 될 미린 고등학교는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까지 모두 있는 ‘미린 교육재단’ 소속이라고 들었다. 또 미린 대학 하면 명문학교로 알려져 있다 보니 고등학교의 명성도 더불어 높은 편이고, 그래서 학교에 재단이 투자를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뭐... 교복을 보면 얼른 그런 게 연상이 되지 않기는 하지만...
“어, 세훈이 아냐? 너, 오랜만이다?”
누군가 세훈의 뒤에서 말을 건다. 세훈이 뒤를 돌아보니,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여학생 한 명이 있다.
“응...? 너 디아나잖아.”
“그래, 맞아!”
이 여학생의 이름은 디아나 릴리엔탈. 세훈과는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얼마 만에 보는 거지?”
“음...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는 다른 데 다녔으니... 한 3년 만인가? 너 어디 다녔지?”
“아, 가족 일 때문에 잠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가, 한 달 전에 다시 근처로 이사를 왔거든.”
“그래...? 나는 왜 몰랐지?”
세훈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뭐... 그야 당연한 거잖아.”
디아나가 웃음을 띠며 말한다. 디아나가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세훈의 걸음이 느리다.
“그건 그렇고 왜 그렇게 걸음이 느려? 오늘은 그냥 개학식만 하고 갈 텐데, 왜 이렇게 활기가 없는 거야?”
“아... 다른 건 아니야.”
“왜 그러는 건데? 말 좀 해 봐.”
“찾는 사람이 있어서.”
“찾는 사람? 나 말고도 또 누가 따로 있는 거야?”
세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디아나는 잠시 언짢은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누구를 말하는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알았어! 그럼 이따가 보자고.”
디아나는 세훈을 놔두고 먼저 걸음을 재촉한다. 세훈의 걸음걸이는 좀 더 느려진다. 등 뒤도 몇 번씩이고 돌아본다. 하지만 아직 보이지 않는다. 세훈이 그토록 찾는 그 사람은. 천천히 걸으면서 주위를 몇 번이고 둘러본다. 조금 걸어가니 도로 맞은편에 미린 대학의 정문이 보인다. 안내 표지를 따라 대로변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니 주변은 주택가다. 그것도 정원 딸린 저택들이 많은 편이다. 부자들이 사는 곳인가 보다, 하고 생각한다. 조금 걸어가니 바로 교문이다. 교문에 서서 시계를 본다. 8시 25분. 학생들이 가장 많이 들어올 시간이라 그런지 점점 더 어수선해진다. 교문 앞에는 몇 명이 서 있는데, 다들 누군가를 기다렸다가 만나서 들어가려는 듯하다. 세훈도 우선 교문 앞에 선다. 교문 너머의 학교 건물을 돌아본다. 뭔가 세훈이 다녔던 초등학교나 중학교보다는 커 보인다. 아마 부대시설이 많은 편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단순히 세훈의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세훈은 또다시 교문 앞에 서서 대로변 쪽을 본다. 아직 세훈이 기다리는 사람은 안 보인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한다. 도로에 보이는 차들은 느리게 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느려진다. 정문을 통과하는 학생들도 점점 더 많아진다. 그리고 좀더 멍때리고 기다리다 보니, 이제 학생들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 8시 40분.
그냥 들어갈까...
세훈의 머릿속에 이 생각이 스친다. 아무리 생각해도 둘 중 하나다. 늦잠을 잤다거나, 아니면 이미 세훈보다 먼저 들어갔거나.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세훈은 결심한다. 그냥 먼저 들어가야지... 어차피 이따가 볼 테니. 세훈은 등을 돌려 교문 안쪽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 때...
“어...? 누구야?”
갑자기 누군가 세훈의 어깨를 짚는다. 세훈은 등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곳에는... 갈색 머리의 여자 교복을 입은 학생이 한 명 서 있다. 세훈의 입이 딱 벌어진다.
“주리잖아!”
“아, 이게 어찌 된 거람... 우리는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됐네.”
역시 미소를 가득 띠고 있는 그 여학생의 이름은 공주리. 세훈과는 유치원부터 같이 쭉 다녀 온 소꿉친구다.
“뭐, 그거야 당연한 거잖아... 같이 시험 쳐서 온 거니까.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늦었어?”
“아, 오늘은 좀 늦게 일어나서 말이지...”
“늦게 일어났다고? 초등학교하고 중학교 때는 항상 나보다 일찍 등교하던 네가 웬일이야?”
“그러게...”
주리는 잠시 뜸을 들인다. 세훈은 잠시 교문 바깥을 돌아본다. 시간은 벌써 8시 45분. 아직도 교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들어갈까...”
“그래.”
세훈과 주리는 발걸음을 교문 안쪽으로 돌린다. 고개를 이쪽저쪽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한쪽에는 육상 트랙과 축구장, 농구장, 야구장 등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학교 건물도 대리석으로 된 외벽이 뭔가 고급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이 학교 온 것... 잘 온 거겠지?”
“다녀 봐야 알지. 그건 그렇고, 너는 무슨 반이야?”
“나...? G반인데.”
주리의 대답에 세훈의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G...반? 잘 됐네! 나하고 같은 반이잖아.”
“오! 그것도 참 신기한데.”
주리는 시계를 본다. 이제 시간은 8시 48분.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은 빨리 들어가자. 이러다가 늦는 거 아냐?”
세훈과 주리는 교문 안쪽으로 들어간다. 정원과 운동장 등을 빠르게 지나쳐서, 두 사람은 본관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G반은... 어디지?”
세훈이 주리에게 묻는다.
“저쪽에 안내도 보면 나오잖아.”
안내도에는 G반이 2층에 있다고 나와 있다. 세훈과 주리는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간다. G반은 계단에서 멀지 않다. 바로 교실 안으로 들어간다. 교실 안은 꽤나 넓은 편이다. 한 반의 정원은 30명 정도로 보이는데, 책상을 널찍하게 떼어 놓고 앉아도 공간이 남아돌 정도다.
“어? 세훈이 아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세훈이 가보니, 디아나가 교실 한쪽 자리에 앉아 있다.
“너도 같은 반이었어?”
“그러게... 너도 같은 반일 줄은 몰랐는데.”
세훈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여, 안녕?”
그 때 세훈의 뒤쪽에서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와 동시에 금발 머리의 한 남학생이 세훈 옆에 가서 앉는다.
“아, 이게 누구야. 너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반갑다.”
“반갑기는 무슨. 3년밖에 안 됐는데.”
이 남학생의 이름은 미셸 카스티유. 세훈과는 초등학교 때 처음 알게 되었으며,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서로 연락이 없었다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중학교 때는 어디 있었는데?”
“에이, 뭐 그걸 미리 알려고 그러냐. 천천히 알게 될 텐데.”
미셸은 잠시 시계를 본다. 시계는 8시 55분을 가리키고 있다.
“그건 그렇고... 너희들 학교 끝나고 RZ백화점이나 갈래?”
“아... 시간 없어. 엄마가 학교 끝나자마자 빨리 뭐 할 게 있다고 전화 하랬는데...”
“야! 넌 아직도 엄마 말에 고분고분하냐.”
“나 평소에는 안 이래. 뭔가 큰 일이 있어서 그러는 것 같기는 한데...”
“아... 알았어. 그럼 다음 기회에 가지 뭐.”
미셸은 아쉬운 듯 창밖을 내다보며 말한다.
“주리, 너는 돼?”
“아니, 나도... 안될 것 같은데. 나도 집에서 빨리 오래서...”
“아니, 왜 다 시간이 안 맞아. 주말 빼면 오늘 같은 날도 없다고. 하... 그럼 나하고 디아나만 가지 뭐.”
미셸은 시무룩한 표정이다. 세훈은 미셸에게 미안해하기보다는, 주리의 반응이 더 흥미롭다. 잠깐... 왜 주리도 나하고 같이 빨리 가야 된다는 거지?
“야, 주리, 너 근데 왜 빨리 가야 된다는 거야?”
“몰라, 엄마가 빨리 오라는데, 무슨 일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잠깐, 분명 세훈의 어머니도 일찍 오라는 말을 했을 터이다. 그러면 혹시...
“응? 너도 너희 엄마가 빨리 와야 된다고 했어? 뭣 때문에?”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그냥 엄마가 너무 늦지 말라고 해서. 자세한 건 이따가 가보면 알겠지.”
그리고 바로 그 때, 교실 문이 열리더니 옆에 책 한 권을 낀 선생이 들어온다. 선생을 처음 본 세훈의 머릿속에는 ‘의외’, ‘신선함’ 이 두 가지가 순간적으로 스친다. 한눈에 보기에도, 선생의 외모는 학생들과 별로 차이가 안 나 보인다. 어떤 학생들 중에는 오히려 선생보다 나이 들어 보인다 싶은 학생도 있다. 그건 그렇고... 선생이 너무 갑자기 들어왔다. 자기들끼리 모여 앉았던 학생들은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런데... 세훈과 주리가 있는 자리는 하필이면 교탁 바로 앞이다!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다.
“아, 여러분!”
선생이 입을 연다.
“굳이 일부러 제자리로 돌아간다거나 할 필요 없어요. 오늘은 그냥 짧게 끝날 테니까, 긴장 같은 건 안 해도 돼요.”
선생의 말에 교실 안은 일단 진정된다. 세훈도 주리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요즘은 젊은 선생들이 오히려 학생들에게 무섭게 대한다는 말을 얼핏 듣기는 했는데 여기는 아닌가 보다. 선생은 계속 말을 잇는다.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키라 미호’라고 합니다. 문학 과목을 전담하고 있고요, 여러분과 나이 차이는 별로 안 날 거예요. 그렇다고 그냥 마냥 편하게만 생각해서는 안 돼요. 자! 그럼 다음으로 들어가서, 우리 학교가 어떤 곳이지 알아야겠죠? 우선...”
“예상했던 대로... 다 그렇지 뭐.”
미셸이 선생에게 안 들릴 정도로, 조그맣게 말한다.
“어떤 선생들은 처음에는 센 척을 한다니까. 그리고 몇 달 지나 봐. 그런 선생들은 대부분 별 볼일 없더라.”
“네가 어떻게 알아?”
세훈이 되묻는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상으로는 그래.”
약 1시간쯤 후. 개학일이라 수업이 일찍 끝나서 그런지 교문을 나서는 학생들이 많다. 교정 여기저기에는 벤치에 끼리끼리 모여앉아 잡담하는 학생들도 있다. 세훈과 주리 또한 교문을 나서는 학생들 사이에 껴서 교문 밖으로 나온다. 막 교문을 나서려는 그 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 거기 너!”
“에... 누구... 인지...”
세훈은 왜인지는 몰라도 말을 잇지 못한다. 왜인지는 몰라도 익숙한 얼굴이다. 조금 짧은 머리에 남들보다 키가 더 커 보이는 남자다. 그런데... 누구일까?
“아... 그러니까... 누구더라...”
“생각 안 나니?”
세훈이 머리를 갸우뚱하자 그 남자가 얼른 말한다.
“아까 전에도 봤고.”
세훈은 잠시 눈을 감는다. 내 앞에 서 있는 저 얼굴. 익숙한데 왜 이름은 생각이 안 나지?
“어... 생각날 것 같기는 한데...”
“조금만 더 머리를 굴려 보라니까?”
“아, 가만히 있어 봐. 그러니까 누구였더라... 아, 맞아! 진언이 형이었지...”
“진언이는 내 쌍둥이고.”
“그럼 누구지...”
“아, 알았다!”
그 때, 그 동안 한 마디도 안 하고 가만히 있던 주리가 그 남학생을 보고 말한다.
“어, 서언 오빠! 오랜만이네!”
“야, 너 이 사람을 알아?”
“너도 알잖아! 어릴 때부터 쭉 봐 왔는데.”
“아... 그래, 맞아! 아까...”
세훈의 앞에 서 있는 키 큰 남자. 다름 아닌 아까 지하철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름은 독고서언. 세훈과 주리보다는 4살 많은 대학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세훈과 주리와는 알고 지낸 사이다.?
“그래... 이제 생각이 났나 보네.”
“아... 서언이 형이구나. 미안, 그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알아봤으면 됐지 뭐. 그런데, 너희들 그렇게 딱 붙어서 또 뭐 하려고?”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렇게 딱 붙어서 다니는 사람들치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은 없었어.”
“하긴 그래. 사실은 새로 등록한 학원에 가려는데, 시간이 많이 남아서...”
주리가 이렇게 말하고는 세훈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집에 가기 전에 어디라도 좀 들를까?”
“어디 들렀다 가자고? 그러다가 늦으면 어쩌려고?”
“상관없다니까. 어차피 집에 가는 길에 있는 건데...”
“어디를 간다기에 그래?”
세훈은 주리의 말에 솔깃해진다.
“RZ백화점에 좀 들렀다 가자니깐.”
“아... RZ백화점이라면 괜찮지. 이것저것 볼 게 많으니까 뭐... 요새 할인행사도 한다던데.”
세훈은 서언 쪽을 보고 말한다.
“서언이 형, 같이 갈래?”
“아니, 난 됐어. 빨리 가야 할 일이 있어서.”
“왜? 혹시 집에 무슨 일이라도...”
“아, 그런 건 아니야. 내일 또 보자고.”
말을 마친 서언은 그대로 먼저 지하철역 출입구 쪽으로 간다. 서언이 지하철역 출입구로 들어가는 것을 본 세훈과 주리가 속도를 내어 걷기 시작하려는 그 때.
“세훈 님!”
세훈이 찬 AI 시계에서 들려오는 NURI의 목소리다.
“전화는 하셨나요?”
“아... 안 해도 될 것 같아. 이미 목적을 알아 버려서.”
“그래도 전화는 해야죠. 빨리 하는 게 좋아요.”
옆에서 듣고 있던 주리가 말한다.
“네 인공지능이야? 참... 저렇게 챙겨 주니 얼마나 좋아.”
“그러게... 그건 그렇고, RZ백화점이 여기서 얼마 정도 되는 거리지?”
“지하철 1정거장인데... 거기서 여기까지 1분밖에 안 걸렸거든? 한 10분도 안 되어서 도착할걸.”
“호... 그래?”
세훈과 주리는 우선 육교를 건너 대학 정문을 지난다. 정문을 지나니 카페가 몇 곳 나온다. 횡단보도를 건너, 오피스 빌딩이 몇 채 나온다. 이어, 둘의 눈에 꼭대기가 어딘지조차 보이지도 않는, 유리판과 전광판 등으로 말 그대로 번쩍거리는, 매우 높은 건물이 하나 보인다. 아침 시간인데도 이 건물의 출입구에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조금 더 걷자 웅장한 출입문이 보이고, 그제야 둘은 발걸음을 멈춘다. 이 마천루가 바로 RZ 타워, 지하 2층에서 8층까지가 RZ 백화점이다. 세훈과 주리가 서 있는 곳은 백화점의 남문이다.
“백화점을 많이 와 보기는 했지만...”
세훈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입을 연다.
“아침에 와 보는 건 처음인데... 아침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았나.”
“당연한 거 아냐? 이 건물이 백화점 말고도 볼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영화관도 있고, 실내 테마파크도 있고, 거기에 워터파크, 온천, 호텔까지... 없는 게 없지.”
“그런 건 나도 알지. 뭐, 일단 한 번 들어가 보자고.”
세훈과 주리는 백화점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아직 아침 시간대라 그런지 사람들로 꽉 찰 정도로 북적대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규모의 백화점답게 사람들이 많다. 1층은 명품관이다. 한 눈에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구두며 핸드백, 화장품 등이 많지만, 여기에 세훈과 주리가 볼 만한 것은 별로 없다. 주리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세훈에게 말한다.
“잠깐만...”
“왜?”
“혹시 패션 스트리트는 어디에 있었더라...”
“패션 스트리트? 아마 4층이었던 것 같은데.”
“2층 아니었어?”
“에이, 2층은 주로 남성의류매장하고 여성의류매장 있잖아. 우리가 볼 만한 건 없어.”
“그럼... 3층은 뭐가 있더라.”
“아, 여기 봐.”
세훈이 안내도를 가리킨다.
“여기 보니까 서점하고... 아동용품 매장 같은 게 있네.”
“아, 그래. 그럼 어쨌든 4층이나 가 보자고.”
두 사람은 곧장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RZ백화점의 1층에서 5층까지는 중앙 로비가 뻥 뚫려 있는 구조다. 한 층 한 층이 높은 편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3층까지만 올라갔는데도 1층의 중앙광장 전체가 다 보이는 느낌이다. 이제 한 층만 더 올라가면 4층이다. 이윽고, 두 사람은 4층에 다다른다. 안내판을 보니 ‘4층-패션 스트리트’라고 되어 있다.
“어때, 내 말이 맞지?”
“그, 그래. 어쨌든... 우선 할 게 하나 있지.”
주리는 잠시 안내도를 한 번 보더니, 망설임 없이 곧장 어딘가로 향한다. 세훈은 주리의 뒤를 따라가며 묻는다.
“네가 잘 아는 곳이 있나 봐?”
“아, 그래. 이 백화점만 오면 단골인데...”
주리가 도착한 곳은 ‘에스테 숍’이라고 적힌 곳. 주리가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곳 주인으로 보이는 2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이 주리를 반갑게 맞아 준다. 대충 봐도 아무래도 세훈이 들어가기에는 조금 그렇다. 세훈은 잠시 4층을 둘러본다. 아무래도 이제 슬슬 여름도 다가오고 하니 여름 의상들이 많이 보인다. 그 중 한 곳을 골라 들어가 본다. 남방셔츠도 있고, 여러 가지 무늬가 들어간 티셔츠도 있다. 하지만 세훈의 눈에 지나치게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셔츠들은 부담스럽다. 점원이 세훈에게 다가온다.
“손님, 뭐 찾으시는 것이라도?”
“아, 아니오. 그냥 좀 볼게요.”
세훈은 몇 번 가게 안 여기저기를 훑어본다. 아무리 봐도 이 중에는 세훈이 원하는 종류의 그런 옷은 없다. 세훈이 그냥 나가려는데...
“저, 손님, 잠깐만...”
점원이 세훈에게 말을 건다. 세훈이 뒤돌아보고 말하려는데, 점원이 다시 말한다.
“아, 아닙니다. 여기 단골이신 분과 닮아서요.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그럼, 또 오십시오.”
세훈은 가게를 나서서 주리가 있는 에스테 숍으로 간다. 어느 새 주리는 할 걸 다 끝냈는지 주인과 잡담을 나누고 있다.
“다 끝났어?”
“아, 다 끝났는데...”
“도대체 뭘 한 거야...”
세훈은 주리의 얼굴을 여기저기 보다가 귀를 보고 뭔가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어? 또 뚫었냐?”
주리의 왼쪽 귀에는 피어싱, 귀걸이가 4개씩이나 있다. 하나는?
“참... 많이도 뚫었네. 언제부터 한 거야?”
“한... 유치원 때부터 했나.”
“유치원? 그 때는 어떤 여자애들이라도 할 수 있는 거잖아. 그거 말고, 한 귀에 2개 이상 하는 거...”
“아, 그건 초등학교... 4학년쯤부터인가.”
“그래? 참 오래도 됐다.”
세훈은 빈정거리는 투로 말한다. 그리고 거울 앞에 있는 자신을 본다. 장신구 하나 없이 교복만 입은 말 그대로 학생의 모습이다. 세훈이 거울에서 돌아서며 말한다.
“이제 어딜 가지?”
“아! 맞아.”
주리는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말한다.
“지하 1층 식품관에 유명한 빵집이 하나 있는데... 거기나 가 볼까?”
“하... 네가 단순히 뭐 하나 사는 것으로 끝날까.”
세훈은 궁시렁대면서도 주리의 뒤를 따라간다. 에스컬레이터를 다시 내려간다. 3층, 2층, 1층을 지나, 지하 1층에 다다른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발을 디디자마자, ‘빵집’이라고 쓰여 있는 화살표가 보인다. 세훈과 주리는 곧장 그 화살표를 따라간다. 빵집에는 금방 다다른다. 빵집의 이름은 ‘쇼콜라’라고 되어 있다.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빵을 고르고 있고, 카운터 앞에는 줄이 조금 길게 늘어서 있다. 세훈이 머리를 갸우뚱하며 말한다.
“여기... 유명한 곳이었나?”
“여기 오는 사람들은 한 번씩 들러 가는 곳인데.”
주리는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내가 아마... 유치원 때부터 알았지 아마?”
“그래? 그 때부터 있었어?”
“한... 20년은 된 곳이야, 여기는.”
“하... 그래? 여기서 뭘 많이 먹는데?”
“주로 여기서 많이 사 가는 건... 단팥빵이나 도넛, 롤 케이크, 카스텔라 같은 게 있어. 그 중에서도 여기서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건... 치아바타 빵에다가 햄, 계란, 양상추 등을 넣은 샌드위치지.”
주리는 마치 이곳의 종업원이라도 된 듯이 말한다.
“정말? 하긴, 난 여기 단골도 아니고... 그럼 여기서 샌드위치나 하나씩 사 먹자.”
세훈은 곧장 샌드위치 코너로 가서 주리가 말한 샌드위치를 하나 고른다. 주리는 샌드위치 외에도 여러 가지 빵을 쟁반에 담는다. 그리고 계산하기 위해 줄을 선다.
“이거 계산할 때마다 늘 군침이 돈다니까.”
“푹 빠졌나 보구나.”
“그래. 앞으로도 쭉 여기 단골이 될 것 같네.”
세훈과 주리는 계산을 마치고 빵집을 나선다. 주리는 주변을 대충 둘러보다가 말한다.
“다음은... 이제 점심 식사를 해야 하는데...”
“벌써야?”
세훈은 시계를 본다. 아직 10시 40분이다. 점심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다.
“아직 11시도 안 됐어. 나는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뭐, 그러면 좀 더 둘러보다가 시간 되면 먹지 뭐.”
주리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한다.
“그럼... 천천히 주변 구경 좀 더 하다가 들어갈까?”
세훈과 주리는 다시 1층으로 올라와서 백화점 남문을 나와 사거리를 향해 걷는다. 거리에 사람들은 아직 많지 않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많다. 걸어갈수록 도심의 분위기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그 때, 같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 한 명이 세훈과 주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온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느낌이 왜인지 모르게 안 좋다. 세훈은 얼른 살짝 옆으로 피한다. 그런데, 세훈이 피했는데도 세훈의 어깨에 강하게 스치는 느낌이 든다.
“이봐, 신입생.”
어깨를 스친 남학생이 세훈을 부른다.
“저... 저 말인가요?”
세훈은 조금은 퉁명스럽게 되묻는다. 그 남학생이 세훈 쪽으로 돌아선다. 세훈보다 조금 더 큰 키에 금발의 미청년 같은 외모다. 그 남학생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왜 치고 지나가나?”
“네? 제가 치다니요?”
세훈은 조금 더 퉁명스럽게 말한다.
“저는 피하려고 했지, 제가 의도해서 친 적 있나요?”
“선배 앞에서, 말대꾸하나?”
선배라고 자신을 지칭한 남학생은 오히려 세훈을 큰소리로 몰아세운다. 세훈은 다시 한 번 조금 전을 기억해 보려 한다. 분명히 피했는데... 어떻게 저 선배와 어깨가 부딪칠 수 있는 거지? 분명히 안 닿도록 멀리 피했는데... 이상한 일이다.
“뭐야, 대답 똑바로 안 해?”
그 남학생이 다시 윽박지른다.
“저...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분명히 피했는데... 피했는데...
“대답하랬다.”
세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다. 겁을 먹었다기보다는 난감하다. 그리고 가슴 한쪽이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제대로 걸린 건 아닌가...
“세훈아.”
그 때 주리가 옆에서 조그만 소리로 말한다.
“네가 잘못했다고 해. 그럼 되잖아.”
“하지만...”
주리는 아무 말 없이 세훈을 바라본다.
“아... 죄...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어이, 신입생.”
그 남학생이 아주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한다.
“이름이 세훈이라고 했지.”
“네...”
그 남학생은 세훈에게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서, 잔뜩 인상을 썼던 얼굴을 풀고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너, ‘재미있는’ 녀석이로군.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또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그 때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라고.”
“......”
그 남학생은 세훈과 주리를 뒤로 하고 자기 갈 길을 간다. 남학생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세훈은 크게 한숨을 내쉰다.
“후... 찍혀 버렸다...”
“그러게, 왜 모르는 사람의 어깨를 쳐 가지고...”
“야, 너도 봤을 거 아냐. 내가 피하려고 했잖아. 맞지?”
“글쎄, 그건 자세히 못 봤는데...”
주리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데 네 말이 사실이라면 참 이상하다. 안 그래?”
“......”
세훈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시 앞을 향해 걷는다.
“너 뭐 더 본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됐어. 그냥 너희 집에 빨리 갈래.”
“하... 알았어. 그럼 빨리 가자고.”
주리는 뭔가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세훈을 따라간다.
“세훈 님, 괜찮으신가요?”
“아... NURI네. 그래, 괜찮아.”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전화는 천천히 하세요.”
“고마워.”
약 30분쯤 후, 초고층 아파트 단지 ‘알파’.
“다녀왔습니다!”
이곳은 55층에 있는 주리의 집. 문이 열리고 주리와 세훈이 들어온다.
“조금 늦었네.”
주리의 어머니가 현관에 나온다.
“오늘은 개학식이라서 한 10시 정도에 끝났다고 들었는데...”
“아, 어딜 잠깐 다녀와서.”
“조금 더 일찍 왔으면 여유롭게 있다가 갈 수 있었을 텐데...”
“아, 학원? 그거야 뭐, 슬슬 걸어가도 되지.”
먼저 거실로 들어가는 주리를 뒤로 하고, 주리의 어머니는 세훈을 돌아보며 말한다.
“아, 세훈이 왔구나.”
“네... 안녕하세요?”
세훈은 어색한 표정으로 주리의 어머니에게 인사한다. 주리의 어머니가 잠시 방 안으로 들어가고, 세훈은 신발을 벗고 주리가 있는 쪽으로 가서 앉는다.
세훈은 주리의 집 안을 두리번거리며 둘러본다. 확실히 세훈의 집보다는 크고, 좀 더 오래 된 듯한 느낌이다. 곳곳에 도자기, 그림 같은 장식도 있다. TV 위쪽을 보니, 가족사진으로 보이는 사진이 있다. 뒤쪽에 앉은 두 명은 주리의 부모님일 테고, 교복 입은 사람은 주리일 테고, 주리와 닮았는데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은...
“아... 너희 언니구나. 그 12살 위라는... 결혼은 했다고 했던가?”
“맞아, 내가 7살 때인가... 그 때 결혼해서... 초등학생 때 조카를 봤어.”
“아... 그래? 나이 차도 별로 안 나는 조카네.”
주리는 말없이 싱글싱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세훈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말한다.
“그건 그렇고, 아까 그 선배...”
“왜?”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보통의 일은 아닌 것 같고...”
“그 때 나도 뭔가 이상한 것 같았는데.”
“그래서...”
세훈은 한숨을 푹 쉬며 말한다.
“그런 일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나 하고.”
“아, 그러면... 내가 잘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어.”
“누군데?”
“학원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 집에 돌아오는 길에 거길 들렀다 가자.”
“아, 알았어. 누군지는 몰라도, 한 번 가 보자고.”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목록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채색이야기] 면채색을 배워보자| 공지사항 6
|
2014-11-11 | 7231 | |
공지 |
오리지널 프로젝트 추진에 대한 안내| 공지사항 |
2013-09-02 | 2345 | |
공지 |
아트홀 최소준수사항| 공지사항
|
2013-02-25 | 4690 | |
1412 |
[괴담수사대] IX-4. 잘못된 망집| 소설 3 |
2019-02-07 | 144 | |
1411 |
[괴담수사대] IX-3. 돌아온 비수| 소설 2 |
2019-02-06 | 136 | |
1410 |
[초능력에, 눈뜨다] 6화 - 선배로부터의 경고| 소설 2 |
2019-02-02 | 136 | |
1409 |
[초능력에, 눈뜨다] 5화 - 보는 것만으로도 위험해!| 소설 3 |
2019-01-26 | 133 | |
1408 |
[초능력에, 눈뜨다] 4화 - 그들은 우리 곁에| 소설 4 |
2019-01-19 | 136 | |
1407 |
마인크래프트 스킨 모음집| 스틸이미지 4
|
2019-01-15 | 150 | |
1406 |
[초능력에, 눈뜨다] 3화 - 초능력자 그녀| 소설 4 |
2019-01-13 | 141 | |
1405 |
[초능력에, 눈뜨다] 2화 - '그 사람'과의 만남| 소설 4 |
2019-01-06 | 146 | |
1404 |
[연말특집] 연말정산 Again 2018| 스틸이미지 4
|
2018-12-31 | 169 | |
1403 |
[초능력에, 눈뜨다] 1화 - 개학| 소설 3 |
2018-12-30 | 140 | |
1402 |
[COSMOPOLITAN] #1 - The Headliners (完) ※| 소설 4
|
2018-12-30 | 179 | |
1401 |
[심플리뷰] 기지로 변형!! 수퍼 BIG 닥터 옐로 세트| REVIEW 4
|
2018-12-23 | 197 | |
1400 |
[괴담수사대] 자잘한 설정들| 설정 3 |
2018-12-16 | 161 | |
1399 |
[괴담수사대] IX-2. 모방범| 소설 4 |
2018-12-10 | 158 | |
1398 |
[COSMOPOLITAN] #1 - The Headliners (3) ※| 소설 6
|
2018-11-22 | 198 | |
1397 |
[심플리뷰] DXS11 신카리온 닥터 옐로| REVIEW 4
|
2018-11-19 | 177 | |
1396 |
[괴담수사대] IX-1. 삼인성호| 소설 2 |
2018-11-14 | 151 | |
1395 |
죠죠의 기묘한 자막| 영상 3
|
2018-11-04 | 152 | |
1394 |
[괴담수사대] 시즌 9 프롤로그에 등장했던 고독의 주령| 설정 2 |
2018-11-01 | 135 | |
1393 |
세계관 설정(16)-메라빙수 가게| 설정 3 |
2018-11-01 | 161 |
3 댓글
마드리갈
2018-12-30 23:55:58
새로이 쓰신 소설의 연재를 시작하셨군요. 축하드려요!!
문명이 발전하고 그 범위가 우주 전역에 걸치더라도 인간의 생활상은 큰 틀에서는 역시 변함이 없어 보이네요. 그래서 친숙하게 보이면서도, 뉴스에서 다루는 것들에 이 세계는 정말 다른 곳이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네요. 걱정되는 것 하나가 미확인 천체의 출현.
역시 사회구성원의 백그라운드가 다양하다는 것도 잘 보이네요. 사실 미국같이 다양성이 가장 높은 레벨의 국가조차도 일단은 영국인, 독일인 등의 앵글로색슨계 백인 위주라는 기반하에 성립했다 보니 구현하신 세계의 다양성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기도 해요.시어하트어택
2018-12-31 22:32:50
감사합니다. 이제 첫 한 발자국일 뿐인걸요.
제가 만들어낸 세계는 앞으로도 더 다듬어가야 할 것이긴 합니다. 그러니만큼 더욱 신경써서 만들어야죠.
SiteOwner
2019-01-05 23:24:29
눈뜨다, SP 시리즈의 연재에 축하의 말씀을 드리며, 건승을 기원합니다.
읽으면서 든 기분은 두 가지입니다. 반가움과 친숙함.
국민학생 때인 1980년대 후반에 읽었던 미래의 삶의 한 단면이 묘사되는 것같은 반가움과, 포럼에 소개해 주신 그간의 설정의 여러 요소가 보이는 것에의 친숙함 덕분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미 동생이 간단하게 언급해 두었습니다만, 일단 국내로 한정해 보자면 인명이 그리 다양하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외국인 출연자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의 경우는 좀 낫지만, 그 외의 분야에서는 아직 미진한 것도 사실입니다.
내용에 직접 관련되는 건 아니지만, 글 전체를 일정 기준에 따라 몇 부분으로 나누는 게 가독성 향상에 좋을 듯해서 말씀드리니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