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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이 의심스럽게 묻자, 남학생은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대놓고는 못 하겠죠. 그래도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 주세요, 일단 믿어 봐요. 제가 초능력은 없어도, 나름대로 도와줄 수는 있으니까.”
“아... 알았어.”
세훈은 그 남학생을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보며 말한다.
“참, 저는 하야토라고 해요, 선배님. 언제든 필요하면 불러 주세요.”
“하야토라고? 그래... 고마워, 어쨌든...”
하야토라는 이름의 남학생에 이어서 레아가 세훈을 돌아보며 말한다.
“들었죠, 선배님?”
“그래...”
세훈은 조금은 자신이 없이 말한다. 물론, 비숍과 싸울 때처럼 누군가가 도와 주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예준과의 싸움 때처럼 혼자서 싸워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게다가 그 패거리는 세훈을 고립시키려 별의별 수를 다 쓸 것이다. 거기에다가, 세훈을 ‘겁쟁이’로 몰아가려는 공작을 펼지도 모르고...
“뭐해?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는 거야?”
주리가 말없이 멍하니 있는 세훈을 보고 말한다.
“아... 아니...”
“내가 전에도 말했지?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고 하지 마. 설령 다른 사람들이 다 등을 돌려도, 나는 네 편이라는 걸 잊지 마. 알겠어?”
“아... 알았어.”
세훈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주리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 오후 1시. 세훈은 일행과 점심식사까지 다 마친 다음, 미린역 사거리에서 나머지와 헤어지고 나서 혼자서 집으로 향한다.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 아까 나눈 이야기들을 생각하자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 서류들을 보고 나서부터 걱정거리들이 또 마치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듯 머릿속에서 꾸물거리기 시작한다. 차라리 아예 몰랐다면 좋았을 걸, 아니면 차라리 그 패거리의 정보를 속속들이 꿰뚫었다면 좋았을 걸... 괜히 상상력이 이상한 쪽으로 나타나서 세훈의 머릿속을 자꾸만 헤집어 놓는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카페에서 일어나기 전에 메이링이 마지막에 한 말은 뭔가 조금은 뜬금없으면서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엘더 박사님이 언제 한 번 너를 보고 싶다더라.
왜일까? 왜 엘더 박사는 세훈을 콕 집어서 보고 싶다고 한 걸까? VP재단의 선임 연구원씩이나 되는 높은 분이 왜 일개 학생인 나를 그렇게 집어서 말했지? 물론 나쁜 이유에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전에 상대했던 비숍, 예준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클라인이 반드시 세훈을 무릎 꿇려서 오라고 했다’... 왜일까? 왜 다들 나를 그렇게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도대체 왜? 왜? 왜?
“아후우우우...”
세훈은 크게 한숨을 내쉰다.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씩 ‘왜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세훈을 쳐다보고 지나간다. 젊은 커플이건, 유치원생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온 엄마건, 나이 지긋한 노신사건, 누구건 간에. 심지어 중년 여성 한 명은 세훈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여성은 마치 ‘구호단체 광고에 나오는 전쟁 난민들을 보는 듯한’, 그런 연민에 가득 찬 눈을 하고 있었다. 세훈은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로, 황급히 그 여성의 눈을 피한다. 그리고 걸음걸이를 좀 더 빠르게 해서 걷는다. 사람들의 시선을 어느 정도는 피할 필요가 있다. 어느 정도 갔을까. 중심가에서 멀어지자, 건물들의 높이가 낮아진 게 눈에 띈다. 이제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중앙공원이 나온다. 시간을 보내기에는 거기가 충분할 거다...
공원에 다다르자, 세훈은 발 가는 대로 걷는다. 대형 조각상이 가운데에 있는 ‘동남광장’에서부터 시작해, 석상, 철상 등이 전시된 조각정원도 가고, 잔디밭 가운데 조성된 야외 공연장도 간다. 그중에서도 세훈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뭐니 뭐니 해도 공원 한가운데 있는 큰 호수. 이름은 ‘미린호’라고 하는데, 여기 미린 신도시가 처음 생길 때부터 있었다고 들었다. 물론 미린고등학교와 연결된 미린대 캠퍼스에 있는 ‘무지개 호수’도 있기는 하지만, 여기 미린호와 비교할 바는 못 된다. 데크가 마련되어 있어 호숫가와 호수를 동시에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곳도 있고, 자연에 가깝게 수생식물들을 심어 조성된 곳도 있고, 가운데에는 나무와 풀로 우거진 섬도 하나 있고, 오리배도 탈 수 있다. 그 호숫가를 따라 걸으면, 아무리 마음이 금방이라도 화산이 터질 듯한 불안감이 밀려오더라도, 잔잔한 호수처럼 차분해진다. 그래서 세훈은 이곳을 많이 찾는다. 평소에 이 호수로 가는 방법은 세훈이 사는 아파트 근처에 있는 서북광장에서부터 시작해서 온실을 지나서 가는 길이었지만, 오늘은 중심가에서부터 왔기에 동남광장에서부터 여기로 왔다. 그래서 첫 느낌은 많이 달라도, 역시 여기구나 하는,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것과도 같은 기분이 든다.
우선은 호수 쪽으로 탁 트여 있는 ‘호반광장’을 지나, 호숫가에 마련된 데크를 천천히 걷는다. 데크에는 사람들도 많이 없어 걷기에 딱 좋다. 마침 미풍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온다. 데크 옆에 있는 호숫가의 연, 창포 등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하늘하늘 몸을 흔든다. 그 광경을 보니 복잡했던 마음속이 전부 정화되는 느낌이다. 이 느낌... 이래서 호수를 찾는 것이다. 이래서 이 호수가 좋은 거다. 세훈은 호수 가운데 있는 섬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짓는다.
“저기...”
별안간, 누군가 뒤에서 세훈을 부른다.
“누구...”
세훈이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세훈을 부른 그 사람, 그 사람을 본 순간, 세훈은 놀라서 뒷걸음질 친다. 몸의 균형을 잃을 정도로. 목소리조차도 나오지 않을 정도의 놀라움. 하마터면 데크의 난간을 넘어가 그대로 호수에 빠질 뻔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느껴지는, 개학식 날의 그 이상한 느낌까지... 어느 새, 세훈은 그와 마주 보고 서 있다. 이 익숙한 위화감...
“오랜만이군, 안 그래?”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개학 첫날의 악몽으로 남아 있는 그 사람, 그 사람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좁은 데크 위에서! 세훈은 급히 주변을 돌아본다. 100m 이내에는 사람이 없다.
“왜 그렇게 다급하지? 진정해, 진정하라고.”
“서... 선배...”
“그간의 전적이 대단하더군. 2주도 안 되었는데 비숍도 이겼고, 또 내 둘도 없는 친구도 이겼어. 그것도 아무 능력도 없이 말이지. 대단해, 대단해.”
클라인은 무슨 뜻인지 모를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과장된 몸짓으로 손뼉까지 친다.
“그래서 말인데, 그 두 사람이 혹시 너한테 뭐라고 하는 것 없었나?”
“그건...”
“아! 굳이 말을 안 해 줘도 될 것 같군. 잘 알고 있으니 말이야. 자! 여기서 네게 선택권을 주지. 어떻게 하곘나?”
“선택권이라니?”
“아 참, 선택지는 두 가지야. 지금 바로 내게 무릎을 꿇고 내 밑으로 들어오든가, 아니면 내 손에 쓰러지든가. 자, 선택해라. 선택은 네 몫이다.”
세훈은 심호흡을 한다. 지금 여기는 호숫가에서도 데크 출입구에서도 한참 떨어진, 그야말로 호수 한가운데. 사람들이 좀 지나가면 모를까. 100m 이내에 있는 사람은 세훈과 클라인, 단 둘뿐이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세훈은 왼손을 들어 AI시계를 보려 한다.
“아, 인공지능한테는 물어 보지 말라고. 그건 반칙이야.”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여기서 무방비 상태로 클라인과 싸우면, 결과는 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숨도 거칠어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이 찌릿찌릿해지기까지 한다. 한 1분 정도 후, 세훈은 어렵게 어렵게 입을 뗀다.
“선배...”
“오? 드디어 답을 냈나?”
“그러니까 말이지...”
“왜 그렇게 답을 주저하나? 답을 내는 데는 3초도 안 걸리는데.”
“답을 내는 걸 일주일 연기하도록 하지.”
“호오, ‘연기’한다고?”
클라인은 재미있다는 듯 얼굴에 웃음을 가득 흘리며 말한다.
“그럼 일주일 후면 답을 낼 수 있다 이건가?”
“물론이지.”
이렇게 자신 있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도대체 이걸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아무 능력도 없는데 허세를 부릴 뿐이 아닌가... 세훈은 클라인의 입만 바라볼 뿐이다. 어떤 말이 떨어질지, 떨린다. 온몸이.
“하하하... 좋아.”
클라인은 마치 세훈에게 아량을 베푸는 듯 큰 소리로 웃으며 말한다.
“일주일 후, 3월 29일에 다시 보도록 하지. 나는 네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네 친구, 앤드루 카슨처럼 말이지.”
“......”
“단, 장소는 당일에 알려 준다. 기대하고 있으라고. 가 봐.”
세훈은 말없이 클라인의 앞을 지나,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걷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세훈의 뒤에서 이상하게 잡아당기는 느낌이 든다. 조금 전에도 느꼈던, 바로 그 이상한 느낌이다.
“아, 내가 하나 빼먹고 안 말해 줬는데...”
“그게... 뭐지?”
“만약에 빨리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네 친구들 신변에 문제가 생길 거야. 알았나?”
“이... 이봐...”
“내가 할 말은 끝났군. 그럼 가도 좋아. 이만.”
말을 마치자마자 클라인은 세훈이 왔던 방향으로 간다. 점점 멀어지는 클라인을 보며, 세훈은 소리를 지르려다가 한숨만 크게 내쉰다. 도대체 이걸 어쩌면 좋단 말인가... 세훈은 자책감이 든다. 차라리 혼자 병원 신세를 지면 졌지, 친구들이 휘말리게 될 줄이야... 세훈은 터벅터벅 걷는다. 처음 이 공원에 올 때만 해도 공원의 풍경을 보기만 해도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치 판타지 소설 ‘어둠을 가로지르는 기사’에 나오는 괴물들과 도적들로 가득 찬 늪지대를 지나는 느낌이다. 똑같은 공원인데 어쩌면 이렇게 다른 느낌인가... 그리고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 하지만 도망가면 안 된다... 도망가지 말자. 절대 숨지만 말자. 세훈은 이렇게 다짐한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2 댓글
SiteOwner
2020-02-22 23:18:23
떨떠름한 순간이군요.
이렇게 세훈과 클라인은 다시금 만났고, 세훈의 마음에는 다시금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게 되었습니다.
보통 10대 때에는 친구관계 등 동류집단과의 교류를 중시하기 마련인데, 클라인은 바로 그 점을 파고 들어서 파문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그렇게 웃고 돌아가는 클라인이 끝까지 웃을 수 있을지...
배수의 진을 친 세훈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겠습니다.
마드리갈
2020-02-23 21:09:52
하야토라는 이름에서 여러가지가 생각나네요.
죠죠의 기묘한 모험 4부의 등장인물인 카와지리 하야토도 생각났고, 일본의 총리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1899-1965)가 생각나기도 했어요. 스탠드 능력은 없지만 정체불명의 적에 용감히 맞서 싸운 전자의 하야토, 그리고 망할 곳은 망해야 한다는 후자의 하야토 모두...
이제 클라인은 망해야 할 대상이겠죠. 하지만 그만 모르고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