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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좋아! 점점 커진다!”
갈대숲 안에서, 모자를 눌러쓴 그 사람은, 점점 커지는 그림자에서 눈을 떼지 않고 본다. 그림자는 빠르게 커지고 있다.
점점 커진 갈대밭의 그림자는 어느새 개울을 넘어, 반대쪽의 땅에까지 닿고, 산책로에까지 점점 다가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림자가 커진 걸 눈치 못 채고 그냥 산책로를 걸어다니고 있고, 그중에서도 현애와 세훈의 일행은 여전히 이야기에만 빠져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모자를 눌러쓴 사람의 심장이 점점 벌렁벌렁 뛰기 시작한다. 시간이 절반 정도로 느리게 가는 것 같다.
“내 그림자가 완전히 집어삼키는 순간... 너희들은 완전히 내 손바닥 안이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모자를 눌러쓴 그 사람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듯 강한 어조로 말하지만, 숨어 있는 갈대밭 안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먹이를 기다리는 맹수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다. 바로 옆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무도 눈치 못 챌 정도로.
한편 개울 건너편.
“그 총알에 든 진홍빛 액체의 정체가 베라네일 가능성이 크다 이거지...”
세훈이 혼자 중얼거리다가, 니라차를 돌아본다.
“너 그거 처음 맞았을 때 어땠어?”
“집에 돌아가니까 찌릿찌릿한 느낌이 몇 번씩 들더니, 다음날 일어나 보니까 뭔가 내게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것 같은 예감이 들더라. 그래서, ‘동물을 조종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아파트 단지 안에 비둘기들을 조종해 봤는데, 정말로 됐지.”
“나하고 비슷하네. 나도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고 그랬거든.”
세훈이 맞장구를 친다.
“그렇다면 베라네일 가능성이 더 크지.”
“그런데 말이야...”
니라차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한다.
“파라 씨는 어디 간 거지?”
“맞아. 파라 씨! 1분 전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현애, 세훈, 니라차 모두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파라를 찾는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한편 모자 쓴 사람이 숨은 갈대밭.
“자, 어디 보자,..”
갈대밭의 그림자는 어느새 일행을 완전히 덮기 직전이다. 모자 쓴 사람은 여전히 갈대밭에 웅크려서, 주먹을 꽉 쥔 채, 입 안의 침을 삼키고는, 점점 더 커지는 그림자를 지켜본다.
“됐다... 됐다... 이제, 됐다...”
드디어, 그림자가 완전히 덮었다.
“됐다! 이제 각오해라! 내 능력을 보여 줄...”
그때. 모자 쓴 사람은 뭔가가 자신의 시야를 가리고 있음을 직감한다.
“뭐, 뭐야, 에이, 갈대가 가린 건가.”
그는 손으로 살살 시야를 가린 것을 건드려 치워 보려고 한다.
하지만, 안 치워진다. 오히려 금속성의 뭔가가 만져진다.
“뭐야, 로봇인가?”
그는 다시 한번 만져 본다. 금속성인데, 신발을 신고 있고, 거기다가 운동복을...
뭐지, 이건?
“이봐요, 뭘 그렇게 만져요?”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린다. 올려다본다. 웬 여자가 한 명 서 있다. 갈색 머리에 운동복을 입은 여자가 말이다.
“다... 당신 뭐야. 로봇이야?”
“로봇 아닌데요.”
무뚝뚝한 얼굴을 한 여자, 다름 아닌 파라다.
“여기서 뭐 하세요?”
파라가 묻자, 모자를 쓴 사람은 잠시 말이 없더니, 다시 파라를 올려다보며 많이 당황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는 당신은?”
“뭐긴요. 잠깐 산책하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나길래 궁금해서 와 본 건데요.”
파라는 시치미를 뗀다.
“뭐야, 거짓말하지 마!”
모자 쓴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당신 방금 전에 저기 징검다리 건너 있었잖아!”
“바로 정체를 드러내시네. 나는 별로 말도 안 했는데.”
파라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남자를 똑바로 보기 위해 쭈그려 앉는다.
“말해 봐. 당신, 정체는 뭐고, 누구한테서 지령을 받았지?”
“그... 그건 말 안 해줄 거야!”
모자 쓴 사람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선다.
“그것보다도, 당신 그... 그 금속성의 다리는 뭐야. 로봇이야, 사이보그야, 뭐야?”
“의족 처음 만져 봐?”
파라가 모자 쓴 사람을 노려보며 말한다.
“빨리 말해. 당신 누구한테서...”
하지만 모자 쓴 사람은 대답하는 대신, 뒤도 안 보고 냅다 뛰어 갈대밭을 벗어나, 바로 옆에 보이는 계단을 올라, 카페거리 쪽으로 도망간다.
“하... 뭐야. 도망가기는.”
파라가 허탈한 얼굴을 하고 계단 쪽을 올려다보는데.
“파라 씨! 파라 씨!”
현애와 세훈, 니라차가 갈대밭 쪽으로 오고 있다.
“거기 있었어요?”
“안 보인다 싶었더니...”
“반응들이 다 왜 그래?”
파라는 태연히 말한다.
“방금 너희들을 공격하려던 녀석 하나 쫓아내 줬는데.”
“네...? 정말요?”
“혹시 주변에 갑자기 그늘이 지는 것 같은 느낌 안 들었어?”
“그... 그늘이요?”
“글쎄요...”
현애와 세훈, 니라차 모두 아까 파라가 사라지던 순간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때... 그늘 같은 게 졌었던가?
“아, 맞다.”
현애가 그때를 생각해 내고서는 손뼉을 치며 말한다.
“그늘이 지길래, 구름 같은 건 줄 알았죠.”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파라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본다. 하늘 위로 뭉게구름 몇 개가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거야. 저 녀석은 그림자를 매개로 능력을 사용하는 것 같았거든.”
“그... 그림자요?”
“맞아. 갈대밭 쪽의 그림자가 얼핏 보니까 비정상적으로 늘어져 있어서, 가서 봤더니 거기만 그렇게 되어 있더라. 그 그림자를 가지고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난다. 그랬다. 그러고 보니까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들 중 일행을 덮을 만한 건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그늘이 졌다. 뭔가 이상했다고 생각했는데,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현애와 세훈 모두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무튼, 그림자 있고 그런 데는 좀 피해 다니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나한테 연락하든지.”
“아... 알겠어요.”
현애와 세훈은 머리를 긁으며 대답한다.
“그런데 말이죠, 혹시 그 공격한 초능력자가 누군지는 알 것 같아요?”
“글쎄... 모르겠네. 나도 처음 들어 본 목소리라서.”
파라는 그림자 안에 다시 가방을 넣으며 말한다.
“그럼 나는 일이 있어서 이만. 언제든지 연락해!”
파라가 손을 흔들고는 산책로를 따라 다시 제 갈 길을 가자, 현애와 세훈, 니라차는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하늘을 다시 올려다본다. 구름은 먼 데에 몇 점만 떠 있다. 다시 주위를 돌아본다. 그림자 같은 건 없다. 보이지 않는다. 셋 다, 큰 소리로,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다음날인 일요일 오후.
현애는 아침 일찍 교회에 갔다가, 혼자서 사리역 번화가에 놀러 나왔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노란 티셔츠에 검은 핫팬츠 차림이다. 머리에는 반다나 대신, 진홍색 베레모를 썼다. 사리역 번화가에 혼자 나오니, 며칠 전 세훈, 주리와 셋이서 놀러 나갔을 때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사람들 지나가는 거리에서 혼자 셀카를 찍는다든가, 아무 옷가게나 들어가서 이 옷 저 옷 보며 종업원이나 로봇에게 말을 걸며 깔깔댄다든가, 카페에서 베리믹스 스무디를 먹으며 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낸다든가. 동면 전에도 혼자서 거리를 이렇게 많이 다녀 봤기에, 뭘 해도 어색하지는 않다.
카페를 나와서, 스무디 컵을 들고서, 한참 사람 많은 거리를 걷고 있는 그때.
“현애 선배님!”
한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잘 아는 소리다.
돌아본다.
파란 머리에 창백한 얼굴, 그리고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허리에 붉은 띠를 맨 원피스를 입은, 레아가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는, 파란 단발머리의 품이 넓은 옷을 입은, 키가 큰 이레시아인 남자 한 명이 서 있다. 그 남자가 현애를 보고 어색하게 손을 흔든다.
“아... 선배님, 혹시 이 분이 누구인지, 미레이 씨나 세훈 선배님 같은 분들께 이야기 못 들었나요?”
“저, 레아 님, 제가 직접 소개하지요.”
단발머리의 남자는 레아보다 한 발 앞에 선다.
“안녕, 네가 남궁현애구나.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호렌 아레안 레노'야.”
“네... 안녕하세요.”
현애와 단발머리의 남자가 눈인사를 나누고, 단발머리의 남자는 현애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더니, 계속 말을 잇는다.
“파라하고, 레아 님에게서 이야기는 들었어. 저기 미린고등학교 1학년에 전학 왔지?”
“네, 맞아요.”
현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런데, 파라 씨는 어떻게 아시죠?”
“아, 파라하고는 2년 전에 여행을 한번 같이 다녀 봤어.”
호렌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손에 괴고 말한다.
“서로 티격태격하기도 했고, 위기에서 구해 주기도 했지. 그러면서 친해졌고. 그러고 2년 동안 못 만나다가, 최근에 다시 만나게 된 거야.”
“아... 그래요? 그 티격태격했다는 건...”
“그건 지금은 자세히는 못 말해 줘. 나하고 레아 님은 또 어디 갈 데가 있으니까.”
현애가 보니, 레아가 호렌의 옷깃을 휙휙 잡아당기며 재촉하고 있다.
“그럼, 또 보자. 잘 가.”
“선배님, 또 봐요!”
레아와 호렌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현애는 또다시 길을 나선다. 또다시 혼자 놀기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먼저 할 일은 셀카 찍기. 가방에서 셀카봉을 꺼낸다. AI폰의 홀로그램에 최적의 위치, 자세, 구도 같은 게 표시된다. 홀로그램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포즈를 취한다.
찰칵-
됐다! 성공이다! 최고의 구도, 최고의 자세, 최고의 밝기! 완벽하다! 이제 이걸 SNS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 현애가 싱글싱글 웃으며 SNS에 사진을 업로드하려고 AI폰을 조작하는데...
“엇...?”
손가락이 저려오는 듯하다. 찌릿찌릿하다. 손가락뿐만이 아니라, 발끝도. 감각이 마비되는 것만 같다. 이 느낌은!
주위를 돌아본다. 현애가 선 자리에, 그늘이 져 있다. 바로 왼쪽의 건물로부터 드리운 그림자가 완전히 덮고 있다. 이제 팔까지 저려 오기 시작한다. 빨리, 이 그림자를 벗어나야 한다! 다리가 저려 오는 걸 참고, 그림자가 없는 옆으로 풀쩍 뛴다.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최대한 안 어색하게, 한 손을 들어, 셀카를 찍는 것처럼 하고, 한쪽 무릎이 아플 것을 감수하고, 한쪽 무릎을 꿇어 바닥에 착지한다.
다행이다.
손발이 저리지는 않다.
휴- 하고 일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림자 밖에 나왔으니.
하지만...
“뭐, 뭐야?”
보인다. 그림자가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그것도, 현애를 향해 바로!
“그림자가 왜 살아서 움직이는 거야!”
아뿔싸.
설상가상으로, 거리에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그것도 거리를 꽉꽉 채울 정도로! 그냥 걸어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다!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는, 잰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을 헤치고서.
하지만, 건물의 그림자는, 계속 현애의 발을 따라온다.
닿는다.
그림자가, 현애의 발에.
전기가 찌릿하듯, 쥐가 난 듯, 발이 다시 저리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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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0-08-05 13:15:57
그림자가 이상할 정도로 커진다니, 뭔가 도깨비같은 게 엄습하는 것 같아서 섬찟하네요.
게다가, 낮 시간대일텐데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도 불길해요. 다가오는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 것같은...
그런데, 그런 능력을 발휘하던 그 모자 쓴 사람은 자신의 눈 앞에 뭐가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군요. 사슴을 쫓는 자는 산을 못 본다는 옛 말 그대로...
전작의 인물들이 다시 나타났어요. 파라, 그리고 호렌.
호렌은 이레시아인으로 지구인과는 다른 외모의 종족일텐데 처음 만난 사이끼리 위화감 없이 인사를 나누는 게 인상적이예요. 현실의 인간사회는 같은 인간끼리도 대립하고 반목하며 사는데...
손끝이나 발끝이 저리는 감각, 진짜 싫죠.
수년 전에 몸 상태가 안 좋았을 때 경험했던 게 다시 느껴지고 있어요.
시어하트어택
2020-08-05 23:15:10
그림자는 눈에 보이기 쉬우면서도, 소리는 들리지 않죠. 그래서 양날의 검인 측면이 좀 있습니다. 저 능력도 모자 쓴 저 사람이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관건이겠죠.
전작에 나왔던 캐릭터들도 본작 내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전작을 읽지 않고도 이해가 가능하도록 전작의 내용은 최대한 간략하게 넣으려고요.
SiteOwner
2020-08-06 20:38:54
전작에 등장한 문제의 베라네가 누군가에게는 전에 없던 능력을 발현시키고, 또한 누군가에게는 그 물질 관련의 소동으로 영구적인 장애를 입게 만들고, 이래저래 문제군요. 특히 사고로 다리를 잃어 의족에 의지하는 파라로서는 그 베라네의 존재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겠습니다.
장기투병 이후 재활을 거쳐 13년 전의 그 해에 겨우 살아남을 수 있게 된 저로서는 여러모로 많이 와닿습니다.
갑자기 사라진 파라는 그 모자 쓴 사람 앞에 나타났고, 그 사람은 목표에만 정신이 팔려 파라의 존재를 뒤늦게 알고...
여러모로 긴박했습니다. 게다가 그림자가 현애에게 드리워진다는 것은...
시어하트어택
2020-08-07 21:51:19
앞으로도 베라네가 키 아이템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그게 어떤 식으로 작중에서 역할을 할지는 앞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를 관심있게 봐 주시면 되겠습니다.
역시, 아무도 모르는 새에 급습당한다는 건 정말 공포스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