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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터즈] Chapter 3: 겁쟁이의 후회. Episode 09

Papillon, 2020-10-08 01:31:04

조회 수
139

한 사내가 알몸으로 수술대 위에 놓여있었다.?
햇볕에 태운 구릿빛 피부와 겉으로 드러난 탄탄한 근육. 자신이 거친 남자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흉할 정도로 팔에 가득 새겨 넣은 문신과, 약을 했기 때문인지 팔 곳곳에 보이는 멍은 사내가 정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이가 아님을 알려줬다. 평소라면 술이나 약에 취해 뒷골목에서 여인을 희롱하거나, 다른 남성을 두들겨 패는 것이 일상이었을 그는 지금 척추가 부서져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독 안에 든 쥐처럼 벌벌 떨고 있을 뿐이다.
그런 사내의 바로 옆에는 한 괴인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정체 모를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흥흥~.”

괴인은 실로 기묘한 모습이었다. 그자는 전신을 두꺼운 판금 갑옷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사람의 몸에 맞춰서 만들어진 정상적인 갑주와는 달리 그의 몸을 가린 금속 옷은 비정상적으로 육중한 형태였다. 해부학적으로 따져본다면 안에 있는 사람이 200kg이 넘는 초고도비만에 달하지 않은 이상, 정상적으로는 나올 수 없는 형태. 특히 장갑 부위는 지나칠 정도로 거대했는데, 손바닥 크기만 성인 여성의 몸통 크기인 기괴한 건틀릿의 형태는 대체 어떤 구조로 움직이는지 의아해질 정도다.

“저기, 저기. 좋은 노래였지?”?

괴인은 고개를 돌려 수술대에 놓인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가오자 사내는 괴인이 쓴 투구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형태만 보면 원형 톱날 여러 개를 머리에 꽂아 넣은 모습인 것이 이를 만든 대장장이의 정신건강에 의문을 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기괴한 모습과는 별개로 괴인의 목소리는 실로 맑고 청아했는데, 어찌 보면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달리 보면 젊은 여인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괴인은 자신이 연주하던 오르간과 같은 악기에서 내려와 작업대에 놓인 사내에게 다가왔다. 사내는 혹시나 상대가 흉기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닐까 봐 눈을 굴려 상대의 손을 살폈는데, 다행히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원하는 게 뭡니까?”

괴인이 흉기를 들고 있지 않은 모습을 보자 협상할 여지가 있다고 여긴 것일까? 사내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인지 괴인은 손가락을 들어 사내의 몸을 쓰다듬었다. 사내는 놀라서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망가진 그의 척추는 유감스럽게도 그의 소망을 따라주지 못했다.

“있지, 있지. 어떤 가구를 좋아해?”
“네?”

무슨 암호인 걸까?
마치 친구끼리 할 법한 일상 회화에 사내는 당황해서 사고를 거듭했다. 그러나 평소 공부와 담쌓은 그의 두뇌는 그 어떤 의미를 찾지 못했고, 결국 그저 평범하게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술상입니다.”
“흐음. 술상이라. 그렇게 만들기에는 재질이 안 좋은데?”

유감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괴인.

“뭐, 그래도 네가 원하니 어쩔 수 없나? 나는 재료의 의사를 존중하는 착한 사람이니까. 아하하.”
‘재료의 의사?’

그 말에 사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괴인이 가져온 물건을 본 순간 그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갔다.
형태만 보면 그것은 공구 정리함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재질은 도저히 평범하다고 볼 수 없었다. 공구 정비함에는 어떤 노인의 얼굴이 달려있었는데, 아직 살아있었는지 고통에 가득 찬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악!”

이윽고 괴인이 박스에서 공구를 꺼내자 노인의 얼굴이 지옥에서 울리는 듯한 비명을 토해내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공구를 꺼내는 순간 노인의 신경에 자극이 가도록 특별히 설계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살려줘!”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한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척수 신경이 부서진 몸이 반응할 리는 만무하다.

“있지, 있지. 시작한다~.”

그렇게 괴인이 든 톱이 사내의 몸에 닿는 것과 동시에 사내가 비명을 지르려던 순간,

“음?”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괴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작업’을 멈추었다.

“누가 내 장난감을 두 개나 부쉈네?”

톱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기는 괴인의 모습에 사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간의 정적.

“아, 그래! 사도구나. 사도라면 이렇게 순식간에 없앨 수도 있지.”

분명 근거 하나 없는 추리이건만,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괴인은 자신의 사고가 완벽하다고 자신하는 모양이다.

“흥. 그러면 만나러 가봐야 하는데,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고. 아~그래!”

다시 괴인의 손에 톱이 들리고,

“술상은 이번에는 안 되겠네, 미안해~.”

사내가 무언가를 인식하기도 전에 사내의 머리가 몸통으로부터 잘려져 나가, 쓰레기처럼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보통이라면 이걸로 끝이겠지만,

“그럼, 이제 만들어볼까?”

이 지옥에서는 그런 식으로 벗어날 수 없다.
사내의 머리에 괴인의 손이 닿는 순간,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리며 변이가 시작된다. 공기를 제공할 폐가 없기 때문인지 사내의 머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지만, 일그러진 얼굴을 통해 얼마나 큰 고통이 사내에게 가해지고 있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후.
그곳에는 거미처럼 발이 달린 기이한 생명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자, 그러면 범인을 찾아줘~.”

괴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거미 마물은 어둠 속에 숨어들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괴인 역시 작업실을 나서자, 숨어있던 괴물들이 움직여 이제는 쓸모없어진 사내의 몸통으로 연회를 벌였고, 결국 방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 ***


어색하다.
쓰러진 에스텔을 부축해 집에 데리고 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에스텔이 눈을 뜨니 학창 시절 처음 보는 10년 선배와 둘이서 식사할 때가 생각날 수준으로 어색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뭐라고 해야 하지?
슬쩍 눈을 돌려서 에스텔을 바라보니 생각에 잠긴 건지 아니면 특유의 먹보 기질이 다시 발현된 것인지, 그녀도 눈을 감고 차만 홀짝이고 있을 뿐이다.
그나저나 고작해야 몇 시간 전에 내장파열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차를 마셔도 되는 건가?

“저기 몸은 괜찮나요?”
“괜찮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 수십 배는 비싸다는 것이 단점이긴 하지만, 죽지만 않으면 재생시켜주는 게 그 약이니.”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지만, 담담히 대답하는 에스텔. 유감스럽게도 말문을 트려는 내 노력은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한 모양이다.
구원의 동아줄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내려왔다.

[소여의 아이야.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

이드라의 권태로운 목소리가 초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나 혼자에게만 들리는 줄 알았는데, 계약을 맺은 이상 그녀의 목소리는 나 말고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 모양이다.

“예, 하고자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위대하신 분께 허락을 구해야 하는 일입니다.”
[본녀의 허락이라. 사도야행(使徒夜行)에 대한 일이더냐?”
“네.”
[허하노라. 비록 가계약 상태라고는 하나 이 아이는 본녀의 사도. 늦든 빠르든 알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로다.]

어째 나에 관한 이야기에 정작 내 발언권은 없는 것이 찜찜하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에 걸린 무게에 그냥 침묵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오드리와 마스터가 얘기할 때도 그랬지만 괜히 내가 모르는 얘기에 끼어들어 봐야 귀찮은 일만 있을 테니.

“그럼, 그레고르. 그대는 사도야행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전혀 모릅니다.”
“그럼 사도에 대해서는?”
“신이랑 계약한 존재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럼……,”
“그냥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설명해주세요.”
“으음.”

무지를 당당하게 표현하는 내 태도에 질렸는지, 에스텔은 살짝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해서 나중에 귀찮은 일에 처하는 것보다는, 모른다는 것을 실토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정도는 길드 생활을 1년만 해도 알 수 있는 당연한 일. 이럴 때는 좀 뻔뻔하게 나서는 것이 낫다.

“그렇다면 그대 카다스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는가?”
“이 도시 말씀입니까?”

인구수나 면적, 지도상의 위치 같은 시시콜콜한 정보들이 먼저 떠올랐지만 아무래도 그런 사소한 것을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도시의 역사에 뭔가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

“이 도시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우리 소여 가를 포함한 4대 가문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야 이 도시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죠.”
“그렇다면 그 4대 가문이 왜 이 도시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는지는 알고 있나?”
“글쎄요.”

일단 귀족이라 권력도 있고, 각각 상당한 재력을 자랑하는 가문들이다. 여기에 각 가문만의 비전(?典) 마법들까지 있을 테니, 어지간한 도시에서 권력을 잡는 것까지는 이상한 것은 아닐 터다.
하지만 고작 이런 얘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닐 테고.

“옛 군주와 관련된 이야기입니까?”

조금 머리를 굴려보니, 이드라가 언급한 옛 군주라는 존재들이 떠올랐다. 지금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 도시의 비사이자, 신기와 관련된 일이라면 분명 그들과 관련 있는 일이리라.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구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에스텔.?
그녀의 대답에서 ‘생각보다’라는 부분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일단 지금은 본론에 집중하도록 하자.

“옛 군주와 계약을 맺고 도시를 세운 겁니까?”
[정확히 말하면 물려받은 것이니라. 본디 우리를 섬기던 이들은 그대들이 선주종족이라고 부르던 이들일지니.]

선주종족?
순간 도시 지하에 있는 지하수로의 모습이 생각났다. 고대 시절에 대체 무슨 방법으로 그런 고도화된 지하수로를 만들었나 의아했는데, 거기에 신들이 개입했다면 납득이 가능했다.

[그들은 본디 본녀를 포함한 군주들을 섬기던 이들이었으나, 어느 순간 타락하여 우리를 모독하기에 이르렀다. 그 시기에 노예였던 인간들이 우리와 계약을 맺었으며, 그들 중 우두머리였던 넷이 바로 4대 가문의 시조이니라.]
“그렇다면 옛 군주는 넷이 아니라는 것이군요.”
[그렇다. 본디 우리는 별처럼 많으니. 하지만 이 도시에 관여된 이들은 열셋에 불과하니라.]

열셋인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숫자다. 하나의 신화 체계를 만들어낼 수준은 아니지만, 주신들의 모임이라고 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숫자다.

“도시의 비사는 흥미롭습니다만, 그 사도와 사도야행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흠. 숫자를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다니, 이런 부분은 또 눈치가 없구나.]

아니, 그걸 어떻게 이해합니까? 그거 알면 내가 점쟁이지.
순간 울컥해서 이드라에게 항의를 퍼붓고자 했지만, 다행히도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에스텔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옛 군주가 열셋인데 4대 가문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왜 문제가 되는 것이지?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혁명가라고 해서 모두가 중역을 맡진 않습니다. 누군가는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고, 어떤 이는 토사구팽 당하죠. 그게 인간이지 않습니까?”
“옛 군주들도 그리 여길까?”
“네?”
“하나하나가 자연법칙을 자유롭게 주무르며, 자신의 영지에 한해서는 창조주나 다름없는 고도의 신령들이 ‘당신의 대리자가 도시 주역이 아니니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라는 결정에 순순히 따르겠는가?”

에스텔의 발화는 의문형이지만 그 내용은 의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따르지 않는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나오는 답이다. 당장 귀족들만 해도 자기보다 낮거나 비슷한 작위의 영주를 상대로 압력을 행사하곤 하는데, 신들이 고작 인간들끼리 한 결정에 따를 리 없지 않은가?

“그럼 사도야행이란 것은?”
[단순한 체스다.]
“네?”
[그 말대로이니라. 말을 구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명령을 내려 대결하는 행위. 그대들이 말하는 체스가 아니던가?]
“이드라 님의 말씀이 과격하긴 하지만 그 말이 옳다, 그레고르. 사도야행이란 50년마다 옛 군주들이 즐기는 일종의 대리전. 사도란 체스판 위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단순한 게임이라는 건가요?”
“글쎄…….”
“?”
“체스판 위의 말들이 살아있다고 해도 그대는 똑같이 말할 것인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체스 게임 도중 수많은 말들은 플레이어의 뜻에 따라 죽고, 죽이는 일을 반복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를 잔혹하다 여기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단순히 나무로 만든 거짓이기 때문.?
하지만 그 말들이 진짜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이제 이해한 모양이로구나, 아이야.]

그런 내 귓가를 향해 이드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고 죽이는 살육전에 온 것을 환영하느니라.]

그것은 조롱 같으면서도 위로처럼 들리는 목소리.

“괜찮은가, 그레고르여.”

내 표정이 창백해진 것을 느꼈는지 에스텔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솔직히 위로되진 않았다.

“역시 충격적인 모양이군.”
“네, 솔직히 별로 알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네요.”

당장 오늘만 해도 꽤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그런 살육전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 거기에 이 미친 싸움이 50년에 한 번씩 일어났다고?
문득, 마스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50년 전 이 도시에서 이상할 정도로 잦은 사고가 일어났으며, 그 사고로 도시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
단순히 꼰대들이 하는 과장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그게 진짜였다고?

“그러니 그레고르여, 그대에게 내가 애원하노라.”

공황에 빠져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 틈을 타, 들려오는 에스텔의 간절한 목소리.

“그대는 현재 가계약자, 일상과 이면에 한 발을 걸친 이. 아직 포기라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 말씀은?”
“이드라 님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신기를 돌려다오. 그렇다면 그대는 다시 평소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 명예를, 아니 우리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다시 한번 내 앞에 고개를 숙이는 에스텔.
나를 지키기 위해 그녀가 싸웠던 것을 생각했을 때, 분명 그녀가 이러는 것은 단순히 그녀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내가 안전해지길 바라서 하는 일이란 것은 분명했다.
그래, 그러니까 그녀에게 초커를 넘겨주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아니 애초에 신기의 원주인은 에스텔이 아닌가?

‘그런데 왜?’

왜 나는 초커를 돌려주는 걸 망설이고 있는 걸까?
계약을 파기하겠다, 에스텔에게 권한을 양도하겠다. 그 간단한 문장을 읊는 것만으로 나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그것이 사무치도록 싫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내 일상은 안전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무능력한 쓰레기에 불과했다. 그저 이 세상에 묻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낭비하며 살아갔다.

‘그런데 어제는?’

초월적인 힘이 생겼다. 그 힘으로 날 죽이려던 괴물에게 복수하고, 본래라면 나 따위는 상대도 안 될 에스텔의 목숨을 구했다.
그 순간 나는 일상의 어떤 때보다도 ‘살아있었다.’

[거부하노라.]

그렇게 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이드라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드라 님!”
[소여를 버리고 이 아이를 택한 것은 본녀의 의사다. 한데 어찌하여 그대가 이에 참견하는가?]
“그는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애초에 준비가 되어있는 이가 누가 있겠느냐?]

이드라는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에스텔의 제안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그 때문일까?

“에스텔. 일단 이드라 님과는 제가 대화해 볼 테니, 내일 이야기하도록 해요.”
“그레고르!”
“지금 몸 상태로는 신기를 받는다고 해도 제대로 싸우실 수 없어요. 그러니 조금 쉬도록 해요.”

그녀를 걱정하기에 지금은 돌려줄 수 없다는 비겁한 거짓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 입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알겠다.”

자신을 걱정해서 그런다는 말까지 거부할 수 없었는지, 에스텔은 방 한쪽으로 이동해 조용히 눈을 붙였다.
이윽고 이어진 침묵.

[후후후.]

그 정적 속에서 오직 이드라의 웃음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Papillon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4 댓글

마드리갈

2020-10-13 15:02:09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적당히 기분좋은 서늘한 것이라야 하는데, 이 회차를 읽고 나니 그 바람이 섬찟하게 느껴지고 있어요. 게다가 느린 바람조차도 무섭게 휘두르는 칼날같이 느껴져요. 게다가 차를 마시다가 끔찍한 장면에 놀라서 차를 토해내 버렸어요.


그런데, 괴인의 작업실에 붙잡혀 온 사내의 운명 이상으로 끔찍한 게 또 이어서 나오네요.

카다스라는 도시의 비사, 그리고 사도, 사도야행 등에 대한 것들.

게다가, “체스판 위의 말들이 살아있다고 해도 그대는 똑같이 말할 것인가?” 이라는 에스텔의 말에서 충격을 안 느끼는 게 이상하겠죠. 게다가 선택을 해야 하네요. 초커를 돌려주고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는 다운시프트(Downshift)인가, 초커를 여전히 지닌채 위험을 안고 이전과는 다른 생활을 하는 업시프트(Upshift)인가...


대체 이드라의 목표는 무엇인 걸까요. 이드라의 웃음소리 또한 무섭게 느껴지고 있어요.

Papillon

2020-10-14 02:16:03

쉬어가는 에피소드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동안 쉬어가는 에피소드는 없을 예정입니다. 일단 처음으로 적대하는 사도가 그리 좋은 녀석은 아니라서요.

SiteOwner

2020-10-24 20:41:28

어느 한 쪽에서는 선택의 여지없는 끔찍한 살육극이, 그리고 다른 한 쪽에서는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의 고뇌가...

그리고, 이상한 일에의 기억이란 직접 말과 글로 나타내지 않더라도 한 공간 안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라면 동시대인도 여러 세대에 걸쳐서도 공유되는 것인가 봅니다.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더라도, 예의 것들은 개별 인간에게 관심이 있기 마련. 괴인과 괴물들의 한때의 욕구충족으로 희생된 사나이의 후임이 되지 않으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뜻하지 않더라도 선택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운명인 듯합니다.

Papillon

2020-10-27 00:50:49

삶이란 B(Birth)와 D(Death)사이의 C(Choice)라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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