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지극히 사소한 변화였다.
꿀렁!
처음 보인 것은 대지를 뒤덮는 검붉은 진흙. 녀석이 있는 위치로부터 시작된 진흙의 파도는 삽시간에 주변을 뒤덮기 시작했고, 근처에 있던 나 역시 벗어날 순 없었다.
“젠장!”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자세를 잡고 충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이어진 것은 아무런 타격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평범한 물결.
‘응?’
분명 아무런 피해도 없건만 여전히 내 칠감은 끊임없이 경고성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계속해서 울리는 녀석의 웃음소리.
“히히히히!”
살인귀는 내가 아무런 타격이 없는 것을 보고도 신나서 웃고 있는 상황. 그 모습에 나는 다시 주변을 살폈고, 곧 변화가 시작되었다.
우선은 단순한 냄새였다.
부패취(腐敗臭).
길드 업무 때문에 하수도를 넘나들 때마다 맡아왔던 그 냄새가 갑작스럽게 사방에서 풍겨 왔다. 그 자체로서 해가 되지 않더라도, 굳이 맡고 싶지 않은 악취에 내가 눈살을 찌푸린 순간, 다시 변화가 일어났다.
툭!
비가 내리는 것처럼 무언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크기도 형태도 제각각.
작은 것은 사도가 아니라면 관측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했지만, 큰 것은 어지간한 성인 남성의 머리보다 커다랬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시체……!”
곤충이나 새는 물론, 연금술로 만든 합성수(合成獸, chimera)를 포함한 각종 마도 생물들까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하여도 살아있었건만,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썩어 가고 있었다.
“이게 대체……!”
상식을 벗어난 기괴한 풍경. 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에서 돌아왔다.
[이골로냑, 이 천둥벌거숭이가!]
이드라는 이전까지 보여주던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분노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 분노가 향하는 방향은 살인귀와 계약한 이골로냑이라는 이름의 신성.
“대체 저게 뭐죠?”
[‘부패’다.]
“썩는다는 말씀입니까?”
[부패라는 개념 그 자체를 세계에 구현한 것이니라. 이골로냑은 왜곡과 부패를 관장하는 신성. 녀석의 권능 중 부패에 해당하는 것으로 세계를 덧씌우는 것이니.]
세계를 부패로 덧씌워?
설명을 들어도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어서 눈 앞에 펼쳐진 모습들은 설령 내가 이드라가 설명해준 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진행되어 갔다.
썩어간다.
시체가, 공기가, 목재가, 석재가, 수분이, 건물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썩어 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론적으로 썩을 수 없는 마력 처리가 된 석재까지도 마찬가지. 그렇게 썩어 버린 것들은 검붉은 진흙으로 바뀌어 다시 더 넓은 구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순간,
“설마!”
나는 녀석이 무슨 의도로 이런 능력을 사용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쿵!
나는 서둘러 발을 굴러 에스텔과 오드리가 갇혀 있던 우리 앞을 향해 도약했다. 제법 거리가 있었기 때문인지 진흙이 덮여오진 않았지만, 그것도 고작 한 치 앞.
‘제대로 된 권능 발동으로는 늦어!’
눈을 감고 전신의 감각을 집중한다. 떠올리는 건 사도의 갑주를 걸칠 때의 감각.
“합!”
이윽고 기합성과 함께 전신에서 뿜어진 이드라의 환염이 빠른 속도로 주변을 덮어 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건물의 옥상을 뒤엎는 것과 동시에 멈추는 불꽃.
‘부족해!’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힘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반동인지 코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출 수는 없다.
‘지켜야 할 건 이 건물.’
설령 옥상이 멀쩡하다고 해도 건물이 무너진다면 끝장인 건 매한가지다. 지속적인 무리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부풀어 오르고, 전신 혈관이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억지로 힘을 끌어냈다.
결과는 성공.
아슬아슬하게 진흙이 건물 외벽에 닿기 직전 건물은 백자색 불꽃으로 뒤덮였다.
치익!
진흙이 불꽃에 닿는 순간, 마치 뜨겁게 달군 쇳덩어리를 찬물에 넣은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윽고 불꽃에 밀려서 진흙의 진행이 멈췄다.
‘역시.’
세상의 모든 것을 뒤덮는 진흙이라고 해도 같은 신의 힘마저 어쩔 수는 없는 것일까?
이 불꽃의 장벽을 유지하느라 한 걸음도 움직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진흙의 위협에 당하진 않으리라.
“괜찮은가?”
“네, 괜찮습니다.”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목소리에 나는 대답과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에스텔의 모습. 그 모습에 나는 지금 상황도 잊어버린 채 서둘러 고개를 틀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왜 알몸인 건데?!
싸우기 전에는 긴장 때문에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에스텔은 알몸으로 잡혀 있었던 모양이다.
“음? 뭐가 말이냐?”
정작 에스텔은 아무런 반응도 없건만, 나이가 곧 연인 없던 기간인 나로서는 얼른 시야를 돌리고 사과하는 건 당연한 일인 법이다.
‘빌어먹을.’
어색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목숨 걸고 싸웠는데 이런 꼴이라니.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났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불꽃을 조종하는 데 정신을 집중했고,
퍽!
전혀 예상치 못한 상대가 상황을 반전시켰다.
“끄악!”
풍선이 터진 것 같은 파열음과 동시에 오른팔로부터 전신을 불로 지지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이 샘솟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그와 동시에 다시 내 귓전을 때리는 목소리.
“나 보고 싶었지~.”
살인귀 녀석은 어느새 인가 내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녀석이 회복하다니!
억지로 힘으로 불꽃을 제어하고 있는 나와는 달리 권능으로 다듬어진 녀석의 능력은 이미 제어를 필요치 않은 모양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퍽!
이번에는 오른 다리가 터져 나갔다.
“끄악!”
“그레고르!”
다시 한번 터져 나오는 고통. 그와 함께 불꽃의 장벽 역시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한다.
‘안돼!’
버텨야 한다.
나는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도 잊은 채, 억지로 이를 악물며 다시 불꽃 조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히히~. 얼마나 버틸까?”
그런 내가 재미있기라도 한지 다시 한번 손바닥에서 검붉은 아지랑이를 피어 올리는 살인귀.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 ***
?
아직 어스름이 남아 있는 이른 아침의 하늘에 붉은 혈화가 피었다가 꽃잎이 되어 흩어진다. 그 꽃의 뿌리가 박힌 곳은 한 사내의 몸.
“큭!”
사내, 그레고르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두 다리로 대지에 섰다. 만약 그가 쓰러졌다가는 지옥을 막아내고 있는 불꽃의 장벽마저 무너짐을 알기에.
“그레고르…….”
그 처절한 분투를 보며, 에스텔은 깊은 무력감에 가슴이 옥죄어왔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그녀는 기사.
보호받는 이가 아닌 수호하는 자.
본래대로라면 일어서서 적을 맞이하는 것은 그녀의 동료가 아닌 자신의 몫일 터. 하지만 지금 그녀는 무기조차 들지 못한 채 갇혀 있는 신세.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고개를 들어 모든 것의 원흉을 노려보았다.
“하하하하!”
블레어, 이골로냑의 사도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목소리로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 모습은 그야말로 악귀나찰, 그 자체.
“어~느~곳~을~고~를~까~요?”
노래하듯 흥얼거리며 그레고르의 신체 부위를 고르던 그의 손가락이 멈췄고,
퍽!
“크악!”
다시 한번 그레고르의 신체 말단이 터져 나가며 붉은 꽃이 피었다.
‘젠장!’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블레어를 향해 뛰어들고 싶다.
하지만 상대는 사도.
그녀가 아는 최후의 기술을 사용한다고 해도, 사도를 상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기분이야 풀릴지도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화풀이를 한다고 해봐야 결국 그레고르를 모독하는 것 일터.
‘찾아야 한다.’
지금 이 전장을 뒤엎을 수 있는 열쇠를.
그녀의 두 눈은 매섭게 주변을 훑기 시작했고, 이윽고 한 곳에서 기이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어어어.”
그녀의 눈이 멈춘 것은 한 괴물이 진흙에 잡아 먹히고 있는 장소. 살아있는 ‘부패’ 그 자체인 저 진흙은 피아를 구분치 않고 모든 것을 삼켰기에, 괴물의 희생 따위는 특이한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위치.
‘어째서 저곳이 삼켜졌지?’
이 구역 도로의 기울기는 평평하다. 그렇기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저 진흙은 발원지로부터 같은 거리만큼 뻗어 나가야 할 터. 하나, 저 구역은 바로 옆에 있는 곳에 비하면 지나칠 정도로 멀었다.
‘어째서냐?’
한곳의 이상성을 발견한 즉시, 그녀의 눈은 빠르게 다시 전장을 살폈다. 그리고 그 관찰이 입증하는 것은 단 하나의 사실.
‘먹이를 노리고 있다!’
저 진흙은 살아있다.
그 형태에 현혹되어 녀석을 단순한 물질로 단정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저건 소환수다.’
부패하지 않은 존재를 노리고, 모든 멀쩡한 것을 집어삼키는 최악의 짐승.
그랬기에 녀석은 자신이 집어삼킬 수 있는 것이 많은 곳을 먼저 노렸고, 그랬기에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서는 그리 멀리 나가지 않았지만, 건물이나 괴물이 있는 장소로는 빠르게 진군했다.
‘답은 나왔다.’
답을 찾은 에스텔은 눈을 빛내며 호흡을 가다듬었고,
두근!
그와 동시에 그녀의 마력이 한곳으로 몰려들었다.
‘목표는 심장.’
마력은 곧 생명력.
그렇기에 생명력의 근원인 심장은 마법사에게 가장 중요한 기관이다. 그렇기에 심장에 마력을 모으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 잘못하면 가공되기 이전의 생명력과 마력이 충돌해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 기술은 금기.
‘하지만 지금은 써야 한다.’
금기(禁技). 우로보로스의 윤회.
쿵!
체내에서 화산이라도 터진 듯, 어마어마한 충격이 그녀를 강타하는 동시에 상상조차 못 해본 통증이 온 신경계를 유린했다.
“큭!”
예상 이상의 고통.
전신 근육이 찢어질 듯 비명을 질러 대고, 상한 내장 조각이 피에 섞여 입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지나치게 올라간 혈압으로 인해 터질 것 같은 전신 혈관.
하지만 그 효과 역시 어마어마했다.
웅!
에스텔의 손끝에서 시퍼런 마력 칼날이 뻗어 나왔다.
순수 마력검.
본디 그녀의 경지로는 하늘이 쪼개지더라도 시도할 수 없는 고도의 기예. 하지만 금기를 범한 대가로 그녀는 이 터무니없는 힘을 다루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손길이 지나치자, 뼈로 만든 창살이 수수깡처럼 쉽게 부러져 나간다.
하지만 이것은 고작해야 시작.
‘길어야 1분.’
그 이상 이 힘을 사용하면 앞으로 검은 물론, 숟가락조차 혼자 힘으로 들 수 없는 몸이 될 터.
‘빨리 처리한다.’
“하압!”
자신을 의아한 듯 바라보는 블레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녀는 모든 마력을 손끝에 집중한다.
원하는 것은 단 일격.
지상에 태양이 떠오른 듯 환하게 빛나던 푸른 마력 칼날은, 이윽고 한 점으로 수렴했고,
비격(飛擊). 사자의 포효.
허공을 뛰어넘어 목표를 찔렀다.
쾅!
공격에 휘말린 건축물이 무너져 내린다. 그 잔해가 향하는 곳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 이윽고 공터에는 무수히 많은 멀쩡한 잔해들이 모였고, 진흙이 그것을 발견했다.
그와 동시에 방향을 트는 부패의 홍수.
자신들을 불사르는 환염의 장벽을 두고 진격을 멈추었던 그들은 새로운 먹잇감이 있는 장소로 환호하며 달려갔다.
‘성공했다.’
건물을 감싸던 진흙의 군세가 물러가는 것을 느끼고 에스텔은 미소 지으며, 마력을 거뒀다.
“음?”
마력이 사라진 탓일까?
더는 버틸 힘을 잃은 그녀는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검붉은 금속의 벽.
“방해했겠다~.”
블레어.
내려 쳐지는 것은 그의 기괴할 정도로 거대한 손.
‘끝인가?’
지금 상태로는 방어도 공격도 할 수 없다.
그렇게 판단한 에스텔은 조용히 눈을 감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죽음은 오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에스텔.”
대신 들리는 것은 그녀를 지켜주던 사도의 목소리.
‘그레고르.’
그의 감사 인사를 들으며, 에스텔의 의식이 서서히 멀어졌다.
?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4 댓글
마드리갈
2020-10-20 16:39:38
그레고르도 에스텔도 이렇게 절체절명의 싸움을...
게다가, 이골로냑의 사도 블레어는 끔찍한 살인귀에 문제의 이골로냑은 왜곡과 부패를 관장하는 신성이군요. 사실 생물학적으로는 부패라는 게 생태계의 순환에 필요한 과정이긴 하지만 또한 그와 동시에 독소를 생성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보니 자연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인데, 이렇게 생각하면 이골로냑은 언제든지 발동될 수 있는, 그러기에 경계해야 하는 신성이기도 하네요.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더욱 무섭게 느껴지고 있어요.
보통 나체인 상태는 신체의 유려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거나 부끄러운 상황을 묘사하기 마련이지만, 여기서 에스텔의 알몸은 그런 느낌이 전혀 없어요. 풍전등화의 운명같은 미약함만이 부각되기만 할 뿐인...
Papillon
2020-10-21 00:34:26
일상 파트에서 알몸 씬이 나왔다면 좀 달랐겠지만, 전투 중이니까요.?
SiteOwner
2020-11-20 22:23:40
끔찍한 전투장면에 한동안 멍하게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코멘트를 하고 있습니다.
이골로냑에 대한 이드라의 분노,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런 것에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할 것 같습니다.
분전했지만 역부족이었던 그레고르에게 위기가 닥쳤고, 잘못하면 그레고르는 물론 에스텔도 끝장이 나버릴 수 있는 상황하에서 단서를 잡고 용기있게 일격을 가한 덕택에 블레어는 힘을 잃었고 그레고르도 에스텔도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군요. 다행입니다.
나체란 아름답기도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연약하기만 할 뿐...통상적인 것들이 왜곡되는 이 상황이 길게 이어지지 않은 것도 다행이라고 해야겠습니다.
Papillon
2020-11-22 21:40:40
이골로냑은 최초로 등장한 적측 옛 군주인만큼 가장 인성적으로도 전투적으로도 떨어지는 존재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고위의 존재로 설정한 이드라랑 사이가 나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