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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순간적으로 내려간 주위의 온도에 위화감을 느꼈는지, 비토가 순간 몸을 조금 움찔거린다.
“생각보다 꽤 세네요. 온몸에 소름이 확 돋을 뻔했습니다.”
“‘생각보다’, 라니요?”
현애가 비토를 노려보며 되묻는다.
“그렇게 말한다는 건 제 능력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아니, 아니, 아닙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비토는 당황했는지 조금 말을 더듬는다. 그런데도 말투는 여전히 예의 바르고 정중하다. 그런 것이 오히려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다.
“하, 오해라고요?”
“오해가 아니고, 제 말을 좀 들어 주시면...”
“비토 씨 당신이 오해 살 짓을 이렇게 해 놓고서도 그런 말이 나와요?”
현애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비토 주위의 온도가 더욱 내려간다.
“당신 첫인상은 꽤 괜찮았는데 말이야, 이제 보니 아니야. 당신의 고분고분한 얼굴 뒤에 숨은 진짜 목적을 알아야겠어.”
“오해입니다. 이건 오해예요. 제 말을 좀 들어 주시면...”
비토가 손을 내저으며 뭐라고 말해 보려 하나, 현애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진다.?
“오해고 뭐고...”
그때.
“아음... 개운하네.”
세훈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말한다.
“피로 같은 게 싹 없어진 기분이야.”
“뭐야, 조세훈 너, 어떻게 된 거야?”
“아, 뭐 별 건 아니고.”
현애가 돌아보자, 세훈이 실없이 웃으며 말한다.
“어깨 뻐근하고 눈 아프고 그러던 거, 싹 없어졌어. 정말이야.”
“난데없이 무슨 말이야, 그게? 누가 그렇게 말하라고 암시한 거야? 아니면 세뇌약 같은 걸 먹은 거야?”
“아니, 아니야! 누가 그렇게 시킨 건 아니야!”
세훈은 곧바로 강하게 부정한다.
“나는 그저 내가 느낀 걸 바로 말했을 뿐이라고!”
“세훈이 말이 맞아.”
앨런이 현애를 제지하며 말한다.
“끓어오르는 건 이해하지만, 좀 차분하게 들을 필요가 있겠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설마... 설마 앨런 씨도 세뇌된 건가요!”
“아니라니까! 네가 지금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좀 진정해. 진정하라고!”
“두 분 말이 맞습니다. 좀 진정하시고 저를 봐 주십시오.”
비토는 이번에는 손을 들거나 하지 않고, 지그시 현애를 바라본다. 하지만 못 믿겠다. 적대감 섞인 얼굴을 하고서는 비토를 돌아보는데...
이상하게...
가라앉는다.
조금 전까지 불같이 타오르면서도 얼음장같이 차가웠던 현애의 속 깊은 곳에서, 불길이 잦아들고, 눈보라가 수그러든다.
“무슨 술수를 썼는지 몰라도, 보통이 아니야.”
현애는 여전히 이죽거리지만, 팍 누그러졌다. 몇 초 전까지 불타오르고 눈보라를 일으켰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세 분 모두, 좀 진정시켜 드렸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려면 좀 차분하게 들어야 할 것 같아서요. 다시 말하지만, 저는 여러분을 해치지 않습니다.”
비토는 수영을 돌아본다.
“나 믿지? 나는 누군가를 해치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야!”
수영은 말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비토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제 알았죠? 수영 씨는 제 친구입니다. 여러분께 어떻게 비쳤을지는 모르겠지만 근본은 선한 사람입니다. 설마 속인다거나 하겠습니까?”
“하... 그래요. 한번 믿어 보죠.”
확실히 누그러졌다. 겉뿐만 아니라 속도.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 비토가 한번 심호흡을 하고 말한다.
“그러면 저도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테이블에 앉은 모두의 시선이 서 있는 비토에게 쏠린다.
“사실 저는 자비에 씨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오랜 친구였죠.”
“치... 친구였다니요?”
“여기 작가님하고만 친구였던 거 아니었나요?”
일행이 반문하자, 비토는 좀 더 진중하게 말한다.
“아니오, 자비에 씨도 제 친구입니다. 그것도 수영 씨보다도 더 오래됐죠.”
“정말요?”
비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습니다. 혹시 자비에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네... 맞아요.”
세훈이 얼른 말한다.
“저번 주 이후로 통 연락이 안 되고 있거든요. 위치 추적도 안 되고...”
“흠...”
비토의 얼굴에 마치 먹구름이 낀 듯, 더욱 어두워진다. 얼굴을 돌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무거운 한숨을 몇 번 쉰다.
“저, 그러면 비토 씨, 실례되지만 자비에 씨에 대한 질문을 좀 해도 될까요?”
비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좋습니다. 그러면 하나만 묻지요.”
앨런이 눈을 빛내며 묻는다.
“혹시 자비에 씨가 여기 블랙실드 카페에 최근 한 달 사이에 몇 번이나 다녀가시는지, 아시나요?”
“최근 한 달 사이에는 한 번밖에 못 봤던 것 같습니다. 그 전에는 좀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법률사무소에 취직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나서는, 여기저기 자주 다니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볼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열흘쯤 전에 저녁 시간에 한번 보기는 한 것 같은데, 그때도 처음에는 누군지 몰라봤고 나중에 알았을 때는 이미 떠나 버린 뒤였죠.”
“그런가요...”
앨런은 조금 힘없이 답한다. 지금 비토의 얼굴로 봐서는 비토가 하는 말은 거짓은 아닌 것 같다. 한 달 동안 한 번 만난 게 전부였고, 그것도 스쳐 가듯 지나간 게 전부였다니...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한번 더 물어보기로 한다.
“그러면 혹시 비토 씨가 그때 봤을 때, 자비에 씨는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나는 게 있나요?”
“누군가하고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어요. 테이블은 커피 놓는 자리 말고는 온통 노트와 사진으로 채워져 있었고요. 처음에는 그냥 다른 사람이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자비에 씨였죠. 그래서 잡으려고 했더니, 이미 사라지고 없더군요.”
현애와 세훈도 고개를 끄덕인다. 평소 보던 자비에의 모습 그대로다. 뭔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니고, 카페에 죽치고 앉아 있고, 거기에다가 책상 위에 서류와 노트 같은 것들로 꽉 채우고... 현애, 세훈, 앨런 모두 동의할 정도다. 틀림없는 자비에다.
“그래요... 그 이상은 모르신단 말이죠.”
“그것 말고는... 평소에 보던 얼굴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죠.”
“그렇군요...”
앨런은 태블릿에다 메모를 끄적이며 말한다. 조금은 실망했다. 원했던 만큼의 정보는 얻을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하나만 더 물어보고 싶다. 이왕 이렇게 만났으면 말이다.
“하나만 더 물어 보죠. 괜찮을까요?”
“네, 물어 보세요.”
비토가 조금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동의하자, 앨런은 바로 묻는다.
“자비에 씨는, 어떤 사람이었죠?”
“제가 아는 자비에 씨는, 매우 유쾌한 사람이었어요.”
“에? 정말요?”
“자비에 씨가 말입니까?”
옆에서 지켜보는 수영만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할 뿐, 현애, 세훈, 앨런 모두 적잖이 놀라는 표정이다.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항상 진지한 얼굴, ‘각 잡힌 듯한’ 행동을 하던 자비에가 그렇게 유쾌한 사람이었다니?
“믿기지 않는데요.”
“그럴 수도 있겠죠. 확실히 자비에 씨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라든가 수입과는 상관없이, ‘인생은 즐기자’는 신조를 지니고 살던 사람이었거든요. 몇 번 파티를 하러 갔을 때도 그런 취지의 이야기를 했고, 가족들도 다들 그러려니 했으니까요.”
“그래요?”
“그랬던 친구인데, 한 달쯤 전에 갑자기 연락이 뜸해졌어요. 그때가 그 법률사무소에 취직했을 때일 거예요. 심지어 전화번호도 바꾸고 사는 곳도 바꿔 버렸어요. 저도 바빠서 통 연락이 안 되다가 얼마 전에 연락처가 다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한번 만나 봐야겠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종되었다니...”
“그 상실감, 잘 알죠.”
앨런이 무겁게 입을 뗀다.
“자비에 씨는 제 직장 후배였고, 그 전에도 다른 친구를 그렇게 잃었던 적이 있거든요.”
“정말요?”
시간이 흘러 오후 5시.
“나는 아직도 안 믿겨. 자비에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게.”
카페를 나오는 길에 앨런이 머리를 긁으며 말한다.
“저도요. 그렇게 안 보였는데...”
세훈 역시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왜 그런 말 있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3가지 이상의 얼굴이 있다는 말 말이죠.”
현애도 알쏭달쏭한지, 왼쪽 머리의 땋은 머리를 자꾸 매만진다.
“자비에 씨도 혹시 그런 게 아닐까요?”
“거 참 개성이 뚜렷한 분이시군요. 하긴, 아주 이상한 건 아니고, 있을 법도 하겠네요.”
수영 역시 머리를 긁으며 말한다.
“참, 그래서 말씀드려 보는 건데... 앨런 에반스 씨.”
“네?”
“실례가 안 된다면 다음에도 또 만나 봐도 될까요? 저도 참고할 만한 게 좀 많아서요.”
“아....”
앨런은 조금 고민하더니, 어렵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 알겠습니다. 오시기 전에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 작가님.”
“물론이죠.”
저녁 8시, 블랙실드 카페. 오후 4시 때보다 사람은 더욱 늘어났다. 안쪽의 자리는 이미 꽉꽉 차서, 바깥의 테라스를 몇 개 더 갖다 놨다.
검은 머리를 포마드로 말끔하게 매만진,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온다. 카운터에 있던 비토가 남자를 맞이한다.
“어서 오십시오.”
“아메리카노 뜨거운 거로 하나 주세요.”
“네, 금방 나옵니다.”
기다리는 동안, 그 남자는 비토를 향해 묘한 웃음을 보낸다. 하지만 비토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커피를 만들 뿐. 남자는 그런 비토를 보며 묘한 웃음을 계속 지을 뿐이다.
어느새, 커피가 다 되자, 남자는 커피잔을 들고 밖의 테라스로 향한다. 자리에 앉아서 주위를 한번 살핀다.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쓰는 것 같지 않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난 뒤, 남자는 전화를 건다.
♩♪♬♩♪♬♩♪♬
“여보세요?”
약 3초 후, 누군가가 전화를 받는다.
“아, 접니다. 통화 괜찮으신지요?”
남자는 전화 너머의 목소리에게 공손히 말한다.
“괜찮다. 말해라.”
주위를 한 번 더 살펴보고, 아무도 자신의 말에 관심을 쏟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목소리를 확 죽인 다음 전화에 가까이 대고 말한다.
“‘그 녀석’을 드디어 찾았습니다. 제 선에서 처리할까요?”
“아니다. 그렇게 할 필요 없다.”
전화 너머의 목소리의 답은 단호하다.
“네가 찾았다고 하더라도, 바로바로 처리하는 게 아니다. 의심이 가지 않도록 일을 처리해야 한다. 일단은 놔두고, 내 지령이 있으면 그때 녀석을 처리해도 늦지 않다.”
“예, 예.”
“너무 대놓고 처리해 버리면 VP재단이나 정부의 의심을 사기 쉬우니까.”
“맞습니다, 맞습니다.”
“내가 여기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아나?”
“알고 있습니다.”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점점 근엄해지고,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공손해진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좋아. 그럼 일단은 관찰에 집중하도록. 내가 지령을 다시 내려 줄 때까지는, 녀석을 관찰하고 동향을 보고하라. 이상.”
전화가 끊기고 나서도, 남자는 1분 정도를 고개를 숙이고 들지 않는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남자는 고개를 든다. 그리고 커피를 한 번에 들이킨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0-11-04 12:35:12
비토 카스텔리가 의외로 다른 사람들과의 접점이 있었네요. 게다가 수영은 물론이고 자비에와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의외의 측면을 알고 있는 이런 사람일 줄이야...보통 사람같으면 계속 오해받으면 그대로 돌아서거나 극도로 분노할 게 분명한데, 대단해요. 최소한 나쁜 사람은 아닐 것 같아요. 그렇게까지 오해를 받고서라도 관철해야 할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닌 한은.
자비에의 알려지지 않은 다른 면모, 그리고 그가 경험한 일과 일변한 모든 것과 실종, 도무지 종잡을 수 없네요.
새로이 나타난 신사는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시어하트어택
2020-11-04 23:37:13
비토의 앞으로의 역할이 더 중요해질 겁니다.
그 역할은 지금 시점에서는 아직 표면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요.
저렇게 의연하게 행동하는 모습에서 저도 미처 짚고 가지 못한 모습을 읽으셨다니, 감사드립니다.
SiteOwner
2020-12-10 23:18:05
일촉즉발의 위기가 이렇게 잘 해결되었군요. 천만다행입니다.
비토 카스텔리는 정말 대단하군요. 여러모로.
게다가 의외로 다양한 사람들과의 접점이 있는 노드같은 인물. 이런 사람의 존재는 참으로 반갑습니다. 반면에 적으로 돌리면 참으로 성가시게 되는 것이지만...
역시 노드가 되는 인물은 적 측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것이군요. 그러기에 더욱 신중하게 대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시어하트어택
2020-12-11 16:20:58
꽤나 흥미로울 겁니다. 무심하게 지나치던 사람에게 의외의 접점이 있다는 것은. 그러니까 인간관계도 다시 한번 살피고 할 필요가 있는 법입니다.
비토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비밀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적들도 주목하고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