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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금요일 오후 4시. 하늘은 조금 흐리기는 해도, 금요일의 분위기는 활기에 넘친다. 미린고등학교의 하굣길도 마찬가지고, 물론 현애도 마찬가지다. 평소와는 달리 혼자서 걷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김빠진 목소리로 ‘아- 즐거운 금요일-’ 같은 즉흥곡을 지어 부를 정도로 신이 난다.
생각해 보니 저번 주부터 은근히 일이 많이 일어났다. 앙드레와 싸웠던 건 논외로 치더라도, 폐건물에 탄환 찾으러 갔다가 얼굴도 모르는 초능력자와 싸웠던 것, 자비에가 실종된 것, 인기작가 드릴맨을 만나러 갔다가 열만 받고 돌아온 것, 그리고 드릴맨을 만났다가 거기서 앨런을 만나고 또 자비에의 지인까지 만나게 된 것 등. 거기에다가, 잊을 만하면 일어나는 쓰레기통 폭발 소식, 도깨비불, 공동묘지의 좀비 이야기 등은 덤이다. 어째서인지 어제 목요일은 그런 소식은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안 좋은 소식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굳이 하나를 꼽자면, 대략 열흘 만에 앙드레가 학교에 돌아왔다는 것. 평소와 달리 앙드레는 풀이 많이 죽어 있었다. 눈가는 퀭해졌고 잘 빗던 머리는 헝클어졌고 입도 많이 마른 것처럼 보였다. 걷는 모습도 힘이 없었고, 운동을 한다고 자랑하는 일도 더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전에는 친구들 시선 끌기를 좋아했는데, 오늘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슬슬 피했다. 현애가 가까이 오자 도망가 버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는 행동만 놓고 보자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마침 앙드레가 보인다. 앙드레는 저벅저벅, 남들을 피해 혼자 걷고 있다. 평소 걸음걸이의 반도 안 되는 속도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현애는 앙드레를 향해 빠른 걸음걸이로 접근한다. 그리고 바로 옆으로 붙어서, 지나간다. 앙드레가 덜덜 떤다. 애써 시선을 피하는 앙드레를 살짝 돌아보고 싱긋 웃고는, 현애는 앙드레를 앞지른다. 앙드레가 벌벌 떠는 진동이 전해질 정도다.?
어느 정도를 그렇게 걸었을까.?
앞에 누군가 서 있다.
교복을 입은 갈색 머리의 남학생이.
미린고등학교 학생은 아니다. 일단은 디자인부터가 다르다. 미린고등학교가 반팔 남방셔츠를 바탕으로 보라색을 넣었다면, 저쪽은 만화에서 보는 것과 비슷한, 흰 셔츠에 군청색 니트티를 받쳐 입었다.
“어, 안녕.”
그 남학생이 먼저 말을 건다. 현애는 일단은 한 발을 살짝 뒤로 물러선다. 왜 모르는 사람이 저렇게 반갑게 인사를 하지? 이상한 일이다. 충분히 의심이 간다.
“네가 그렇게 의심이 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해.”
남학생이 다시 말한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적대적인 건 아니다. 한 걸음 다가가 본다.
“미린고등학교 1학년 G반의 남궁현애였지?”
남학생은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한다.
“너, 나를 어떻게 알아?”
“아, 우선은... 이 분이 소개해 줬거든.”
남학생이 AI폰을 들어 보인다. 거기에 보이는 사진은 제임스 듀폰 변호사의 사진. 그러고 보니 저번 주에 우연히 만났을 때, ‘도깨비불’ 이야기를 했었다. 설마 이 남학생도 도깨비불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일단은 들어 보기로 한다.
“혹시 너도 이 분 알아?”
“아, 몇 번 본 사람이지.”
“그래...”
남학생은 몇 번 AI폰을 만지더니, 또다른 사진을 보여준다.
“혹시 그럼 이 사람들도 본 적 있어?”
이번에는 여자 2명의 사진이다.
“정확히 말하면, 한 명은 외계인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모르겠는가. 다 아는 후배들인데! 한 명은 레아,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츠츠지모리 사이.
“미린중학교 다니지. 나하고도 잘 아는 후배들이야.”
“그래...”
남학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AI폰을 만진다.
“참, 나도 한 마디만 해도 될까?”
현애가 남학생을 보고 말한다.
“나는 아직 네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소개 좀 부탁할게.”
“아, 맞아. 내 소개를 안 했나?”
남학생이 머리를 긁으며 잠시 멋쩍게 웃다가, 헛기침을 두 번 하고는 웃음기를 싹 뺀다.
“자, 내 소개를 할게. 내 이름은 ‘시저 컬리’, 도라고등학교 2학년 2반이야. ‘골드스타’ 단지에 살고 있지.”
골드스타 단지라면, 미린역에서 지하철로 3정거장 가면 나오는 단지다. 주리네 집이 있는 알파 단지의 바로 옆 단지이고, 아직까지는 도깨비불이 나온 적이 없었던 단지이기도 하다.
“골드스타 단지? 거기, 알파 단지 옆에 있지.”
“맞아. 어떻게 알아?”
“아, 내가 지금 거기에 살고 있어서.”
“정말이야?”
시저의 표정과 눈빛과 목소리, 모두가 밝아진다.
“그럼 오늘 한번 같이 가 봐도 될까?”
“음, 왜?”
“왜긴 왜겠어, 어제부터 우리 단지에 그 도깨비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정말?”
현애의 목소리도 순간 높아진다.
“정말 도깨비불이 나타난 거야?”
“그래, 네가 아는 그 도깨비불이라고!”
시저가 목소리를 높이며, AI폰의 홀로그램을 켜고 영상을 보여준다. 영상 속에는 푸른 도깨비불들이 아파트단지 주위를 마구 돌아다니고 있다. 어떤 것은 놀라서 도망가는 행인의 뒤를 쫓아다니고 있다. 확실히, 저번 주에 듀폰이 보여주었던 그런 종류의 도깨비불이 맞다!
“그래, 네가 왜 나한테 와서 이런 걸 보여 줬는지 잘 알겠어.”
현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가 보자. 나도 내가 아는 사람들을 좀 오라고 할게.”
알파 단지 입구. 현애와 시저가 AI폰을 보며 소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
“뭐야, 그럼 너 냉동된 건 언제적이야?”
“그게... 좀 많이 오래됐지.”
“어... 그래? 어쨌든, 많이 신기하네. 냉동인간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지금은 해동됐지. 그러니까 ‘전 냉동인간’이야.”
“아무튼.”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현애가 문득 시계를 보니 오후 6시다.
“아참, 너도 연락은 한 거야?”
“아, 맞아. 한 명 올 거야.”
“한 명? 그래...”
어느 정도 기다렸을까.
“여기야, 여기-”
누군가가 현애와 시저를 향해 손을 흔든다. 현애가 보니, 메이링과 앨런이 도로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메이링 씨! 앨런 씨!”
현애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손을 흔든다.
“꽤 일찍 왔네요?”
메이링과 앨런이 길을 건너와서 현애와 시저 맞은편의 벤치에 앉는다.
“그래. 네 옆에 있는 애는 누구야?”
“이런 말 쓰기는 뭐하지만... 제 의뢰인이죠.”
“의뢰인? 아, 맞아. 도깨비불 때문에 왔다고 했지?”
“네...”
시저가 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는다.
“그래... 시저랬지? 골드스타 아파트 단지의 도깨비불 때문에 의뢰한 거고.”
시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맞아요.”
현애가 살짝 주위를 보더니, 메이링의 옆으로 가서, 목소리를 낮추고 말한다.
“저, 메이링 씨.”
“왜?”
“좀 괜찮으세요?”
“아, 맞아. 시간이 좀 지나니까 충격에서 나름 벗어나더라.”
“다, 다행이네요.”
“아직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고... 아니, 이렇게 비유해야겠지. 지진이 나잖아? 큰 지진은 끝났어. 하지만 미약한 여진은 계속 일어나지. 자비에가 없어졌다는 그 큰 충격 때문에 며칠은 일하기 어려웠지만, 그건 금방 끝났어. 하지만 거기에서 오는 상실감이나 불안감 같은 복합적인 감정은 아직도 크게 남아 있어. 그런 거야.”
“그래요...”
현애는 무겁게 대답한다. 메이링이 겪고 있는 그 여진이 자신에게도 전해지는 듯하다.
“참.”
앨런이 시저를 돌아보며 말한다.
“온다는 친구는 아직 안 온 거야?”
“아니요. 이제 금방 올 거예요. 올 때가 다 됐는데...”
시저가 막 뭔가 말을 하려고 할 때쯤.
“여기야, 여기!”
남학생 한 명이 시저를 보고 손을 흔든다.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니까, 투블럭 머리를 한 땅딸막한 남학생이 서 있다. 시저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고, 키는 중학생보다도 더 작아 보인다. 어디 나들이라도 간다고 생각했는지 어깨에 멘 가방에는 음료수병이 몇 개 들어 있는 게 살짝 보인다. 눈으로 어림잡아 보니 한 155cm에서 160cm는 되어 보인다. 신기하다. 현애보다도 한 살은 많을 텐데, 키는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라니?
아무튼, 그 키 작은 남학생은 현애와 시저가 있는 쪽으로 와서는, 메이링과 앨런에게 한 번씩 인사한다. 현애와도 눈이 마주친다. 척 보니, 나쁜 사람이나 수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메이링 씨!”
단지 안쪽에서 주리의 목소리도 들린다. 메이링을 부르자마자, 주리는 단숨에 메이링에게 달려간다. 메이링도 반갑다는 듯 얼굴을 활짝 편다.
“괜찮았어요? 한동안 안 보이시길래.”
“아, 괜찮아, 괜찮아. 나는 괜찮아.”
“정말요? 제가 다 걱정되는데.”
“이제 좀 마음을 다잡았어. 그러니까 신경은 쓰지 마.”
메이링은 일어나서 일행의 얼굴을 한번씩 보더니, 활기차게 말한다.
“좋아. 그럼 다 모인 것 같네. 가 보자고.”
“어... 제 이름이요?”
땅딸막한 남학생이 싱글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제 이름은... ‘마르코 티머만’이예요. 도라고등학교 2학년 2반이죠. 말하기는 좀 사소하긴 한데, 교내방송 기자로 활동하고 있고요. 뭐, 앞으로 기자가 될 거니까요.”
“기자라...”
메이링이 마르코의 말을 유심히 듣다가 말한다.
“그럼 지금 가는 것도 혹시 취재하려고 가는 거야?”
마르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혹시 떨리지는 않아?”
“글쎄요, 저는 좀 다른 의미로 떨리죠.”
다른 사람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고, 적어도 얼굴에 웃음기는 띠고 있지 않지만, 마르코는 무엇이 즐거운 건지 얼굴에 은근히 웃음기를 흘린다.
“그래.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
메이링은 이마에 손을 대고 한숨을 푹 쉬며 말한다.
“하지만 적어도, 얼굴에 대놓고 ‘재미있다’라고 하지는 말아 줘. 이걸 겪는 사람들은 즐겁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걷다 보니, 어느새 골드스타 단지 입구에 다다른다. 금요일 저녁의 아파트단지의 풍경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도에는 정장 입은 사람들과 가벼운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오가고, 단지를 나가는 차보다는 들어오는 차가 더 많다.
“글쎼, 평소와는 그렇게 다르지 않은데...”
현애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한다.
“정말 여기서 도깨비불이 나오는 게 맞아?”
“그래. 도깨비불이 나오니까 불렀지.”
시저가 답답하다는 듯 말한다.
“기다려 봐. 아직 도깨비불이 나올 시간은 안 됐으니까.”
“그래?”
메이링은 앨런을 돌아본다. 앨런은 누군가와 통화하는 중이다.
“아, 오실 수 있다고요? 예, 예. 그럼 바로 이리 오시죠! 예!”
“앨런, 그 작가하고 통화한 거야? 전화 다 끝났지?”
메이링은 조심스럽게 앨런을 부른다.
“아, 네.”
“그 도깨비불이 주로 몇 시쯤에 출연한다고 했더라?”
“지금까지 들어온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앨런이 잠깐 머리를 굴리는 듯하다가 입을 연다.
“평균적으로 7시에서 8시 사이에 나타났죠... 바로 지금쯤이네요, 변호사님.”
“정말이야?”
앨런이 막 고개를 끄덕인 그 순간.
살짝 보이는 것 같다.
푸른 불꽃 같은 게.
앨런의 뒤에!
“저... 저거... 설마!”
앨런의 외침에, 다들 앨런이 가리킨 곳을 본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0-11-06 22:31:02
현애의 개인정보는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세라토시 미린구의 공공재인가요...
유명인도 아닌데 저렇게 신원을 아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고, 대부분 좋은 일 관련이 아니니 적잖게 당황스러울 거예요.
한편, 전작의 최종보스였던 앙드레는 비참하게 몰락해 있네요. 사실 그렇게까지 대형사고를 쳤는데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것도 기적이겠죠. 폴리포닉 월드라면 아마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 아닐까 싶은데...
새로이 나타난 인물들이 있네요. 시저 컬리, 마르코 티머만.
그들은 기존의 인물들과도 직간접적으로 접점이 있고, 그렇게 모두 모여 도깨비불을 만나러 출진하네요. 과연 그냥 괴담 속의 초자연적인 현상일지,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연출하는 모종의 목적을 위한 장치일지도 드러나겠어요.
시어하트어택
2020-11-08 21:53:19
이제 또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니,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이지요. 도깨비불은 단순한 초자연적 현상만은 아니죠. 그 안에는 또다른 사건의 연결고리들이 이어져 있습니다.
SiteOwner
2020-12-10 23:34:44
앙드레가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겠군요.
학생 때 이런 동급생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불량품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어떤 남학생인데, 중학생 때 아침 조회 때 저에게 다짜고짜 시비를 걸었고, 저는 발차기로 대응했습니다. 발차기에 얼굴을 그대로 얻어맞고 쓰러진 그 남학생이 이후 저에게 다시는 덤벼들지 못하고, 같은 고교에 진학했지만 더 접점을 갖지도 못했습니다(어릴 때의 싸움을 떠올려 보면서 드는 생각 참조).
이제 도깨비불의 현장에 임한 것인가요. 우연인 줄 알았던 것들이 계속 반복되면 더 이상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시어하트어택
2020-12-11 16:45:52
꼭 학창시절에 보면 그런 식으로 자기 위세를 부리는 인간들이 하나둘씩은 있었습니다. 지금 소식은 알 수가 없지만요. 그 중에는 상상만 해도 끔찍할 것 같은 기억도 있다 보니, 더욱 그때를 생각하기 싫은 때도 있습니다.